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설교

요한계시록 강해(22)-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계7:9-12)

등불지기 2012. 3. 3. 17:48

요한계시록은 환난 중에 있는 교회들에게 보내진 편지로서

환난 중에 있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믿고 찬송하며 인내할 수 있도록 기록되었습니다.

이 기록목적을 잊는다면 계시록 해석의 방향을 잃고 본문의 숲 속에서 방황하게 될 것입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요한계시록 강해(22)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

 

본문:계7:9~12

 

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7:10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7:11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7:12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 하더라

 

계시록 7장에서 요한은 두 가지 환상을 봅니다. 이 환상들은 6장에서 제기된 질문인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에 대한 답변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7장은 “오직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만이 구원 받게 될 것이며,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작정한 자들은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게 될 것”이라고 대답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대해 보았고, 그것이 우리의 영구한 구원의 기초라는 사실에 대해 배웠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구원이 사람의 결단과 의지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결단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을 겁니다. 그러나 매우 안타깝게도 로마 카톨릭에서는 구원의 확신 교리를 마귀적인 것으로 정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행위나 결단이나 노력에 달린 것처럼 가르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기를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은 완전하며 또한 완벽한 것이어서, 그리스도의 복음에 반응하며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듣고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자들을 하나도 잃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들으며, 목자는 자기에게 나아오는 양들을 결코 추방해버리거나, 잊어버리거나, 혹은 잃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두 번째로 요한이 보게 된 환상은 구원받게 될 당신의 백성들을 다른 측면에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첫째 환상은 하나님의 구원이 완전함을 강조하고 있다면, 둘째 환상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이 위대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도 하나님의 구원이 어떤 특성이 있는지 함께 본문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구원의 보편성입니다.

사도 요한이 두 번째 환상을 통해 가장 먼저 보게 된 장면이 무엇입니까?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을 보게 되었습니다.(9절) 하나님의 구원은 어느 특정한 민족이나 족속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땅의 모든 족속에게 미칠 ‘좋은 소식’인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환상을 보면서 영적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사실 이 환상은 하나님의 언약이 신실하게 성취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그에게 주신 약속이 무엇입니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창12:1-3)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약속의 땅으로 부르시면서 주신 약속입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기 전 11장에는 바벨탑 사건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각 나라와 족속과 방언으로 열방에 흩어지는 사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언어를 흩어버리고 여러 민족과 족속으로 흩으신 직후에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들의 교만과 죄로 흩어진 그들을 다시 불러 모으기 위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을 아는 한 민족을 일으키기를 원하셨고, 그 민족을 통해서 흩어진 민족들에게 찾아가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통해 큰 민족이 일어났지만 우리가 부르는 유대민족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을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유대민족에서 그리스도가 나셔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건설하기로 선포하시고 새 율법과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이스라엘의 의를 위해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새 이스라엘의 기초가 되는 제자들을 불러 모으셔서 그들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당부하심으로써 아브라함의 언약이 교회를 통해 성취되는 것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족속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기 전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성령이 충만히 임할 때 그들은 방언을 말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큰 일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각 족속의 말로 선포된 하나님의 큰 일은 흩어진 백성들을 다시 불러 모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것입니다. 성령이 임함으로써 이제 흩어진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모으려는 하나님의 위대한 행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교회는 영적 이스라엘로서 아브라함의 복을 전 세계 열방 민족들에게 전하는 복의 근원으로 세워진 그리스도의 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환상은 오늘 모든 지상교회가 세계선교를 힘써 행할 때 마땅히 품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본질적으로 선교지향적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다니셨듯이 그리스도의 몸 역시 잃어버린 자들과 잃어버린 민족과 족속들을 향해 부담감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선교가 교회가 하는 역할의 전부가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선교만을 외칠 수는 없습니다. 교회는 기도하며 예배하며 교제하며 떡을 떼며 말씀을 가르치며 세례를 베풀며 구제하는 일을 게을리 할 수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건강한 몸을 이루는 일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몸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침을 받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선교로 이어지지 않으면 비대해지고 비만해지는 것입니다. 물이 고여 있고 흐르지 않으면 반드시 썩어버리고 냄새가 진동합니다. 물이 흘러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지경 밖에 있는 불쌍한 영혼들과 족속들에 대해 부단히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정체되고 결국 썩는 냄새가 나는 연못 공동체로 전락하기 쉽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기만의 문제 속에 갇혀 지내지는 않습니까? 자기 일에만 바쁘고 죽어 가는 영혼들과 족속들에 대해 관심을 어느 정도로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의 지경을 넘어가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까?

