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요한계시록 강해(23)
흰 옷 입은 자들
본문:계7:13~17
7:13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7: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7: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7:16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7:17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오늘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볼 것은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중에 자신이 절대로 결백하며 깨끗하다고 주장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자신이 자신을 바라보아도 부끄러운 것이 많다면 하물며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오죽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눈에는 명랑한 달도 깨끗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이 스스로 풀기 어려운 최대의 문제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죄 많은 인간이 어떻게 절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설 수 있겠는가? 오늘 본문은 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성경에서 흰옷을 입은 자들은 의인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그 놀라운 자격을 얻을 수 있었을까요? 이것이야말로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최대 최고의 기쁜 소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천상의 장로는 요한에게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이며 어떻게 흰옷을 입게 되었는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들이 누굽니까? 먼저, 그들은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큰 환난’은 무엇을 가리킬까요? 사람이 살면서 겪게 되는 크고 작은 시련을 가리킬까요? 사람이 살면서 나름대로 ‘큰 시련’을 겪어보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어떤 사람이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이야기한다면 꼭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어떤 일로 어려움을 겪으셨는지요?” 그리고나서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별거 아닌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어떤 친구는 사귀던 자매와 헤어진 것을 가지고 자기 인생에서 맛보았던 환난 중에 가장 큰 환난이라고 호들갑을 떱니다. 제자훈련을 시작할 때 가장 먼저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 간증하게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는 말하지 않고 대신 자신이 어떻게 힘들게 살아왔는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합니다. 부모님 사업이 파산하고, 집이 경매로 넘어가고,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그래서 이리저리 이사 다니고, 등등 이야기합니다. 그게 정말 큰 환난이었습니까? 제발 좀 엄살 그만 부리십시오. 제발 힘들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저처럼 30번 넘게 이사해보셨습니까? 다음 주에 저는 또 이사합니다. 이사할 때마다 저는 인간적으로 서럽습니다. 언제까지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으로 가야 하는가? 내가 참으로 안식할 곳은 어디인가? 그래도 저는 힘들다고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 이사할 때마다 저는 오히려 하늘나라의 영원한 집을 생각할 수 있어서 참 감사합니다. 땅에 있는 집은 내 집이 아닙니다. 마음껏 책을 사서 좋은 환경에서 공부해보지 못한 것이 서럽다고 느낀 적은 있어도 제가 ‘큰 환난’을 지나고 있다고 생각해보진 않았습니다. 그런 것들 가지고 힘들다고 ‘큰 환난’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의 고난을 아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것들은 환난의 축에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큰 환난’은 그리스도의 받으신 고난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큰 환난”이라고 말씀할 때 그 의미는 인생들이 살아가면서 겪는 나름대로의 시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큰 환난’입니다. 이것은 보다 깊은 의미의 환난입니다. 이것은 인생들이 하나님의 크신 진노를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종말의 때가 사실은 하나님의 진노의 때임을 아는 것입니다. 죄인들이 자신의 죄 때문에 겪는 환난을 의미합니다. 자기 자신의 죄 때문에 어떤 환난을 겪어보셨습니까?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겪는 고통입니다. 이 환난은 일반적인 환난이 아닙니다. 죄와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크신 진노를 가리킵니다. 본문에서 “큰 환난에서 나온다”는 말씀은 이것을 깨닫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 환난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세상의 적대감 때문에 발생하는 환난입니다. 이 환난을 당한 사람이 의롭다함을 얻으며,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은 반드시 이 환난을 겪게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을 읽어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떤 말씀을 주셨습니까? 자신이 떠나감으로 제자들에게 임할 고통을 예언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요16:20)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세상의 눈총을 맞아보지 않은 사람은 아직도 그리스도의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누가 흰옷을 입은 자들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해 장망성을 떠나서 천성을 향해 도망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어떻게 흰옷을 입을 수 있었습니까? “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14절)고 하였습니다. 이 의의 옷은 우리의 노력이나 수고나 어떤 공로로 만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 옷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씻어 희게 한 옷입니다. 사람이 만드는 의의 옷은 다 누더기와 같고 냄새나는 걸레와 같습니다.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사64:6)라고 했습니다. 이 옷은 전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공로로 덧입혀주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의인’이라고 할 때 그 의가 자신이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의인은 오직 하나님이 창조하십니다. 의인은 위에서부터 태어나는 것입니다. 흰옷은 의의 옷을 가리킵니다. 의의 옷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 만드신 옷입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도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그 의를 선물로 거저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로 받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비슷한 환상을 보았습니다.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매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슥3:3-5)
