겸손에 관하여
최고의 성품
어거스틴은 기독교의 최고 덕목으로 겸손을 꼽았습니다. 겸손이란 다른 사람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 즉 모든 사람에게서 배우려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참된 겸손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성품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적용될 때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겸손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항상 같이 두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이 참된 겸손은 불가능한 것이고, 겸손하지 않고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손길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일수록 특별하게 낮추시는 일들이 그 삶속에 자주 있습니다. 만약 교만한 사람을 그냥 내버려두신다면 이것은 그를 큰 심판에 두실 것이 작정되었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깔보며 우습게 보며 함부로 말을 하는데도 그 삶에 아무런 일이 없다면 이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녀는 아주 작은 교만에 대해서도 아주 무서운 징계로 낮추시는 하늘의 손길이 함께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낮추실 때는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십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질병과 같은 육체의 고통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께서 자신을 겸손케 하시려고 행하신 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12:7)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많이 받은 자녀일수록 겸손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강력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것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교만이란 성품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잠8:13)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라 다름 아니라 악을 미워하는 마음인데, 악을 미워하는 마음이란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교만한 마음은 상극관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만의 여러 가지 얼굴로서 거만, 악한 행실, 그리고 패역한 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만을 미워하시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교만은 스스로 하나님처럼 행세하는 태도와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하나님처럼 행동하고 하나님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의 특징은 그 행동에서 나타납니다. 무엇보다 그 말하는 데서 교만이 나타납니다. 남읊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내일 일을 자랑하는 것은 교만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교만은 하나님을 적으로 만든다
스스로 하나님인 체 하며 생각하며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자신의 적으로 만드는 사람이기에 정말 무서운 사람입니다. “미련한 자는 교만하여 입으로 매를 자청하고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자기를 보전하느니라.”(잠14:3)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는 자를 성경은 ‘미련한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련한 자의 특징은 교만한 것인데 교만한 자의 특징은 그 입으로 매를 초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심판날에도 살아남는 비결은 자신의 입술을 지키는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의 특징은 입이 무겁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한 말에 대해 무겁게 책임을 지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교만한 사람은 그 입술을 절제하지 못하고 제어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심판을 자청하게 됩니다. 매를 불러들이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 입술인 것입니다. 이와같이 교만은 하나님을 적으로 만드는 행위입니다.
교만한 사람과 함께 다니지 말라
우리가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합니다. 성경은 무엇보다 교만한 자를 가까이 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하리라.”9잠16:5) 구약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호사밧이란 유대왕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가 북이스라엘 임금인 아합과 손을 잡고 아람과의 전쟁터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마음이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아합에게 승리를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아합에게 심판을 내리실 때에 여호사밧이 하마터면 전쟁터에서 죽을 뻔 하였습니다. 우리가 누구와 손을 잡는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교만한 사람과 손을 잡지 마십시오. 내가 아무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질지라도 교만한 자와 손을 잡는다면 교만한 자가 받을 벌에 내가 참여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18) 우리가 마음에 새겨두어야 할 말씀입니다. 제가 전방에서 군생활을 할 때 행군을 많이 했습니다. 행군을 할 때는 반드시 전령이 앞서 행군합니다. 그 이유는 전령이 적의 공격을 받을 때 뒤에서 행군하는 본대가 피신할 수 있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교만은 전령과도 같아서 교만이 나타나게 되면 반드시 그 뒤에는 패망이란 이름의 본대가 오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 무엇보다 무서워해야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교만이란 이름의 못된 성품입니다. 이 성품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이며 그 언행에서 쉽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으로 말을 쉽게 하는 것을 본다면 우리는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재빨리 피하여 숨어야 합니다.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지 말라
교만의 여러 가지 특징 중에 하나가 가난한 자를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할 자니라.”(잠17:5) 교만한 사람의 여러 특징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말을 함부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어려움을 겪을 때 속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의 사고방식은 모든 사람과의 관계를 경쟁구도 속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볼 때 업신여기게 되고 다른 사람이 잘못될 때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 교만이란 성품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지 그 여부를 알려면 가난한 사람에 대해 자신이 어떤 생각과 마음을 갖고 있는지, 갑작스런 어려움으로 고통을 당하는 이웃을 바라볼 때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사람, 다시 말해서 교만해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일수록 가난한 사람을 가까이 하며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삶을 살려고 애쓰는 사람인 것입니다.
