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강해(18)
하나님의 심판
본문: 계6:1~8
6:1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뢰 소리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6:2 내가 이에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6:3 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더니
6:4 이에 붉은 다른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6:5 셋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세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6:6 내가 네 생물 사이로서 나는 듯하는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 말라 하더라
6:7 넷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네째 생물의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오라 하기로
6:8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저희가 땅 사분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
지난 시간 살펴본 대로 성부 하나님의 오른 손에 들려 있던 그 책은 범죄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구속계획이었습니다. 이 계획은 인간이 범죄할 것을 미리 아시고 인간을 창조하시기 훨씬 이전에 삼위 하나님께서 합의하여 미리 정하신 계획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이 범죄하자 하나님은 그 계획을 즉각 실행에 옮기실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들고 있는 성경은 하나님의 계획과 실행, 약속과 구원에 대한 위대한 보고서입니다. 성경은 인류의 구속을 위해 불같은 열심을 가지고 행동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범죄한 인류에게 다시 낙원을 돌려주시려는 하나님의 구속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한 중보자가 나서야 했습니다. 왜 중보자가 필요할까요? 성경은 하나님의 그 약속을 ‘유언’이라고 말합니다.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실행이 됩니다. 그러기에 이 유언을 실행할 사람은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는 전혀 없는 것입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으로서 죄 많은 인생들을 대신하여 죽을 자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중보자는 바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으로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을 위해 죽으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 인간과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면서 하나님의 로고스이셨던 그분이 인류의 구속을 위해 오시리라 약속된 대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하나님의 유언을 실행하실 유일한 중보자이심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
그것을 계시록 본문 역시 매우 단순 명료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그 책을 취했다’는 말은 이제 죽임 당한 어린양이 그 구속계획을 실행할 권리를 획득하셨다는 말입니다. 오직 자격이 있는 자만이 인봉을 떼고 두루마기에 기록된 약속대로 실행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실행하는 것은 오직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왜냐면 그는 약속된 메시아로서 동시에 죄 없는 하나님으로서 범죄한 인류를 대표하여 그들의 죄값을 당신의 피값으로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어린양 예수님만이 구세주의 자격을 가지고 계십니다. 오직 그분만이 하나님의 계획을 실행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계획은 매우 치밀하고도 꼼꼼하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 계획이 너무나도 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책은 모두 일곱 개의 인으로 단단히 인봉되어 있는데 이제 어린양께서 그 인을 하나씩 떼심으로써 그 책에 기록된 대로 구속계획이 실현되어지는 것입니다.
어린양께서 인봉을 하나씩 떼심으로써 우리의 구속은 점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구원은 실현되고 있으며 완전한데로 전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하나님의 구속계획이 실현되는 데는 정한 때와 기한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곱 개의 인봉(seals)은 인류의 구속을 위해 하나님이 정하신 때(kairos)를 의미합니다. 일곱 개의 인봉은 결코 한꺼번에 떼어지지 않습니다. 하나 씩 하나 씩 차근히 떼어질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하나님이 예정하신 때와 기한에 따라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으며, 최후를 향해 다가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사실은 당시 고난 받던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공의가 왜 신속하게 실현되지 않는가에 대해서 조급해 있던 하박국 선지자에게 주신 말씀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합2:3) 하나님의 때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때를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그 때를 아는 것은 고난 속에서도 참을 수 있는 참된 힘이 됩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에게서는 무한한 위로요, 세상 속에서 안주하고 안락을 누리는 자들에게는 무시무시한 경고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미 최후 심판이란 내리막을 향해 기울어지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온 세상은 진통을 겪기 시작했다는 증거들을 볼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증거들이 세상에 이미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지켜보면서 하나님의 구원이 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놀라운 구원이 지금 진행 중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때가 지금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역사와 삶 속에서 확인하라고 본문은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이 지금도 진행 중에 있으며 피조 세계에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그 모든 배후에는 사실 어린양의 통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 세계에 하나님의 진노가 부어지는 일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입니까? 세상을 창조하실 때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스스로 평가하신 그 피조물에 진노를 내리실 수 있습니까? 스스로 보시기에 그렇게 좋았던 세상에 이처럼 두려운 심판을 내리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 때문입니다. 그리고 죄로 물든 세상 가운데서 고통 받고 있는 당신의 백성들의 울부짖음 때문입니다. 그것이 계시록 6장 전체서 말하려고 하는 주제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것은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 속에서 고난 받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구속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산통입니다.
