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설교

요한계시록 강해(19)-하나님의 진노 I (계6:9-11)

등불지기 2012. 3. 3. 17:33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이해와 경험은 복음의 첫단추를 끼우는 것입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요한계시록 강해(19)

 

하나님의 진노 I

 

본문: 계6:9~11

 

6: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6:10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6:11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여러분, 복음이 무엇입니까? 무엇이 ‘복된 소식’일까요? 복음을 전하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세상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할 때 여러분이 전해야 할 소식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복음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복음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까? 과연, 진정한 기독교적 복음의 메시지는 어떤 것일까요? 그냥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말들일까요? 사람들이 듣기 좋아할 만한 이야기가 복음인가요? 오늘날 교회는 복음전도는 강조하고 있으나 사실 무엇이 복음인가에 대해서 심각할 정도로 무지한 상태에 있습니다. 성경공부와 강의는 많이 하고 있지만 의외로 복음에 대한 참된 이해는 왜 그렇게 빈약하게 느껴지는지 모릅니다. 이 시대의 교회들을 바라볼 때마다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이 이것입니다. 성경지식은 늘어가는데 복음에 대한 확신은 빈약해져 가지 않습니까? 이것이 저 혼자만 느끼는 걸까요? 제가 너무 부정적으로 보는 걸까요?

글쎄요. 저는 심각하게 생각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쟈크 엘룰이 표현한 대로 ‘뒤틀려진 기독교’로서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참된 구주의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교회가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아주 많은 교회가 생각하고 있는 ‘복음’이란 구원, 치유, 성공, 기도응답, 문제해결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예수님의 몸된 교회가 자신들에게 조금이라도 유익을 주는 한 예수님을 섬기고 교회에 나와주는 것 같습니다. 만약 자신들에게 계속적으로 유익을 주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배신할 준비를 하는 것 같습니다. 제 눈에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즉각적으로 떠날 명분만을 찾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에게 혹은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가 만일 인생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고 말하면 얼마나 하기 좋은 말입니까? 좀 더 귀를 즐겁게 해주는 말로 지친 심신을 새롭게 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도 성공주의 메시지로 여러분의 의욕을 새롭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먼 옛날 사람들의 굶주림을 5병2어의 기적으로 해결해주신 예수님을 사람들이 자기들의 왕으로 삼았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을 피하여 도망가셨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습니다. 복음을 문제해결로 보는 한 언제나 우리는 복음에 대한 이해에서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이란 문제해결의 복음이 아닙니다. 인생들의 문제해결을 위해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문제해결을 위해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 아니라면 왜 이 땅에 오셔야 했을까요? 그것은 인생들이 생각하는 자기들의 ‘문제’와 전혀 차원이 다른 ‘전 우주적인 문제’ 때문입니다. 인생들은 주림과 병듦과 기타 등등의 문제아래 신음하고 있지만 더욱 더 심각한 우주적인 고통 안에 있습니다.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간단하게 ‘죄’라고 말합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단지 죄의 증상만 미봉책으로 덮어버리고 마는 식의 ‘좋은 소식’은 우리를 기만하고 있는 겁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 복음을 알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그분의 말씀과 사역을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문제해결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문제를 밝혀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인생들은 자기들이 안고 있는 문제의 해결을 위해 예수님께 나아왔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더 크고 심각한 문제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를 바라셨고, 그렇게 인식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문제해결의 소식이 아니라, 거꾸로 문제폭로의 소식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진정한 기독교적 복음선포라고 하는 것은 인생들이 겪고 있는 비참함과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다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언제나 성공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인 인생들의 공통점은 인생들이 겪고 있는 총체적인 문제, 우주적인 문제와 고통을 제대로 인식하는데서 출발한다는 점입니다. 만약 이 첫 단추를 제대로 꿰지 않는 한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오해될 뿐입니다. 언제나 예수님은 자신을 왕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을 피하여 도망 다니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한번 보고자 원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보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에게 언제나 예수님은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직면해야 할 진정한 문제들을 보여주신 것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빛으로 오셨습니다. 빛이 임하면 어둠 속에 숨어 있던 모든 더러운 것들이 드러납니다. 평소에 몰랐던 것들, 평소에는 더러운 것인 줄 전혀 몰랐던 것들이 그분의 빛 아래 아주 고통스럽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렇게 어둠 속에 은폐, 엄폐하여 숨어 있는 것을 밝히 드러내어주는 것입니다. 그 복음 앞에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평소 가지고 씨름하며 고민하고 있던 그러한 ‘문제’들은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온 우주를 신음하게 하는 참된 문제의 본질을 인식하게 됩니다.

