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클리닉

설교의 기본기

등불지기 2024. 8. 27. 14:27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점은 기본기에 있습니다. 프로 선수는 경기가 있든 없든 기본기를 훈련하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이번 파리 올림픽에서 양궁에서 세 번 금메달을 딴 어느 선수는 메달을 딴 이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보고 제가 감탄을 했습니다. "오늘 메달을 딴 기쁨을 오늘 만끽하겠습니다. 그러나 내일 저는 잊어버리고 다시 훈련에 매진할 생각입니다." 이것이 프로의 자세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기복이 없는 경기를 펼칠 수 있도록 기본기 훈련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설교자에게도 이런 기본기가 있습니다. 설교의 기본기가 무엇일까요?

 

첫째, 설교라는 행위보다 설교자의 정체성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설교자의 설교는 결코 설교자의 정체성을 앞설 수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설교를 했다고 할지라도 설교자의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았다면 그 설교는 문제가 있습니다. 설교자의 정체성이란 무엇일까요? 설교자는 자신이 설교하기 이전에 먼저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자신이 과연 설교를 위해 하나님께 부름받은 것인지, 거듭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합니다. 또한 설교자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앞에서 하나님을 증거하는 증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즉 설교자 자신도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자여야 합니다. 설교자는 설교하기 이전에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순종하는 신자여야 합니다. 설교자는 설교자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연구하는 학자여야 하고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인지 끊임없이 묻고 또 되물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설교자는 자신이 설교하는 대상인 청중을 깊이 이해하는 아비요 목자여야 합니다. 영혼을 깊이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설교할 준비가 덜 된 것입니다. 설교자가 설교 준비하는데 이와같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에 들이는 시간이 설교준비하는 일에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것을 잊어버리게 되면 설교를 잘 하려고 하는 허영심에 빠지게 됩니다. 설교를 잘 하려고 하는 유혹을 떨쳐버려야 합니다. 설교는 잘 하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해야 합니다. 바른 설교는 바른 정체성에서 비롯됩니다. 좋은 설교자가 되려면 무엇보다 자신의 정체성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먼저 바로 서는 것이 설교하는 행위보다 중요합니다.

 

둘째, 설교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이 단순한 사실이 사실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설교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화려한 언변과 화법을 자랑하고 청중을 웃게 하거나 울게 합니다. 그들은 청중을 압도하는 스피치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보다는 청중들을 휘어잡는 자신의 카리스마 자체를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진짜 하나님 앞에서 설교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설교하는 것이라면 설교자는 두려워 떨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자신의 영혼을 걸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설교하는 사람은 설교하면서 농담을 하거나 비속어를 쓰거나 혹은 부정확하게 발음하며 말을 흘리지 않을 것입니다. 설교자 자신이 하나님의 임재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 어떻게 청중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설교한다고 말은 하겠지만 그것은 자신의 설교에서 분명히 그 태도와 발음과 모든 태도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셋째, 설교는 설교자의 마음에 새겨진 진리의 말씀을 신실하게 증언하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만일 강단에서 자신이 쓴 원고를 눈으로 보면서 읽어내려간다면 청중들은 아마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음...저분은 설교준비를 충분히 하지 않은 것 같군...' '혹시 다른 사람이 대신 대필해준 원고를 읽고 있는 것은 아닌가?' '본인의 마음에 담지 못했다는 것은 충분히 묵상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닌가?' 오늘날 현대 사회는 인공지능의 시대입니다.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널리 보급되어 있습니다. 설교자는 인공지능 AI에게 설교 원고를 써달라고 명령을 내릴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저는 어떤 분이 인공지능을 활용하여 설교 준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인공지능을 활용하여 예화도 찾고, 설교를 위한 ppt 원고를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좋은 예화를 찾고 좋은 이미지를 얻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결코 자신의 마음에 새기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마음에 새기는 것은 충분히 시간을 들여 고민하며 주해를 하고 묵상하고 본문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은 이렇게 본문과 씨름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힘들어 합니다. 본문과 씨름하면서 하나님께 묻고 또 묻는 묵상을 어려워 합니다. 얍복강 나루터에서 천사와 씨름하던 야곱처럼 하지 않습니다. 너무나 쉬운 길을 선택하려고 합니다. 인터넷과 인공지능, 다른 설교자들의 설교집들이 쉬운 길을 제시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본기가 되어 있는 설교자는 그러한 쉬운 길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좁고 협착한 길로 가려고 애를 씁니다.  설교하기 전에 진리의 말씀을 먼저 설교자 자신의 마음에 새기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지루하며, 고통스럽고,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 길로 가는 것이 설교자의 기본기입니다.

 

넷째, 가장 위대한 설교 원고는 성경 본문 그 자체입니다.

