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과학, 그리고 우주

창조론 vs. 진화론

등불지기 2024. 8. 28. 21:23

 

 

 

여기서 창조론과 진화론의 논쟁에 관하여 생각해보도록 한다. 진화론은 1859년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에서 처음 제시된 세계관으로서 인류의 조상은 아담이 아니라 유인원이라는 주장이다. 이 이론은 무기화합물에서 유기화합물로 진화할 수 있다는 밀러의 실험(1952년)에 의해 검증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진화론에 의하면 오늘날의 인류는 우연히 무기물에서 단세포로, 단세포에서 점점 복잡한 생명체로, 결국 원숭이로부터 환경에 적응하기 위하여 진화하였다고 말한다. 양자역학이 본격적으로 태동하던 시기인 1925년 미국에서는 진화론 논쟁이 불붙었다. 학교에서 진화론 교육을 금지하는 법안(버틀러 법)이 통과되자 24살의 생물교사인 존 스콥스가 이 법에 도전하여 법정까지 끌고 갔다. 오랜 갈등 끝에 1968년 버틀러 법은 결국 폐지되었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창조론이 금지되고 진화론이 가르쳐지고 있다. 그러나 진화론 안에서도 다양한 이론이 있으며 최근에는 인류와 우주 만물이 고도의 지성을 가진 ‘지적 존재’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지적설계론이 진화론의 대항마로 제시되고 있다.

 

진화론에 대해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세 가지이다. 첫째, 진화론이란 세계관은 인류의 공동체성과 도덕주의가 붕괴되는 결과를 가져온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인간을 열등과 우등의 개념으로 구분함으로써 아파르트헤이트나 인종차별 혹은 히틀러의 홀로코스트 같은 인류 범죄를 정당화시켜 주는데 진화론의 우생학이 적극 사용되었다. 즉, 진화론은 인류 공동체성을 무너뜨린다. 둘째, 진화론에서 제시된 것은 ‘가설’이며 이 가설을 뒷받침하는 몇몇 실험 ― 예를 들어 무기화합물에서 유기화합물을 실험실에서 만들었던 밀러의 실험 ― 의 조건이 ‘공정성’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실험’이 존재하기에 과학적이므로 학교에서 가르쳐야 한다고 하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그 어떤 실험도 현실에서 입증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셋째, 원숭이에서 인류로 진화하는 것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적자생존의 본능이라고 설명하게 되면 물리 법칙에 모순이 생긴다. 열역학 제2 법칙인 엔트로피 법칙에 의하면 모든 만물은 질서에서 무질서로 진화하며 따라서 무질서도(degree of disorder)는 항상 증가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그 반대 방향인 무질서에서 질서로의 진화는 자연세계에서 결코 저절로 발생하지 않는다. 무기화합물에서 유기화합물이 된다든지, 혹은 원숭이가 오랜 세월을 거쳐 인류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명백히 엔트로피의 법칙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물리학적 사고방식에 따르면 단순한 구조의 물질이 고도의 복잡한 물질로 스스로 진화하는 것은 수억 년의 세월이 흘러도 불가능하다. 오히려 자연만물은 그 반대로 ‘진화’하는 것이 정상이다. 원숭이가 수만 년의 세월을 지나 복잡한 악보의 악기를 능수능란하게 연주하는 인류로 진화하는 것은 자연계에서는 결코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 또한 연료가 다 타⋁버리고 남은 재와 먼지들이 스스로 뭉쳐서 빛과 열을 내는 순도 높은 에너지가 되는 일도 수억 년의 세월이 흘러도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면 왜 창조론과 진화론이 충돌하는가? 그것은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진화론의 세계관은 무신론(atheism)이다. 반면 창조론의 세계관은 유신론(theism)이다. 무엇이 실재인가(what is reality)에 대한 대답으로서 무신론과 유신론으로 나뉜다. 따라서 유신론과 무신론의 관점 차이는 결코 해소될 수 없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세계관의 문제이므로 창조론과 진화론은 영원히 갈등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나는 이 갈등을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다. 유신론과 무신론은 서로 건너지 못할 강을 사이에 두고 있다. 문제는 유신론 내부에 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진화론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있다. 핵심은 자연세계에서 관찰되는 “변화”의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이다. 여기서 근본주의적 유신론과 유신론적 진화론으로 나누어진다. 변화를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일 것인가? 이것은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학문의 문제이다. 왜냐면 신앙은 실재를 다루고, 학문은 해석을 다루기 때문이다. 같은 세계관 아래 있는 학문의 영역에서는 서로 다양한 관점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나는 성경의 무오성(Biblical inerrancy)을 믿는다. 하지만 성경을 해석하는 인간이나 교회는 무오하지 않다고 믿는다. 그래서 개인이나 교회가 성경을 해석하고 체계화한 신학 자체는 무오한 것이 아니며, 그래서 언제나 새롭게 진술되어야 하고 개혁되어야 한다. 만약 어떤 ‘신학의 체계’가 무오하다고 믿는다면 이것은 오만이요, 독선이다. 특히 역사적 해석을 무시하고 문자주의에 빠지는 것을 가장 주의해야 한다. 그것은 과학도 마찬가지다. 성경이 무오하나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이 무오하지 않듯이 과학자가 실험을 통해 어떤 가설을 입증하여 세운 이론이라 할지라도 무오할 수 없다. 반증(disproof)될 여지는 항상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믿는 가운데 다양한 언어와 다양한 논리로 신념체계를 진술하는 ‘신학’에 대해서는 당연히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교회의 문제는 이러한 ‘학문적 자유’ 혹은 ‘학문적 관용’을 잃어버릴 때 발생한다. 즉, 자신이 가진 신념체계가 마치 성경 그 자체인 것처럼 확신하기 시작할 때 갈릴레오를 정죄하고 비난했던 루터처럼 행동하게 된다. 신학자들은 독선에 빠져서는 안 된다. 물론 과학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관찰이나 실험은 언제나 오류가 있을 수 있고 반증될 수 있다.

