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묵상

고통에 관하여 II

등불지기 2013. 7. 24. 04:01

 

 

모든 사람은 나름대로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간직하며 살아갑니다.

웃고 있어도 속으로는 울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나만 왜 이런 고통을 겪고 있는가? 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보다 더 큰 고통이 없을 것이라고 함부로 단언하지 마십시오.

고통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고통은 삶의 일부분입니다.

 

 

 

고통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고, 삶의 일부분이지만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삶의 질은 달라집니다.

피할 수 없는 삶의 일부분임에도 불구하고

고통 중에서도 감사하고,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통을 피할 수는 없지만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고통의 문제는 결국 사고방식의 문제입니다.

어떤 관점을 가지고 고통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고통 중에서 고통을 느끼며 불행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반대로 고통 중에서도 행복을 느끼며 행복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비구름과 비행사를 생각해보세오..

비구름 속에 비행하는 비행사는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그러나 비구름 위에 비행하는 비행사는 멋진 장관을 구경하며 감탄할 것입니다.

우리 삶에 먹구름이 사라지게 할 수는 없지만

먹구름을 바라보며 즐길 수는 있습니다.

 

 

 

진짜 고통은 나 자신을 변화시킬 때 옵니다.

관계에서 겪는 고통을 한번 생각해볼까요?

만일 반드시 관계해야 하는 사람인데 변화가 없어 답답하다면?

상대방으로 인해 내가 힘들고 마음이 어렵다면?

이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상대방을 변화시키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언제나 실망과 좌절만 낳을 뿐입니다..

어쩌면 상대방을 변화시키려고 애쓰는 것이 교만일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변화될 거란 기대를 포기하고 답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그런 경우는 차라리 내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내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관계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내가 내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 그 경우에 최선입니다.

어쩌면 상대방이 나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달라질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고통을 당할 때 맹세를 합니다.

"나는 앞으로 절대로 ... 하지 말아야지!" 혹은 "...절대 해야지!"

이러한 맹세 혹은 다짐은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을 잊어버리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맹세가 자칫 나의 삶과 남의 삶을 일그러지게 만들 수 있습니다.

고통 중에 맹세하는 것을 조심하십시오.

대신 고통 중에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고통을 느끼는 순간은 주님을 만날 순간입니다.

 

 

 

고통이 없다면 우리 삶은 정말 단조로울 것입니다.

고통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감미로운 노래를 부를 수 있고

고통이 있기 때문에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습니다.

존경받는 삶에는 고통이란 숨은 내조자가 있습니다.

이것이 고통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모든 고통은 위대한 스승입니다.

스승의 가르침 없이 성공할 수 없습니다.

광야학교는 많은 스승이 있습니다.

스승을 존경하고 환영하고 그 앞에 고개 숙여 기꺼이 가르침을 받으려 한다면

스승은 우리를 잘 가르쳐 좋은 성적으로 광야학교를 수료하게 해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을 부끄러워하여 숨기려고 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고통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드러내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고통과 씨름하다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사고방식의 큰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부끄러워했던, 그래서 싸우면서 물리치려고 했던 고통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고통과 싸우는 것을 포기하고

오히려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고통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고통은 우리를 가르치는 위대한 스승입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은 고통받는 다른 이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보듬을 수 있는 인격체로 만들어줄 것입니다.

 

 

 

육신의 가시(고통)와 목숨 걸고 싸웠던 사도 바울이

자신의 가시를 당당하게 자랑하게 된 것은

가시가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가시를 바라보는 또 다른 관점을 얻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관계에서 겪는 고통? 육체의 고통? 자녀로 인한 고통? 직장 상사로 인한 고통?

나의 실수로 인한 고통? 혹은 나를 연단하는 고통?

그 어떤 고통이든지간에

우리는 사도바울에게 있었던 관점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고후12:9,10

 

 

 

나의 고통과 씨름하지 말고 우러러보십시오..

나의 약함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자랑하십시오..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일하실 수 있는 공간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South Africa,

김광락 선교사 올림

 

 P.S

 자, 다음 성경구절을 같이 큰 소리로 읽어볼까요?

Shall we read aloud the following pass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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