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설교

요한계시록 강해(15)-하늘예배II(계4:11)

등불지기 2012. 3. 3. 17:14

요한계시록 강해(15)

 

하늘예배 II

 

본문: 계4:11

 

4: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오래 전 어느 성도의 가정에 심방 갔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예배를 드리려고 하는데 이제 막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아이가 있었는데 부모에게 하는 말이 자기는 기독교가 싫다는 겁니다. 이유인즉 기독교는 너무 배타적이라는 겁니다. 다른 종교나 다른 신앙을 인정하지 않고 오직 자기들의 믿음만 강요하기 때문에 싫다는 겁니다. 너무 독선적이고 다른 신앙을 수용할 줄도 모르고 폭이 좁아서 싫다는 얘기입니다. 저는 그 학생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기독교는 분명 독선적이고 배타적이지. 하지만 바로 그것이 진리의 특성이란다. 진리가 배타적이지 않고 독선적이지 않으면 그것은 더 이상 진리일 수 없는거야. 진리라는 말은 그 자체가 다른 것을 수용하지 않는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는거야.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고 하는 식의 말은 절대 진리가 될 수 없는거야” 그리고 예배 중에 저는 생각해 두었던 설교본문을 바꾸어서 요한복음을 가지고 전도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우리 인간은 어떤 존재이며, 죄는 무엇이며,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예수님은 어떤 일을 하셨으며,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사실과, 믿지 않는 자에게는 영원한 지옥형벌만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등등을 가르쳤습니다. 그때 저의 생각에는 그 학생이 나중에 세상에 나가버리면 다시는 이 복음에 대해서 들을 기회가 없을지 모른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전도 설교했습니다. 듣고 계속 반감을 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확실한 복음의 선포가 필요했습니다. 우리 영혼의 상태와 운명에 대한 분명한 사실을 이야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직면하기를 꺼려하는 것은 모든 인생들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그 학생은 우리 교회에 자주 나오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느낀 사실은 교회 밖은 물론이지만 교회 안에도 전도 받지 못한 불신자들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는 나오는데 전혀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예배는 드리는데 참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왜 이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간에 대는 대로 무작정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 일을 하는 이유를 알아야 하겠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공부하는 학생은 왜 공부해야 하는 지 그 이유를 알고 공부를 해야 합니다. 사업하는 사람은 왜 그 일을 해야만 하는 지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가정주부는 왜 자녀를 기르며, 왜 가사 일을 해야 하는 지 그 이유를 알고서 해야 합니다. 이것은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만 왜 하나님을 믿는지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더라도 왜 기도해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계속해서 예배의 중요성을 제가 강조합니다만 예배드리러 나올 때에도 우리가 왜 예배드려야 하는 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또한 만일 누가 그 이유를 묻는다면 나름대로 답변을 제시할 수 있도록 준비해두어야 합니다. 이 말은 저의 생각이 아니라 성경이 명령하는 바입니다. 벧전 3:15에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따르십니까? 그 주님을 예배하십니까? 좋습니다. 그런데 왜 믿는지, 왜 예배하는지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누가 그 이유를 물을 때 답변할 것을 준비해두고 계십니까? 저는 오늘 우리가 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 지 그 이유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시면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여기서 “합당하다”고 했습니다. “합당하다”이 말은 “충분한 자격이 있다” “가치가 있으시다” “당연하다”는 말입니다. 즉 예배를 받으실만한 이유가 있다는 말입니다. 예배는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 받으시기에 충분한 이유를 갖고 계신 분이십니다. 여러분, 가정과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십니까? 그렇다면 왜 예배를 드리십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몇 가지로 그 이유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만이 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신약에서는 우리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는 “주”라는 말을 너무나 쉽게 쓰고 있습니다만 초대교회 상황에서는 이 “주”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당시에만 해도 로마제국의 도미티안 황제는 자기를 “주 하나님”으로 내세우며 자기를 숭배할 것을 전 세계에 강요했습니다. 따라서 만일 누군가가 로마황제 이외에 다른 누구를 “주 하나님”으로 부른다면 그것은 곧 황제를 정면으로 대적하는 것을 의미했고, 그것은 결국 자기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것을 의미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그런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든 안 부르든 세상에서 그리 문제될 것은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주”라고 부른다고 우리 목숨을 내놓아야 하거나 재산을 몰수당하는 그런 상황은 없지 않습니까?

