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설교

요한계시록 강해(20)-하나님의 진노II(계6:12-17)

등불지기 2012. 3. 3. 17:36

요한계시록 강해(20)

 

하나님의 진노 II

 

본문: 계6:12~17

 

6:12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택하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같이 되며

6:13 하늘의 별들이 무화가 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같이 땅에 떨어지며

6:14 하늘은 종이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매

6:15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6:16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6: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우리는 계속해서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통해서 “기독교 역사관”에 대해서 교훈 받고 있습니다. 때를 아는 지식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반드시 가져야 할 지식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하늘의 제단 아래 뿌려지고 있는 순교자들의 피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순교자들의 피는 정한 분량을 채우기까지 계속 뿌려질 것이며, 우리의 완전한 구속을 위하여 더 뿌려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다섯 째 인이 우리에게 말하려고 하는 바는 종말의 때는 곧 순교자들의 때이며, 순교자들의 피로 말미암아 이 땅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냐면 무죄한 자의 흘린 피가 하나님께 심판을 계속적으로 탄원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순교자의 시대요, 순교자들의 피가 끊임없이 하나님의 심판을 호소하는 시대입니다. 종말은 곧 순교자의 때이며, 따라서 종말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순교자의 길을 걸어가는 자들입니다. 순교자의 길이란 무슨 거창한 어떤 구호가 아니라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고백하면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죽음을 환영하기까지 그리스도의 임재를 즐거워하면서 살라고 이 종말의 때는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섯 째 인을 뗄 때 나타나는 현상은 우주적인 재난과 우주적인 고통에 두려워 떠는 인생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앞서 살펴본 다섯 째 인을 뗄 때 보인 순교자들의 피가 하나님의 심판을 끊임없이 호소하는 데에 따른 논리적인 결과인 것입니다. 순교자들의 피로 말미암아 이 땅과 온 우주 만물에 미치는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크고 무서운 지를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종말의 때는 어떤 때인가?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박한 진노 아래 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크게 두 단락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첫째, 12절에서 14절까지 하나님의 진노가 온 우주적으로 나타나는 양상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매” 그리고 둘째로, 15절에서 17절까지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에 따라 두려워 떠는 인생들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당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이러한 묘사는 문자적인 의미가 아니라 실존적인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 아래 놓여 있는 인생들의 비참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말씀하려고 하는 바는 아주 간단합니다. 종말의 때는 하나님의 임박한 진노의 때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은 인류 역사의 어느 특정 시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주께서 부활 승천하심으로 말미암아 온 우주는 긴장국면에 들어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마겟돈이나 딥 임팩트와 같은 영화가 묘사하는 그런 종말이 아닙니다. 이 종말은 인류가 겪게 될 미래의 어느 특정한 사건이 아니라, 바로 오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때는 어떤 때입니까?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야기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분노의 활시위를 당기심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노하고 계시며 순교자의 피가 분량을 채울 때까지 분노하심으로 참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인 우주와 그 가운데 사는 인생들의 비참한 운명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어떤 때를 살고 있는지를 알고 계십니까? 우리는 다름 아닌 종말의 때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계십니까? 이 종말이 너무나 확실하며 너무나 임박하므로 마치 지금 그것을 현재진행형으로 서술하고 있는 예언자의 심정을 이해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임박한 진노를 피할 수 있는 인생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때를 분별하고 계십니까? 이 때는 종말의 때요, 하나님의 진노가 임박한 위기의 때입니다!

