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묵상

Fear, Love, Friend

등불지기 2013. 8. 6. 06:03

 

 

두려움, 사랑, 그리고 친구

 

청년들이 주로 고민하는 것은 적성, 비전, 진로 등의 문제뿐만 아니라 내면의 문제, 감정과 정체성의 문제, 사랑하며 사랑받고 싶은 욕구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그리고 친구와의 관계문제일 것입니다. 두서없이 생각나는 대로 글을 써보겠습니다. "두려움"과 "사랑"과 "참된 친구"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Fear leads to every kinds of disasters..

우선 스타워즈에 나오는 명언부터 시작해볼까요? 제다이의 스승 요다가 한 말인데요.."두려움은 어둠의 세력으로 안내하는 관문이다. 두려움은 분노를 만들어내고, 분노는 증오를 만들어내고, 증오는 고통을 만들어낸다." 옛날 영화를 볼 때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요..요즘 두려움, 사랑, 그리고 참된 친구라는 주제에 관해 곰곰히 생각해볼 때 생각이 나는 대사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모든 미신, 모든 불행, 인간관계에서 겪는 모든 고통과 고난은 바로 '두려움'에서 시작합니다. 반대로 자유, 행복, 보람, 참된 친구와의 만남, 의미있는 인간관계의 열쇠도 다름 아니라 이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Love vs. Fear..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두려움입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지우는 능력이고 두려움은 사랑을 빼앗아 가는 에너지입니다. 참 사랑을 하려면 우리는 먼저 두려움을 극복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모든 두려움은 형벌에 대한 인식이며 그 인식의 뿌리는 수치심에서 비롯되며 수치심은 또한 자신에게 의가 없음 혹은 자신이 의롭지 못함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의를 가지고 사는 것, 그래서 의로 말미암아 평화를 누리는 것, 그래서 마음이 기쁘고 즐거운 것..이것이 두려움을 몰아내는 사랑의 시작입니다. 자신에게 당당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 너그럽게 대할 수 있습니다.-14:17; 요일4:18

 

 

                               

 

Philophobia

필로포비아는 사랑에 빠지는 것에 대해 공포를 느끼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 어릴 적 부모가 이혼을 했거나 혹은 정서적 충격을 받아 생긴 외상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사랑은 삶과 죽음을 결정짓는 문제이고 사랑하거나 사랑 받는 일은 공포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절대로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하고 다닙니다만 그 마음은 사랑을 갈구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간절히 원하지만 사랑 앞에서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 자신의 이성과 감정을 짓누르기 때문에 매우 혼란스러워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무신론자들은 최면이나 상상요법, 혹은 회상 등의 요법으로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이 경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용서하고 자신을 용납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Fear Fake Friends..

저는 인생을 살아보았다고 결코 말할 수 없는 나이age이지만 살면서 '친구'에 관해 배운 것이 있습니다. 나를 공격하고 상처를 주는 사람은 그렇게 무서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나를 안아주고 내 앞에서 항상 좋은 말만 해주는 친구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특히 내 앞에서 자신의 속마음을 열어 보여주면서 다른 어떤 사람이 악의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할 때는 더 두려워해야 합니다. 나를 높여주고 남을 깎아내리며 험담하면서 자신에게 동의를 해주기를 바라는 친구.. 그는 친한 친구인 척하지만 사실 가짜fake입니다. 그런 가짜 친구앞에선 같이 웃어주고 공감할 때가 아닙니다. 차라리 원수가 '가짜 친구'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27,5,6

 

                                 

 

Finding Friends..

우리는 참된 친구를 어떻게 만나는 걸까요? 다윗은 사울을 피해 도망다니며 광야를 전전긍긍할 때 훗날 왕국을 함께 건설할 참된 친구들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돈도 권력도 없이 도망다니며 내일을 기약할 수 없어보이는 다윗에게 목숨을 걸고 찾아갔던 까닭은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심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참 친구는 노력하여 찾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얻는 것입니다. 내가 잘 나갈 때가 아니라 내가 어려움을 당할 때 붙여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 친구를 사귀려고 사람의 힘으로 노력하는 것은 항상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왜냐면 그들은 내가 어려울 때 다들 떠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22:1,2;23:16;19:7

 

 

 

 

