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적으로 건강한 그리스도인에 관하여
은혜롭다?
흔히들 ‘은혜롭다’ ‘은혜로운 교회’라고 하면 ‘분위기가 좋다’는 뜻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은혜로운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정서적으로 건강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서적으로 건강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감정이 잘 통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 적 다녔던 모교회는 흔히 말하는 ‘매우 은혜로운’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고등학교 2학년일 때 갑자기 분열의 어두운 그림자에 휩싸여서 표류하였습니다. 어떻게 그토록 은혜롭게 성장하던 교회가 그처럼 순식간에 분위기가 급랭하게 되고 나빠질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의문이 들 정도였습니다. 교인들은 두 패로 나뉘어서 주일예배를 1층과 지하실로 나뉘어서 드린 후 서로 스크럼을 짜서 밀고 당기며 서로에게 비난과 저주를 퍼붓는 모습에 제 친구들은 대부분 신앙과 교회를 버리게 되었습니다.
교회성장?
노회에서나 혹은 사적인 만남에서 목사들은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지고 서로에게 묻는 것이 “몇 명이나 출석하는가?”입니다. 교인수가 늘어나면 ‘성장하는 교회’인 줄로 다들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회가 이렇게 ‘성장’하지 못하면 연말에 장로들이 담임목사에게 무언의 압력을 가하는 것이 한국교회의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는 담임목사나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다고 눈총을 날리는 장로들이나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놓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성장’의 기준은 결코 숫자나 건물 같은 외모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얼마나 그리스도와 같이 변화되어가고 있는가 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롬8:19) “이런 것(=성품의 변화)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벧후1:9)
새로운 척도
그러면 은혜로운 교회, 성장하는 교회의 지표signs는 무엇일까요? ‘분위기’ ‘출석교인’ ‘숫자의 증강’ ‘건물’ 등과 같은 기준으로 측정할 수 없다면 무엇일까요? 그것은 ‘정서적으로 건강함’emotionally healthy입니다. 정서적으로 건강한 교회가 진정 영적인 교회입니다. 정서적으로 건강한 그리스도인이 영적인 그리스도인입니다. 정서적으로 건강하다는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정서적으로 보호받는다는 것이고, 둘째, 정서적으로 올바르게 반응할 수 있도록 안내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정서적으로 보호를 받는다는 것은 어떤 가시나 찔레의 공격에도 충동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정서적으로 안내를 받는다는 것은 슬퍼서 울어야 할 때와 분노하여 화를 내어야 할 때를 적절하게 통제받는다는 것입니다.
사울에게 악령이 임할 때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삼상16:14)
정서적으로 건강하려면 성령의 임재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성령의 역사 없이 정서적으로 건강햊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일은 우리의 정서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환경과 외적인 충격과 변수에 쉽게 요동하지 않도록 우리의 정서를 안정시키고 풍랑 가운데서도 고요히 잠을 취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평강peace of God으로 우리의 마음(생각과 감정체계)을 보호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를 떠나가게 되면 그 빈자리를 악한 영이 찾아오게 됩니다. 성령과 달리 악한 영 역시 하나님의 주권 아래 활동하고 있는데 악한 영이 활동할 때는 성령과 반대로 정서불안, 번민, 스트레스, 정신적인 고통과 격정 등을 불러 일으킵니다.
자살의 원인
자살율에 관해 한국은 전세계 1위 국가라는 오명을 벗어던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루 평균 자살하는 사람이 40명에 달합니다. 세계 자살율 국가 2위인 헝가리보다 자살율이 무려 세 배가 넘습니다. 옛날에 자살하는 사람은 대부분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었으나 요즘은 10대부터 모든 연령대에서 골고루 나타납니다. 한국사람은 다른 어느 민족보다 삶에 대해 쉽게 비관하기 잘합니다. ‘내가 이렇게 꼭 살아야 하나?’라는 회의를 잘 하는 민족입니다. 영국 BBC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한국은 전 세계에서 ‘욕망지수’(ambition index)가 제일 높은 민족입니다. 무엇인가 갈망하고 소유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열망이 그토록 높기 때문에 또한 절망하고 실망하는 정도 또한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의 자살
그러나 제가 지금 살고 있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경우 삶의 비관 때문에 스스로 생명을 끊었다는 흑인들의 이야기는 지금까지 한 반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한국보다 훨씬 더 빈곤하고 더 열악하고 삶의 실제적인 고통이 더 심함에도 불구하고 비관하여 자살하는 흑인들을 찾아보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입니다. 한 달 월급이 한국돈으로 30만원인데 월급날이면 온 동네 상점이 북적거립니다. 받은 월급으로 값비싼 신발이나 옷을 사는데 하룻만에 다 탕진(?)해버리는 흑인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한 흑인들을 보면서 한국사람은 다들 이해를 못하고 손가락질을 합니다. 그러나 흑인들은 내일일을 내일 걱정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그 어느 민족보다 잘 지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 즐길 수 있다면 최대한 즐기는 것을 삶의 특권으로 여기고 감사할 줄 압니다. 나를 짓누르는 삶의 고통의 무게가 그토록 무거울지라도 적어도 오늘 예배 가운데서 신나게 몸을 흔들며 춤을 줄 압니다. 삶의 환경이 그토록 심각한데도 오늘 크게 웃을 있는 모습을 보면 이토록 민족성이 다를 수 있다는 것에 깜짝 놀랍니다.
