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설교

요한계시록 강해(16)-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등불지기 2012. 3. 3. 17:19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세상 죄를 지고 가신 예수, 그분은 저의 첫 사랑이시고, 저의 삶의 이유, 제 사역의 모든 것, 저의 생명, 저의 의미, 저의 행복, 저의 모든 것 되신 분입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요한계시록 강해(16)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본문:계5:1-7

 

5:1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5:2 또 보매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5:3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5:4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5:5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5: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5:7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시니라

 

세상에서 우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웁니다.

사업에 실패해서 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난에 서러워서 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파서 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게 되어 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랑했던 부모가 세상을 떠나서 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로 사람들은 웁니다. 그러나 여기 아주 특별하게 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12 제자 중 한 사람입니다. 요한은 아주 크게 울고 있습니다. 큰 소리로 울고 있습니다. 마치 이제 막 부모를 여의고 난 자식이 우는 것처럼 슬피 울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울음은 세상 사람들이 흔히 우는 것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의 울음소리는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역사 상 가장 위대한 사도 중에 한 사람이었던 사도 요한이 그의 생애 가운데 아주 특별하게 울었던 한 순간을 중심으로 그 울음소리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과연 무엇 때문에 울고 있을까요?

매우 특이한 이유 때문에 울고 있습니다. 그는 다름 아니라 책 한 권 때문에 울고 있었습니다. 본문 4절 말씀을 보실까요?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책은 도대체 어떤 책입니까? 예, 아주 특별한 책이었습니다. 어떤 특별한 책인가? 이 책은 하나님의 오른 손에 들려져 있었습니다. 1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사도 요한은 성령의 거룩한 환상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스런 보좌를 보게 되었는데 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 책이 한 권 쥐여져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계시록 4장에서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운 보좌의 형상을 중심으로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5장에 넘어오면서 특별히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오른 손에 놓여져 있는 한 책에 대해서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어떤 책인가? 성경에서 ‘책’이라고 말할 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모양의 책을 연상해서는 안됩니다. 고대 세계에서 ‘책’은 두루마기였습니다. 보통 파피루스나 양피지를 길게 연결하여 그 위에 기록한 뒤에 그것을 둘둘 말아서 항아리 같은 그릇에다가 담아서 보관해두곤 했습니다. 중요한 계약서나 임금의 명령서라든지 혹은 유언장과 같이 법적으로 아주 중요한 두루마기 같은 경우는 아무나 함부로 열람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두루마기에다가 끈을 묶고 그 묶은 매듭에다가 밀랍으로 붙여놓습니다. 그래서 법적으로 자격 있는 사람만이 그 붙여진 밀랍을 떼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임금의 명령이 기록된 문서일 경우에는 오직 자격 있는 사람만이 그 밀랍을 떼어내어서 그 서류를 읽을 수 있었고, 오직 그 사람만이 그 서류에 기록된 대로 명령을 집행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로마나라에는 죽기 직전에 유언서를 작성하는데 오직 죽은 다음에 상속자가 그 유언서를 읽어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일곱 번 밀랍으로 인봉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유언한 사람이 죽어야만 그 인봉된 두루마기를 열어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직 법적으로 상속권을 가진 사람만이 그 유언장을 열어서 유언한 대로 집행할 수 있었습니다. 