계시록은 바로 이러한 문제에 대한 인식을 갖게 도와줍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살펴본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인류 역사 가운데 필연적으로 일어날 일들을 직시하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종말에 인생들이 겪고 있는 두려움과 고통들이 있는데 그것은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위한 것이라는 겁니다. 그것을 한 마디로, ‘종말’이라고 합니다. 종말에 세상 사람들 마음속에 급속도로 확산되는 어떤 종류의 두려움이 있는데 그것은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진노의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인생들이 겪는 4가지 고통, 혹은 원초적인 두려움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것들은 사실상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있는 인생들의 비참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 살펴본 4종류의 말들은 세상을 향해 보내어진 하나님의 종들로서 고통 받는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을 위해 질투하심으로 세상에 하나님의 공의를 실행하고 있습니다.

첫째, 흰말은 정복욕을 나타내는 것으로 인생들은 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흰말을 탄 자는 사람들 가운데 열등감을 조장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꾸만 남을 이기고 정복하려고 부추길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이렇게 정복의 욕구에 붙잡힌 사람들을 통해 세상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붉은 말은 증오심을 나타냅니다. 붉은 말을 탄 자는 인생들 가운데 계속 피해의식을 조장할 것이고, 상처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확산시킬 것입니다. 종말의 때는 급속도로 사랑이 식어질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셋째, 검은 말은 이기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검은 말을 탄 자는 결핍에 대한 두려움을 사람들 가운데 퍼뜨릴 것입니다. 그래서 점점 소유욕과 일확천금, 배금사상을 퍼뜨릴 것입니다. 사람들은 점점 자기만을 사랑하게 될 것이고 점점 이기적이 되어갈 것입니다. 넷째, 청황색 말은 총체적인 비극을 암시합니다. 청황색 말을 탄 자는 사람들 가운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확산시킬 것입니다. 사람들은 점점 창백해져갈 것이고 쇠약해져갈 것입니다. 이러한 네 종류의 두려움은 모든 세상 사람들이 겪는 비참함입니다. 이러한 비참함이 점점 증가하는 것은 종말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천국 시민권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한없는 위로와 소망이 되기도 합니다. 그것은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순례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증거로 인식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러한 두려움에 부응하여 인생들에게 무엇인가 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두려움들을 과감하게 드러내고 이기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고 믿고 살아가는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서 성경은 ‘땅에서 왕 노릇 하는 왕 같은 제사상’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지금까지는 지상에 대한 환상이었습니다. 이제 본문에 들어와서 장면이 바뀌어서 천상에 대한 환상으로 전환하게 됩니다. 그것은 제단 아래 부르짖는 순교자들의 부르짖는 소리에 대한 것입니다. 8절에 청황색 말을 탄 자가 사람들을 죽이더라고 했는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자들은 그렇게 죽은 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죽은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들이 가진 증거 때문에 죽임을 당한 자들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은 죽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이유로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정치적 혹은 종교적 신념을 위해 죽임을 당한 자를 가리켜서 ‘순교자’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이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죽임 당한 자들입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가진 증거 때문에 죽임 당한 자들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의 가진 증거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이렇게 번역해야 더 정확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곧 저희의 가진 증언” 그렇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들이 법정에 섰을 때 증거로 제출한 자들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죽임 당한 사람들이 많지만 법정에서 사형을 언도 당하는 이유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제출했기 때문이어야 합니다. 안중근 의사가 신자였다고 해서 그를 순교자로 일컫지 않습니다. 왜냐면 법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증거(증언)로 제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법정에 증거로 제출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여러분, 기독교회의 영광은 곧 순교자의 피입니다. 한국교회의 영광 역시 이 땅위에 뿌려진 일 만 여명의 순교자들의 피 위에 한국교회가 세워져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한번은 죽습니다. 그러나 어떤 신념 때문에 죽임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법정에서 제출해서 죽임을 당하는 그가 진정한 순교자입니다. 