흰옷은 오직 하나님 한분만이 입혀주십니다. 여러분, 누가복음 15장에 탕자의 비유를 보십시오. 집나간 탕자가 회개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그 아들의 누더기 옷을 벗겨주고 새 옷을 입혀주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옷을 깨끗이 빠는 것은 매우 익숙한 경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자기 백성을 만나시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옷을 빨아야 했습니다.(출19:10) 야곱은 유다에 관한 예언에서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창49:11)라고 했습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사1:18) 자신의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 사람은 나뭇잎을 준비하였지만 하나님은 피가 듣는 가죽옷을 입혀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흰옷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공로로 만드는 것입니다. 내 노력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행하신 그 은혜로우신 일들을 참으로 믿고 신뢰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거저 입혀주시는 은총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주목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그 피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세우게 합니다. 자기의 노력과 공로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하는 자는 영원히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면 흰 옷 입은 자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이 살고 있는 주소는 어디입니까?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15절) 그들의 위치는 하나님의 보좌 앞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언약사상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의롭다하심을 받은 자는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자들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같은 말을 했습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2:4-6)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것입니다. 왜냐면 그리스도께 자신의 전부를 얹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죽으실 때 나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은 곧 내가 부활한 사건이며,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셔서 하늘 보좌에 좌정하신 사건은 우리가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 보좌 앞에 서게 된 사건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 모든 은혜로운 일은 우리가 잘 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피 흘려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어린양의 피가 우리를 의롭게 합니다. 다른 어떤 것도 우리를 의롭게 하지 못합니다. 어린양의 피가 우리를 의로운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어린양의 피가 우리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분의 의가 없으면 우리가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하고 아무리 많은 노력으로 착하게 살아가려고 몸부림친다 할지라도 우리는 사실상 벌거벗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를 죄에서 깨끗케 하십니다.(요일1:7) 그분의 흘리신 피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롬3:25) 그 피 때문에 의롭다하심을 얻었고, 그 피 때문에 그 크신 진노에서 구원을 받습니다.(롬5:9)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 값을 다 지불하셨고 그래서 우리는 자유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엡1:7) 어떻게 이 모든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까?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1:19)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신분과 우리의 위치를 정확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이 새로운 신분과 지위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그런 여타 종교와 다릅니다. 언제나 이러한 신분과 위치에서부터 우리가 어떻게 행할 것인지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여러분 자신의 신분을 명확히 하십시오. 여러분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아십시오. 성경은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자들은 지금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 있습니다. 그들은 지상에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살고 있지만 그들의 진정한 위치는 바로 하늘입니다. 말 그대로 ‘하늘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렇게 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렇게 느끼지 못하겠지만 하나님이 보시는 바로 그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골3:1-4)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가 당면한 삶의 사소한 문제들 앞에 호들갑을 떠는 것을 잠시 중단해야 합니다. 엄살을 피우는 것을 중단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기까지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우리는 잠시 잠잠해야 합니다. 그리고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 말입니다. 우리의 신분이 무엇이며, 우리의 위치가 무엇인지 말입니다. 성경은 오늘 분명히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흰옷을 입은 자들로서 하늘 보좌 앞에 있다”고 말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시고 살아가십시오. 내가 누구며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분명히 하십시오. 즉, 신분과 위치에 대한 지식을 확고히 하십시오. 그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그러면, 흰옷을 입은 자들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라고 했습니다.(15절) 여기서 말하는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그런 건물이 아닙니다. 의인들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야 합니다. 왜 교회에 나옵니까?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교회에 나가야 할 이유에 대해 몰라 당황하고 있습니다. 대답은 간단합니다. “그곳이 내 몸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에서 자신을 찾았던 요셉과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그곳이 내 집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내 집에 가는 데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교회에 가는 것을 자기 집에 가는 것보다 더 편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교회를 몸으로 여기고 계십니까? 아니 여러분의 집으로 여기십니까?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들은 몸 안에서 밤낮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의인들은 언제나 하나님을 섬기는 데 대한 부담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높여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무엇인가 유익을 얻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자체가 그들의 즐거움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즐거워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은 하나님을 참으로 기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무엇인가 베풀어주실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의 마음에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말씀이 거하시기 때문에 그들은 그리스도로 만족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자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교회에 오는 것 자체가 목적이지 교회에 와서 무엇을 얻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거하지 않는 사람들은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합니다.