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의 마음 the farmer’s heart
오늘은 농부의 마음the heart of a farmer에 대해서 묵상해보았습니다.
제가 믿는 하나님 아버지God the Father는 하나님 농부God the Farmer이십니다.(요15:1)
농부의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농부의 마음을 갖는 것이 왜 중요한 것일까요?
농부의 마음 vs. 사냥꾼의 마음
아프리카 흑인들의 세계관은 농부의 마음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들의 조상들은 농경문화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들은 원래 수렵과 거래에 익숙할 뿐 땅을 경작하고 씨를 뿌리고 가꾸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단적인 예를 들면, 흑인들이 사는 마을을 가면 나무나 꽃을 보기 힘듭니다. 그들에게 나무는 그저 뗄감일 뿐 나무가 그들의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래 전에 아프리카에 정착한 백인들이 사는 마을에 가면 나무와 꽃으로 단장된 정원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조상들은 유럽에서 건너온 농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땅을 경작하고 씨를 뿌리며 식물을 가꾸는 것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흑인들은 원래부터 수렵과 채집에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농부의 마음과는 거리가 멀고 차라리 사냥꾼의 마음을 가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농부의 마음보다는 사냥꾼의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는 농부의 마음을 배우기까지 많은 연단과 고생을 자초하게 될 것입니다.
계약문화 vs. 언약문화
아프리카 흑인들의 사고방식은 계약문화입니다. 흑인들은 계약과 거래행위는 잘 하는 반면 예측하고 투자하고 준비하는 일에는 약합니다. 그 증거를 하나 들자면 흑인교회를 가면 예산을 심의하고 발표하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일단 수입이 들어오는 대로 그리고 필요가 생기는 대로 우선적으로 집행할 뿐입니다. 그래서 저축하는 것도 잘 없습니다. 일단 필요한 대로 써버리기 잘 합니다. 예를 들어 한 달 월급을 받으면 일단 사고 싶은 옷이나 꾸미고 싶은 머리단장에 우선 써버립니다. 그렇게 다 써버리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으면 그때 가서 또 고민하면 된다고 대답합니다. 흑인들에게 미래라는 이름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목축문화 vs 농경문화
아프리카 흑인들의 삶을 변화시키려면 이런 사고방식의 특성들을 잘 이해해야만 합니다. 흑인들의 시간관, 흑인들의 계약문화, 흑인들의 거래문화 등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흑인들과 함께 일하다가 쉽게 상처를 받는 한인 혹은 한인 선교사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한인들은 처음에는 순수한 마음으로 동정하기도 하고 베풀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베풀어 준 것에 대해 감사할 줄도 모르고 자신들의 신의를 저버리는 행동을 보면서 마음에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상처를 받는 것은 흑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흑인들의 시각에서 보면 한인들의 베풂은 계약의 일부라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흑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흑인들에게 상처를 받고 선교지를 떠난 선교사도 보았고, 한인도 보았습니다.
자신의 텃밭을 가꾸라
아프리카 흑인들을 영적 지도자로 키울 때 명심해야 하는 것이 그들에게 ‘농부의 마음’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단적으로 흑인 목회자들에게 나무를 심으라고 말합니다. 혹은 채소밭을 가꾸거나 가든을 가꾸라고 말합니다. 식물을 재배하는 일planting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마음을 묵상할 수 있고 또 영적인 교훈을 얻을 수 있고 또 설교할 수 있는 영감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국에 있을 때는 이 일의 중요성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프리카 선교사로 와서 집 뒤뜰에서 작은 텃밭을 가꾸는 일을 하면서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텃밭을 이곳 영어로 patch라고 부릅니다. 패치를 가꾸면서 얻는 교훈은 한국에서 20년 동안 목회하면서 배운 교훈보다 더 값진 교훈이었습니다. 저는 planting을 취미로 삼든 직업으로 삼든 planting을 하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배울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다고 생각하고 존경합니다.