그런 점에서 저는 신약의 두 교회를 모델로 생각합니다. 첫째는 안디옥 교회입니다.(행13장) 안디옥 교회는 문화적으로 개방적인 교회였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다양한 구성원들이 모인 공동체였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안과 및 사울이라”(행13:1) 저는 건강한 교회의 특징이 다양성이라고 믿습니다. 특정 계층의 사람만이 모인 교회도 교회지만 그러나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한 몸을 이루었을 때 비로소 강력하게 선교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한국은 문화적으로 폐쇄적인 나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더욱 더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열방을 향해 빚진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리고 열방에 대해 빚진 자의 마음으로 계속 정탐여행을 나가야 합니다. 이번 티벳 선교 역시 그러한 빚진 자의 마음을 가진 자들이 많이 참여했으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는 빌립보 교회입니다. 빌 4자을 읽어보시면 빌립보 교회가 얼마나 선교지향적인지 알 수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아직 자립하지도 않은 개척 초기부터 선교에 물질과 기도로 교제하기 시작했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이 이렇게 복음의 초기부터 선교에 힘쓰게 된 것은 큰 환난 속에서 복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환난 속에서 복음을 받은 자들이 사실 선교사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국교회가 세계에 미전도지역과 오지에 가장 많은 선교사들이 나가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둘째는 구원의 위대함입니다.

요한 사도가 두 번째로 본 장면은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였습니다.(9절) 지난 시간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십사 만 사천이란 숫자를 들었습니다. 이 숫자는 문자적인 의미는 아니며 하나님의 관점에서 서술되어진 숫자인 것입니다. 요한은 단지 천사를 통해 숫자를 듣게 되었는데 이제 실제로 보니까 그 수는 가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천문학적인 무리였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144,000명과 이번에 언급한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사실상 동일한 대상이며, 영적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십사 만 사천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헤아릴 수 없는 무리는 사람의 관점에서 서술한 것입니다. 사실 이 두 번째 장면 역시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루는 아브라함을 환상 중에 장막 밖으로 불러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요한이 보았던 환상과 비슷한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15:5) 이 약속을 받을 때 아브라함은 이미 자신이 사라를 통해서 자식을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환상 중에 무수한 별들이 “아버지 아브라함이여...”라고 외쳐대는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위대하심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약속을 굳게 신뢰하였습니다. ‘비록 지금은 아들을 낳을 수 있는 나이가 훨씬 지났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신실하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나님의 약속을, 아니 약속하신 하나님을 굳게 믿었습니다. 약속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를 바라보시고서 하나님은 그를 ‘의롭다’고 칭하셨습니다. 그리고 동일한 믿음으로 우리는 의롭다고 감히 칭함을 받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보배로운 약속을 믿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십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 역시 이러한 약속을 상기했습니다. 야곱이 가장 힘들고 외로우며 곤고할 때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게 되었습니다. 다른 것을 붙잡을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상황은 20년 동안 섬기던 외삼촌 라반을 떠나 형 에서를 만나기 위해 가던 중이었습니다. 얍복강 나루터에서 야곱은 진퇴양난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야곱은 필사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게 되었습니다.“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정녕 네게 은혜를 베풀며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창32:12) 야곱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을 때 하나님은 야곱을 붙잡아 주셨습니다. 사실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셨을 때부터 이미 붙잡아주셨으며 또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에 참여하며 그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들로 부름 받았음을 알고 계십니까? 어떤 약속입니까? “하늘의 별과 같이 능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심히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창조하시려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계획 속에 여러분 자신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견고하게 붙잡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구주의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리라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붙잡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십자가에 높이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마다 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이 바라본 이 엄청난 무리 속에 우리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살아갈 때 세상을 이기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없이 우리는 도저히 세상을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수많은 무리들 중에 서 있는 내 모습을 그려보십시오. 그 모습은 믿는 자의 것입니다.

셋째로, 구원에 대한 명확한 정의입니다.

사도 요한이 세 번째로 바라본 장면은 그 수많은 무리들의 모습이었습니다.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이것은 승리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완벽한 정의입니다. 여러분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이 구원이란 어떤 것입니까? 첫째, 이 구원은 의의 구원입니다. 이 수많은 무리들은 다 흰옷을 입고 있습니다. 계시록에서 흰옷이란 단어가 많이 나오는데 흰옷은 의와 성결을 가리킵니다. 사람은 범죄함으로써 이 옷을 박탈당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죄인들은 벌거벗은 모양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자신의 영적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 여러 가지로 은폐, 엄폐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종교의 모양으로 자신의 수치를 가리기도 하며, 쾌락과 탐닉 뒤에 자신을 숨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범죄한 사람에게 ‘가죽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죄 없는 동물을 천사의 손을 빌어 죽이셔야 했습니다. 이것이 구속에 대한 최초의 계시였습니다. 이 계시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기 전에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의롭다고 칭해주시는 것입니다. 이 ‘의’는 사람이 노력하여 결코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이 ‘의(義)’는 오직 하나님이 위에서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영적 수치를 가리기 위해 의의 옷을 입혀주시는 사건, 은혜의 날개로 우리를 덮어주시는 은총, 근본적인 수치를 제거하시는 사건, 바로 이것이 우리가 경험한 구원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의(義)의 옷(衣)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우리의 구주는 우리의 모든 불의를 당신의 것으로 가져가셨고, 당신의 피로써 의의 옷을 만들어 우리에게 입혀주셨습니다. 다윗은 이 은혜를 잘 고백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32:1,2) 여러분은 이 죄사함의 은혜를 알고 계십니까? 오, 이 죄사함의 감격! 여러분은 경험해보셨습니까?