이 순교자의 삶에 대해서 배우십시오. 초대교회사를 읽어보십시오. 그리고 죠지 폭스(George Fox)의 [순교사]를 읽어보십시오. 한국교회의 순교자들의 전기를 읽어보십시오. 언제나 순교자의 피가 뿌려진 곳에 세워진 교회는 반드시 부흥했습니다. 교회의 영성이 가장 탁월한 때는 바로 순교자들을 배출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순교자들이 제단 아래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 본문을 가지고서 그리스도인들이 죽은 다음에 그 영혼이 어디에 머물게 되는지에 대해서 논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죽은 자의 상태나 거처에 대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이 장면을 이해하기 위해서 구약의 제사법을 알아야 합니다. 레위기 4:7을 보면 번제단 아래 피를 쏟아 붓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순교자들이 자기 삶을 제물로 다 바치고 그 피를 제단 아래 쏟아 부었다는 것입니다. 즉, 순교자들은 죽음으로써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되었음을 증명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관제’로 자주 표현하곤 했습니다.(빌2:17, 딤후4:6) 관제는 희생제사를 제단 위에 벌여놓고 불을 붙이기 전에 그 위에 붓는 술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여겼는지에 대해서 매우 흥미로운 점을 가르쳐줍니다. 바울은 자신을 겨우 관제로 드린다 할지라도 기뻐할 것이라고 말했고, 시간이 지나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관제와 같이 벌써 자신이 부음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즉, 바울이 말하는 것은 자신은 피를 다 쏟아 부어서 희생제물이 될 준비를 다 갖추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순교자의 심정입니다. 무엇입니까?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죽음을 유익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이 자살충동이나 염세주의를 옹호하거나 정당화하는 것으로 보지 말아 주십시오. 세상을 살기 싫거나 힘들어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바울의 고백은 “내 안에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므로” 죽음을 유익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죽음을 유익하게 보는 사람들을 간혹 찾아볼 수 있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오직 그리스도와 함께 할 욕망 때문에 죽음을 유익하게 간주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죽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생각해보지 않았다고요? 죽음은 인생이 직면하고 있는 최고 최대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고민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쩌면 그 이유는 우리가 직면하기를 싫어해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가급적 피해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피할 수 없을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사실, 인류 역사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많은 용감한 위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철학과 신념을 위해 죽음을 불사한 사람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유익하다고 외치면서 죽음을 반기는 사람은 순교자들뿐이었습니다. 아니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죽음을 유익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 얼마나 달콤하며 행복한 것인지 알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에 관한 여러 가지 신학적인 지식을 갖는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믿고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믿는 사람만이 외칠 수 있는 말이 단 하나 있습니다. “죽는 것이 내게 유익하다!” 물론 마음에도 없는 말을 위선적으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위기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개인적으로 볼 때 죽는 것이 참으로 유익하다고 여기십니까? 그러한 고백이 과연 그리스도와 함께 할 욕망 때문입니까? 그가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습니다. 순교자의 길을 가는 사람은 몇몇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피 흘린 순교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실 순교자의 길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길입니다. 순교자가 되는 것과 순교자의 길을 가는 것은 다릅니다. 그러나 순교자의 길을 걷지 않고서도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여러분, 눅14:27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자신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오늘 이 자리에 수많은 형제자매들이 모였는데 만약 바울이, 혹은 만약 예수님이 이곳에서 설교하신다면 무엇이라 말씀하시겠습니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지 않는 자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총대 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고난을 감내하는 것도 아닙니다. 말 그대로 죽는 것입니다. 모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사실 순교자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죽음을 유익하게 받아들입니다. 여러분들도 순교자의 길을 걷고 있습니까?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고 계십니까?

