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설교

요한계시록 강해(21)-144,000(계7:1-8)

등불지기 2012. 3. 3. 17:42

요한계시록을 바라볼 때 '다빈치코드'식으로 바라보면 결코 계시록의 핵심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

계시록의 말씀은 노스트라다무스나 정감록과 같은 성격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묵시문학적 이미지에 감춰진 교리의 책]으로 이해하는 것이 성경적 해석의 열쇠입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요한계시록 강해(21)

 

144,000

 

본문: 계7:1~8

 

7:1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7:2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7:3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7:4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7:5 유다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7:6 아셀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7:7 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7:8 스블론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

 

지난 시간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인생들의 비참함과 고통스런 절규를 살펴보았습니다. 죄인들의 울부짖는 소리는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라는 질문으로 잘 요약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 살펴본 사실은 첫째, 모든 죄인들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살고 있다는 것과, 둘째, 모든 죄인들이 하나님의 진노의 낯을 뵈옵기를 죽음을 맞이하는 것보다 더욱 더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죄인들이 가지고 있는 이 근원적인 두려움은 자신들의 영적 수치를 은폐하거나 엄폐하려는 몸부림으로 증명되고 있습니다. 죄인들은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리다 못해 자신보다 더 큰 것들로 엄폐하려고 애쓰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낯으로부터 자꾸만 도망 다니다가 결국 막다른 골목에서 결국 자살을 생각하는 데서 이 두려움은 분명히 증명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은 우리가 복음을 확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진노라는 현실을 발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모든 죄인들에게 임하여 있는 하나님의 진노를 깨닫지 않고서 참된 복음의 확신에 이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언제나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은 하나님의 진노의 낯을 인식하는 첫 관문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서 크리스챤이란 사람이 시온성을 향한 순례의 길을 떠나도록 만든 것은 자기 생각도, 이웃의 권유 때문도 아니라, 오직 성경책을 통해 하나님의 진노를 발견하고 가슴 깊이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산상수훈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가르치신 말씀의 뜻입니다. 자기 안에 하나님의 의가 없다는 사실, 즉,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는 죄인이란 사실을 마음으로 인식하는 것이 없이 천국을 얻은 사람은 이제껏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계시록 7장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7장은 6번째 인을 뗄 때 죄인들이 두려워하며 절규하면서 질문했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에 대한 대답입니다. 하나님의 큰 진노의 날에 누가 하나님 앞에 설 것이며, 누가 진노의 날에 생존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해서 7장은 두 가지 환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환상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인 맞은 자들만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게 될 거라는 진리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인(seal)은 하나님의 소유, 보호, 그리고 구별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땅, 바다, 각종 나무는 온 세상과 세상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매우 간단명료한 진리입니다. 즉, 오직 하나님의 인 맞은 자들만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큰 환난을 통과하게 될 것이지만 결국 아무도 잃어버린 바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양의 진노의 큰 날이 선포되었는데, 이 종말의 때에 누가 능히 그 진노를 피할 것인가?” “누가 능히 그 큰 진노를 피할 수 있으며, 누가 능히 하나님의 낯을 뵈올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 “누가 능히 서리요?”라는 질문의 뜻입니다. 이 질문은 그냥 궁금해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거의 절규에 가까운 질문이며, 패닉에 가까운 질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언젠가 이런 질문을 던져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성적이고 지적인 호기심에서가 아니라 온 마음으로 던져보신 적이 있습니까? 공포에 질린 마음으로 질문해보셨습니까? 이 시간 다시 한 번 이 질문을 품어보시기 바랍니다. “오호라,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선생들아, 내가 어찌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복음을 알기 원하십니까? 구주의 구원에 대해 알기 원합니까? 구주의 복음이 참으로 능력임을 알기 원합니까? 그러면 이 질문을 잘 던져야 합니다. “누가 능히 서리요?”

