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의 둘째 날: 물과 하늘
창조의 둘째 날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창 1:6-8)
우주에서 가장 많지만 가장 작은 원자는 바로 원자번호 1번 수소⋁원자이다. 양성자 1개와 전자 1개를 가지고 있는 수소⋁원자는 원자 중심에 있는 핵 주위에 1개의 원자가 자전하면서 공전하고 있다. 중수소⋁원자 두 개가 결합하면서 에너지를 방출하고 헬륨⋁원자가 된다. 이런 방식으로 원자들이 서로 융합하여 분자를 만들어 내고 분자가 모여서 물질을 만들어 낸다. 둘째 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은 물이었다. 물은 H2O로서 수소⋁원자 2개와 산소⋁원자 1개가 서로 결합하여 있다. 그리고 물과 물 사이를 나누어 그 빈 공간을 하늘이라 부르셨다. 그런데 사실 물과 물 사이는 빈 공간이 아니다. 사실 이 공간에는 산소⋁분자, 질소⋁분자, 이산화탄소⋁분자 등으로 가득 채워진 공간이다. 여기서 우리가 계속 반복적으로 볼 수 있는 특징이 있다. 하나님은 무언가를 창조하시고 그리고 구분하신다는 점이다. 즉 대칭성의 원리가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첫째 날 빛을 창조하시고 빛과 어둠을 분리하셨다. 둘째 날 물을 창조하시고 물과 물 사이를 나누셨다.
하나님은 물과 물 사이의 빈 공간을 가리켜 ‘하늘’이라고 칭하셨다. 사람이 보기에 공기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원자로 가득 차 있다. 대기를 구성하는 대표적인 원자는 78%의 질소(Nitrogen)와 21%의 산소(Oxygen)이다. 지구 밖 대기는 사람이 숨 쉴 수 없는 공간이지만 지구 안쪽 대기는 우주에서 매우 찾아⋁보기 힘든 두 원소인 질소와 산소로 가득 차 있다. 질소는 매우 큰 에너지를 품고 있는 원자이지만 질소는 산소를 안정화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질소와 산소는 사람의 호흡기를 통해 신체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주된 성분이다. 우주에서 이런 대기를 가지고 있는 행성을 찾기 위해 과학자들은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도 발견되지 못하였다. 지구는 전 우주에서 매우 독특한 곳이다.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가 ‘나누는 일’이었다. 첫째 날에 빛을 창조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누셨다(창 1:4). 둘째 날에 물을 창조하시고 물과 물로 나뉘게 하셨다(창 1:6-7). 셋째 날에 땅을 물로부터 창조하시고 땅과 바다의 경계를 나누셨다. 넷째 날에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을 창조하시고 낮과 밤, 빛과 어둠을 나누게 하셨다.(창 1:18) 이러한 ‘대칭성’은 중요한 창조원리 중 하나이며 모든 물질세계의 원리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보면 이러한 ‘대칭’이 두드러지게 나타남을 볼 수 있다. 현대 물리학자들에게 이러한 대칭원리는 사물을 이해하는 중요한 원리로 자리 잡았다.
그러면 궁창 위의 물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것이 노아 홍수 때 땅에 쏟아진 것으로 보는 창조과학자들이 있다. 노아 홍수 이전에 이것은 태양으로부터 오는 해로운 광선을 차단해 주고 지구를 따뜻하게 감싸 주는 보호막의 역할을 했고 따라서 노아 홍수 이전과 이후 사람들의 육체적 수명이 급격하게 차이를 보이는 이유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창세기 1장 1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창조의 넷째 날 궁창에 해와 달과 별들을 창조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그렇다면 궁창 위의 물은 지구의 대기권을 감싸는 보호막이 아니게 된다. 궁창 밖의 물이 해와 달과 별들을 통과해서 지구 위에 쏟아졌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은 성경을 철학서나 혹은 과학책으로 간주하고 읽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성경은 모순된 개념들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또한 과학 전문가의 관점에서 성경을 읽으면 성경은 또 다른 ‘비과학적 요소들’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성경은 과학적 지식을 알려 주기 위해 기록된 책이 아니다. 성경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충분한 모든 지식을 전해 주고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과학적으로 문제가 많으니까 성경은 비과학적이며 신뢰할 수 없다고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현대 과학의 최신 이론을 하나도 모르는 어린아이와 같은 고대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시는 이른바 매우 ‘어리석은 방식’을 선택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라 매우 고의적인 선택이다. 성경은 가장 단순하게 보이는 우주관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궁창 위의 물’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창조과학자들의 주장대로 노아 홍수 이후에 다 쏟아진 것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이것은 어떤가? 팽창하고 있는 우주의 경계에 물의 존재가 있다고 이해하는 것은 어떨까? 해와 달과 별들이 존재하는 ‘궁창’의 크기를 천체 물리학자들이 인정하는 크기대로 100억 광년이 넘는다고 가정해 보자. 많은 사람들이 우주의 끝에는 무엇이 있는가 하고 묻는다. 굳이 추측하자면 ‘물’이 있을 것이다. 인류는 우주에 물이 존재하는 곳을 찾기 위해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입하여 조사하고 있다. 어쩌면 우주의 끝에서야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물론 물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되는 행성에 대한 후보들이 제시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증명된 행성이 없다. 단언하건대 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 중에 가장 놀라운 것이다.
하나님께서 첫째 날 창조하신 빛은 모든 만물의 근본을 구성하는 양자세계라고 한다면 둘째 날 창조하신 물과 하늘은 양자세계가 본격적으로 활약하는 무대다. 하늘의 무수한 천체들이 생겨날 공간이기도 하고, 생명체들이 나타날 배경이기도 하다. 둘째 날 창조는 다섯째 날 창조를 위한 준비 작업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의 꽃이자 마지막 걸작에 해당하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극적으로 선포하는 무대이기도 하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시 19:1-4)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무대이다. 사람의 귀로 들을 수 있는 소리의 한계는 분명하다. 그러나 분명한 소리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 날 창조하신 빛의 스펙트럼을 인간이 다 보지 못하고 각기 다양한 빛의 파장이 만들어 내는 모든 소리를 다 듣지 못한다. 하늘은 마치 하나님께서 우주라고 하는 거대한 파이프오르간을 연주하는 무대와 같다. 빛이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우주는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능력이 선포되는 공간이다. 인간의 신체는 그 모든 빛과 소리를 다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들으려고 결심하면 들을 수 있다. 보려고 하면 볼 수 있다. 인간은 그러한 도구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렇게 유한한 존재로 만드신 이유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볼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신 것이다.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고, 다 들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닌 유한한 존재로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의 절제하심의 성품에 의한 것이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행 17:24-27)
'신학, 과학, 그리고 우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조의 넷째 날: 하늘의 광명체 (0) | 2024.08.28 |
---|---|
창조의 셋째 날: 땅과 식물 (0) | 2024.08.28 |
카오스: 창조의 배경 (0) | 2024.08.28 |
만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빛의 세계 (0) | 2024.08.28 |
기독교 신학을 위해 사용할 양자역학 용어들 (0) | 2024.08.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