 

동일한 실재를 인정하는데 다른 해석을 내리는 경우, 즉 세계관 내 갈등은 1차적으로 그 개념을 다시 정의하는 데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창조를 ‘무에서 유로의 급진적인 도약’(creatio ex nihilo)으로 말한다면 진화는 ‘유에서 유로의 점진적 변화’를 뜻한다. 그러나 ‘무’와 ‘유’의 상태를 어떻게 정의하느냐를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창조’를 ‘무에서 유로의 급진적인 변화’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어떤 근거로 그러한 정의를 내리는지 말하지 못한다. 성경 어디에도 ‘완전한 무’에서 유로의 변화를 암시하는 구절은 없다.

 

오히려 성경은 ‘혼돈과 공허로부터의 변화’를 말하고 있다. 이것은 열역학 제2 법칙(엔트로피)과도 상통한다. 우주의 질서는 낮은 엔트로피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과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다. 성경 전체의 맥락도 마찬가지다. 창세기뿐만 아니라 성경 전반에 걸쳐 하나님의 구원을 창조와 연결하여 말하고 있는데 구원은 무에서의 구원이 아니지 않는가? ‘완전한 무’에서의 창조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본문(text)에서 지원을 받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셨을 때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출현’으로서의 창조임이 틀림이 없다. 왜냐면 ‘혼돈’은 빛이란 형태를 스스로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그 빛이 모든 물질들을 만들어 내는 변화를 이끌어 낸다면 그것은 창조인가 진화인가? 원자가 서로 결합하여 분자가 되고 그것이 물질이 되고 점점 변화하여 별이 되고 별이 빛을 내고 다시 별의 내부에서 각종 무거운 원소들이 만들어지고 초신성의 형태로 폭발하여 여러 행성들이 출현하고 여러 원소들의 먼지구름이 나타나고 그중에서 생명체에 필요한 물과 탄소화합물이 만들어진다면 이것은 창조인가 아니면 진화인가? 변화라는 과정만을 강조한다면 ‘진화’라고 하고, 그러한 변화가 저절로 된다고 믿는다면 ‘진화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생명과 의식과 같은 높은 수준의 질서가 저절로 만들어질 수 있을까? 진화론자들도 이러한 ‘변화’는 일상적인 세계에서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진화론자들은 모든 변화의 배후에 ‘신’은 없으며 ‘자연법칙’만이 있다고 믿는다. 철저한 무신론자였던 아인슈타인이나 스티븐 호킹이 ‘신’이란 단어를 사용했을 때는 그 의미는 인격적인 신이 아니라 단지 ‘자연법칙’을 의미했다. 진화론자들은 ‘그냥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 혹은 ‘자연법칙’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중력’이나 ‘중력파’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한다. 예를 들어 수소⋁원자로 구성된 가스층이 모여서 핵융합(nuclear fusion)하여 빛을 내는 항성이 될 수 있는 것은 중력 때문이라고 말한다. 생명 진화론자들은 중력파(gravitational wave)가 생명현상의 원인이라고 설명한다. 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현상을 그럴듯하게 설명하기 위해 어떤 미지의 힘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힘을 가지고 설명하려고 한다. 그것이 원래 그렇게 되는 것이 당연한 ‘자연법칙’이고, 자연법칙이 그들에게 ‘신’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신봉하는 ‘자연법칙’인 중력이나 중력파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양자역학의 최첨단 분야인 입자 물리학에서는 아직도 ‘중력’의 실체와 씨름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설명하지 못하는 그것을 그냥 원래 그렇게 작용하는 법칙이라고 에둘러 말한다. 반면 유신 창조론자들이나 유신 진화론자들은 그 변화의 배후에 ‘인격적인 신’이 있다고 믿는다. 중력이나 중력파는 관찰 검증될 수 있지만 ‘신’은 관찰되지도 실험대상이 되지도 못한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유신 창조론이나 유신 진화론을 ‘과학’의 범주에 넣지 않고 ‘종교’의 영역에 둔다.