이 중대한 질문에 대해서 오늘 본문은 이렇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오직 택함 받은 자들만이 설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종말의 때에 과연 누가 구원을 얻는가에 대해 본문이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저는 종말에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해 몇 가지로 여러분에게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그것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구원이 이루어지는 배경에 대해 잠깐 살펴보기 원합니다. 본문에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서 바람이 불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고대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대세계에서는 사람들은 하늘이 커다란 사각형처럼 생겼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땅 역시 커다란 사각형으로 생겼는데, 각각의 모서리를 연결해주는 커다란 기둥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네 천사는 세상을 주관하는 천사요, 붙잡고 있는 바람은 인생들에게 임할 환난과 고통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문맥적으로 볼 때 분명 성령의 바람과 다릅니다. 에스겔서에 나오는 성령의 바람은 ‘생기’로서 죽은 자들을 살리는 바람인데 반해서 본문에 기록된 바람은 고통과 저주의 바람입니다. 2절을 보시면,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절의 장면은 2절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서 땅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불지 못하게 하는 것은 2절에서 등장한 다른 천사의 명령 때문입니다. 그 천사가 큰 소리로 외치기를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그 천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네 천사가 바람을 놓기 전에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을 치는데 이마에 인 맞은 자들의 수가 십 사 만 사천 명이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큰 진노의 날에 구원받을 인생들을 보게 됩니다. 그들이 받은 구원은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우리의 구원이 어떤 특징이 있는지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이 시간 저는 그것을 세 가지로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구원은 선택적 구원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마에 인치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것으로 구별하셨다는 뜻이며,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셨고,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내 주는 살아 계시고 날 위해 비심을 그 주신 사랑 인하여 나 알게 되었네. 날 거룩하게 하려고 주 작정하신 일 그 누가 반대하리요 곧 이뤄주시리. 주 다시 돌아오실 때 날 안다 하시고 또 나를 받아 주실 줄 나 확신합니다. 내 안에 주님 계시고 주안에 나 있어 그 한량없는 기쁨과 참 안식 얻도다.”(찬송16장)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까? 내 공로와 내 의지 때문입니까? 구원을 경험한 인생들이 공통적으로 고백할 수밖에 없는 한 가지는 주께서 먼저 나를 아셨고 주께서 나를 구원하시기로 이미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구원의 확신과 예정론은 동전의 앞 뒤 면과 같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이 단지 철학적으로 예정론을 이해하려고 하는 한 우리는 결코 예정론을 진정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작정은 언제 이루어집니까? 오늘 본문에는 천사들이 바람이 불도록 놓기 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구원이 언제 작정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4,5)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믿습니까? 예정론을 이해하고 계십니까? 이 질문은 여러분이 구원의 감격과 확신이 있는 가라는 질문과 사실 동일합니다. 여러분, 왜 많은 사람들이 예정론에서 걸려 넘어지는지 아십니까? 구원의 확신과 예정론을 분리시키기 때문입니다. 단지 하나님의 예정과 구원을 철학적으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입니다. 자신이 받은 이 엄청난 구원에 대해 이해하려고 몸부림치다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기에 결국 내린 결론이 바로 하나님의 예정입니다. 예정은 구원에 대한 논리적 이해의 종착역입니다. 그러므로 예정은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신에서 출발합니다. 여기서 출발하지 않으면 언제나 하나님의 예정하심이라는 복된 교리는 운명론이나 숙명론으로 오해되어지게 됩니다. 사단이 언제나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공격하기 위해 이 예정론을 곡해하는 방법을 즐겨 사용하고 있음을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 이 예정을 다룬 말씀의 문맥을 보십시오. 이 예정을 주장한 다윗이나 바울을 보십시오. 언제나 받은 구원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다가, 언제나 나 같은 죄인이 왜 이토록 큰 은혜를 받게 되었는가를 설명하려다가 결국 하나님의 예정이 아니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정을 이해하려고 하면 이미 예정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정은 신앙의 대상입니다. 예정은 철학적 사색이 아니라 감격 어린 신앙고백이어야 합니다. 여러분, 예정을 이해하려고 하십니까? 그러면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대신 자신의 구원을 이해하려고 해보십시오. 자신의 구원을 이해하려고 하면 할수록 결국 자신의 구원을 이해하기 위해서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예정하심 때문이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받은 은혜, 받은 구원을 이해하고자 하는 몸부림을 끝내고 안식을 주는 것이 예정하심입니다.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우리 힘과 의지로 그리스도를 선택한 것 같지만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하심 때문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왜냐면 죄인에게 임한 이 구원이 너무나 엄청나고 크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미리 아신 자들을 미리 자신의 것으로 구별하시고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선택받은 자들,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된 자들은 진노의 큰 날에, 다가오는 환난의 바람에도 굳게 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환난의 바람이 불기 전에 구원받을 자들을 당신의 주권대로 선택하셨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구원이 선택적 구원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려고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4,15)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누가 선택받은 자인지 과연 어떻게 압니까?