물론 현재도 북한이나 중국이나 모슬렘 문화권에서는 아직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주님”이라고 “구세주”라고 “구원자”라고 고백하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만일 목에 칼이 들어왔는데도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라고 고백할 자신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실제로 여러분의 인생의 주인이십니까? 그분을 주로서 섬기고 계십니까? 예수님을 부인하면 살려주고 계속 ‘주님’이라고 고백하면 용광로에 집어던지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고 따르는 것은 곧 순교자가 되겠다고 결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을 위해 그리고 주님 때문에 죽을 각오도 되어 있다는 고백입니다. 세례 받을 때 모든 교인들 앞에서 서약하지 않습니까? 그 서약의 의미는 주님 때문에 목숨도 내어놓겠다는 신앙고백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례 받는다는 것은 곧 순교자처럼 신앙생활 하겠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성경, 특히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주 하나님”이라고 할 때 그 의미는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예배를 받으실만한 분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세상에 그 어떤 사람도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에게만 절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경배 받으실 분이십니다. 오직 주님만이 주님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직 그분에게만 엎드려 경배해야 합니다. 물론 부모나 친지 어른들에게 세배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존경을 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의 목적으로 절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존귀와 영광과 감사와 능력”을 되돌려 드리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만일 자신을 신격화한다면 우리는 그에게 절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신이라고 한다면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얼마 전 모 목사가 자신은 원죄가 없고 성경에서 물위를 걸어간 것 빼고는 모든 기적을 다 이루었다고 주장한 일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은혜가 많고 아무리 신령해도 자신을 죄 없다고 한다든지 하나님과 동등하게 주장하면 적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일제시대 때에 일본은 신사참배를 강요했습니다. 일황과 일장기를 신격화했기 때문에 절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사를 보면 어떤 목사들은 단지 존경의 뜻으로 절하는 것이기 때문에 괜찮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장로교 1938년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해도 무방하다고 가결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엄청난 죄를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솔선수범해서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 때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순교한 목사님들도 수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이 나라 이 민족 한국교회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징계를 내리셨습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난 것은 전적으로 총회적으로 신사참배를 가결한 것 때문인 줄 믿습니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 회개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합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출20:3) 하나님만이 유일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께 예배하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유일하심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우리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알고 있으며 또한 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유일하심을 참으로 안다는 것은 세상에서 참으로 당당하게 살아가게 해 주기에 충분한 능력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유일하심을 아는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인생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둘째,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누가 하나님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여기 가장 확실한 분별원리가 있습니다. 온 우주만물을 창조했는지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세계역사상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주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을 경배하라고 강요했습니다. 사도 요한 당시에 로마황제 도미티안 역시 자신을 ‘주 하나님’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적그리스도들이 자신을 신격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온 우주 만물을 직접 창조했다고 주장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신이라고 주장하는 존재는 많지만 자신을 창조주라고 주장하는 존재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혹시 사람들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여기는 신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자신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주장하는 신은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없습니다. 보십시오. 모슬렘은 마호메트를 믿습니다. 불교인은 부처를 믿습니다. 세상 사람은 자신의 힘이나 머리나 돈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만물을 지었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합니다. 마호멧은 자신이 우주만물을 창조했다고 주장하지 못했습니다. 부처도 자신이 세상을 무에서 창조했다고 주장하지 못했습니다. 공자도 못했습니다. 그렇게 똑똑하다고 하는 과학자들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하나님을 믿습니까? 우리가 왜 하나님께 예배드립니까? 하나님만이 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온 우주만물의 창조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예배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14:1)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온 우주와 자연만물은 자기를 지은 분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온 우주와 자연만물은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시19:1-4) 또한,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롬8:19) 하나님이 구원해주시기만을 기다리면서 탄식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주님이 지으신 자연만물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며 찬양하며 노래하고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인들 당연히 예배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셋째,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 모든 피조세계를 친히 섭리하시기 때문입니다.