 

여기서 자연법칙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내려야 하는지에 대해 문제가 생긴다. 엔트로피 법칙으로 설명하자면, 낮은 엔트로피에서 높은 엔트로피로 변화하는 것을 ‘자연법칙’이라고 다들 이해한다. 그러나 높은 엔트로피에서 낮은 엔트로피로 변화할 때 사람들은 그것을 ‘기적’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진화론자들은 그것도 ‘자연법칙’이라고 부른다. 수소가스가 모여 핵융합을 일으키는 항성이 되는 것은 내버려 두면 결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님에도 진화론자들은 그렇게 되는 ‘자연법칙’이 있다고 주장한다. 결국은 과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은 ‘신념’의 문제로 귀결된다.

 

반면 유신진화론자들은 그러한 변화가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렇게 변화하도록 최초의 특이점(singularity)에 변화의 능력이 전지전능한 신으로부터 부여되었다고 믿는다. 문제는 특이점이 아니라 변화의 시점에 ‘신의 존재’를 인정하느냐의 여부이다. 대체로 유신진화론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되 변화의 배후에서 ‘계속적으로 창조하는 신’의 존재는 인정하지 않는다. 만일 자연세계 혹은 우주 만물에서 관찰되는 어떤 ‘변화’가 자연적인 상태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 즉 높은 엔트로피에서 낮은 엔트로피로 변화하는 ― 방식이라면 나는 그것을 ‘진화’ 혹은 ‘변화’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 묻고 싶다. 낮은 엔트로피에서 높은 엔트로피로의 변화는 ‘자연법칙’이나 ‘변화’ 혹은 ‘진화’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으나 그 반대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라면, 그러한 변화가 이전에 없던 전혀 새로운 변화라면 이것은 ‘창조’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나는 하나님께서 모든 창조의 배후에 계신다고 믿는다.

 

