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회복의 지름길은 천상예배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요한계시록 강해(17)
천상예배
본문:계5:8-14
5:8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5:9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5:10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5:11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5:12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5:13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5:14 네 생물이 가로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구원의 감격이 식어지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증상이 예배가 재미없어 지는 겁니다. 예배에 참석하기는 해도 의무감으로 합니다. ‘내가 예배드린다’고 하는 참여의식이 아니라 ‘예배보러간다’고 하는 구경군의식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여러분께서는 예배를 드리러 오셨습니까? 아니면 예배를 보러 오셨습니까? 흔히들 ‘예배’라고 하면 고리타분하고 딱딱하고 재미없고 지루하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하고 참석하지 않으면 뭔가 벌을 받을 것 같은 그런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요즘 많은 교회들이 예배는 재미없다는 의식을 깨뜨리기 위해서 예배를 재미있게 만들려고 시도합니다. 예배 중에 드라마나 영화나 연극을 상영합니다. 음악도 젊은 사람 취향에 맞추어서 감성적이고 흥미를 유발시키는 빠른 템포의 복음송을 도입하는 교회가 많습니다. 설교 역시 사람을 웃기고 사람의 흥미를 유발시키는 설교로 흘러가고 길게 설교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유행의 근본적인 생각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배는 재미없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예배를 재미있게 만들려고 온갖 인본주의적인 방법들을 동원해보지만 그런 방법들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 보러가자’는 말이 유행하게 됩니다.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의 쇼맨십을 보면서 재미를 느끼면 예배를 잘 드렸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예배를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에 대한 구경꾼들이 많지만 예배에 진정 참여하는 참여자는 적어져 가는 겁니다. 여러분, 예배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구경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 몸과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까? 보는 것입니까? 아니면 드리는 것입니까? 예배는 몸과 마음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예배 가운데 무엇을 드리고 돌아가십니까?
그런데 대부분은 예배를 통해 무엇인가를 보려고 합니다. 혹은 무엇인가 공급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가 끝나고 나면 “목사님 예배가 참 좋았습니다” 혹은 “목사님 설교가 참 은혜로웠습니다” 처음에 사역을 시작할 때는 이런 말을 들을 때는 솔직히 기분이 좋았습니다. 이런 말을 듣지 못하면 ‘아, 내가 설교를 잘못했구나’ ‘예배를 잘못 인도했구나’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생각이 듭니다. 설교자가 과연 청중으로부터 칭찬과 영광을 받아야 하는가? ‘설교가 좋았다’는 말을 들어야 예배를 잘 드린 것인가? 설교가 좋든 안 좋든 상관없이 찬송이 좋든 안 좋든 상관없이 ‘예배 잘 드렸습니다’는 말을 듣지는 못하는가? “설교 잘 들었습니다” “설교말씀 참 좋았습니다”는 말보다 “하나님께 예배 잘 드리고 돌아갑니다”라는 말을 왜 못하는가? 오늘날 교회가 예배자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구경꾼을 키우고 있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드리기 보다는 받으려고 하고 참여하기보다는 방관하면서 제3자의 입장에서 평가하려고 하며, 그런 일에 보다 능숙해져갑니다. 그러한 자기 모습을 보면서 때로는 공허감을 감추지 못하면서 때로는 그것이 ‘영적 분별력’이 향상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예배를 내가 직접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구경꾼의 입장에서 그저 보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설교자는 청중으로부터 칭찬을 받으려고 설교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설교를 준비해야 하지 않는가? 진정한 찬양팀 리더는 사람들의 평가에 초연해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원래 예배만큼 재미있고 감격적인 것이 없어야 정상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큼 우리를 고무시키는 것은 세상 그 어디에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대체할만한 감격스럽고 재미있는 일은 그 무엇도 없다고 고백해야 정상입니다. 