창조와 섭리는 동전의 앞뒤 면과 같습니다. 창조주 되신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나서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많은 신자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믿습니다만 피조 세계에 전혀 관여하지 않고 구경만 하시는 분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 상황에 대해서 그저 구경만 하는 그런 분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 경향을 가리켜서 신학적인 용어로 ‘이신론 사상’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해와 달과 별을 창조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해가 뜨고 달이 지고 별이 운행하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이신론 사상입니다. 그것은 복음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고 나서 그 만드신 피조물들을 붙드십니다. 섭리하십니다. 적극적으로 개입하십니다. 오늘 본문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본문을 한번 보십시오.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이 말을 쉽게 번역한다면 이런 뜻입니다: “만물이 존재하는 하는 것은 주의 뜻과 의지와 말씀 때문이고, 만물이 지음 받은 것도 주의 뜻과 의지와 말씀 때문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창조섭리에 대한 교리를 가장 훌륭하게 요약해주는 말씀입니다. 무엇입니까? 우리가 보는 자연만물, 우주의 움직임과, 세계 역사가운데 이루어지는 일들, 예측을 불허할 정도로 일어나는 여러 가지 기상이변들, 그리고 사건과 사고소식들, 수많은 종족간 분쟁들과 전쟁들, 우리를 깜짝깜짝 놀라게 만드는 수많은 사건들을 바라볼 때 많은 사람들은 ‘과연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라고 의아해합니다. 그러나 계시록이 선포하는 말씀은 하나님의 뜻이 배후에 다 있다는 것입니다. 만물이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의지와 말씀이 그 배후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만물이 그런 모양으로 지음받은 것도 다 하나님의 의지와 특별한 뜻이 배후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놀라운 사실을 알 때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상황을 허락하시는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합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는 다 하나님의 뜻이 있고 하나님의 의지가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어떤 분들은 왜 지구상에 이런 끔찍한 사건과 사고와 재난과 재해가 끊이지 않고 더욱 심해져 가는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다 하나님의 뜻과 의지가 있습니다. 여러분, 집에 돌아가셔서 시편 107편을 깊이 묵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미친 바람을 일으키시기도 하시고 말씀으로 잠잠하게도 하십니다. 풍랑이 일어나는 배후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풍랑이 잠잠하게 된 배후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만물이 그렇게 그런 모양으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지와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모든 것에 결코 우연이란 없습니다. 모든 만남과 모든 사건과 모든 상황과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게 될 때에 참으로 예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축복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고통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내 모습이 왜 이 모양 이 꼴인가? 여러분, 거기에도 다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 내 삶에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야만 합니까? 거기에도 하나님의 뜻과 의지가 작용합니다. 이와 같이 모든 피조물의 배후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게 되면 우리는 범사에 그리고 항상 예배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주일만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우리는 예배의 동기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시107:31) 여러분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사실 예배의 조건이 되고 동기가 됩니다. 예배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되는 겁니다.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주의 뜻대로)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되심을 알면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분의 주권을 인정해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제가 군에서 훈련받을 때 정말 감명 깊게 불렀던 찬송이 있습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 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인도 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큰 근심 중에도 낙심케 마소서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내 모든 일들을 다 주께 맡기고

저 천성 향하여 고요히 가리니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아멘.

우리가 방금 부른 이 찬송가는 1704년 독일의 루터파 목사인 벤자민 슈몰크가 작사한 노래입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독일의 루터파에게 많은 핍박이 가해졌습니다. 그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슈몰크 목사는 열심히 목회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전도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집은 불타고 어린 두 아들이 불타 숨져 있었습니다. 이 안타까운 광경을 바라보던 슈몰크 목사는 한동안 멍했지만 예수님께서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신 것을 생각하고서 이 찬송시를 썼다고 합니다. 주를 위해 박해를 이겨내면서 목회와 전도의 일을 잘 감당하고 있는데 집이 불타고 더욱이 아무 죄 없는 두 아들이 숨지고 말았습니다. 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을 위하여 노래할 수 있다는 것--이것이야말로 참 신앙인이요 참 예배자인 줄 믿습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이런 상황이 닥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까? 그것도 그냥 당한 것이 아닙니다. 주를 위해 충성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게 이런 상황이 주어진다면 과연 슈몰크 목사님처럼 이런 찬송을 드리시겠습니까? “하나님, 제가 무얼 잘못했습니까? 하나님, 저에게 왜 이렇게 하십니까?”라고 불평 원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저는 무지하며 저는 죄인이오니 주님의 좋으신 뜻대로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고백하면서 이 찬송을 부르시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상황을 겪는 나보고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혹은 그런 상황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필시, 저 사람은 하나님이 버린 사람이야” “뭔가 하나님께 큰 죄를 지었나보지”