거듭 말하지만 쟁점은 자연세계에 관찰되는 ‘변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달려 있다. 예를 들어 물을 담은 유리잔에 잉크 한 방울을 떨어뜨리면 어떻게 되는가? 한 방울의 잉크는 무질서한 형태를 그리며 점점 퍼져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우리는 이해한다. 그러나 반대로 흩어져 가는 무질서한 움직임이 마치 영화 필름을 거꾸로 되돌리듯이 하나의 잉크 방울로 모이는 것이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다고 상상할 수 있는가? 무질서에서 질서로 나아가는 과정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질서 그 자체로는 질서로 나아가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만약 자연계에서 그러한 이상한 현상을 보게 된다면 누군가 ‘초능력’을 발휘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혹은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왜냐면 그러한 현상은 ‘자연계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창조도 마찬가지다. 자연계에서 관찰되는 모든 변화를 창조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높은 엔트로피에서 낮은 엔트로피로의 변화, 무질서에서 질서로의 변화는 ‘창조’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죄와 저주에서부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큰일을 ‘창조’라고 성경 전체가 말하고 있다는 것이 이해가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유신진화론(Theistic Evolution)은 전통적인 유신론자들이 보기에는 창조론을 진화론에 맞게 수정한 타협한 사상이라고 여겨진다. 과학자들은 이것을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종교적 신념으로 바라본다. 반면 유신진화론에 의하면 하나님은 물질을 창조하셨을 때 진화능력을 부여했고 그에 따라 창조 후에 모든 생명체가 자연적인 과정을 통해 진화했다고 말한다. 즉, 하나님은 물질의 변화나 생물의 진화에 어떤 직접적인 개입을 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또한 유신진화론은 대체적으로 아담의 인류대표성과 인간의 원죄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의 유신진화론을 나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는 하나님의 ‘현재적인 창조’를 믿는다. 그리고 모든 인간이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을 믿는다. 하나님은 태초에 창조하시고 뒷짐 지고 계시는 그런 분이 아니다. 만물의 모든 ‘의미 있는 변화’에 주원인으로 개입하시고 다스리시는 인격적인 분이시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물질의 창조자로 인정하면서도 인간과 생명체의 창조에는 개입하지 않고 진화과정에 맡겨 두신다는 ‘유신진화론’을 나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굳이 표현하자면 나는 ‘유신진화론’이 아니라 ‘지속 창조론’을 믿는다.

 

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굳게 믿으며 지금도 창조사역에 깊이 관여하신다고 믿는다. 내가 받아들이지 않는 진화론은 만물이 스스로 변화한다는 그런 진화론이다. 참된 변화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진화론을 나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만 만물이 스스로 변화한다는 유신진화론보다는 지금도 계속 창조하고 계신다는 것을 굳게 믿는다. 창조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자. 만약에 이전에 없던 전혀 새로운 변화가 출현했다면 그것은 진화인가 아니면 창조인가? 두 개의 수소⋁원자가 결합하여 수소⋁분자가 되었다면, 이것이 저절로 된 것이라고 한다면 진화론적 설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저절로 일어나는 현상인가? 우주에 넓게 퍼져 있는 수소⋁원자와 헬륨 원자가 스스로 모여서 스스로 뭉쳐서 스스로 융합하여 빛을 내는 것인가? 수십억 년의 세월이 지나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고 초신성이 되어 폭발하여 우주에 잔해를 퍼뜨리고 그 잔해는 다시 저절로 모여서 또 다른 별이 되고 행성이 되고 단순 생명체가 되고 그 생명체가 스스로 진화하여 문명을 건설하는 지적 생명체가 되는 것인가? 과연 그 모든 ‘새로운 질서의 출현’이 저절로 된다고 믿는 것인가? 그러한 신념을 과학적이고 이성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사실은 종교적 신념을 갖고 있는 것이다.

 

천체 물리학자들은 중력이 작용해서 그렇게 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은 중력이 어디서 오는지 중력이 도대체 무엇인지 아직도 설명하지 못한다. 그들은 그것이 자연스럽다고 “믿는다.” 결국 ‘신념’의 문제이다. 그러나 나는 자연계에서 저절로 일어나는 변화 중에 의미 있는 변화로서 이전에 없던 것이라면 창조라고 믿는다. 나는 모든 의미 있는 변화의 힘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저절로 빅뱅이 일어났다고 믿지 않는다. 무질서한 세계는 결코 스스로 질서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그리고 저절로 항성이 생기고, 저절로 초신성이 생기고 행성이 생기고, 저절로 높은 수준의 지적 생명체가 생겨났다고 믿지 않는다. 내가 받아들이지 않는 진화론은 하나님을 부정한 채 물질이 스스로 의미 있는 (즉, 이전에 없던 질서를 만들어 내는)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믿는 그런 믿음을 나는 거부한다.