사도 요한이 환상 중에 보고 있는 이 장면은 유대인들이나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생소한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구주께서 이 땅에 오시기 오래 전 구약의 선지자들이 이미 여러 번 예고한 바 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들은 이 종말을 ‘여호와의 날’로 선포하면서 여러 가지로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예언하였습니다. 이사야 13:9-11에,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임하여 땅을 황무케 하며 그 중에서 죄인을 멸하리니 하늘의 별들과 별 떨기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 달이 그 빛을 비취지 아니할 것이로다. 내가 세상의 악과 악인의 죄를 벌하며 교만한 자의 오만을 끊으며 강포한 자의 거만을 낮출 것이며”라고 했고, 사34:4에서도 “하늘의 만상이 사라지고 하늘들이 두루마리같이 말리되 그 만상의 쇠잔함이 포도나무 잎이 마름 같고 무화과나무 잎이 마름 같으리라”고 예고했습니다. 에스겔 32:7에서도 “내가 너를 불 끄듯 할 때에 하늘을 가리어 별로 어둡게 하며 해를 구름으로 가리우며 달로 빛을 발하지 못하게 할 것임이여”라고 했습니다. 선지자 스바냐는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심히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애곡하는도다. 그 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무와 패괴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을 치며 높은 망대를치는 날이로다 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소경같이 행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또 그들의 피는 흘리워서 티끌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같이 될지라.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당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키우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거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습1:14-18) 요엘 선지자도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려니와...”(욜2:31)라고 예언했습니다. 이처럼 구약성경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사도 요한의 예언이 전혀 새로운 어떤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때는 종말의 때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도 이 종말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마24장을 보십시오. “그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마24:29) 또, 눅21:25절부터 보십시오. “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와 우는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이런 일이 시작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웠느니라”(눅21:25-28) 여러분, 참 그리스도인의 증거가 무엇입니까? 이 때(Kairos)의 지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종말을 믿는 것입니다. 물론 종말을 믿는다고 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종말을 믿습니다. 이 종말의 때, 즉,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의 때에 하나님의 진노를 피해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때는 어떤 때라고 가르치셨습니까? 온 주주에 나타날 하나님의 진노의 징조가 나타날 것인데 그것들을 보면서 어떻게 살 것인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피어스 브루스넌이 주연한 단테스 피크(Dante's Peak)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화산이 폭발할 때의 광경은 가히 엄청납니다. 그런데 갑자기 폭발하지 않습니다. 폭발하기 전에 먼저 징후가 나타납니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그러한 증상을 눈치 채고 주민들을 대피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무시당합니다. 민주주의의 치명적인 약점이 여기 있습니다. 다수의 주장이 진리로 간주된다는 것입니다. 다수의 논리가 진실을 정죄합니다. 대다수가 아니라고 하면 그것이 곧 진리인 양 간주해버립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하고 있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요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보십시오. 우주와 자연과 인간 사회와 인간 정신세계에 하나님의 진노를 암시해주는 징조들이 충분히 보입니다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무시합니다. 진리에 대해 코웃음 칩니다. 그러나 교회는 계속해서 세상에 대해 경고를 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대피시켜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는 그늘을 제공해주는 곳입니다. 그 그늘은 다름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이제 두 번째 단락으로 넘어가 봅시다. 이러한 종말의 때를 살고 있는 인생들의 비참함에 대해서 어떻게 그려주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진노를 직면하는 것을 죽음에 직면하는 것보다 더 두려워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죄인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생각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생각하는 것을 낫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죄인들은 죽음보다 하나님의 진노를 더 무서워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서 가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이들이 절규하는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이처럼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고 몸부림치는 것은 모든 죄인들의 본성입니다. 최초에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가장 먼저 자신들의 벌거벗음을 발견했습니다. 자신들이 의가 없음을 발견한 것 때문에 그들은 가장 원초적인 수치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 수치감은 성적 수치감과 더불어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가 성적 수치심을 느낀다는 것은 우리의 의가 죄로 말미암아 박탈당했음을 상기하기 위해서 허락된 것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동물의 세계를 보십시오. 수치감을 느끼는 존재는 오직 사람뿐입니다. 사람만이 부끄러움을 탈줄 압니다. 이것은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을 암시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렸습니다. 이렇게 죄인들은 자신의 불의를 여러 가지로 은폐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얄팍한 종교심으로 이 수치를 가려보려고 합니다. 경건의 모양을 흉내냄으로써 이 수치를 가립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다 일시적인 것으로서 하나님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죄인들은 자신의 영적 수치를 종교나 경건의 모양이나 기타 영적인 것들로 가리기도 하지만 그것으로도 불충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자신의 영적 수치를 가려줄 수 있는 더 큰 것을 찾습니다. 범죄한 첫 사람을 보십시오. 그들은 은폐에서 엄폐로 나아갑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나무 뒤에 자신들을 숨겼습니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릴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낯에서 자신들을 숨길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죄인들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자꾸만 자신들을 은폐, 그리고 엄폐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범죄한 이후 하나님의 낯을 보는 데서 쫓겨났고, 그 이후 태어난 가인 역시 범죄한 이후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추방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죄인들은 자꾸만 빛을 싫어합니다. 그리고 자꾸만 어둠 속으로 자신을 숨기고 싶어합니다. 이처럼 죄인들은 하나님의 낯을 뵈옵기를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차라리 그 낯을 보기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하나님의 입재를 피하여 죄인들은 자꾸만 자꾸만 멀리 달아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조차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하나님의 백성들 역시 하나님의 임재를 피하여 자꾸만 도망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강림한 여호와의 임재를 바라볼 때 이것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얼굴을 뵈옵기를 두려워했고,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구름에 가리셨고, 자신의 친 음성을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들려주셨던 것입니다.