겸손은 심판을 이기는 능력이다
아합왕은 매우 교만한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강탈하여 자기의 소유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합을 심판하기로 결정하시고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어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게 하셨습니다.(왕상21:19-24)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는 너무나도 엄중하고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의 메시지를 들은 아합왕은 자신의 교만을 뉘우치고 겸손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니더라.”(왕상21:27) 예전의 번역에는 “천천히 다녔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겸손한 자의 특징은 화려한 옷을 절제하는 것입니다. 겸손한 자의 특징은 음식도 절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한 자의 특징은 천천히 걷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며 “풀이 죽은 모습으로 걷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겸손은 극도로 불타오른 하나님의 심판마저도 늦추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아합일지라도 그가 자신의 교만을 뉘우치고 겸손히 다니기로 작정하였을 때 하나님의 심판은 놀랍게도 연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합의 태도를 보시고 그 종 엘리야에게 이같이 말씀하십니다.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그가 내 앞에서 겸비하므로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는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의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왕상21:29)
하나님 앞에서 풀이 죽은 모습으로 걷기
우리가 종종 금식을 하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기 위한 것입니다. 겸손이 금식의 참 목적입니다. 만일 이 목적을 이해하지 못하고 금식한다면 금식은 단지 종교적인 행위일 뿐 자신의 삶에는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자신을 스스로 낮추려는 목적을 바로 이해를 하고 있다면 굳이 ‘금식’을 할 필요가 없을지 모릅니다. 때로는 금식보다는 TV를 절제하고 SNS를 잠시 접는 것도 효과적인 금식일 수 있습니다. 목적은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낮추는 것입니다. 원래부터 겸손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법을 배워야 할 뿐입니다. 만약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면 하나님의 징계를 깨닫고 하나님의 진노의 손에서 벗어나고 하나님의 심판을 연기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할 절실한 필요가 있을 때일 것입니다. 종종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사랑받는 자녀임을 깨닫고 아합이 그러했던 것처럼 ‘풀이 죽은 모습으로’ 천천히 걸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높아지려면 스스로를 낮추어라
하나님께서 높이시려는 사람은 반드시 그에게 고통과 고난과 어려움을 주셔서 낮추십니다. 높이기 전에 반드시 낮추시는 손길이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낮추시려는 사람은 그가 교만하게 말하며 행동할 때에도 내버려두시는 일이 있습니다. 낮추시기 전에 반드시 교만한 때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영적 원리를 잘 이해한다면 하나님의 방법으로 높아지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4:9,10)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6) 만일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낮추는 법을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높아지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겸손케 하시려고
최근 나의 하나님께서는 나를 겸손케 하시려고 고통도 주시고 때로는 고민도 주시고 때로는 삶의 어려움도 주셨습니다. 처음에는 마음이 어렵고 힘들었지만 성령께서 제 마음에 주신 말씀이 이것이었습니다.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히12:5,6) 내 삶속에 고통이 있고 고난이 있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하고 찬송해야 하는 일임을 진심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가 교만해지는 것을 그 무엇보다 두려워하고 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겸손해지려고 고통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고통과 고난 중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말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 때문이고, 또한 나를 높여주시려는 계획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교만해지지 않도록 고통과 고난을 주시는 아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나를 약하게 하시는 것은 나에게 강하신 능력으로 함께 하시려는 계획이 있는 것입니다. 나를 낮추시는 것은 나를 높이시려는 선한 계획이 있는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은 나를 겸손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South Africa,
김광락 선교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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