여러분, 욥의 고난을 기억하실 줄 압니다. 욥의 상황은 더 심각했습니다.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많은 복을 주셨습니다. 재물의 복을 주셨고 10명의 자녀들도 주셨습니다. 욥은 당대에 하나님을 경외한 아브라함 못지않게 하나님을 잘 섬긴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자녀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했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자녀들 명수대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정도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루 동안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스바 사람이 갑자기 습격하여 모든 소유를 빼앗아가고 칼로 종들을 죽였습니다. 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재산과 종들을 불태워 버렸습니다. 또 갈대아 사람들이 습격하고 재산을 약탈하고 종들을 죽였습니다. 또, 대풍이 불어와서 집이 무너져 자녀들이 다 몰사했습니다. 심지어는 욥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서 기와조각으로 몸을 긁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욥은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욥이 고백한 말이 무엇입니까?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 이 모든 상황에도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당대에 욥과 같이 의롭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욥에게 왜 이런 고난이 주어졌습니까? 하나님께서 왜 이런 상황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셨습니까? 욥이 무슨 죄를 지어서입니까? 욥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단 말입니까? 죄 때문에 고난이 주어지기도 하지만 욥과 같이, 그리고 슈몰크 목사님처럼 전혀 죄를 짓지 않아도 나에게 이런 예기치 않은 상황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더욱더 신앙생활 잘해보려고 열심을 내는데 이런 상황이 내게 주어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그럴 때 과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일단 중요한 것은 입으로 범죄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입으로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은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임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불평 원망하는 것보다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좋습니다. 침묵은 금입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할 때 마음속에 한 가지 고통이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라고 했습니다.(롬9:1) 그 고통이란 다름 아니라 자기 동포인 이스라엘의 구원문제였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은 어떤 백성이었습니까? 그들은 영광의 말씀을 가장 먼저 받았습니다. 언약을 받은 민족입니다. 율법을 선물로 받은 민족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할 줄 아는 민족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출시킨 위대한 민족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열심이 그 어느 민족보다 탁월한 민족입니다. 열심히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는 그런 민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바울은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완고함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이스라엘을 버리셨는가?”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 완고해지기까지 하나님은 왜 그냥 계셨는가?”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드셨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 로마서 9장에서 11장까지 계속 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11:33-36) 사도바울이 말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과연 버리셨는가? 결코 아니다. 엘리야 시대에 하나님이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칠 천 인을 남겨 두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신실한 자들을 남겨두심으로써 자신의 신실함을 지켜나가신다. 나를 보아라. 나는 죄인 중에 괴수였지만 하나님은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이 복음의 직분을 맡기시지 않았는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완고한 마음을 주신 것은 이스라엘의 영적 실패, 넘어짐을 사용하셔서 모든 이방인에게 구원의 은혜를 내리시고자 하시기 위함이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실패와 불순종은 오히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축복으로 연결되었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깊이를 맛볼 수 있다.” 이스라엘이 불순종하고 완고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한 것만 볼 때는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시는 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고 마음이 근심에 눌리고 답답하고 심령에 큰 고통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너무나 신기하고 놀랍다는 것입니다.

시편107편을 묵상해보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에 대해 더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풍랑을 일으키기도 하시고 또 말씀으로 풍랑을 잠잠하게도 하시는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운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의 생애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이 죄 없이 사울에게 쫓겨다니고 억울하게 비난받고 정처 없이 방랑하는 삶을 살게 되었을 바로 그 시절에 다윗은 하나님의 주권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배울 때 다윗은 한 사람의 임금이기 이전에 참된 예배자로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예기치 않는 고난과 시련 속에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주권을 깨닫게 하시려고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어야 합니다. 내 좁은 식견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전체적인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분명 내 문제는 억울합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에 분명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를 확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재빨리 깨닫고 하나님의 주권에 입각해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이 연단에서 빨리 합격하는 비결입니다. 욥을 보십시오. 욥은 하나님의 주권을 깨닫고 티끌에 앉아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주이심을 깨닫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자신을 깊이 낮추었을 때 하나님은 그를 높이셨습니다. 사도바울은 바로 이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민족이나 한 개인을 넘어뜨리게도 하시고 또 일으키기도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원 가지였던 이스라엘을 아낌없이 잘라내신 것처럼 우리도 언제든지 잘라내실 수 있는 그런 분입니다. 종종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는 부분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에 따라서 그저 기계적으로 반응만 보이는 그런 분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커피자판기처럼 몇 개의 동전을 투입하면 원하는 대로 커피를 뽑을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계속해서 예배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만, 참된 예배자가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 뜻대로 된다고 예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뜻대로 이루기 위해서 예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의 진정한 동기는 바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기 때문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 머리로 이해되기 때문에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의 주권을 믿기 때문에 예배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참 예배의 본질은 바로 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기 위해서 몇 가지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몇 가지로 하나님의 주권을 논증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일은 우리가 다 헤아릴 수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머리로 다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겁니다. 내 생각에 맞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하고 원망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는 겁니다. 둘째,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함부로 하나님의 생각을 추측하지 말라는 겁니다. 욥과 같이, 슈몰크 목사와 같이 고난당하는 자를 향해서, 불순종하고 완고한 이스라엘을 향해서 하나님이 함부로 버렸다든지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보다 더 뛰어난 지혜를 가진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더 좋을텐데”라고 하나님께 강요하러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에도 이런 방식으로 저런 방식으로 해결해달라고 강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식이 내가 제시하는 방식보다 더 뛰어난다는 사실을 믿고 들어가야 합니다. 넷째, 하나님께 빚을 갚으라고 독촉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빚진 사실이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은혜를 받고 살아갑니다. 도움을 받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홀로 존재하십니다. 아무의 도움도 필요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따지고 요구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섯째, 만물의 시작과 마침은 다 주님께 달려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만이 홀로 창조주가 되심을 믿어야 합니다. 모든 피조물이 그분 때문에 존재하고 그분 때문에 움직이고, 그분이 부여한 목적대로 움직입니다.