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요10:4,5) 누가 선택받은 자입니까? 구주의 음성에 반응하는 자입니다. 구주의 복음에 전인격적으로 응답하는 자입니다. 예정론을 운명론으로 곡해하려는 사단은 늘 이렇게 속삭입니다. “하나님이 예정하신 사람은 하나님이 구원하실거야. 그러므로 너는 전도할 필요가 없어!” 여러분, 이것이 교회를 기만하게 하고 복음전도와 세계선교의 대위임령을 불순종하게 만드는 가장 교묘한 마귀의 술책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정하심의 교리는 교회로 하여금 더욱 더 복음을 전하게 만듭니다. 왜냐면 복음에 반응하는 것을 보고 그가 선택 받은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인침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 하나님의 것으로 확증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종들은 귀에 구멍을 뚫었습니다. 소들이나 양들은 다른 사람의 소유와 구별하기 위해 이마나 허벅지에 불에 달군 인두로 주인의 이니셜을 새겨놓았습니다. 요즘 우리는 책을 구입하고 나면 자기 이름을 적어 표시해놓지 않습니까? 내 것이라는 표시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종들’(3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종입니까? 내 인생 내 소유 모두 하나님의 소유임을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 누가 종입니까? 주인의 뜻대로 모든 것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자신의 뜻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종은 오직 주인의 뜻만 추구합니다. 여러분,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귀하게 여깁니까?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외치고 사십니까? 기억하십시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행함 없는 믿음은 영혼 없는 몸과 같이 죽은 것”입니다. 종교행위, 사역, 직분, 기독교적 체험은 결코 우리의 구원을 보장해주지 못합니다. 진노의 날에 능히 설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자기는 죽고 자기 뜻은 내려놓고 오직 주님의 뜻을 구하는 인생입니다. 하나님의 종들만이 큰 진노의 날에 능히 설 수 있습니다. 거꾸로 말해서 하나님이 인치신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종이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종이십니까? 혹시 하나님을 여러분 자신의 종으로 여기지는 않으십니까? 하나님의 뜻을 구하든지, 아니면 사람의 뜻을 구하든지 우리는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또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인친 자들을 ‘성도’라고 불렀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고전1:2)이라고 했습니다. 거룩한 백성이란 호칭은 우리의 공로와 노력으로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자신의 것으로 구별하신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따로 떼어놓으신 자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거룩한 자들’로 불리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간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는 자신을 구별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이해하고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믿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사신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두 번째로 이 구원은 완전한 구원입니다. 즉,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사람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작정하신 사람들 중에 한 사람도 잃어버리게 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4절을 보십시오.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 사 만 사천이니”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144,000명이란 숫자는 하나님의 구원이 완전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이 숫자가 문자적인 의미냐 아니냐에 대해 논란이 많습니다. 저는 분명히 이 수는 상징적이라고 믿습니다. 왜냐면 본문 4절에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라고 했는데 신약성경에서 ‘이스라엘’이란 말이 유대인만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은 영적 이스라엘을 항상 강조하고 있습니다. 갈3:28,29에,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했습니다. 빌3:3에,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도 유대인들을 ‘이스라엘’로 부르신 적이 없습니다. 혈통적인 면에서 ‘이스라엘인’은 돌멩이 하나로도 능히 하나님이 만드실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는 유대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 퍼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합니다. 또한 5절에서 8절까지 언급되고 있는 지파들의 이름을 보시면 문자적으로 유대인들을 가리킨다고 보면 여러 가지 어려움에 처하게 됩니다. 보십시오. 단 지파가 빠졌습니다. 요셉과 므낫세가 함께 나오고 있습니다. 에브라임 지파가 빠졌습니다. 그리고 레위 지파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장치들은 요한이 ‘육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영적 이스라엘’임을 명심하도록 배려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각 지파별 일반 이천 명씩 열두 번, 그래서 십사 만 사천 명이란 숫자가 기록된 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완전하다는 것을 강조해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구별하신 사람, 하나님이 인친 사람, 하나님이 작정하신 사람은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하고 큰 지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완전한 구원에 대해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10:27-29) 하나님의 예정과 구원에 대해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6:37)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에게 오는 양들은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6:38,39) 사도 바울 역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이 완전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은 완전합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작정한 인생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반응할 것이고 복음을 듣고 구주께로 나오는 인생은 하나도 잃지 않으실 것입니다. 위대한 목자이신 구주를 찬양합니다.