오늘 살펴보게 되는 네 가지 인은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과 관련이 있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대행하는 존재로서 네 생물들이 등장합니다. 하나씩 살펴보기 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시간적 순서가 아니라 논리적 순서라는 것입니다. 즉, 첫째 인은 역사의 어느 시기의 어느 사건을 의미하고, 둘째 인은 인간 역사의 어느 시기, 어느 사건을 의미한다는 식으로 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아야 하는 근거로서 일곱 인과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이 서로 어떻게 연관을 맺고 있는 지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일곱 째 인이 떼어질 때 일곱 나팔이 차례대로 불려지고, 마지막 일곱 나팔이 불리어질 때 일곱 대접이 차례대로 불려집니다. 하나님의 구속계획을 뜻하는 책에는 일곱 인봉이 있었고, 일곱 째 인봉에 일곱 나팔이 포함되어 있고, 일곱 째 나팔에 일곱 대접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인류역사의 어느 시간과 사건을 기록한 시대적 추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계획이 완성되기까지 필연적으로 일어나야 할 논리적 추이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잘못 해석하는 많은 사람들의 오류가 바로 이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해서 저질러집니다. 논리적 추이를 시대적 추이로 끼워 맞추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어린양이 하나씩 인을 떼실 때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는지 살펴봅시다. 그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논리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일어나야 할 사건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그리스도인들이 품어야 할 세계관과 역사관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첫째 인을 떼실 때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레 소리 같은 음성으로 “오라”고 외치는데 어떤 사람이 흰말을 타고 등장하는데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이 환상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특히 1세기 당시 요한의 서신을 받았던 소아시아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느꼈을까요? 요한이 이 서신을 기록하고 있던 당시에 로마제국의 변방에는 말을 타고 활을 잘 쏘았던 파르티아인들의 침공이 잦았고 이러한 파르티아인들의 침공으로 로마제국이 무너질 것이라는 소문이 로마제국 전역에 나돌았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의 이미지는 분명 빠르게 확산되고 확대되는 모습입니다. 당시 말은 가장 빠른 교통수단이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역사적으로 해석할 경우 인간사회에 급속도로 퍼지는 어떤 두려움의 종류라고 생각합니다. 네 가지 인을 뗄 때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말들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확산되는 두려움들의 종류를 가리킨다고 봅니다. 그 두려움들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사람들의 마음에 퍼지고 있습니다. 이 두려움이 사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적으로 볼 때도 네 종류의 말은 하나님의 심판이 인생들에게 임하는 어떤 양상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네 종류의 말에 대한 환상은 스가랴서에 등장하는데(슥1:7-17) 구약성경을 잘 아는 유대인들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이 환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게 될 것입니다. 네 종류의 말에 대한 환상은 스가랴 선지자가 처음으로 본 환상이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네 종류의 말에 대한 환상을 보여주는 천사에게 이 환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었을 때 계시를 담당한 천사는 이렇게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심으로써 안일하게 살고 있는 열국에 진노를 내리시는 데 쓰임 받는 하나님의 종들이었다고 말합니다. 비록 자신들의 죄로 열방에 포로로 끌려갔지만 시온의 백성들은 열방에 내리시는 하나님의 진노와 질투를 바라보시면서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긍휼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동일한 원리가 계시록의 본문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세상에 내리시는 하나님의 진노는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들, 즉 당신의 자녀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질투와 사랑을 증거합니다.