보통 한 면에만 기록하고 양쪽에 모두 기록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오른 손에 들고 계신 이 책이 어떤 내용을 담은 것일까요? 문맥이나 여러 정황을 살펴볼 때 이 책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주시려는 ‘기업’에 대한 증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천국을 우리에게 유업으로 물려주시려고 기록한 유언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원래 이 기업은 에덴동산에 아담과 하와가 소유하고 있었던 것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범죄함으로 마귀에게 빼앗겨 버린 것이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다시 되찾아 주시려고 하시는 계획을 기록한 책인 것입니다. 이 유언장이 공개되면 사람은 다시 잃어버린 기업을 회복하고 원래 에덴동산에서 살았던 것처럼 죄 없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1절 말씀 보니까, 이 책은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이 확실하며 성실하고 또 권위가 있다는 뜻입니다. 보통 한 면에만 기록한다고 했는데 두 면을 기록했으니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약속은 너무나 성실하고 꼼꼼하다는 것이며, 일곱 인으로 봉했다고 했으니 하나님의 약속은 권위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 책에 기록된 유언을 실행할 수 있는 자격은 아무나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 사도 요한이 울고 있습니까? 3,4절을 다시 보시면,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라고 했습니다. 이 두루마기에 인봉된 것을 풀 수 있는 법적 상속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 위에 없다는 말은 하늘의 그 어떤 천사들도 인봉을 떼지 못한다는 말이고, ‘땅 위에’라는 말은 땅 위에 그 어느 동물이나 그 어느 사람이라도 이 두루마기를 열어볼 수 없다는 말이며, ‘땅 아래에’라는 말은 지금까지 죽은 사람들 중에서라도 그리고 보이지 않는 그 어느 세계에서라도 이 두루마기를 열람할 사람은 없다는 말입니다. 왜 천사들이 이 두루마기를 떼지 못할까요? 왜 인간이 이 인봉을 떼지 못할까요? 조금 전에 말씀드렸듯이 사람은 죄를 범했습니다. 그래서 죄 때문에 빼앗겨 버린 것을 어떻게 도로 찾을 수 있습니까? 죄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 약속에 참여할 자격과 특권을 앗아갔습니다. 예를 들어 가산이 기울어져서 재산을 다 팔고 노예 신분으로 전락하고 남의 집에 종살이하고 있는 사람이 무슨 수로 노예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조선시대 노비들의 생활을 보면 돈을 많이 벌어서 양반집 족보를 사면 혹 되기도 했지만 원칙적으로 한번 노예 신분으로 전락해버린 사람이 다시 자기 노력으로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유언장입니다. 유언을 남기면 유언한 사람이 죽어야 그 유언이 효과를 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천국기업을 물려주시겠다고 유언을 하셨다면 하나님께서 죽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이 인봉을 뗄 수 있습니까? 법적으로는 죄가 없는 사람이 이 인봉을 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사도 못합니다. 그 어느 사람도 죄 없는 사람이 없기에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온 우주 안에 그 어느 누가 이 인봉을 뗄 자격이 있습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더욱이 힘 있는 천사가 이렇게 소리칩니다. 2절에 “또 보매 힘 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강력한 천사는 하나님의 의를 선포합니다. 누가 도대체 자격이 있느냐? 누가 법적인 상속인이냐? 죄 많은 인류에게 천국을 유산으로 물려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실행할 사람이 누구냐? 불순종으로 모든 인류가 죄와 마귀와 사망권세의 노예로 팔렸는데 누가 그 노예 신분을 풀어주고 하나님의 이 위대한 천국유산을 상속하게 하겠느냐? 하늘 위의 천사도 땅위의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그 어떤 탁월한 천사도 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역사를 살았던 그 어떤 성인도 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공자도 석가도 소크라테스도 플라톤도 그 어떤 현자도 그 어떤 도덕선생도 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성경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직접 집행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아무도 없습니다. 죄와 마귀와 사망권세에서 종살이하는 인류를 노예 신분에서 풀어주어 하나님의 영광스런 천국유산을 물려주는 계획을 실행한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주가 되시기 위해 죄없는 분으로서 육신을 입으시고 사람 곁으로 다가오셨습니다.