Love as a Fight

우리는 '사랑'을 어떤 감정이나 고정된 상태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참 사랑은 역동적이고 때로는 전투적입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단지 감정에 불과한 걸까요? 자신을 죽이지 않고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이 단지 느낌이나 개념뿐이겠습니까? 자신을 온전히 부정deny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참 사랑은 그래서 치열합니다. 전투적입니다. 전쟁입니다. 그래서 참 사랑을 하려면 치열한 전투를 치뤄낼 힘을 길러야 합니다. 속사람이 약한 사람은 결코 온전한 사랑을 행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늘 학대하고 정죄하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품어주고 용서하고 사랑으로 섬길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은 연기하는 것이요 위선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절로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언젠가는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사랑할 때가 올 것이라고 막연히 기대하지 마십시오. 지금부터 사랑할 힘을 길러야 합니다. 전장에 나가기 전에 혹독한 훈련을 받는 군인들처럼 우리는 사랑할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그리고 강해져야 합니다.

 

 

 

Grow in the Grace..

그러면 어떻게 강해질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벧후3:18) 강해지는 비결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일까요? 설교를 듣거나 혹은 찬양을 부르면서 '은혜를 받았다'고 고백할 정도로 '느낌'을 받는 걸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가는 지식입니다. 만일 수련회나 말씀학교나 혹은 찬양집회를 통해 '좋은 감정'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아무런 진보가 없다면 결코 성장한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자신은 걸음마를 떼지 못한 어린아이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보고서 절망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우리는 강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아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아는 것은 반드시 나의 관점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곧 하나님의 관점을 갖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관점을 갖는 것이고, 하나님의 관점을 갖게 될 때 우리의 삶은 결코 과거와 같을 수 없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관점으로 사물과 사람을 보기 시작할 때 가장 먼저 우리 삶에 열매(=성품)로 나타나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을 때 내 눈에는 내가 불완전하게 보이겠지만 하나님은 이미 나를 완전하게 하셨고 완전한 모습으로 보고 계십니다.-롬8:30

 

 

 

 

 

Fight with the Truth..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내는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사랑이 두려움을 몰아내는 걸까요? 우리는 그 과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요.. 우선 두려움이 왜 생기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려움은 무지에서 생깁니다. 우리가 어두운 밤길을 홀로 걸어갈 때 두려움을 느끼는 까닭은 어둠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어둠 속에 감추어진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한 가지 열쇠를 얻게 됩니다. 두려움은 모든 미신superstition의 원천인데 미신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만들어낸 신념체계이지요. 그러니까 두려움과 지식은 서로 상극관계인 것입니다. 두려움은 회피할수록 더욱 그 힘과 파괴력이 커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대로 두려움을 드러내고 노출시키면 두려움은 금방 힘을 잃고 맙니다. 여기까지 이해가 되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참 지식은 참 사랑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말인데요..그러니까 참 사랑은 참 지식을 가졌을 때 생기는 힘power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참 사랑의 본질을 이야기할 때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이라고 정의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된 사랑은 우리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참된 사랑은 참된 지식을 가졌을 때, 즉 하나님이 보시는 대로 볼 줄 아는 관점을 가졌을 때 생기는 능력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진리로서 싸워야 하는 이유입니다. 진리를 기뻐하지 않고서는, 불의를 미워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결코 두려움을 몰아내는 사랑의 능력을 얻을 수 없습니다.

 

 

 

Truth enables you to fight against Fear..

앞에서 간디가 말한 유명한 말은 일반적으로 진리입니다. 미움과 증오가 인류의 불행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인류의 진정한 적은 두려움입니다. 그 두려움은 온갖 미신과 거짓말들을 만들어내어서 사람들을 억압하고 조종하며 소중한 삶을 파괴합니다. 마지막 때는 이러한 두려움이 점점 커져가는 때입니다. 그래서 두려움은 사람들로 하여금 사랑하며 살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모든 두려움에는 뿌리가 있는데 근본적인 뿌리는 '무지'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랑하며 살기 위해서, 그리고 의미있는 삶을 누리기 위해서, 참된 친구를 은혜로 얻기 위해서, 우리의 힘과 노력이 아닌 진리의 말씀을 붙들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참 지식이 참 사랑의 원천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

 

"부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고전13:6)

 

아멘!!

 

South Africa,

김광락 선교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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