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개혁

신앙고백

등불지기 2023. 7. 7. 15:29

어느 교회를 가더라도 예배 때맘다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의문을 던져보겠습니다. 신앙고백문은 여러 종류가 있는데 왜 하필 사도신경을 신앙고백문으로 암송합니까? 사도신경의 의미를 알고 고백하는 것입니까? 과연 사도들의 신앙을 사도신경이 제대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까? 교회들마다 자기만의 신앙고백문을 만들어서 예배때마다 고백할 수는 없는 것입니까? 사도신경을 다른 신앙고백문으로 대체하는 것은 왜 안됩니까? 사도신경이 성경과 같은 정경의 권위를 갖고 있지 않음에도 사도신경을 마치 정경과 같이 취급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선 사도신경의 오류부터 살펴봅시다. 우선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만든 고백문이 아닙니다. 사도들이 만들었다는 증거는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사도신경은 외경도 아닌 위경에 속합니다. 사도의 권위를 빌어서 만든 고백문이므로 그 이름부터 정직하지 못합니다. 이런 고백문에 정경적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성경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그 다음 사도신경은 로마 카톨릭의 신앙고백문입니다. 원래 칼빈주의 전통을 따르는 교회에서는 사도신경을  암송하지 않습니다. 대신 십계명이나 시편을 낭송합니다. 제가 15년간 다녔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비롯한 남부아프리카에는 화란 개혁교회 전통을 따르는 백인교회들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어디를 가도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독립교단을 형성한 흑인교회에서도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한국에서 온 선교사 몇 명이 사도신경을 현지인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셋째로 사도신경은 지역교회의 시대적 사명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앙고백은 당시의 삶과 시대적 상황속에 나와야 비로소 의미가 있습니다. 넷째로 사도신경은 나의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고백이 아닙니다. 가만히 보면 사도신경은 귀신들도 능히 떠들 수 있는 그런 수준입니다. 이런 고백문은 오늘날 교회의 신앙고백의 표준이 될 수 없습니다.

 

사도신경의 신학적 오류를 간단히 살펴볼까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에서 천지창조의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동정녀 마리아"는 죄 없는 마리아를 믿는 카톨릭적 표현입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원인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있지 않습니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역사적 고난임을 강조하는 표현이라 할지라도 역사적으로 볼 때에도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고난을 주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장사한지 사흘만에" 엄밀하게는 이틀만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거룩항 공회"란 표현도 카톨릭적 표현입니다.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는다는 것 역시 산자와 죽은자의 교제와 중보기도를 믿는다는 카톨릭적 표현입니다.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는 것이 기독교 부활신앙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부활은 몸이 다시 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몸을 덧입는 것입니다. 이처럼 대충 살펴본 것만으로도 부정확하고 적절하지 않은 표현들로 넘쳐나고 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교회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입니다. 어떤 목사들은 오해하지 않도록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 말이 오히려 사도신경이 신앙고백문으로 사용되어지기에 적합하지 못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신앙고백문은 이해하기 쉽고 간결해야 합니다. 

 

저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획일적으로 고백하는 사도신경을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위경이기 때문에, 그것이 신학적 오류투성이기 때문에, 그것이 교회 구성원들의 신앙고백으로 공예배시에 고백하기에 너무나 부적절하기에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교회만의 신앙고백문을 만들어서 고백하는 것이 훨씬 더 낫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에 관하여, 교회에 관하여, 구속에 관하여, 앞으로 되어질 일들에 관하여, 특히 세상 속에서의 교회의 정체성과 사명에 관하여 교회가 함께 고민하고 신앙고백문을 만들어서 함께 고백하는 것이 훨씬 더 의미가 있지 않겠습니까?

 

김광락 목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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