이제 사도 요한이 울고 있는 이유가 이해되십니까? 큰 소리로 울고 있는 사도 요한의 울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모든 인류의 영적 절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인류의 울음소리는 전 우주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만물이 피곤해하며 신음하고 있습니다. 요한의 울음은 인류의 상태를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서, 내 안에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다다를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애통하는 모든 인류의 절망적인 상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울음은 구원받기 위해서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영적 울음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누구든지 천국을 유업으로 받으려면 이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첫째, 내 안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즉 지적인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 둘째로, 내 안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가 없음으로 인해 슬퍼하고 애통하는 것입니다. 즉, 감정적인 통회와 울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이 두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면 진정으로 예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참 그리스도인이란 회개의 관문을 통과한 사람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아기가 태어날 때 어떻게 태어납니까? 큰 소리로 울면서 이 세상에 나오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영적인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도 그렇습니다. 사도 요한과 같이 큰 소리로 울 때 그 영혼이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사실에 진정으로 슬퍼하고 애통하며 울 때에 주님은 조용히 찾아오셔서 우리를 성령으로 새롭게 하시고 우리 영혼을 거듭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와 같이 거듭나셨습니까? 이와 같이 의의 결핍을 깨닫고 슬퍼하며 애통하며 우신 적이 있으십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 근본적으로 죄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진정 슬퍼하고 통곡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있다면 여러분은 거듭남을 체험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실 것입니다. 만약 없다면 여러분은 아직도 예수님을 알지 못하거나 아직도 거듭남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과 하나님을 인격으로 아는 것은 분명 다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는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진정으로 거듭나고 하나님과 예수님과 교제를 나누면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의식한다고 해서 예수님을 안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진정 아는 것은 예수님과 친교를 나누고 있다는 것이고 예수님을 통해서 내가 변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거듭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린아이의 절규를 통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처럼 깊은 슬픔과 애통과 절규와 부르짖음을 통해서 중생을 체험했음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이와 같이 거듭나셨습니까? 진정 거듭남을 체험하셨습니까? 여기 힘 있는 천사가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을 그 영혼이 들어볼 때에 우리는 진정으로 애통하게 되고 애통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성령의 은혜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상 천하에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실행할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서 사도 요한과 같이 큰 소리로 울게 될 때에 거듭나게 되는 줄 믿습니다.

울고 있는 사도 요한을 위로한 음성이 무엇입니까?

사도 요한이 큰 소리로 엉엉 울고 있을 때 그에게 위로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여기서 메시야를 유대 지파의 ‘사자’라고 했습니다. 그는 ‘다윗의 뿌리’라고 했습니다. ‘사자’라고 했는데 이 말은 ‘Lion' 즉 맹수의 왕 사자를 가리킵니다. 고대 세계에서 ’사자‘는 힘과 권세를 나타내는 동물이었습니다. 승리의 표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구약의 족장이었던 야곱의 예언이 성취된 것을 말합니다. 창49:9,10절을 보시면,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 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숫사자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라고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다시 창3:15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에 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메시야는 힘 있는 사자처럼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억압하고 있는 죄와 마귀와 사망의 권세와 싸워 이기실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그리고 메시야는 다윗의 뿌리에서 나실 것이다! 이 말은 다윗의 왕통이 잠시 끊어졌다가 다시 회복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대로 우리 예수님께서는 다윗으로부터 28대만에 이 땅에 오셨습니다.(마태1장 참조)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음성을 듣고 사도 요한이 본 것은 맹수의 왕 사자가 아니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본 것은 아주 연약하고 힘없는 어린양이었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장면입니다. 실제로 나타난 모습은 매우 연약한 모습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고 했습니다. 분명히 장로로부터 듣기에는 맹수의 왕 사자이었는데 사도 요한이 본 것은 사자가 아니라 힘없고 나약한 한 마리의 어린양이었습니다. 메시야는 유대지파의 사자로 오셔서 승리하실 것이라고 했는데 무력하고 힘없는 어린양이 보좌와 피조물 사이의 중보의 위치에서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여기에 복음의 놀라운 신비가 숨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아로서 이 땅에 오셔서 분명 승리하셨습니다. 광야에서 마귀를 이기셨습니다. 생애 가운데 모든 죄를 이기셨습니다. 율법의 권세를 이기고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질병의 권세를 이기고 온갖 귀신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승리하신 방식은 유대인들이 상식으로 생각하던 그런 무력의 방식이 아니라 그들이 보기에 무기력한 죽음의 방식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신비입니다. 유대인들은 사자로서의 메시야를 고대했습니다. 지금도 사자로서 오실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그런 칼과 창과 무기와 기적을 행하는 능력으로 승리하시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갈보리 십자가에서 죽는 방식으로 승리하셨습니다. 매우 역설적인 방법입니다. 사람의 생각을 깨뜨리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골2:12-15) 우리 예수님께서 승리하신 방식은 무력의 방식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는 죽음의 방식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십자가로 죄와 율법과 마귀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십자가로 승리하신 예수님--이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처럼 죽임을 당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유언장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자격이 있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임 당한 어린양으로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 사이에 중보자로 서 계십니다. 유언장은 작성한 사람이 죽지 않고서는 결코 실행에 옮길 수가 없는 것 아닙니까? 작성한 사람이 죽었다는 증거가 있어야 유언장은 개봉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따라서 죽임 당한 흔적을 가지고 있는 어린양은 이 인봉을 떼기에 합당합니다. 이 어린양은 바로 우리 구주 에수님이십니다. 할렐루야.