그런데 본문에서 순교자들이 탄원하고 있습니다. 부르짖는 소리가 들립니다. 아주 큰 소리로 호소합니다.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제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여기서 순교자들은 누구에게 호소합니까?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제”이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거룩하십니다. 결코 죄와 불의를 용납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둘째, 참되신 분이십니다. 거짓과 속임수를 싫어하십니다. 셋째 모든 주의 주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것을 임의대로 처분하실 수 있으시며 또한 버리실 수도 있으십니다. 그분은 위대한 심판장이십니다. 그래서 피 흘린 순교자들은 호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심판을 내려달라고 호소하는 것에 대해서 여러분 중에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심판을 내려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명령에 배치되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도, 그리고 스데반도 죽임을 당하기 전에 불쌍히 여겨 달라고, 그래서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분명 그들의 인격이 그렇게 죽임 당한 후에도 그렇게 기도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기도하는 것은 그들의 인격이 아니라 그들이 흘린 피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사실 호소한 것은 아벨의 피였습니다. 이세벨과 아합이 포도원을 빼앗기 위해 나봇이란 의인을 죽였을 때 사실 하나님의 심판을 부른 것은 죽은 후의 나봇의 기도 때문이 아니라 땅에 흘려진 무죄한 자의 피였습니다. 피는 하나님의 심판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의인과 무죄한 자의 피가 흘려진 땅에는 재앙과 저주가 끊이지 않는 법입니다. 이것은 그렇게 죽은 자가 사후에 기도하기 때문이 아니라 무죄한 자의 흘린 피가 하나님의 심판을 끊임없이 호소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신원하다”는 말은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는 없으나 늦출 수는 있는데 그것은 민초들의 억울함을 위정자들이 잘 풀어주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누가 물을 지 모르겠습니다. “보복에 대한 간구”를 우리가 모방할 수 있습니까? 분명히 말하지만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총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결코 그러한 기도를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용서하고 불쌍히 여길 의무만 받았지 저주를 내리고 미워할 권리는 이미 십자가에서 박탈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가만 내버려두신다고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은 위대한 재판장이시오 대주제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억울한 때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간구하십시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십시오. 하나님의 때까지 기도만 하십시오. “어느 때까지 하실 겁니까?” 사실 이 기도는 세상 속에서 신실한 믿음을 지키며 순교자의 길을 걷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매일 매일 탄식하면서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시편6:3,4과 90:13, 그리고 74:9,10을 한번 보십시오. 언제나 의롭게 사는 사람들, 정결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이런 기도를 안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언제까지입니까?”라고 부르짖고 계십니까? 기억하십시오. 언제나 세상 속에서 신실한 믿음으로 살려고, 주의 뜻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자는 눅18장에 말씀한대로 ‘거룩한 원한’을 품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원한이 있습니까? 거룩하고 참되신 하나님께만 털어놓을 수밖에 없는 사무친 의(義)의 소원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의인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의의 기도를 받으십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하나님의 응답이 어떻게 임합니까?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십니다. 계시록에서 흰색은 승리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영광의 색입니다. 흰 두루마기는 최종 영화의 상징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이 패배자로 인생을 마감한 것 같지만 사실 하나님께로부터 승리자로 대우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위로 받고 있습니다.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나님은 안식을 명하십니다. 그들은 잠시 모든 시름을 잊고 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안식은 결코 오래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때입니까? 순교자들의 수가 채워져야 합니다. 아직 더 많은 순교자들의 피가 이 땅에 흘려져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그 수를 정하셨고 그 수를 헤아리고 계시며 하나님만이 그 수를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 고통 중에 있습니까? 시련 중에 있습니까? 순교자들과 같이 “도대체 어느 때까지...”라고 한숨 쉬면서 기도만 하고 계십니까? 그것이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에 관한 탄식입니까? 그것이 죄악으로 충만한 이 시대를 바라보면서 속에서 샘솟듯이 터져나오는 탄식입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때가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 때를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내 힘으로 도저히 안 되는 일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때를 믿고 구하십시오. 그 때를 아는 것이 세상을 승리하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지혜입니다. 그 때를 주목하십시오. 그 때를 바라보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의 힘입니다.