정결을 사모하라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하늘의 농부heavenly Farmer이십니다. 하늘의 농부께서는 말씀으로 심어 천지만물을 조성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란 다름 아니라 농부의 마음 그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그 아들에게 견고하게 붙어 있음으로 저절로 열매를 맺는 모습을 간절히 보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15:2) 하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견고하게 붙어 있음으로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원칙이 내 삶과 사역에 나타나는 것을 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열매를 많이 맺도록 하기 위해 하늘의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거해 버리시는 일”입니다. 우리 삶속에 하늘의 농부이신 아버지께서 무엇인가를 제거해버리실 때 얼마나 아깝고 얼마나 아프고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버림과 고통을 통해 깨끗해지게 되고 깨끗해지게 되면 저절로 열매를 맺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농부이신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의 성공이 아니라 우리의 정결인 것입니다.
기다리는 법을 배우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실 때는 언제나 눈물로 씨를 뿌리며 오래 참고 기다리는 농부의 마음을 먼저 경험하게 하십니다. 바라던 것이 연기되고 지체되며 수포로 돌아가는 듯한 상황에서도 절망하지도 포기하지도 않고 농부의 마음을 푸고서 묵묵히 할 일을 해나갈 뿐입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며 결실기를 기다리며 하늘의 농부heavenly Farmer께서 잘 했다고 상주실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다릴 줄 아는 마음은 농부가 가진 최고의 성품 중에 하나입니다. 이 성품은 곧 하늘 아버지의 성품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약5:7,8
조급한 마음은 금물이다
조급한 마음은 하나님과 동행하고 동역하는데 금물입니다. 조급한 마음은 일을 그르치게 만듭니다. 만약 농부가 씨를 뿌려 겨우 싹이 나왔는데 열매 맺지 못했다고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보다 너무 작다고 해서 싹둑 잘라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마찬가지로 목회나 선교나 무슨 일이든 조급한 마음으로는 결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러면 내가 조급한 마음을 갖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조급한 마음은 조급한 말에 나타납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끝까지 경청하지 못하고 중간에 잘라서 말한다든지, 혹은 쉽게 맹세나 약속을 한다든지, 생각나는대로 말을 함부로 한다든지, 내 말을 보면 내 맘을 알 수 있습니다. 조급한 말은 조급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조급한 마음은 우리의 삶을 궁핍과 결핍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성경은 조급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나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를 따름이니라.”(잠21:5) 또 조급한 말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말이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잠29:20)
자신의 경작지를 소중히 여기라
농부의 마음을 갖기 위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일터’가 무엇인지 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경작지를 나누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에 대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으로 나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경작지’를 잘 알고 그것에 집중할 줄 아는 사람이 있고 다른 사람이 가진 것과 비교하며 부러워하며 남의 것을 흠모하느라 정작 자신에게 주어진 ‘경작지’는 돌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땀을 흘려야 할 곳을 정확히 아는 것은 축복입니다. 자신이 눈물을 쏟아야 할 곳을 아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무리 좋은 땅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아무리 좋은 것을 먹고 누리고 있다고 할지라도 크게 신경쓰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땅이 아무리 초라하고 아무리 작아도 감사한 마음으로 거기에 집중할 줄 아는 사람이 농부의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반면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는 항상 불만 불평이 가득하며 다른 사람에게 주어진 것을 바라보며 부러워하는 사람에 대해서 성경은 ‘방탕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불로소득을 추구하는 사람, 땀흘리지 않고 손쉽게 성공할 길을 찾는 사람, 눈물로 심지도 않고 거둘 것을 바라는 사람은 주어진 것 마저도 탕진해버릴 사람입니다.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거니와 방탕한 것을 따르는 자는 지혜가 없느니라.”(잠12:11) “가난한 자는 밭을 경작함으로 양식이 많아지거니와 불의로 말미암아 가산을 탕진하는 자가 있느니라.”(잠13:23)
부지런하다는 의미