어린양으로서 오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만큼 정확하게 예언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 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53:2)라고 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깍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53:7)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속들이 손을 들어 뺨을 때릴 때에도 잠잠하셨습니다. 빌라도가 심문할 때에도 침묵하셨습니다. 빌라도가 심히 기이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왜 침묵하셨을까요? 저와 여러분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잠잠하셨습니다. 희생제물이 되기 위해 침묵하셨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무엇입니까? 완고하여 도무지 이스라엘을 놓아주지 않으려고 버텼던 애굽의 바로 람세스 2세의 마음을 꺾어 놓은 것이 무엇입니까? 하늘의 천지이변이나 자연재해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유월절 어린양의 피였습니다. 어린양의 피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오직 집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발라놓은 집만이 칼을 든 심판의 천사가 넘어갔습니다. 이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유월절 어린양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유월절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드시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 십자가에 몸을 찢으시고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흘려진 그 피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의 천사는 넘어갑니다. 그리고 죄와 저주와 질병과 죽음과 온갖 더러운 영들과 마귀의 권세 아래서 종살이하는 삶을 청산하고 이제 저 가나안 땅을 향하여 행군하는 영적 군사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사도 요한의 증언을 들어봅시다.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양이 섰는데”라고 했습니다. 사이에 섰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중보자로 서 계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에 죽으신 경험과 죽으신 흔적을 몸에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올라가 보면 우리 주님을 만나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을 바라볼 때 그 몸에 있는 죽음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에 나 있는 죽임 당한 흔적은 천국에서 영원토록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몸의 흔적을 바라보면서 나의 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 되신 예수님의 그 크신 대속의 사랑을 영원토록 잊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 몸의 상처를 영원히 바라보면서 천국에서 살 것입니다. 그리고 그 흔적을 직접 만지고 직접 바라보면서 영원토록 우리를 죄악가운데 구속하신 주님의 은총을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 적은 사람에게는 그 흔적을 직접 보여주시면서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고 네 손으로 내 손바닥을 만져 보라”고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구원의 감격으로 주 예수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 흔적을 바라보면서 영원토록 예수님을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 어린양에는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다고 했습니다. 일곱 뿔은 충만한 권세를 가리킵니다. 일곱 눈은 전 세계에 보냄 받은 하나님의 성령을 가리킵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이 십자가 복음을 들으면 코웃음 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그런 말로 세계를 구원하겠다고?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이렇게 비웃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세상적으로 미약하게 보이는 이 십자가 복음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권세가 있습니다. 이 권세는 온 세상을 바꿔놓을만한 힘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이 복음의 권세로 말미암아 로마제국이 무너졌습니다. 미신이 가득했던 서방세계가 무너졌습니다. 동방세계도 무너지고 있습니다. 사신우상숭배와 술과 노름으로 국세가 기울어져가던 이 민족을 새롭게 한 것도 바로 이 십자가 복음이었습니다. 이 복음의 권세는 땅 끝까지 이르러서 세계를 바꿔놓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7) 성경은 이 십자가의 능력에 대해서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세상사람들은 물질이나 권력이나 다른 물리적인 어떤 힘을 숭배합니다. 요즘은 사람들이 정보와 지식을 숭배하는 사회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의 힘이요 지혜요 모든 능력의 원천이 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2-24) 우리는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로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면 세상을 절대로 이길 수 없습니다. 세상의 지혜를 따라 가다가는 결코 세상을 따라 잡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어린양이 하나님의 오른 손에 들려져 있는 두루마기를 취하셨습니다.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구원계획의 완성을 위해 이 땅에 다시 영광가운데 재림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예 신분으로 전락하여 죄와 질병과 마귀의 죽음의 공포 아래 신음하는 모든 인류에게 다시 천국을 유업으로 물려줄 유언장을 작성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놀랍고도 신실하고 은혜로운 계획을 실행에 옮길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냥 그대로 두면 모든 인류는 영원한 멸망의 구렁텅이로 떨어져서 지옥 불 가운데서 영원한 고통을 겪으며 저주를 겪을 운명이었습니다. 우리는 온 인류의 이 절망적인 처지에 대해 탄식하며 통곡하며 슬피 울어야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어린양으로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어린양 되신 예수님께서는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로 서 계시면서 이 놀라운 구원계획을 집행하고 계십니다. 자신의 절망적인 영혼의 상태로 말미암아 슬피 울며 애통하며 탄식하는 모든 죄인들에게 다가가셔서 위로하십니다. 사도요한과 같이 자신 안에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의가 도무지 없고 그래서 이대로는 죽을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그 영광스러운 유업을 물려받기는커녕 펄펄 끓는 지옥 불 가운데 던져질 수밖에 없는 인생의 비참함에 대해서 애통하고 울고 있는 모든 영혼에게 복음으로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그의 영혼을 거듭나게 하십니다.