예배 이외에 다른 무언가가 더 재미있고 흥미 있다고 한다면 영혼에 무엇인가 잘못되기 시작한다는 증거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죄를 범한 이후 그들이 가장 먼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예배의 감격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의 의식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친밀감을 잊어버리고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친근히 교제 나누며 예배드리는 감격이 사라지게 되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부담스럽고 두렵기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 예배의 감격을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모든 죄인들의 공통점은 바로 예배의 감격이 없다는 것과 예배에 대해서 굉장한 부담감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바로 죄 때문에 예배의 감격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세상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에 예배의 감격이 사라져버리고 있습니다. 세상풍조를 좇기 때문에 예배가 부담스러워집니다. 백화점 세일할 때 보십시오. 자동차들이 얼마나 많이 몰립니까? 요즘은 보통 식당에서도 경차를 경품으로 내걸고 있습니다. 선물을 공짜로 준다고 하면 그것 하나 받아갈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북새통을 이룹니까? 불신자들뿐만 아니라 믿는 사람들도 이런 사행심리에 눈이 멀어서 어디서 뭘 주고 어디서 뭐가 싸다라고 하면 기를 쓰고 갑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배는 어떻습니까? 예배는 백화점 바겐세일만도 못하지 않습니까? 백화점에 놀러 가지고 하면 신나서 갑니다. 그러나 예배드리러 가자고 하면 부담스러워집니다. 예배에 대한 부담감--이것이 바로 죄의 증상입니다. 예배는 재미없고 지루하고 딱딱하다는 생각--이것이 은혜에서 떨어진 증거요 증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예배의 감격을 회복시켜 주시려고 인간역사 가운데 개입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통해서 잃어버린 예배의 감격을 다시 회복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의미에서 중요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참된 예배의 감격을 회복시켜주는 영적인 원리들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오늘 우리에게 천상의 예배를 소개해주면서 우리로 하여금 정말 감격스러운 예배를 회복하라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본문은 하늘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영광스럽고도 황홀한 예배의 광경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이 천상의 예배는 계4장에서 계속 계속됩니다. 사실 이 천상의 예배는 계시록 전체의 중요한 배경이요 중앙무대입니다. 그래서 계시록은 다른 어떤 성경보다도 예배적인 성격이 강합니다. 천상의 예배라는 이 중앙무대를 염두에 두지 않고서는 계시록의 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계시와 행하시는 모든 역사들이 바로 예배라는 전체적인 배경 가운데서 이루어집니다. 계시록을 계속 읽어보시면 하나님이 놀라운 일을 행하실 때마다 예배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계시록은 하나의 위대한 예배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4장부터 보시면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예배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보좌의 형상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형상은 모두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위엄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중심으로 네 생물이 있고, 그들을 둘러서서 24장로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바라보며 쉴새 없이 예배하는 일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성령의 충만한 임재가 있고 또 큰 유리바다가 있습니다. 이 보좌에서는 천둥번개가 쉴새 없이 몰아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죄인들을 용납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말합니다. 이 거룩하고 위엄스럽고 영광스러운 보좌를 중심으로 밤낮 예배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이 예배의 본질이고 핵심이라는 말입니다. 참 예배는 하나님의 영광스럽고 위엄찬 보좌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우리가 얼마나 거룩하지 못한 피조물인지 인식하는 것입니다. 밤낮 쉴새 없이 찬송 드리고 예배드려도 역시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불붙는 유리바다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인식하고 내게는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의로움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깨닫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계4장은 창조주에 대한 인식입니다. 그 모든 것은 참된 예배의 정서에 대해서 무엇을 말해줍니까? 참된 예배의 정서는 거룩함에 대한 인식, 즉 진지함과 두려움입니다. 경외감이 참 예배의 기본 정서입니다. 현재 여러분은 하나님을 경외하시면서 예배드리고 있습니까?