너무나 간략하게 살펴보았습니다만 이 하나 하나씩 묵상하고 살펴보는 것만 해도 또 일주일이 걸려도 부족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재었으며 땅의 티글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명칭으로 산들을, 간칭으로 작은 산들을 달아보았으랴.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그가 누구로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공평의 도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주었느뇨. 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 레바논 짐승들은 번제 소용에도 부족하겠고 그 삼림을 그 화목 소용에도 부족할 것이라. 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같이 빈 것같이 여기시느니라”(사40:12-17)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8,9)

사랑하는 여러분, 참된 예배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겸손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실 수도 있고 다시 사용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시기 때문에 유한한 인간이 그분을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 저는 너무 억울합니다’라고 생각되십니까? ‘하나님, 저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셨습니까?’라고 생각되십니까? 여러분, 나는 피조물이요 그분은 창조자이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분의 지혜와 지식과 판단이 훨씬 더 높고 깊고 넓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방식이 내가 생각하는 방식보다 더욱 탁월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생각하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당신의 신실함을 지켜나가실 것입니다. 지금은 이해되지 않지만 언젠가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깨닫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에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지혜와 지식의 깊이 앞에 고개 숙여 자신의 교만함을 뉘우칠 것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누가 하나님보다 더 똑똑할 수 있습니까? 누가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안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하나님보고 빚을 갚으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불평원망하지 마십시다. 오히려 하나님의 깊고 높고 넓은 지혜외 지시의 부요함을 인정하고 그분을 찬송하십시다. 그분께 예배하십시다.

여러분, 사람이 어디로 왔으며 무엇을 해야 하며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모든 인생과 모든 만물과 모든 우주가 창조주 하나님께로 말미암았고 창조주 하나님 때문에 존재하고 있으며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움직여지고 있고 창조주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생의 제일된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알며 하나님을 기뻐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참 예배야말로 모든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참 예배의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면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권면 드립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릴 때 참된 축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배를 드림으로 무슨 복을 받고자하는 것보다 더 고차원적인 동기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이유는 예배를 통해서 우리가 어떤 좋은 것을 받기 때문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예배드립니다. 하나님만이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예배드립니다. 하나님만이 모든 만물을 홀로 붙드시고 간섭하시고 섭리하시기 때문에 예배드립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소원하는 것 안 주실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어떤 개혁자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우리를 지옥에 던져 넣으실지라도 우리는 그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겠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십니다.” 아멘.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하나님,

우리 주 하나님과 주 예수님께 영원한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돌려드립니다.

우리 주여 죄와 허물 많은 저희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주시기를 사모합니다.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높이 달리심으로 이루신 그 놀라운 구속의 은혜를 깊이 알기 사모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잊지 말게 하시고 변함없는 주님께 늘 기쁨과 감사의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우리 마음에 소원하는 것 이루어주셔서 주님께 큰 영광 돌리게 하옵소서.

그러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변함없는 주님께 참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 마음에, 그리고 우리 삶속에서 다만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지극히 영화롭게 하였듯이, 오늘 우리도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드림으로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해드리는 그런 삶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