그러면, 흰말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어떤 학자는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하는데 문맥은 전혀 지지하지 않습니다. 물론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흰말을 탄 자로 묘사하는 본문이 계19장에 나옵니다. 그러나 계6장에 나오는 흰말을 탄 자는 분명 그리스도에 대한 묘사는 아닙니다. 흰말을 탄 자는 인생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진노를 대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흰말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흰말은 고대세계에서 승리의 상징이었습니다. 개선장군들이 타는 것이었습니다. 흰말을 탄 자가 ‘자기 활’을 가지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는 모습은 정복욕에 사로잡힌 자들에 의해 사람들이 가지게 될 두려움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첫째 인의 내용은 하나님의 진노가 인생들의 끊임없는 권력을 향한 욕구를 통해 세상에 나타난다는 것이라고 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사람들은 흰말을 타기 원하거나 혹은 흰말을 탄 자를 기대하고 숭배합니다. 백마를 탄 왕자를 학수고대하는 것은 몇몇 속 빈 여자들만이 꿈꾸는 환상이 결코 아닙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자기 자신을 다스려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러한 강력한 통치자가 나타나면 얼마나 두려워 떠는지 모릅니다. 절대권력을 향한 투쟁은 인간 역사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래서 인류역사 속에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자칭 메시아라 일컬으면서 절대권력을 향하여 투쟁해 왔었다는 증거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권력을 향한 인간들의 욕구는 우리 주변, 특히 정치세계에서 보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욕망이기도 합니다.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마음은 어린아이들에게도 찾을 수 있는 공통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면류관을 받기를 원하며 남을 이기기 위해서 활을 준비합니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도 사실 남의 것을 빼앗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사람들은 명예와 권력을 숭배하며 그래서 남에게 지는 것을 굉장히 싫어합니다. 그래서 ‘자기 활’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남이 희생되는 것을 보고 쾌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종말의 때는 이러한 정복욕구에 사로잡힌 인생들을 통해 하나님의 진노가 사람들에게 임할 것이라고 본문은 말합니다. 이렇게 정복욕을 통해 하나님의 진노가 세상에 임합니다. 여러분, 역사를 보세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정복욕에 눈이 멀어 수많은 사람들을 다치게 만들었습니까? 히틀러와 뭇솔리니, 스탈린과 같은 사람들을 보십시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강도나 도둑이 아닙니다. 다름 아니라 권력에 눈 먼 사람입니다.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사람처럼 무서운 사람이 또 있습니까? 아이러니한 사실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인간의 마음속에 내재된 권력에의 욕망을 통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무엇입니까? 복음은 그러한 인생을 정복하려는 욕구와 정복당함에 대한 두려움에 떠는 인생들을 해방시켜주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을 알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흰말이 아니라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만약 흰말을 타고 입성하셨다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모든 권력과 명예에 대해 십자가에 죽은 자들입니다.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끊임없이 정복하려는 욕망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고 권면합니다. 성경은 남의 유익을 위해 살라고 권면합니다. 남을 섬기면서 살라고 권면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도, 주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다툼과 시기와 원망과 시비로 하는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왜요? 지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이 두려움 때문에 ‘자기만의 활’을 가지고자 노력합니다. 두려움과 열등감과 정복욕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정복의 욕구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말합니다. 남과 경쟁해서 이기려는 욕망, 남에게 뒤쳐진다는 콤플렉스 등을 십자가에 못 박으십시오. 야곱과 같이 다른 사람과 경쟁해서 이기려고 하는 삶에 대해 죽으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콤플렉스 때문에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자격증을 따고, 열심히 학위를 따고 열심히 노력합니다만 결국은 남을 이기는데서 기쁨을 얻습니다. 남보다 앞서 나가는 데서 승리감을 얻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방식과 정반대입니다. 대신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섬김의 도를 배우십시오. 자신의 생명을 다른 사람의 성공과 번영을 위해 내어놓는 것입니다. 자신을 다른 사람이 올라설 수 있는 디딤돌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희생을 통해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섬기는 자로 부르셨지, 남과 경쟁해서 이기는 사람으로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둘째 인을 떼실 때 붉은 말이 무대에 등장합니다. 붉은 말을 탄 자는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서로 미워하게 하고 죽이게 하는 일을 합니다. 물론 이 일은 임의대로 할 수 없고 오직 허락 받은 범위 안에서 가능합니다.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하나님께서 스스로 제한하신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일을 위해 그가 받은 것은 큰칼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진노가 세상에 임하는 방식은 이렇게 인간들의 죄성을 통해서 세상에 구현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인을 통해 본문이 우리에게 계시하는 바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또 다른 두려움입니다. 그것은 미움이란 형태로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마음속에 다들 증오심을 키우고 있습니다. 가인을 보십시오. 사실 두려움 때문에 남을 미워하고 두려움 때문에 형제를 죽입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증오의 칼을 갈고 다듬고 있습니다. 미움은 사단의 강력한 무기입니다. 증오심에 가득 찬 사람들은 사단의 밥입니다.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증오심을 계속 품는 것은 사단을 자기 안에 들어오라고, 들어와서 자신을 다스리고 인도해달라고 초청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사단은 화평을 깨뜨리는 데 선수입니다. 