이렇게 본문에서 순교자들의 피의 호소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네 번 째 인까지 지상에서 인생들이 당하는 고통을 이야기하다가 다섯째 인에서 천상에서 순교자들의 피가 울부짖는 소리를 기록하고 있는 의도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 땅에 임하는 재앙의 원인을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더욱 크게 임할 하나님의 임박한 진노를 또한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백성들의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가만히 침묵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큰 일이 일어날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순교자들을 위로하시고 때를 기다리라고 하신 것은 그렇게 피를 흘린 자들에게 내릴 진노가 얼마나 엄청날 것인지 상상하게 해줍니다. 하나님은 무조건적으로 용서하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직 어린양의 피를 믿는 자를 무조건적으로 용서하십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사랑하시는 자녀가 피 흘리며 죽어갈 때도 침묵하신 것은 사실 더 큰 진노의 잔을 붓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이 땅에 이렇게 비극과 재앙들이 많이 일어나며, 왜 수많은 사람들이 매년마다 증가해져 가기만 하는 재난과 재난의 소식들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인생들이 고통을 당하는데도 가만히 보고만 계시는 것처럼 보일까요? 아니 오히려 인생들을 더욱 불행의 터널로 몰아가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요?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백성들을 위하여 심한 분노로 질투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진노의 잔을 붓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생들이 그렇게 맹렬한 분노로 질투하시는 하나님을 알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불의로 경건을 가로막는 모든 불의한 자에 대해 내리기로 작정하신 진노가 얼마나 큰지를 알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세상에 대해 자신 있게 할 말, 그들이 반드시 들어야 할 복음은 이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는 하나님의 저 무서운 진노를 바라보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다른 표현입니다. 그것은 범죄한 인류에게 아직도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증거입니다. 아직도 기회는 있습니다. 어서 속히 그분 앞으로 달려나와서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달려와서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순교자의 수는 점점 차고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때가 늦기 전에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돌아오십시오.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은 오직 단 한 곳뿐입니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늘 아래뿐입니다. 세상에 지친 자들이 여기 있습니까? 오늘 그 그늘 아래 나아오십시오. 십자가 그늘 아래 여러분을 초청합니다. 주님은 그곳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그분께 나아오면 그분은 여러분에게 참된 안식과 평화를 안겨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참된 피난처는 오직 그 은혜의 날개, 십자가 그늘뿐입니다. 십자가 그늘 아래 있는 참된 안식으로 지금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십자가 그늘 밑에 나 쉬기 원하네.

저 햇볕 심히 뜨겁고 또 짐이 무거워

이 광야 같은 세상에 늘 방황할 때에

주 십자가의 그늘에 내 쉴 곳 찾았네.

내 눈을 밝히 떠서 저 십자가 볼 때

날 위해 고난당하신 주 예수 보인다.

그 형상 볼 때 내 맘에 큰 찔림 받아서

그 사랑 감당 못하여 눈물만 흘리네.

십자가 그늘에서 나 길이 살겠네.

나 사모하는 광채는 주 얼굴뿐이라.

이 세상 나를 버려도 나 두렴 없도다.

내 한량없는 영광은 십자가뿐이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