 

나는 하나님의 창조를 완전한 무에서 유로의 변화로 국한하지 않는다. 유에서 유로의 변화라 할지라도 그것이 전혀 새로운 국면의 변화라면 그것은 창조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땅이 혼돈하며 공허한 가운데” 빛을 창조하셨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혼돈과 공허는 그 자체로 빛을 결코 만들어 내지 못한다.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가 스스로 그리고 우연히 양자세계, 즉 빛의 세계를 만들어 내었다고 믿지 않는다. 물질은 스스로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 내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물리적으로 볼 때 무질서에서 질서를 만드는 힘은 반드시 외부에서 와야만 한다. 내버려두면 작용-반작용이 영원히 반복될 뿐이다.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이 모든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 내신다.

 

창조과학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창조과학주의자들’은 성경의 무오성을 믿으며 창세기 1장의 하루를 문자적인 의미의 24시간으로 보고 있고, 창세기의 창조기사를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입장이다. 즉 창조론을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성경을 ‘과학책’으로 보는 견해나 창세기의 문자주의적 해석에 관하여 다소 부정적이다. 어느 정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있으나 과학적 지식을 전달하기 위한 것은 성경이 의도한 바가 아니다. 성경은 계시의 책이므로 계시된 때의 역사적 문법적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내가 볼 때 창조과학의 최대 문제는 진화론에 대한 배격과 전투에 너무 심취하여 우주 만물에 다양하게 나타나는 ‘변화’에 대해 소홀하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이 생물의 현상과 우주 만물의 현상을 관찰하면서 찾아낸 ‘변화’에 대한 관측 결과에 대해 침묵하면 안 된다. 적극적으로 변화를 수용해야 한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강조에 있어서 더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현재적 창조에 대해 더욱 강조할 필요가 있다. 또 한 가지 창조과학자들은 지구의 나이에 관해 ‘젊은 지구설’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지구의 나이는 6,000년 정도라고 믿는다. 그러나 창세기 1장을 다시 보라. 하늘의 광명체가 있기 전에 땅이 먼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오래된 지구설’을 믿는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의미 있는 변화’는 물리학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높은 엔트로피’(무질서 단계)에서 ‘낮은 엔트로피’(질서)로 나아가는 변화이다. 하나님은 혼돈과 공허에서부터 빛을 창조하셨다. 혼돈(카오스)은 극도의 무질서라면, 빛은 극도의 질서이다. 우주(코스모스)는 혼돈(카오스)으로부터 창조되었다. 혼돈은 그 자체로 질서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창조’이다. 물리학자에게 있어서 완전한 ‘무’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대기가 비어 있고, 우주가 진공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공간은 ‘질서 정연한 힘의 원칙으로 가득 찬 공간’이다. 자연 만물은 낮은 엔트로피에서 높은 엔트로피로 점진적으로 변화하려고 한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그 역순으로는 변화할 수 없다. 참된 변화, 무질서에서부터 질서로의 변화, 혼돈에서 빛으로의 변화는 하나님의 창조 솜씨이다.

 

그런 의미에서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과 제임스 콥의 과정신학에서 말하는 그런 개념에 나는 그리 깊은 감명을 받지 못한다. 왜냐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의 전능성을 강조하느라 변화를 무시하거나 혹은 변화를 너무 강조하여 하나님의 전능성을 포기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변화에 대해 경직된 반응을 보이는 까닭은 지나치게 ‘완전한 진공’에서 유로 나아가는 변화만을 ‘창조’라고 여기는 고정관념 때문이다. 기독교 신학은 ‘변화’에 대해 유연한 생각을 할 필요가 있고 창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모든 ‘의미 있는 변화’를 창조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물질은 스스로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 낼 힘이 없다고 믿는다. 그 모든 변화의 주체는 바로 전지전능한 하나님이심을 믿는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과거에 창조하시고 지금은 뒷짐 지고 서 있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지금도 창조의 일을 하고 계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지금도 수많은 항성과 행성을 창조하시며 은하들을 창조하고 계신다고 믿는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생들도 창조하고 계시며 인생들의 삶 가운데서도 중생과 거듭남, 그리고 성화와 견인이라는 참되고 의미 있는 변화, 즉 창조의 일을 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시며 전지전능하신 창조주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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