사단은 사람들 사이에 화평을 그냥 보고 있는 것을 가장 참지 못합니다. 사람들 마음속에 증오심을 키우는 것이 사단의 주된 임무입니다. 그래서 죽이게 하고 서로를 해하게 합니다. 사단은 또한 민족들 간에 화평을 제하고 서로 싸우게 하기도 합니다. 역사를 보세요. 전쟁이 없던 해가 있었습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화평케 하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모든 증오심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 말씀을 순종할 수 없다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증오심과 앙숙관계입니다. 미워하는 마음에 그리스도의 성령이 거하지 않으십니다. 물론 불의를 증오하고 미워해야 합니다. 성경은 해질 때까지 증오를 품지 말아서 사단이 틈타지 않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혹시 여러분 안에 미움과 원망과 증오심이 있습니까? 그것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십시오. 그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특히 종말의 때는 이 증오심이 더욱 극에 다다를 것입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24:9-12) 사도 바울 역시 경고하고 있습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딤후3:1-5) 혹시 여러분 마음속에 어떤 종류의 증오심이라고 있으면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기 바랍니다. 대신 주님이 가르쳐주신 사랑과 용서와 화목의 도를 배우기 바랍니다.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처럼 칼을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용서하십시오. 용서와 화목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셋째 인을 떼실 때 검은 말이 무대에 등장합니다. 검은 말을 탄 자가 가진 것은 저울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근과 결핍을 의미합니다. 종말의 때가 되면 결핍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더 사람들 안에 확산되어 갈 것이라고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6절에,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라고 했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 품삯입니다. 그런데 밀 한 되는 하루 양식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루 벌어서 하루 먹는다는 것이 아닙니까? 열심히 노동하지만 겨우 그날 연명할 뿐입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삶에 대해 두려움을 가질 것입니다. 이 두려움은 주님의 십자가 이전에도 있었지만 종말의 때에 더욱 두드러질 것입니다. 결핍에 대한 두려움의 확산--이것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양상입니다. 사실 이 진노는 구약시대에도 있어왔습니다. 창세기에 하나님은 아담에게 얼굴에 땀이 흘려야 먹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종말의 때는 이 결핍을 심각하게 경험할 것입니다. 세상은 점점 결핍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이 두려움 앞에 모든 인류가 무릎 꿇고 벌벌 떨고 있습니다. 풍부하게 누리는 것 같지만 사실 점점 자원은 고갈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의 것을 빼앗기 위해 얼마나 혈안이 되는지 모릅니다. 정치가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빼낼 궁리만 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석유 등 에너지가 고갈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석유는 50년 안에 바닥을 드러낼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이 현실을 조금이라도 직시하는 사람은 두려움에 몸서리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검은 말 탄 자가 들고 있는 저울은 인생들의 탐욕을 잘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더 많이 가지려고, 손해 보지 않으려고 얼마나 재어보는 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나름대로 저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손해 보는 일은 절대로 안 합니다.
종말의 때가 될수록 이러한 현상은 더욱 두드러질 것입니다. 지금도 여러분이 직접 보고 있지 않습니까? 손해 보는 일은 절대로 안 하는 이기적인 분위기가 팽배해져갈 것입니다. 이러한 진노는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장 커다란 형태가 자본주의의 그림자입니다. 자본주의의 폐해는 이러한 인생들의 탐욕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오늘날 황금만능주의가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 결핍에 대한 인생들의 두려움이 커져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교회도 이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돈만 있으면 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이야말로 하나님의 교회가 타락하게 되는 시점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는 교회나 개인이나 좀 더 가지려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더욱더 영적으로 곤고해지고 가난해질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안에 이러한 두려움이 있지 않습니까? 내일 일에 대한 두려움말입니다. 결핍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더 많이 가지려고 몸부림치고 있지 않습니까? 성경은 무엇이라 말합니까? 탐심과 소유욕을 버리라고 말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 마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친히 보여주신 나눔과 버림의 도를 행하라고 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실제적으로 성경적 토지 정의를 위한 모임에 가입하셔서 공부할 것을 권합니다. 이 세대에서 공의를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교회가 어떻게 이 공의를 실천할 것인지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고민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 두려움 앞에 떨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영광스러운 약속은 무엇입니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4:19) 이 결핍의 두려움 앞에 벌벌 떠는 세상 가운데서 이렇게 외치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곧 계시록이 말하는 왕노릇하는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두려움을 다스리고 있습니까? “나는 세상의 왕”이라고 외치면서 왕노릇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혹시 세상과 같이 이 두려움의 왕 앞에 굴복하고 두려워 떨고 있거나 말 뒤에 손이 묶인 채로 질질 끌려 다니고 있지는 않습니까?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능력 주시는 주님 때문에 우리는 가장 심각한 결핍 가운데서도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 지라”(빌4:18)고,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4:12)고 외칠 수 있습니다.