그리고 그 수많은 무리들은 또한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있었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는 승리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도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보고 있는 장면은 승리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 승리적 교회는 곧 천상의 교회요, 무형교회며, 동시에 하늘에 앉혀진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이 무리는 죽은 성도들만 가리키는 것도 아니며 또한 미래의 어느 시점을 가리키는 것도 아닙니다. 시점은 현재입니다. 현재 하나님은 당신의 완전한 교회를 승리한 교회로 보고 계십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승리한 교회에 대해 잘 말하고 있습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사도 바울은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다고 담대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죄악 많은 땅에서 살면서 우리는 하늘을 보아야 합니다. 지상교회, 늘 처절하게 죄와 마귀와 육신과 싸워야 하는 전투적 교회, 흠도 많고 책망 받을 일도 많은 교회를 보면서 우리는 동시에 흠 없는 하늘의 교회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계시록을 계속 읽어가다 보면 땅에 있는 자들과 하늘에 있는 자들이란 표현이 자주 나오는 것을 봅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은 죽어서 천국에 간 자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구주의 복음을 듣고 믿어 의롭다 함을 받은, 그래서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을 굳게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전히 우리는 이 땅에서 고생하며 신음하며 피 흘리기까지 전투하며 처절하게 싸워나가지만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하늘의 영광스런 그 수많은 무리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한 생각은 오직 믿는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땅에서 살지만 하늘을 바라보는 자가 되십시오. 전투적인 교회에 다니지만 그리나 승리한 교회의 일원으로 서 있는 자신을 바라보십시오.

또한 그 수많은 무리들은 또한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 있습니다. 계시록 6장에서 “누가 능히 서리요?”라고 질문했는데 진노하시는 하나님과 어린 양 앞에 당당하게 서 있는 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이렇게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 앞에 당당히 서 있을 수 있는 단 하나 이유는 하나님의 의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바로 이것이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낯을 대면하고 있다는 것, 어린양 앞에 당당히 서 있을 수 있다는 것, 바로 이것이 구원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구원 받으셨습니까? 그리고 이 수많은 무리들 가운데 바로 나 자신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상상하실 수 있습니까? 이 얼마나 황홀합니까? 우리가 받은 구원에 대해 이토록 황홀해보신 적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어쩌면 여러분은 아직도 진정한 구원이 무엇인지 맛보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여러분, 이 위대하고 놀라운 구원을 보십시오. 이 구원을 맛보십시오. 이 수많은 무리들 중에 끼여 있는 여러분 자신을 찾지 못한다면 다시 한 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귀 기울여 보십시오. 죄인들을 하나님 앞과 어린양 앞에 당당히 세우게 하는 복음에 대해 주목해보십시오. 복음은 하나님과 어린양 앞에 죄인들을 세우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복음은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자각하고 오직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볼 때 여러분 안에서 능력으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넷째, 구원의 주도권입니다.