세 번째 하나님의 구원은 제한적입니다. 제한 구원은 성경적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남은 자 사상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수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대속의 피를 흘려주신 대상은 전 세계 모든 인류가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자들에게만 그리스도의 보혈이 유효한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반발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그러나 제한 속죄, 혹은 제한 구원은 성경적입니다. 이것은 논리적으로도 분명해집니다. 만약 구주께서 흘리신 보혈이 문자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고 한다면 구주를 믿으라고 요청할 필요도 없어질 뿐더러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모든 인류가 자동적으로 구원을 받을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성경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구주의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는 자들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흘리신 보혈이 효과적으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구주께서 ‘죄인을 찾아 구원하려 왔다’고 하셨을 때 세상의 감옥에 있는 모든 죄인들을 찾아가신 것이 아니며, 모든 죄인들이 복음을 듣지도 않고 회개함도 없이 자동적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여러분이 잘 아실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라고 말씀하시면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살후3:2)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아무나 갖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면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이라고 말했습니다.(벧후1:1)

하나님이 구원하실 인생이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은 엄연한 현실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오직 남은 자들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제한되었다고 해서 극소수라는 뜻은 아닙니다. 다음 주에 살펴볼 것이지만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라고 했습니다.(9절) 십사 만 사천은 다분히 상징적인 숫자이며, 실제 숫자는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인 것입니다. 십사 만 사천이란 숫자가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모든 사람들에게 자동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구별하신 사람들이며, 이 숫자는 사람들의 의지나 결단에 맡겨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에 맡겨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의 의지와 결정에 달린 것처럼 생각하는데 사실은 하나님의 작정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작정은 우리의 의지와 결정을 무시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제가 거듭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작정은 우리의 의지와 결정을 더욱 더 강하게 해줍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리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작정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새로운 의지와 결단력으로 반응하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내 삶 속에 영접한 것 같은데 사실 따져보면 하나님께서 먼저 내 삶 속에서 역사하셨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2,13)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 즉, 하나님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된 자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됩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믿어지는 것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요3:20,21) 무슨 말입니까? 빛으로 나아가는 의지와 행동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로 인친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나아가기를 꺼려하고 자꾸만 어둠 속으로 도망가는 행동은 스스로 택함 받지 않은 것임을 스스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벧후1:10)고 말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는 구원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행위로 구원을 증명하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어떠함을 묵상할 때 우리는 감격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작정하신 대로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완전한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제한된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는 믿음만으로 받은 이 보배로운 믿음을 생각할 때 참으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고, 그 믿음을 주신 하나님을 참으로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인친 자들은 공통점이 있는데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종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러한 의식뿐만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의 뜻을 가장 먼저 구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여러분에게 호소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이 인치신 자임을 믿는다면 당연히 자신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의 뜻을 삶 속에 이루며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행하는 것으로 여러분은 자신이 하나님의 인친 자임을 스스로 증명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기뻐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몸부림치는 자들을 보호하시며, 세상 끝까지 지키실 것입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지금 그 뜻을 구하는지 자신을 검토해보십시오.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이 나의 최우선 관심사인지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그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고 외치며 사는 지 점검해보십시오. 그분의 뜻을 행하는 일에 최고의 기쁨을 얻는지 확신해보십시오. 만약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이 무슨 기도의 응답을 했던, 무슨 고상한 직분을 교회에서 받았든, 교회에서 무슨 고상한 사역을 하든, 그리고 무슨 고상한 영적 체험을 했던 간에 그것은 여러분의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144,000명은 누구입니까?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죽이고, 자기 뜻을 버리고, 오직 “주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고 외치며 사는 인생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끝날까지 그들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먼 옛날 애굽에 재앙이 임할 때 하나님께서 고센 땅의 이스라엘을 구별하셨듯이, 재앙의 천사가 회리바람처럼 애굽 전역을 휩쓸기 전에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을 자의 집 문설주에 인칠 것을 명령하셨듯이 하나님은 당신이 구원할 백성을 친히 아십니다. 그들은 구주의 복음에 전인격적으로 반응할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최우선으로 삼고 그 뜻을 이루며 살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