기본기가 잘 되어 있는 설교자는 자신이 설교할 본문의 범위를 선택하는 일에 신중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어떤 설교도 성경 본문보다 더 위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설교자의 기본기가 안 되어 있는 설교자의 특징은 설교할 본문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본문과 전혀 다른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 조직된 원고라 할지라도 성경 본문보다 더 위대하지 않습니다. 설교가 끝났을 때 청중의 마음에는 본문이 남아야 하고 본문이 가슴에 새겨져야 합니다. 설교자가 말한 어떤 이야기나 간증, 또는 예화가 뇌리에 계속 남는다면 설교의 기본이 안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본문에 충실해야 합니다. 성경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본문이 말하도록 설교자 자신은 사라져야 합니다. 본문이 주인공이 되어야 하고 설교자 자신은 조연으로 물러서야 합니다. 본문이 사라지고 설교자 자신이 무대의 중앙에 주연이 되어 조명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평소 본문 주해와 묵상에 규칙적으로 그리고 성실하게 임해야 합니다.

 

다섯째, 설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freedom 입니다.

이것은 설교자가 강단에서 원고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는 뜻도 될 뿐 아니라 성령께서 자유롭게 운행하실 수 있도록 철저하게 자신을 결박하고 부인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설교자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응시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청중의 눈을 응시해야 합니다. 아이컨택은 매우 중요합니다. 청중과 교감하며 한 마음이 되기 위해서 설교자는 원고에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원고를 준비할 필요가 없다는 그런 뜻이 결코 아닙니다. 설교자는 충실하게 본무을 주해하고, 충실하게 본문의 핵심 진리를 자신의 마음에 새겨야 하고, 또한 충실하게 그것을 글로 써야 합니다. 저는 원고를 쓸 때 가능하면 손으로 쓸 것을 권면합니다. 컴퓨터로 원고를 작성하는 것보다 손으로 쓰는 것이 훨씬 유익합니다. 그러나 강단에 올라갈 때는 자신이 쓴 원고를 집에 두고 올라가야 합니다. 강대상에 올라갈 때는 자신의 마음에 새겨진 원고만 가지고 올라가야 합니다. 그리고 청중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아야 합니다. 그들의 영혼을 깊이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자유로이 운행하실 수 있도록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자신을 결박하고 진리가 진리 되도록 해야 합니다. 설교자가 강대상에서 마음대로 지껄여도 된다는 뜻에서 자유가 아닙니다. 자신은 철저히 부인되고 진리에 의해 결박된 상태, 그래서 오직 진리의 성령께서 자유롭게 청중의 마음 속에서 일하실 수 있도록 하는 것--이것이 설교자가 사모해야 할 자유입니다.

 

여섯째, 설교는 가장 중요한 예배 worship 입니다.

설교가 예배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설교가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 교회에서 설교는 예배의 성격을 상실한 것처럼 보입니다. 설교는 청중에게 강요하고, 호통치며, 잔소리하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설교하는 시간은 사실상 청중을 고문하는 시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자신이 청중을 고문할 수 있다는 것을 설교자들은 왜 상상하지 못할까요?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가 청중을 고문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설교가 예배의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해하셨는지 선포하고, 위대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높이고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닙니까? 설교가 그렇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있습니까? 설교자 자신을 높이는 것이 되어버리지 않았습니까?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측면에서는 맞지만 사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설교자가 강대상에서 함부로 말을 하는 경향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청중에게 대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는 청중과 함께 하나님이 말씀을 고백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예배입니다. 

 

일곱째, 설교는 배달 delivery 입니다.

참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에 대해 평가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뿐더러 자신의 설교에 관하여 혹평과 비난을 받을 때에도 의기소침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참 설교자는 설교를 잘 하려고 하는 자가 아니라 진리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피자를 주문했을 때 배달원이 문 앞에 촟인종을 누릅니다. 문 앞에서 피자를 배달 받았을 때 피자 한 조각을 입에 베어 물고서 '맛 있다' 혹은 '맛 없다'고 평가를 한다고 가정해보십시오. 피자 배달원이 그런 평가에 상처를 받지 않는 이유는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피자 배달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배달원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정확한 주소에 정확하게 배달이 되었는가 입니다. 만일 설교자가 자신의 설교에 대해 펑중으로부터 '목사님  설교 오늘 최고에요' '너무 좋았어요' 와 같은 평가를 듣는 데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거나 혹은 좋은 평가를 듣지 못해서 의기소침해지거나 한다면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한 것입니다. 진리의 전달자는 자신이 전달한 메시지에 관하여 어떤 날카로운 평가나 비평을 받는 것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에 대해 그 어느 누구보다 날선 비평을 가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설교에 대해 비평하는 소수 교인들에 대해 감사해야 합니다. 저는 제 설교에 대해 녹화영상을 방송실에 요청해서 꼳 받아서 스스로 모니터링을 합니다. 제가 다른 설교자의 설교를 모니터링하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제게는 언제나 제 설교에 대해 날카롭게 비평하는 아내가 있다는 사실에 늘 고마움을 느낍니다. 제 설교 영상을 보면서 제가 고쳐야 할 점, 실수한 부분, 부족한 부분 등을 항상 찾아내려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를 판단하실 분은 오직 주님이심을 고백하고 주님의 은혜로 제가 조금 더 성장한 '배달자'가 될 수 있도록 주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죽을 때까지 기본기를 연습하고 또 연습할 것입니다.

진리를 전할 기회가 주어지든 그렇지 않든 언제나 기본기를 다지는 일에 힘쓸 것입니다.

주님,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진리의 성령으로 도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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