그 다음 계시록 5장에 넘어오게 되면 특별히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들려진 두루마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창조주와 모든 피조물 사이에 서 있는 한 어린양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두루마기를 펴거나 보거나 할 사람이 없어 요한은 큰 소리로 통곡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의 울음은 죄악 가운데 종살이하며 신음하는 모든 인류와 모든 피조물들의 신음소리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왜 큰 소리로 울고 있느냐? 그 두루마기는 바로 죄와 마귀의 권세 아래 고통당하는 모든 인류의 고통을 풀어주시려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기록된 것입니다. 원래 가지고 누리고 있었지만 범죄함으로 잃어버린 천국기업을 되찾아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서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계획을 실행할 사람이 천상천하에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법적인 자격을 갖춘 사람만이 인봉을 때고 두루마기를 펼쳐서 그 가운데 기록된 약속대로 시행할 수 있는 데 아무도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하늘의 천사들 중에서도 땅위에 인류 가운데서도 이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집행할 중보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큰 소리로 울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그래서 예배는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드리는 자는 회개의 눈물이든 기쁨의 눈물이든 간에 눈물이 메마르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 하시리이다.”(시51:17) 바로 그 때에 죽임 당한 어린양이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중보자로 서셨습니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하나님의 오른 손에 들려진 두루마기를 취하셨습니다. 두루마기를 취하셨다는 것은 곧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실행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 놀라운 구원계획을 실행할 자격을 얻으셨고, 다시 부활 승천하심으로 이 구원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계십니다. 그것이 바로 어린양이 책을 취하셨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은 바로 어린양이 책을 취하심으로 이루어지는 천상예배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4장은 보좌에 앉으신 거룩하신 하나님을 중심으로 예배드리는 것이었다면 계5장은 중보자로 서 계시는 어린양을 중심으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참된 중보자이신 어린양은 경배받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오늘 우리는 모든 장로들과 천사들과 피조물들이 어린양을 경배하고 있는 장면을 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천상예배의 아름답고 황홀한 광경을 살펴보기 이전에 한 가지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도대체 천상에서 드려지는 예배와 오늘날 우리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천상의 예배가 오늘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왜 이 본문이 기록되어야 했습니까? 본문이 기록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도전의 목적입니다. 즉, 우리가 지금 드리는 지상예배가 천상예배의 거울이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그려주신 설계도대로 성막을 만들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보좌와 그 천상예배를 본떠서 예배를 조직했습니다. 또, 히브리서 저자는 성소와 성소에서 드리는 예배에 대해서 설명할 때 지상의 것은 하늘의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고 했습니다. “저희가 드리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히8:5) 여러분, 보십시오. 요즘 얼마나 많은 예배의 유형이 있고 유행이 많습니까? 어떤 순서로 드리는 예배가 바른 것인가? 어떻게 드려야 바른 예배를 드리는가? 판단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그런 가운데서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늘 위에서 드려지는 예배를 보라!” 천상의 예배야말로 우리가 정말 본받아야 할 예배가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물론 우리는 완전히 모방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상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는 천상에서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양을 중심으로 드려지는 예배를 본받으려고 몸부림쳐야 합니다. 우리는 왜 예배 드려야 하며, 누구에게 예배하는 지를 명확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예배는 한낱 감정으로 흐르거나 혹은 다른 방향으로 왜곡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위로의 목적으로 기록된 겁니다. 사도요한 당시에 지상예배에 참석하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믿음 때문에 환란과 핍박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토굴이나 카타콤과 같은 지하공동묘지에서 모여서 예배를 드리던 소수의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성경은 말합니다. “보아라. 너희 위에 엄청난 규모로 드려지는 예배가 진행되고 있다” “지상과 상관없이 저 높은 곳에서 예배가 지금도 드려지고 있다” “이 천상의 예배에 너희가 지금 참여하고 있고 또 앞으로 참여하게 될 것이다” “너희들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 따라서 이 천상예배에 대한 환상은 핍박 속에서 카타콤에서 예배드리던 초대교회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되었을까요?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에 많은 교인들이 참석해서 화려한 순서를 가지고 웅장하게 예배드리면 얼마나 신날까요? 하지만 알아야 합니다. 구역장님들 얘기를 들어보면 두 세 사람이 모여서 예배드리면 기운이 안 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두 세 사람이 모여서 예배드려도 그 예배는 영광스러운 천상의 예배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백 수천 명이 모여서 예배드려도 겨우 몇 사람이 모여서 예배드려도 천상의 예배를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상의 예배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상의 예배를 의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상의 예배를 생각하고 감격과 흥분으로 예배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수 천명이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지원을 받는 성가대와 함께 얘배 드려야 예배 드렸다는 느낌을 받습니까? 한 두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여서 드리는 예배는 그런 감격을 누릴 수 없는 것입니까? 우리의 예배 분위기나 순서나 형식에 상관없이 하늘의 영광스런 예배를 의식할 수는 없는 것입니까?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천상의 예배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얼마나 흥분되고 감격스러운 일일까요?
