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과학, 그리고 우주

창조의 셋째 날: 땅과 식물

등불지기 2024. 8. 28. 21:05

 

 

창조의 셋째 날: 땅과 식물

 

셋째 날 창조는 이렇게 시작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1:9-13)

 

땅이 물에서 올라오고 있다. 이것은 원자의 세계에서 당연한 순서인데 원자의 성질로 볼 때 땅에서 물이 생길 수 없다. 물에서 땅이 생기는 것이 논리적인 순서다. 그런데 우주 진화론자들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물을 품은 운석이 외계로부터 지상에 쏟아졌기 때문에 지구에 물이 풍부해졌다고 이해하려 한다. 그렇다면 물을 품은 운석을 발견해야 할 것이다. 창조론보다 물은 품은 운석이 오늘날 바다를 이루었다는 것을 믿기가 훨씬 어렵다. 물을 구성하는 원자에 비해 땅은 훨씬 더 복잡한 형태의 원자가 서로 결합하여 분자를 이룬 여러 가지 물질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이 물의 창조가 땅의 창조보다 앞선 이유다. 이제 땅과 바다가 창조되었다. 그리고 땅과 바다는 서로 경계선을 이루고 있다. 바다가 땅의 경계를 침범하지 못하도록 말씀이 경계선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리고 땅에는 각종 채소와 과실수가 자라기 시작한다. 최초의 움직이고 자라는 생명은 동물이 아니라 식물이었다.

 

우주 진화론자들은 지구라는 행성이 어느 초신성의 폭발로 인해 생긴 잔해가 중력에 의해 뭉쳐서 생긴 것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태양도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과학자들이 많다. 그런 주장이 얼핏 논리적인 것처럼 보이나 그러한 가설이 성립하기 위해서 우주 먼지들을 끌어 모으는 힘인 중력(gravity)이 어디서부터 나오는지 먼저 설명해야 한다. 지구가 초신성 폭발의 잔해로부터 생겼다는 이론을 검토해 보자. 태양보다 훨씬 더 큰 항성이 수소 연료를 다 소진하게 되면서 내부에는 핵이 융합된 찌꺼기인 여러 종류의 원소들이 생겨났고 이유를 알지 못하는 어떤 힘에 이끌려 뭉치게 되었는데 그것이 지구라는 행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연료가 다 타버리고 남은 찌꺼기들이 다시 새로 헤쳐 모여서 태양이 되고 지구가 되고 인간이란 지적 존재가 된 것이 저절로 된 것이라면 물질이 스스로 움직여서 높은 질서의 물질체계로 진화했다는 것인데 이것은 과학자들이 굳게 믿는 열역학 법칙을 스스로 위반하는 것처럼 보인다. 연료를 다 써 버리고 남은 재와 찌꺼기들이 스스로 모여서 또다시 빛을 내는 항성이 되고 저절로 높은 수준의 지적 생명체가 될 수 있다고 굳게 믿는 이 신념은 어디서 나왔을까? 여러 무거운 원자번호를 가진 원소들과 분자들로 구성된 물질 덩어리인 땅에서 바다가 생기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할까? 이것이 설명이 안 되니까 우주에서 물이 지구로 와서 바다를 이루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단순한 구조()에서 복잡한 구조()로 나아가는 것과 복잡한 원자구조()에서 단순한 원자구조()로 나아가는 것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합리적일까? 나는 물에서 땅이 나와 성립되었다는 창세기의 논리가 훨씬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 3:4-7)

 

창조의 셋째 날 하나님은 땅과 바다의 경계를 만드시고 땅에서 각종 채소들과 과목들이 자라게 하셨다. 이것은 분명 여섯째 날 창조될 각종 동식물과 사람을 위한 먹을거리로서 준비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창세기 24절부터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2:4-6)

 

창세기 112절에는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했으나 창세기 25절에는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것은 사람이 보는 것과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보신 것은 현재와 미래를 포함한 전체적인 그림이다. 반면 사람이 보기에는 아직 그 모습을 제대로 드러낸 것이 아니다.

 

땅은 온갖 채소들과 과목들을 품고 있었으나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 주시는 때와 그것들을 경작할 사람이 나타날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또 한 번 인간 창조의 위대한 목적을 발견하게 된다. 자연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은 그것을 경작할 인간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경작할 사람이 등장하기까지 식물들은 가능성의 존재로만 창조되었다. 아마도 성경에서 가장 잘못 해석되고 이해되는 구절이 정복하고 다스리라라는 말씀일 것이다.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은 자연을 파괴하고 유린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무질서를 질서로 바꾸는 경작행위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