우리가 우리 죄로 말미암아 슬퍼하고 있습니까? 세례 요한은 이렇게 외치며 증거하고 있습니다. “보라,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어린양 되신 주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어린양되신 주님께 죽임당한 상처와 흔적이 있음을 바라보십시오. 그의 옆구리의 창자국과 손과 발에 난 못자국을 보십시오. 여러분, 죄와 질병과 마귀의 억압에서 벗어나기 원하십니까? 저 천국을 유업으로 받기 원하십니까? 진정 구원받기 원하십니까?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기 원하십니까? 새로운 인생으로 살아보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하나님의 어린양을 바라보십시오. 일찍 죽임당한 흔적이 있는 어린양을 바라보십시오. 어린양 되신 예수님은 여러분을 위로하시고 거듭나게 하십니다. 어린양 예수님만이 우리를 살려주시고 새롭게 하십니다. 이 중생의 축복이 여러분에게 다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보라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죄악가운데 출생하여 죄악가운데 살다가 죄악가운데 멸망하여 영원한 지옥불에서 고통당하며 영원한 저주아래 신음할 수 밖에 없던 죄인들에게 이 영광스러운 복음을 알게 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려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스스로 어린양으로 이 땅에 오신 주예수님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내 평생 사는 동안 어린양되신 주 예수님을 깊이 알며, 사랑하며, 경배하며, 찬송하며 살기 원합니다. 환란이 오나 시련이 오나 핍박이 오나 내 일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변함없이 어린양 예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살기 원합니다. 성령으로 충만케 하셔서 이 믿음 변치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