그러면, 오늘 우리가 다시 예배의 감격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계시록 4장과 5장을 주의 깊게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4장에서 하나님 보좌의 영광스럽고 위엄스러운 형상이 의미하는 바를 깊이 헤아려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천상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깊이 묵상하면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천상예배의 영광스러운 광경을 묵상가운데 그려보면 우리 마음속에 굉장한 흥분과 도전과 감격이 되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의 인도를 따라서 천상예배의 영광을 마음으로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속에 찬란하게 그려질 때까지 계속 말씀을 붙들고 씨름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내 마음속에 예배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새로운 감격과 새로운 흥분이 되살아 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바로 본문이 우리에게 의도하는 은혜입니다. 계시록 4장부터 한 절씩 살펴보면 좋습니다만 너무 시간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오늘 읽은 본문에 국한해서 예배의 감격을 회복시키는 중요한 한 가지 진리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 진리는 다름 아니라 8절에서 너무나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8절 말씀은 어떻게 시작하고 있습니까? “책을 취하시매...” 7절부터 보시면, “어린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책은 어떤 책이라고 했습니까? 예, 잃어버린 천국기업을 다시 되돌려주시려는 하나님의 구속계획이 기록된 책이라고 했습니다. 저 천국을 유업으로 물려주시려는 하나님의 유언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 그것을 다시 회복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나오미를 보십시오. 살던 베들레헴에 가뭄이 찾아오니까 집과 땅과 재산을 다 팔아 이방 모압으로 이민 갔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나오미는 모든 것을 다 잃습니다. 남편과 두 아들을 잃어버렸습니다. 두 자부 중에서 한 사람이 떠나가 버렸습니다. 다시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지만 다시 팔아버린 땅과 기업을 누가 되찾아줄 수 있습니까? 그 때 오직 한 사람, 율법의 ‘기업 무르기법’에 의거해서 보아스라는 유력한 사람이 나서서 나오미를 대신하여 그의 자부 룻을 아내로 맞이함으로써 나오미가 잃어버린 기업을 다시 회복하게 됩니다. 보아스가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지 않았더라면 누가 나오미는 그 기업을 다시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보아스는 오늘 책을 취하신 어린양의 모형과 그림자요 예표였습니다. 나오미는 오늘날 우리 힘으로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모든 비참한 죄인들을 나타냅니다. 룻기의 주제는 며느리의 효성이 아닙니다. 룻기의 참 주인공은 우리가 잃어버리고 팔아버린 기업을 다시 되찾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책을 취하시매...” 이 말은 간단하지만 결코 단순하지 않은 위대한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가 잃어버린 천국기업을 다시 되찾게 해주시려는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향하여 이런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둘째로, 우리 인간들은 결코 자신이 힘으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에 관한 한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하고 전적으로 무지하며 전적으로 부패한 죄인들입니다. 자력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진리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하기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라고 했습니다. 셋째로, 이 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잃어버린 에덴동산을 회복시켜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이 책에 기록된 놀라운 구원계획을 실행할 자격을 얻기 위해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셨고 이 땅에서 고난의 삶을 사시다가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친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따라서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 그러니까, “책을 취하시매...”