농부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부지런한 사람입니다. 부지런하다는 말은 분주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루를 바쁘게 살았다고 부지런하게 살았다고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바쁜 것과 부지런한 것은 다릅니다. 분주함과 근면 성실함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부지런함이란 성품은 자신에게 어떤 경작지가 주어졌는지 정확하게 아는 지식이 있습니다. 그런 지식을 기반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경작지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경작지’에 눈을 돌리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의 일에 너무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때를 잘 아는 지식을 포함합니다. 씨를 뿌려야 할 때 뿌릴 줄 알아야 합니다. 씨를 뿌려야 할 때 다른 일로 분주하거나 바쁘게 살았다면 그것은 결코 부지런한 삶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와같이 자신에게 무엇이 주어졌는지에 대한 지식,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집중할 줄 아는 지식, 다른 사람의 것에 관심을 꺼버릴 줄 아는 지식, 행동해야 할 때와 쉬어야 할 때를 아는 지식이 부지런함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식이 없이 부지런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줍니다. 이런 지식을 가진 사람이 부귀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런 지식이 없는 사람은 그냥 분주하게 살 뿐 아무런 열매도 맛보지 못합니다. 자신이 남들보다 더 바쁘게 사는데 왜 남들보다 못사는가에 대해서 깨닫지도 못합니다. 부지런한 삶의 핵심은 지식입니다. 우리는 분주한 삶이 아니라 부지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잠12:24) “게으른 자는 그 잡을 것도 사냥하지 아니하나니 사람의 부귀는 부지런한 것이니라.”(잠12:27) “게으른 자는 가을에 밭 갈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거둘 때에는 구걸할지라도 얻지 못하리라.”(잠20:4)
때를 따라서
농부의 마음에는 때를 아는 지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때time는 두 가지 때가 있습니다. 흘러가는 때가 있고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하는 때가 있습니다. 흘러가는 때는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결정적인 때는 우리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천하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전3:1)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태어날 때와 죽을 때를 알지 못하며 결정하지도 못합니다. 씨를 뿌리고 싶다고 언제나 뿌릴 수는 없습니다. 언제 웃을지 혹은 언제 울지 그 때를 내가 알지도 결정하지도 못합니다. 모든 것에 다 때가 있습니다.There is a time for everything. 사람이 살아가면서 고민하는 이유는 그 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고 자신이 결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농부의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때를 잘 분별할 줄 아는 마음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농부는 계절을 분별합니다. 경작할 때, 씨뿌릴 때,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내릴 때, 추수할 때를 늘 분별합니다. 시간을 아는 지식이야말로 농부의 마음을 이루는 근간입니다. 이 때time을 분별하는 문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농부의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만사의 때를 정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배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를 분별하려면 하나님 앞에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에 즉시 온전하게 기쁘게 순종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때를 놓치면 모든 것이 뒤틀리고 뒤죽박죽되어버리고 일을 망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쳐서 복종시킬 줄 알아야 합니다.
씨를 뿌리라
씨를 뿌리는 행위는 농부의 삶에 핵심입니다. 씨를 뿌리는 수고를 마다한다면 농부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뿌려야 할 씨앗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행위는 가장 고차원적인 의미에서 씨를 뿌리는 행위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와 물질적인 것을 함께 나누는 것 또한 씨를 뿌리는 행위입니다.(갈6:6) 성령과 함께 동행하며 경건한 삶을 사는 것 또한 자기 영혼의 밭에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한 마음으로 헌금하고 구제와 선교를 위해 후원하는 것 역시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성경은 특히 물질이나 돈을 ‘양식’ 혹은 ‘씨앗’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먹을 씨앗과 심을 씨앗을 함께 주시는 분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고후9:10) 그리고 인색한 마음으로 헌금 혹은 후원하는 것보다 감사한 마음으로 혹은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인 “씨뿌림”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가 그 마음에 적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6,7) 농부의 마음을 배우기 전까지 사람들은 심을 것은 생각하지 않고 거둘 것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농부의 마음을 배우기 시작하면 거둘 것보다 심을 것을 먼저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의 문제는 이것입니다. 심는 것은 적은데 거두고 싶은 것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농부는 많이 거두기 위해 많이 심으려고 애씁니다.