흰옷을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하나님과 어린양 앞에 서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모두 큰 소리로 외치고 있습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이 우렁찬 찬양은 온 하늘을 울리고 있습니다. 하늘의 성도들은 어떻게 찬양하고 있습니까? 손에 든 종려나무 가지를 마구 흔들면서 큰 소리로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왜 큰 소리로 찬양할까요? 왜냐면 그들은 큰 환난 속에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이 얼마나 큰 지를 잘 알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이 영광스러운 하늘에 우리가 서 있기 때문에 우리는 큰 소리로 찬양해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찬송소리를 결코 낮추지 마십시오. 결코 모기 만한 소리로 찬송하는 것을 겸손의 미덕인양 간주하지 마십시오. 왜 농구장과 야구장에서는 자기가 좋아하는 팀과 선수들을 바라보면서 마구 소리치며 손을 들어 환호하면서 교회 와서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까? 교회에서 그렇게 강렬하게 찬양하면 많은 사람들이 정신 나간 광신도들 정도로 취급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들의 시선이 두려워서 침묵하십니까? 우리가 받은 구원이 그렇게도 작은 것인가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그렇게도 작은 것입니까? 크게 소리 내십시오. 큰 소리로 그분의 은혜에 화답하고 반응하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며 또한 특권입니다. 이 찬송소리에 마귀는 벌벌 떨면서 놀라 도망갈 것입니다. 힘 있는 찬송은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무기입니다. 삼상16:23에, “하나님이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신은 그에게서 떠나더라”고 했습니다. 또, 왕하 3:15에, “거문고 타는 자가 거문고를 탈 때에 여호와께서 엘리사를 감동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또 대하20장에 보면, 여호사밧과 모압-암몬 연합군이 싸울 때 노래하는 자들을 선택해서 그들에게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찬송하게 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들이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시도다”라고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개입하셔서 적군들을 패하게 하셨습니다.(대하2):22) 또,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바울과 실라의 찬송이 감옥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할 때에 옥터가 움직이고 옥문이 열리며 쇠사슬이 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찬송은 여러분의 능력입니다. 찬송은 여러분의 특권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을 분명히 하십시오. 찬송은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인가 받아내려는 수단이 아닙니다. 찬송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에 대한 반응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로우신 일에 대한 성도의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만약 반응이 아니라 어떤 축복을 얻기 위한 방법이 된다면 예배의 중심은 하나님이 아니라 여전히 나 자신입니다. 그것은 참된 예배라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그들은 무엇을 찬양하고 있습니까? 받은 구원에 대해 감사하기보다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영광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점입니다. 구원을 받아서 감사해서 찬양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때문입니다. 찬양의 근거나 능력이 자신들에게 있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들이 찬양하는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10절) 환난 가운데서도 끝까지 지켜주시고 함께 하신 전능하신 하나님! 단지 환난에서 벗어나게 하신 것뿐만이 아니라 영광스런 승리자로 세우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 놀라운 구원이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이 주도하시며,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기 때문에, 구원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 때문에 하늘의 성도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감격으로 우렁찬 소리로 최대한 힘을 다하여 소리를 높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소리를 높이더라도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찬양소리를 높이게 하는 것은 우리의 감정도, 우리의 필요도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성도들이 부르는 찬양입니다. 여러분은 이 찬양소리를 들어보셨습니까? 이 감격스런 찬양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누구에게 이 큰 소리로 찬양을 드립니까? 우리의 구원을 주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극한 환난에서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른 예배와 바른 찬양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해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위해 이렇게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19) 그래서 우리의 찬양과 예배가 하늘의 성도들이 드리는 찬양과 예배로 회복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야 하며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의 크기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을 맺습니다. 여러분이 이 시간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점검해보십시오. 다시 말하건대 찬양과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으려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은혜로이 거저 주신 약속들과 크신 능력으로 구원하신 일, 그리고 그 놀라운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이 구원을 홀로 주도하시고 크신 능력으로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반응이 아니라 어떤 축복을 얻기 위한 방법이 된다면 예배의 중심은 여전히 나 자신이 되는 것이며 생존하시는 하나님은 소외되신 것입니다. 그것은 참된 예배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어떠하심 때문에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위대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힘을 다하여 소리를 높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높으심 때문에 우리는 기쁨에 겨워 마구 소리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의 무수한 무리들 가운데 끼여 있음을 알기에 손을 흔들어 환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하늘의 자리에 우리가 이미 참석했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큰 소리로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예배와 찬송에서 여러분의 소리를 낮추지 마십시오. 큰 소리로 그분의 은혜에 화답하고 반응하십시오! 천사들 역시 우리의 찬송에 함께 화답할 것입니다. 천사들의 화답찬송을 보십시오. 처음 ‘아멘’은 성도들의 찬양에 화답하는 것이며, 두 번째 ‘아멘’은 7가지 찬양에 대한 화답이다.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 우리의 찬양이 수단입니까? 아니면 화답입니까? 응답 혹은 화답이라면 도대체 무엇에 대한 화답입니까? 자신의 즐거움과 기분발산을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구원의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영광과 위엄에 대한 화답입니까?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을 돌리기에 지극히 합당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찬송의 이유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보배로운 피로 우리를 사셔서 하나님 아버지를 위한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찬송의 제목입니다. 아멘.

 

구주를 생각만 해도 이렇게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대에야 얼마나 좋으랴.

만민의 구주 예수여 귀하신 이름은 천지에 있는 이름 중 비할 데 없도다.

참 회개하는 자에게 소망이 되시고 구하고 찾는 자에게 기쁨이 되신다.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주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사랑의 구주 예수여 내 기쁨 되시고 이제로부터 영원히 영광이 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