라는 이 단순한 표현 속에는 기독교 복음의 전부가 담겨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께 강조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 복음 때문에 우리가 예배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예배의 회복은 곧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갱신은 곧 복음의 갱신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고 확신합니다. 여러분 본문을 보십시오. 죽임 당한 어린양이 이 책을 취하실 때 천상에서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예, 아주 놀라운 예배가 드려집니다. 이 예배는 그 스케일이나 규모 면에서 점차 확대되고 있습니다. 8절부터 10절까지 보시면, 하나님의 보좌를 직접 책임지는 네 생물과 24장로들이 어린양 앞에 엎드려 기도와 찬양으로 예배드립니다. 그 다음으로 곧바로 이어지는 찬양이 무엇입니까? 11절, 12절을 보시면, 하늘의 수억 수 십 억 더 되는 천군 천사들이 어린양께 찬양을 드립니다. 그 다음으로 13절, 14절을 보시면, 하늘 위와 땅 위와 땅 아래와 바다 위와 바다 가운데 모든 우주만물들이 어린양께 찬양을 드리고 있습니다. 저는 이 점진적이고도 점차적으로 확대되어 가는 천상의 예배의 광경을 마음속으로 그려보고 있으면 황홀해서 견딜 수 없습니다. 빨리 어린양 되신 주님 곁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은 그런 생각 들지 않습니까?
4장에서도 예배가 드려지고 있지만 5장에서 드려지는 예배와 차이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5장에서는 온 우주만물이 이 예배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자는 천상의 모든 피조물을 대표하는 네 생물과 24장로뿐이었습니다. 지상에 있는 그 어느 피조물이라도 그 어떤 사람이라도 그 보좌 앞에서 감히 예매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로 말미암아 비로소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예배드릴 수 있는 길이 탁 트이게 되었다는 겁니다. 어린양이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놓여있는 두루마기를 취하시기 전에는 우리는 보좌 앞으로 나아가서 예배드릴 생각도 못했습니다. 어린양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알기 전에는 결코 그 어떤 피조물도 이 천상의 예배를 이해할 수도 없고 참여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어린양이 그 두루마기 책을 취하시는 순간부터 우리는 보좌 앞으로 나아가 예배드릴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천상에서 드려지는 이 예배의 특징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굉장하지 않습니까? 우선 수나 규모 면에서 엄청난 예배입니다. 저는 학생시절에 부활절 연합예배에 참석하곤 했는데 대구달성공원에 수 만 명이 모여서 “할렐루야 우리 예수 부활 승천하셨네...”라고 찬송을 합창할 때 그 우렁찬 찬송소리에 파묻혀서 감격과 흥분에 온 몸이 전율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시면 그 규모는 가히 천문학적입니다. 수억 수 십 억 이상의 천사들과 함께 찬송소리가 하늘에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온 우주만물이 어린양 앞에서 떠들썩하게 찬양합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흥분되는 장면입니까? 생각만 해도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성가대에서는 소프라노 테너 알토 베이스와 같이 네 파트로 나누어 찬송하는 것처럼 천상에서도 네 파트로 나누어 찬송이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한번 자세히 보십시오. 네 생물이 먼저, 그 다음에 24장로들이 찬양을 하고, 그리고 하늘의 천군 천사들이 찬양하며, 마지막으로 온 우주 자연만물이 우렁차게 찬양하고 있습니다. 어느 누가 예배의 인도자가 없습니다. 오직 모든 피조물이 저마다 예배의 인도자입니다. 누가 예배를 인도하고 누가 예배를 구경하는 구경꾼이 없습니다. 방관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인도자요 참가자입니다. 호흡이 있든 없든 모든 피조물들이 경배의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바른 예배는 누가 예배를 인도하고 누가 따라가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예배의 인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인도자에 따라 예배의 감격이 달라진다고 하는데 참 예배자는 그것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예배는 모든 참여자가 바로 자신이 직접 스스로 예배를 올려 드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천상예배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입니다.