효율적인 사고방식에서 탈피하라
예수님께서 씨를 뿌리는 비유(마13장)를 주셨습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 핵심은 예수님 자신을 씨를 뿌리는 자로 동일시하고 계신다는 것이고, 농부는 씨를 뿌릴 때 뿌린 씨앗의 대부분이 효과를 나타내지 못할지라도 결코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러한 농부의 마음이 자신의 마음임을 보여주시려고 한 것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를 주시기 전 문맥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사역에 대해 사람들이 거부반응을 보이고 혹은 미지근한 반응을 보일 때 제자들은 그러한 반응을 보면서 낙심하기 쉬운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당신은 씨를 뿌리는 자로서 씨를 뿌릴 때 낙심하고 절망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느냐고 제자들에게 반문하시는 것입니다. 농부의 마음을 배우기 전에는 말씀사역을 하다가 실망하고 또 구제사역을 하다가 실망하고 또 후원을 하다가 실망합니다. 실망하는 것이 위험한 이유는 포기함으로써 열매를 맛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실망하지 않으면 때가 이르매 거둘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갈6:9) 따라서 농부의 마음을 배우려는 그리스도인들이 조심해야 하는 겄은 효율적인 사고방식입니다. ‘나는 분명히 믿음으로 씨를 뿌렸는데 왜 아무런 반응이 없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의 노력과 수고와 섬김과 봉사와 헌신에 대해 ‘효과’가 당장 나타나지 않는 것 때문에 계속 할 것인지 고민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직도 농부의 마음을 덜 배운 것입니다. 농부의 마음은 효율적인 사고방식과는 거리가 멉니다. 농부의 마음은 너무 계산적인 사고방식과 거리가 먼 것입니다. 효율성을 따지는 사고방식, 효과를 추구하는 사고방식, 계산하고 따지는 사고방식으로는 잘 살 것 같지만 오히려 게으름만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풍세를 바라보는 자는 파종하지 못할 것이요 구름만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못하리라.”(전11:4) 결과가 기대이상이든 기대이하든, 내가 원했던 효과가 당장 나타나든 그렇지 않든 묵묵히 씨를 뿌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전11:6)
씨 뿌리는 자의 마음을 가지신 예수님
예수님은 씨뿌리는 비유를 주시면서 “나는 씨 뿌리는 자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선언하고 계십니다. 마13장의 씨 뿌리는 비유의 핵심 메시지는 예수님의 이러한 자기 이해와 자기 선언입니다. 예수님의 씨뿌리는 비유를 잘 들여다보며 예수님의 마음을 묵상해보십시오. 천국복음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으로 반응하고 가족들조차 회의적으로 반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씨뿌리는 자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반응에 대해 자신의 사역에 대해 회의하거나 고민하는 법이 없습니다. 왜냐면 예수님은 농부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농부는 씨를 뿌릴 때 4분의 3이 자신을 좌절시킬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자신의 말씀 사역에 모든 사람이 다 긍정적으로 반응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씨를 뿌리는 자로 초점을 맞추고 계신 것은 4분의 3이 아니라 옥토에 떨어질 4분의 1이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효율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혀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씨를 뿌리는 행위를 하다가 금방 낙심하고 포기하고 돌아서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농부의 마음을 품었다면 사람들의 반응이나 자신의 기대에 못미치는 그런 상황에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한 두 번 선한 일을 했는데 기대한 결과가 없다고 낙심하지 않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 선한 일을 계속해 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때에 30, 60, 100배의 결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뿌린 씨앗이 100개라고 가정해봅시다. 75개가 자신을 좌절시켜버렸습니다. 그렇다고 낙심하고 포기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나머지 25개가 최소한 30배의 결실을 거둘 것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100배의 결실을 거두면 2500개의 열매를 거둘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천국복음에 부정적으로 반응하여도 낙심하기는커녕 오히려 크게 기뻐하셨던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농부의 마음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열심히 사역하다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결과를 보면서 낙심하고 사역을 포기하고 돌아서는 사역자들이 많습니다. 그것이 선한 일일수록 더욱 더 그런 때가 찾아옵니다. 낙심하고 주저앉고 모든 것을 포기해버리고 싶은 때가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자기 일일 것입니다. 낙심할 때가 온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임을 우선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낙심의 시기를 넘기지 않고서는 거둘 때도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농부의 마음은 언제나 희망과 기쁨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자기 안에 있는 절망과 포기하고 싶은 생각과도 치열하게 씨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고비를 넘을 때는 죽을 것 같은 고통이 뒤따릅니다. 그러나 눈물 없이 넘을 수 없는 낙심이란 이름의 고비를 넘기지 않고서는 추수의 때가 오지 않습니다. 농부는 자기 자신과 싸워 이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절망과 싸워 이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피눈물을 흘리며 자신과 싸우면서 한 걸음씩 전진하다보면 어느새 풍성한 수확의 들판을 바라보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게 될 것입니다.
아프리카에서 농부의 마음으로 살기 원하며
김광락 선교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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