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이에 대한 대답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이시다. 하나님의 창조는 완료가 아니며 계속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둘째, 하나님은 빛이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해 신학에서는 “공유적 속성”과 “비공유적 속성”이란 개념으로 설명한다. 예를 들어, 거룩성, 선함, 사랑, 신실하심 등은 인간과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해서 공유적 속성이라고 한다. 반면, 자존하심, 불변하심, 전지하심, 전능하심, 편재하심, 영원하심 등은 인간과 공유할 수 없는 “비공유적 속성”이라고 부른다. 이 모든 것을 하나씩 다 살펴보는 것은 여기서 힘들고 가장 중요한 속성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당연히 “하나님은 빛이시다”라는 진술이다.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5-7)
창조의 첫째 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빛을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빛이시라고 한 것은 하나님이 친히 만드신 그 빛으로 되어 있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시고 그 빛 가운데 계신다는 뜻이고 누구든지 하나님을 본다면 빛을 보게 될 것이란 뜻이다. 하나님은 빛 가운데 계신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도 부연 설명하기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라고 했다. 하나님에게는 어둠이 조금이라도 없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실 때 “거룩하신 아버지”라 부르시면서 기도하셨다(요 17:11).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거룩에 대하여 그림 언어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히브리어 ‘거룩’을 뜻하는 ‘카도쉬’란 단어는 ‘구별되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그 만드신 피조물과 스스로 구별되신 분이시다. 또한 하나님은 인간세계에서 발견되는 그 어떤 어둠, 즉 죄의 요소를 발견할 수 없으시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피조물로부터 구별되신 분이시므로 하나님의 창조 또한 구별하시는 일이 되었다. 빛을 창조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누셨고, 물 가운데 궁창을 두어 물과 물을 분리하셨고, 밤과 낮을 나누셨다. 과학자들이 발견하는 ‘대칭원리’는 완벽하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잘 보여 준다. 인간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다. 왜냐면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불평하고 원망하는 이유는 스스로 눈이 멀어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이 죄를 짓는 것도 어둠에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요일 2:9-11)
하나님은 자신을 피조물과 구별하셨으며 또한 모든 어둠과 자신을 구별시키셨다. 이 어둠은 죄를 가리킨다. 그래서 하나님을 보는 순간 자신의 어둠을 즉시 보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거룩을 경험하는 순간 자신이 너무나도 추한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난 증거는 나의 변화로 증명된다. 즉, 내가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둠 가운데 행하지 않는 것으로 빛 되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증명이 된다.
하나님은 빛이시다. 하나님은 빛을 만드셨고, 빛 가운데 계신다. 하나님은 그 빛으로 가장 뛰어나고 가장 거룩한 천사들을 창조하셨고, 그들은 가장 가까이서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하는 모습을 묘사할 때 빛으로 묘사하고 있다.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또 보좌에 둘려 이십 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 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이 가득하더라”(계 4:2-6)
구약의 에스겔 선지자가 묘사한 하나님의 모습은 좀 더 자세하고 역동적이다. 에스겔 선지자가 묘사한 것 중에 일부만 보자.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내가 본즉 그 허리 이상의 모양은 단 쇠 같아서 그 속과 주위가 불 같고 그 허리 이하의 모양도 불 같아서 사면으로 광채가 나며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곧 엎드리어 그 말씀하시는 자의 음성을 들으니라”(겔 1:26-28)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하나님을 본 사람에게 묻는다면 이렇게 공통적으로 대답할 것이다. “하나님은 빛이시다.” 하나님은 그 만드신 빛 가운데 계신다. 그래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빛을 본다는 것이다. 빛은 여러 가지 스펙트럼이 있다. 파장이 짧을수록 푸른 빛을, 파장이 길수록 붉은 빛을 보인다. 빛의 스펙트럼에 가운데 부분만 보면 무지갯빛을 볼 수 있다. 또한 다양한 빛의 스펙트럼은 또한 다양한 음을 만들어 낼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 중에 가장 거룩한 존재들이 하나님 주변에 있고 가장 뛰어난 빛으로 창조된 천사들이 하나님을 섬긴다. 그들의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사람이 눈으로 인식할 수 있는 빛의 범위는 전체 빛의 스펙트럼 중에서 매우 좁은 구간만 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만드신 빛의 생명체인 천사들은 모든 빛의 영역을 다 볼 수 있다. 하나님을 그렇게 바라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을 볼 때에도 그렇게 바라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하나님을 본 사람들은 누구나 그 빛에 압도당하여 혼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사야, 에스겔, 다니엘, 사도 요한 등등. 피조물인 인간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정말 무서운 경험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셨을 때 줄을 쳐서 백성들이 하나님을 보려고 올라오지 말 것을 엄히 명령하셨다.(출 19:21, 24) 누구든지 하나님을 본 자는 죽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사실 물리적으로 빛의 일부분인 감마선을 잠시라도 쬐면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빛을 직접 보기를 원했던 모세에게조차 하나님은 이렇게 답하셨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20)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와 언약을 맺으시고 그를 통해 한 민족을 만드셨을 때 그 민족을 하나님을 가까이 섬기는 거룩한 백성으로, 세상에 하나님의 빛을 비추는 제사장 나라로 삼고자 하시는 계획을 구체적으로 나타내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신 것은 ‘거룩함’이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도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신 이유이다. 율법을 통해 이스라엘은 죄를 인식하게 되고 죄를 해결하게 되는 하나님의 원리를 알게 되었다. 즉, 어둠을 몰아내는 법을 배우게 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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