그 다음으로 또 어떤 특성이 있습니까? 천상에서도 기도와 찬송이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철저하게 어린양이 한 일이 그 중심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하리로다” 그리고 12절을 보십시오.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음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또 13절 중반부터 보십시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여러분, 천상에서 드려지는 찬송과 예배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예,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한 일입니다. 그리고 누구에게 예배드립니까?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양입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를 돌아보십시다. 개인적으로 드리는 예배든 공적으로 드리는 예배든 예배의 주제와 내용이 바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까? 그리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어린양이 우리 예배 가운데 얼마나 존귀하게 선포되고 있으며, 어린양이 얼마나 영광스럽게 찬양 받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의 예배는 누구에게 드려지는 것입니까?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여러분 자신을 위한 것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예배는 오직 하늘의 아버지와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어린양을 경배하기 위해 오늘 모였습니다. 선교여행을 하다보면 예배는 전 세계적인 현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만이 예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 경배하는 자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분명히 확신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린양 예수님께 경배하기 위해 오늘 이 자리로 나오셨습니다. 그것이 기독교회의 예배의 참된 본질입니다. 예수님께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예배는 사실 기독교적이지 않습니다.
그 다음으로 또 어떤 특성이 있습니까? 14절을 보니까 어린양에 대해 찬송이 울려 퍼질 때, 네 생물과 장로들이 “아멘”과 어린양에게 엎드려 경배함으로 서로 화답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가 어린양을 높이고 어린양에게 엎드려 경배하는 그런 예배가 될 때 하늘의 천사들도 역시 우리의 예배를 지켜보면서 “아멘”하고 함께 엎드려 경배하는 것으로 화답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맹목적으로 ‘아멘’이라는 응답을 유도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리 좋지 않게 생각하는 편입니다만 그러나 분명한 것은 참된 예배자는 언제나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수없이 화답하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탁월한 설교가 울려 퍼진다 할지라도, 아무리 아름다운 오케스트라의 선율과 성가대의 화음이 심금을 울린다 할지라도 우리가 전인격적으로,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아멘’으로 화답하지 않는 한 우리는 여전히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끝으로, 작년에 어떤 책을 읽는데 제 마음속에 사라지지 않는 이야기가 하나 있어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어떤 전도사님이 교회를 막 개척했는데 예배당도 초라하고 볼품없는데다가 교인도 사모와 아이들 외에는 아무도 없는 겁니다. 첫째 주에는 ‘할렐루야’하면서 웃으면서 예배드렸다고 합니다. 둘째 주에도 사람이 없으니까 ‘개척교회니까 그렇지 뭐’하면서 자위했습니다. 셋째 주에도 사람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한 달이 지났습니다. 매주일 11시에 예배는 드리는데 너무 사람이 없어서 목회 할 의욕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답답한 심정으로 울면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저도 열심히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게 뭡니까?” 그렇게 하소연하면서 울면서 잠자리에 들었는데 꿈에 보니까 예배를 드리는데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고작 두 세 사람인데 놀라운 것은 그 예배당 안에 빛난 천사들이 가득 차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서 깜짝 놀라게 되었다는 겁니다. 들리는 음성이 “너는 왜 아무도 없다고 하고, 혼자 기도하고 있다고, 혼자 예배하고 있다고 생각하느냐?” “네는 혼자가 아니다. 네가 예배드릴 때 나도 기뻐하고 있고, 여기 있는 천사들도 기뻐하고 있노라” 잠에서 깨어나 깊이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에 연연하지 않고 계속 기쁨으로 예배드리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런 다음에 하나님은 놀랍게도 그 교회가 부흥하는 복을 주셨다고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여러분, 예배가 지루하고 재미없다고 느껴집니까? 나 혼자 예배드리고 있다고 느껴지십니까? 예배드릴 때 혼자 있는 것같이 외롭게 느껴지십니까? 절대 혼자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예배드릴 때 하늘의 천사들도 함께 예배드리며 기뻐하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예배드릴 때 온 우주 자연 만물도 함께 기뻐하며 예배드리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참여하는 예배는 아무리 보잘 것 없을지라도 천상의 아름다운 예배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혹시 예배의 감격과 흥분을 잃어버리셨습니까? 예배가 따분하고 형식적인 것처럼 느껴지십니까? 예배 그 자체에 문제가 있기보다 문제의 근원은 내 마음 안에 있는지 모릅니다. 내 안에 구원의 감격이 식어져 가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십시다. 내 안에 예배의 감격이 식어진 것을 가지고 예배순서가 잘못되었고 예배 분위기가 어떻고 예배인도자가 어떻고 남의 탓을 하지 말고 정직하게 내면을 살펴보십시다. 내 안에 과연 예배의 감격이 살아있는지.