죄인들의 습성은 이처럼 하나님의 낯에서 자신을 은폐, 엄폐하고 자꾸만 도망가려고 합니다. 그들은 그 얼굴을 뵈옵기보다는 차라리 자살을 선택하기 원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얼굴을 보지 않게 할 것으로 자신을 숨기기 원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참된 안식처가 될 수 없습니다. 죄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의 영혼 깊은 곳에 있는 두려움을 숨기기 위해서 그들은 레저를 즐기고 스포츠를 즐기며 도박을 즐깁니다. 그러한 탐닉은 그들의 두려움을 잘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에 탐닉하면서 자신을 마약이나 술이나 세상 쾌락에 맡기면서 이렇게 외치는 것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낯을 두려워하는 이 공포는 모든 죄인들이 가지고 있는 공포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공포를 덮어버리거나 잊어버리려고 안간힘을 다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될 때는 차라리 자살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 위에 떨어져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죽음의 공포보다는 하나님의 임재의 낯을 바라보는 두려움이 더욱 크다는 얘기입니다. 죄인들은 죽는 것보다 이것을 더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낯을 뵈옵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의 이러한 원초적인 공포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가르치셨습니까?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들을 생각하고 무서워함으로 기절하리니...”(눅21:26) 그렇습니다. 종말의 때를 살고 있는 모든 죄인들이 세상에 임할 일들을 잠시라도 생각한다면 기절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종말의 때는 사람들이 어찌할 줄 모르며 우왕좌왕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이 두려움을 가장 먼저 느낄까요? 본문을 보십시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라고 했습니다. 여기 열거된 사람들은 주로 강한 자들입니다. 가진 자들입니다. 여기서 ‘각 종’이라고 한 사람들은 그렇게 강한 자, 가진 자들에게 예속되어 있는 자들입니다. 임금이 두려워하면 임금이 부리는 종들은 더욱 더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이러한 열거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진노를 누가 가장 잘 인식할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입니다. 여러분은 제 설교를 들으면서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라구요? 세상이 하나님의 진노를 생각할 수 있나요? 세상에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를 생각할 수 있을까요? 세상을 보세요. 세상은 저마다 하나님의 진노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듯이 살아가고 있지 않나요?” 그러나 표면만 보지 마시고 그들의 영혼 깊은 곳을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원초적인 두려움을 이해하기 원한다면 땅의 임금이나 왕족이나 장군이나 부자들이 되어 보십시오. 여러분이 땅에서 강한 자가 되어 보십시오. 여러 종들을 부리는 자주자가 되어 보십시오. 그러면 세상에 임할 하나님의 진노를 다른 보통 사람들보다 더욱 더 잘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오늘날의 권력가들과 재력가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부럽습니까? 이 땅에서 떵떵거리며 권력과 부를 남용하는 그들이 되고 싶습니까? 우리가 언뜻 보기에 그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이 땅에서 권력과 재력을 더 많이 잡으면 잡을수록 더욱 두려워하고 더욱 걱정과 근심에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정치가들은 차기 권력자에 의해서 심판 받을 것을 두려워합니다. 재력가들은 환율과 대공황에 대해서 두려워합니다. 지식을 가지고 있는 과학자가 되어 보십시오. 자원의 고갈과 우주의 종말에 대해 두려워 떨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땅에서 강한 자가 될수록 이러한 공포는 거의 패닉에 가까워질 정도입니다. 선지자들도 이 날에 대해 예고했습니다. “그때에 저희가 산더러 이르되 우리를 가리우라 할 것이요 작은 산더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호10:8)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들을 생각하고 무서워함으로 기절하리니...”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다른 마취제를 찾아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죄인들은 지금 절규하고 있습니다. 공포에 질린 채 말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죄인들의 절망에 찬 절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낯을 대하느니 차라리 죽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진노의 얼굴을 뵙는 것보다는 차라리 바위에 깔려 죽는 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의 큰 날을 인식하고 절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큰 날에 누가 설 것인가 라고 한탄합니다. “누가 서리요?” 하나님의 진노의 큰 날에 누가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며 자신은 그 진노의 날에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고 안전할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본문이 질문하고 있는 것은 사실 모든 죄인들,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이 질문에 대해 우리 모두가 대답해야 합니다.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지금껏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 질문에 대해 정직하게 대답해야 하는 첫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제가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임박한 진노의 날에 자신 있게 설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어린양의 불꽃같은 눈앞에 능히 설 수 있습니까? 여기에 모든 죄인들의 절망이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모든 인생들이 절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죄인들의 절망에 찬 고뇌를 다르게 표현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바로 이러한 진노의 날에 능히 우리를 설 수 있도록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구주의 복음은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날 때” 두려워 떨면서 절망하는 모든 인생들에게 피난처를 약속해준다는 것입니다. 곤고한 사람에게 주시는 약속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에게 주시는 안식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낯을 뵙기를 무서워하는 인생들에게 주시는 피난처를 제공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지상교회는 세상에 이 약속이 있다고, 이 약속을 붙잡으라고 부단히 외치는 곳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임박한 진노의 날에 죄인들을 준비시키는 곳입니다. 여러분, 무엇입니까? 무엇이 우리의 피난처입니까? 어디가 우리가 안식해야 할 곳입니까? 그곳이 이 땅에 어디에 있습니까? 이 땅에서 우리의 피난처와 안식처는 바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늘 아래입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2:1-6)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2:18,19)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임박한 진노의 이 날에 우리가 도망가야 할 곳은 오직 한 군데뿐입니다. 그곳은 어떤 장소도 아니고 어떤 행위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곳은 구주의 복음입니다. 어린양의 피가 흘려진 십자가 그늘 아래뿐입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묻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임박한 진노의 날을 알고 있습니까? 임박한 그분의 진노를 생각하고 두려워 떨어보셨습니까?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의 손에 사로잡힌 자의 절망어린 탄식을 해보셨습니까? 그 큰 진노의 날에 여러분은 당당하게 설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의 진노가 소낙비같이 내리는 이 때 여러분은 어디에 여러분 자신을 숨기고 있습니까? 여러분,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의 보배로운 피가 뿌려진 갈보리 언덕만이 우리를 안전하게 숨겨줄 수 있습니다. 계시록 7장에 넘어가면 모든 인생들의 피난처를 분명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계7:10)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7:14)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정말 믿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만이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 여러분을 서게 해 줄 것이라고 믿습니까? 구주의 보혈이 참으로 여러분에게 자랑거리가 되고 있습니까? 구주의 보혈에 참 능력이 있다고 찬송하면서 살아가고 계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구주의 복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에 대한 깊은 확신을 가지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진노의 크기와 깊이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대한 확신은 이 임박한 진노의 날에 대한 분명한 인식에 결정적으로 달려 있습니다. 이 종말의 때를 알지 못하고, 이 종말의 때에 위로부터 임하는 진노의 무시무시함을 알지 못한 채, 이 두려움에 몸서리치면서 “누가 서리요?”라고 울부짖어 보지 못한 채, 구주의 이름을 너무 쉽게 부르려고 하지 마십시오. 구주의 이름은 두려워 떠는 자들에 의해서 불리어져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사를 보십시오.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의 전기를 읽어보십시오. 신약성경에 참으로 회심한 자들을 살펴보십시오. 그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낯을 뵈올 때 가졌던 공포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낯을 인식하는 두려움 없이 복음에 대한 깊은 확신을 가진 사람은 여태껏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만선의 축복을 안겨다 주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베드로는 이 두려움을 가졌습니다. 단지 “나를 따라오너라.”고 하셨을 때 마태는 이 두려움을 가졌습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내가 너를 보았다”고 하셨을 때 나다나엘 역시 이 두려움을 가졌습니다. “삭게오야 내려오라 내가 네 집에 유하리라”하실 때 삭게오 역시 이 두려움을 가졌습니다. 빌립보 감옥에서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고 절규했던 간수장 역시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의 낯을 바라보고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이 깊은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참된 복음을 인식하도록 도와줍니다. 만약 복음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늘은 임박한 진노의 날임을 기억하십시오. 이 진노의 날에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절규하는 인생들의 비참함을 생각하십시오. ‘성부와 성자의 진노의 날에 누가 설 것인가?’라고 한번 절규해보십시오. 그래야 복음이 복음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까?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만큼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임을 알고 있습니까?