넷째 인을 떼실 때 청황색 말이 등장합니다. 아주 창백하게 생긴 말입니다. 이 말을 탄 자의 이름이 특별히 이름이 거명되고 있는데 바로 사망입니다. 그 뒤에 무덤이 열리고 있습니다. 그들(사망들)이 땅 사 분의 일의 권세를 얻어서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이 겪고 있는 총체적 난국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종말의 때에는 사람들이 점점 죽음과 질병에 대한 두려움이 실제적인 공포가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검, 흉년, 사망, 땅의 짐승은 서로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전쟁이 벌어지고 나면 흉년이 찾아오고 흉년과 함께 질병이나 전염병이 돌게 됩니다. 땅의 짐승은 전염병을 가리킵니다. 구주께서 부활하심으로 종말의 때가 열리게 되었는데 이 종말의 때에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서 이러한 전쟁과 기근과 질병과 죽음에 대한 총체적인 공포가 점점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보십시오. 사람들은 얼마나 자기들의 건강을 염려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건강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이 청황색 말 앞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승리하며 왕노릇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여호와 라파’의 이름으로 이 땅에 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그리스도 예수 여러분의 구주를 신뢰하십시오. 그분을 의지하여 나날이 강건해지는 자신의 속사람을 주목하면서 사십시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단순합니다. 종말의 때에 사람들 내에서 급속히 확산되는 어떤 두려움에 대한 보고입니다. 사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첫 번째 양상에 불과합니다. 앞으로 우리는 인생들이 당면하고 있는 더욱 크고 두려운 현실을 직시할 것입니다. 우리는 인류가 벌써 겪기 시작한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를 보면서 우리의 구원의 그 날이 점점 가까워 오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날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진노가 세상 속에 나타나고 있는 것은 곧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역설적인 진리를 가슴깊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러한 현상들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두려워해야 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섬기며, 사랑하며, 나누며, 살리며 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두려움에 몸서리치면서 떨고 있는 인생들에게 유일한 피난처는 어디입니까? 이 모든 배후에 계시는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것뿐입니다.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늘 아래 피하는 것뿐입니다. 오직 그분의 은혜의 날개 아래 우리 인생들이 이러한 증가일로에 있는 두려움들을 피할 수 있는 참된 안식처가 있습니다. 이제 그 안식처로 달려나오십시오. 두려움을 이기려고 사람들은 자기 활을 준비하고 큰칼을 가지려고 하고 저울을 움켜쥐려고 합니다. 그러나 참된 평화와 안식은 오직 어린양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참 평화, 참 용서, 참 만족, 참 강건함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들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넓은 품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와서 주님이 준비해놓으신 그 풍성한 선물을 받으십시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저 마귀는 우리를 삼키려고 입벌리고 달려와도
주 예수는 우리의 대장되니 끝내 싸워서 이기겠네
내 지은 죄 주홍빛 같더라도 주 예수께 다 아뢰면
그 십자가 피로써 다 씻으사 흰 눈 보다 더 정하겠네.
저 공중에 구름이 일어나며 큰 나팔이 울려날 때
주 오셔서 세상을 심판해도 나의 영혼은 겁 없겠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내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한계시록 강해(20)-하나님의 진노II(계6:12-17) (0) | 2012.03.03 |
---|---|
요한계시록 강해(19)-하나님의 진노 I (계6:9-11) (0) | 2012.03.03 |
요한계시록 강해(17)-천상예배(계5:8-14) (0) | 2012.03.03 |
요한계시록 강해(16)-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0) | 2012.03.03 |
요한계시록 강해(15)-하늘예배II(계4:11) (0) | 2012.03.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