그리고 이 예배의 감격을 어떻게 다시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천상의 감격스러운 예배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영광스러운 천상의 예배를 떠올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분을 위해 대속의 피를 흘려주신 어린양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를 위해 영원히 중보하고 계시는 어린양께 예배드리기 위해 모였습니다. 설령 여러분이 외롭게 혼자 예배드린다 할지라도 여러분은 저 영광스럽고도 감격스러운 천상예배에 이미 참여하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두세 명 모여서 예배드리던 수 천 명 모여서 예배드리든 수가 문제되지 않습니다. 더 웅장하고 더 감격스럽고 더 흥분되는 천상의 예배에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참여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배에 대한 감격과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여러분 이것을 해보십시오. 여러분이 얼마나 복음을 알고 있는지를 점검해보십시오. 복음에 대한 무지는 우리로 하여금 예배에 대한 감격을 결코 회복할 수 없게 합니다.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예배드려야 할 하나님과 어린양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대신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예배의 순서와 예배당의 분위기와 예배의 분위기를 바라봅니다. 어색하고 이상하고 딱딱하고 지루하고...그래서 예배에 대해 부담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살아있고 참된 예배, 생명력 있는 예배를 좌지우지하는 것은 사람들의 표정이나 친구들과의 관계나 예배순서의 세련됨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복음입니다. 참된 복음에 대한 이해가 우리로 하여금 참된 예배를 드리게 합니다. 예배에 대한 어려움을 예배의 분위기 탓으로 돌리지 마십시오. 그 원인을 복음의 무지로 돌리십시오. 그러므로 우리는 참된 예배의 회복을 위해 부단히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해야 하며 복음을 가르쳐야 합니다. 복음을 알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반드시, 그리고 필연적으로 여러분의 예배는 감격과 기쁨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사실, 나 같은 죄인 구원하시기 위해서 나에게 영광스러운 천국을 유업으로 물려주시기 위해서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어린양이 되셔서 죽임 당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죽임 당한 어린양이 하나님의 오른 손에 있던 책을 취하셨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예배의 감격을 다시 회복할 수 있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감격스럽게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서 어린양 앞에 엎드려 어린양에게 찬송과 영광을 돌려드릴 수가 있습니다. 책을 취하신 하나님의 어린양께 찬송을 올려드립시다.
기도할까요?
죽임을 당하신 하나님의 어린양께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영원무궁히 돌려드립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시려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내려 오사 갈보리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하나님의 어린양께 모든 칭찬과 영광과 감사와 모든 좋은 것을 돌려보내기를 원합니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인생들에게 영생을 주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을 위해서 살며 하나님을 위해 꿈과 계획을 가지고 사는 인생으로 바꾸어 주신 그 놀라운 은혜를 찬송합니다.
죽임 당하신 어린양을 바라보오니 잃어버렸던 예배의 감격을 다시 회복시켜 주셔서 날마다 기쁨으로 노래하면서 주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예배자들이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오직 주의 보좌만을 의식하는 예배자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살아있는 예배를 통해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홀로 영광 받으시옵소서.
그래서 이제는 나를 위한 인생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인생으로 살게 하옵소서.
죽임 당하신 어린양을 위한 예배자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나를 통해 어린양이 진정 높아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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