따라서 여러분, 복음은 결코 값싼 복음이 아닙니다. 단지 지식적인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이 종말의 때에 전인격적으로 반응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박한 진노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구주의 복음은 결코 ‘복된 소식’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결코 백화점 세일하듯이 값싼 복음으로 구원받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복음은 무슨 ‘뽀대 나는’ 장식품이 결코 아닙니다. 복음은 아무에게나 복음이 아닙니다. 구주의 복음은 언제나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신음하는 자들에게 말 그대로 ‘복된 소식’인 것입니다. 그 진노 아래 두려워 떨어보지 못한 인생은 복음을 액세서리로 달고 다닐지는 몰라도 복음에 대한 확신으로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이 참으로 복음에 대해 깊은 확신을 갖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말과 지식만으로 복음을 이야기하지 맙시다. 이 복음이 참으로 복음이 될 수 있도록 이 종말의 때를 분명히 알도록 합시다. 하나님의 진노는 다가오는 미래의 어느 날이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 머리 위에 임하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디 지금 여러분은 본문의 질문에 대답하십시오. “그들이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만세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린 것 내게 효험 되어서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공을 세우나 은혜 갚지 못하네 쉬임 없이 힘쓰고 눈물 근심 많으나 구속 못할 죄인을 예수 홀로 속하네 빈손 들고 앞에가 십자가를 붙드네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주심 바라고 생명샘에 나가니 맘을 씻어 주소서. 살아 생전 숨쉬고 죽어 세상 떠나서 거룩하신 주 앞에 끝날 심판 당할 때 만세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