우울증과 조울증
자살의 원인은 삶의 비관입니다. 살아있다는 것, 그리고 살아간다는 것이 큰 축복이고 매순간 환호하며 환희로 즐겨야 하는 호사스러운 선물이라는 이 믿음이 한국 사람에게는 없는 것 같습니다. 한국사람은 다분이 그 핏속에 흐르는 기질이 우울질입니다. 그래서 현실과 다가오는 미래에 관해 지나치게 예민하고 과도하게 심각합니다. 제가 볼 때 좁은 땅과 밀집한 인구, 변덕스러운 기후가 주는 영향도 있는 것 같습니다. 매주 교회를 출석하며 봉사도 잘 하며 칭찬을 받지만 심방해보면 우울증과 조울증을 앓고 있는 교인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게 됩니다. 우울증과 조울증은 자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정신병입니다. 우울증이란 삶의 비관이 삶의 경향이 된 상태이고, 조울증이란 사소한 것에 쉽게 기뻐하거나 혹은 쉽게 슬퍼하는 기복이 급격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제 교회는 이러한 문제를 직시하고 다루어야 합니다.
음악의 중요성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들고 와서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령이 그에게서 떠나더라.”(삼상16:23)
다윗은 어릴적부터 찬양의 능력을 알았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그 아버지 이새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을 때 그 일곱 형들이 막내 다윗을 빈 들판에 양떼들과 함께 버려두고 자기들만 잔치자리에 참석하려고 가버렸습니다. 빈들에 양떼들과 홀로 남겨진 다윗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수금을 타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었습니다. 찬양과 음악은 다윗에게 외로움과 서러움에 사로잡히지 않게 한 능력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다윗을 사울왕 앞에 세우셨습니다. 악령이 사울을 괴롭히며 사울에게 정신적인 고통을 안겨다줄 때 다윗은 자신이 경험한 찬양의 능력으로 사울의 정신을 맑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치유받은wounded 자가 또한 치유자healer가 되는 것입니다.
찬양의 능력을 활용하기
정서적으로 건강한 교회가 되려면 우선 찬양사역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단지 찬양팀을 활성화시키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찬양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찬양에 대한 올바른 인식 없이도 얼마든지 찬양팀을 활성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찬양사역은 결코 참된 찬양의 제사를 하나님께 올려드릴 수 없습니다. 찬양에 대한 새로운 눈이 열려야 합니다. 찬양과 연주에 은사가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교인들이 그러해야 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악보보다는 가사를 볼 줄 아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마음을 읽는 찬양이 아니라 반대정신으로 찬양하는 믿음의 훈련이 있어야 합니다. 내 삶이 힘들수록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찬양을 해야 합니다. 감정이 아닌 믿음으로 찬양하기 시작할 때 찬양은 환경을 변화시키는 능력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찬양과 음악을 무시하고 건강한 교회로 섬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과 정서의 관계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성령과 정서의 관계를 잘 깨닫고 배우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성령은 우리의 정서를 보호하고, 우리의 감정이 올바르게 반응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일을 하십니다. 삶속에는 여러 가지 변수들이 예측하지 못할 정도로 갑자기 다가옵니다. 그럴 때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생각과 감정체계)을 보호하십니다. 염려해야만 하는 일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당장 염려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하십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우리가 울어야 할 때 울게 하시고, 기뻐해야 할 때 소리내어 크게 웃게 하시며,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게 하십니다. 감정emotion은 행동motion을 위한 힘energy입니다. 성령은 이런 방식으로 우리의 감정체계에 간섭하심으로써 우리가 의의 병기로 쓰임받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성령을 의지하기보다는 자신이 만든 율법과 규칙들에 스스로 얽매임으로써 결국 감정을 죽이는 단계로 나아갑니다. 그것을 ‘경건’ ‘보수적 신앙’ 등으로 자찬하는 정신 나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감정은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입니다. 감정을 죽여버리고, 감정 자체를 부정하고, 감정의 불길을 꺼버리는 것은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정서적으로 건강한 삶을 위하여
우울증 혹은 조울증을 앓고 있고 삶에 깊은 회의를 갖고 있는 목사나 선교사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심지어 자살충동을 느끼는 목사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감정의 문제를 부끄러워하고 숨기며 삶의 규칙, 봉사, 기타 활동 등으로 숨기며 산다면 이는 점점 문제를 힘들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뿐입니다. 이제 교회는 ‘정서’라는 문제의 핵심을 수면위로 끄집어내야 할 때입니다. 설교는 교인들의 정서를 직접 어루만지는 설교가 되어야 합니다. 사역과 봉사는 교인들의 정서를 억누르는 것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하며, 오히려 교인들의 정서를 더욱 풍성하게 하는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모든 교인들이 정서과 성령의 관계를 잘 이해하고 말씀에 따라 관계문제를 잘 처리하고 극복할 수 있도록 배우고 훈련받아야 합니다.
정서적으로 건강한 선교
선교사역보다 더 중요한 것은 건강한 정서를 가진 선교사가 되는 것입니다. 선교지에 오래 있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외로움와 씨름하면서 정서적인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서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깊이 들어주고 치유하는 관계가 선교지에서는 더욱 어려운 일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선교지에 나오기 전에 정서적으로 건강한 선교사가 되는 것, 그리고 선교지에서도 정서적으로 건강함을 유지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그 어떤 사역보다 중요한 과제입니다. 정서적으로 건강한 선교를 위해 가정사역, 더 나아가 혼자만의 독단적인 사역과 프로젝트보다는 깊이 교제하는 영적 그룹을 통한 코이노니아가 더욱 중요한 사역이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정서를 지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지 깨닫고 날마다 성령께 자신을 온전히 내어드리는 내어맡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김광락 선교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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