(딤전6:5절) 신앙생활을 어떤 수단으로 생각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 교회에 나오신다면 여러분은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은혜 받기 위해 교회에 나오는 것을 정죄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는데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에게서 돌아서라고 성경은 말합니다.(딤후3:5) 신앙생활은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정작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지 못할 때 우리는 다툼과 변론과 언쟁과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과 침륜 곧 부도덕한 삶과 해로운 정욕으로 떨어지기 쉽습니다.(딤전6:3-10) 하나님을 섬기는 것의 의미를 분명히 아셨습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또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묻는 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주님” 이것이 곧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섬기십니까? 예배를 즐기십니까?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십니까? 하나님의 뜻을 묻고 계십니까? 여기 흰옷 입은 자들은 밤낮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 본문을 보십시오. 흰옷 입은 자들이 누리고 있는 은총을 보십시오. 흰옷 입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보호막이 되어 주십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15절) 여기 ‘장막’이라는 단어는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우 친숙한 단어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치시는 장막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은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장막을 치셨습니다. 여기서 장막은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임재의 흔적을 늘 보고 맛볼 수 있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러한 은혜가 다시 한 번 종말에 있을 것이라고 예언해 왔습니다. “그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 그 땅의 소산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를 위하여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요 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곧 예루살렘에 있어 생존한 자 중 녹명된 모든 사람을 거룩하다 칭함을 얻으리니 이는 주께서 그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케 하실 때가 됨이라. 여호와께서 그 거하시는 온 시온 산과 모든 집회 위에 낮이면 구름과 연기, 밤이면 화염의 빛을 만드시고 그 모든 영광 위에 천막을 덮으실 것이며, 도 천막이 있어서 낮에는 더위를 피하는 그늘을 지으며 또 풍우를 피하여 숨는 곳이 되리라”(사4:2-6) 그 영광의 천막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 가운데 나타났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계21:3) 흰옷 입은 자들은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지날 때 보게 될 것입니다. 특히 구주의 이름으로 핍박을 받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장막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앞서 가신 그리스도께서 많은 영광을 보여주시면서 낙심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기뻐하고 계속 따라오라고 하시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장막을 덮어주시지 않는다면 아마도 이들은 따가운 햇볕에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수많은 핍박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흰옷 입은 자들은 하나님이 쳐주신 장막 때문에 큰 해를 입지 않고 좁은 길을 갔습니다.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광야 이스라엘 백성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지켜주시고 인도하셨던 하나님께서 지금도 그리스도인들을 지켜주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들은 반드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들을 지켜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또한 흰옷 입은 자들에게는 목자가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목자는 바로 어린양이십니다.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17절) 어린양은 그들을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십니다. 여기서 생명수 샘은 성령의 임재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그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7:37,38)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수의 강은 믿는 자가 받을 성령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에스겔 선지자가 바라본 환상이 성취된 것입니다. 성전에서 동향한 문을 향하여 스미어 나오는 샘물은 참 성전된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나오는 성령의 강물인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을 알고 계십니까? 성령이 어떤 분입니까? 성령은 진리의 영, 곧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임재와 도우심으로 순간순간 새 힘을 공급받으며 광야를 기적적으로 지나갑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행2:38)
성령을 받는 것은 매우 상쾌한 사건입니다. 마치 무더운 여름철 한 모금의 냉수가 갈증을 씻어주는 것처럼 성령의 임재는 그렇게 상쾌할 수 없고 그렇게 시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3:19) 이것은 오래 전부터 선지자들이 예고해오던 은혜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은혜의 때에 내가 네기 응답하겠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로 백성의 언약을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로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케 하리라. 내가 잡혀 있는 자에게 이르기를 나오라 하며 흑암에 있는 자에게 나타나라 하리니 그들이 길에서 먹겠고 모든 자산에도 그들의 풀밭이 있을 것인즉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자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니라”(사49:8-10) 이 놀라운 샘물을 우리가 어떻게 마실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께로 가십시오. 이 물을 어떻게 얻겠습니까? 이 질문을 던진 우물가의 한 여인에게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3,14) 그 여인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죄사함을 받은 이후에 비로소 그 샘물을 마음껏 마실 수 있었습니다. 이 은혜는 구하는 모든 자에게 열려 있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이 샘으로 나오십시오. 이 샘의 주인은 매우 큰 부자이기 때문에 마음껏 퍼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십니까? 그분은 이 샘의 주인장이실 뿐만 아니라 긍휼이 많으신 선한 목자이십니다. 그분은 목마르고 굶주린 양떼를 찾아다니십니다. 그분은 자기의 음성을 듣고 자신에게로 나아오는 양떼들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리고 생명수 강가로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푸른 풀밭에 눕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영혼을 새롭게 하십니다. 그리고 애통하는 모든 심령을 위로하십니다. “그 눈에 모든 눈물을 씻어주십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주님이 여러분을 위해 이미 이루신 그 놀라운 일들을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이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을 위해 모든 것을 이루시고 여러분을 위해 몸과 피를 다 내어놓으신 그분 앞에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단 한 가지 그분 앞에 나와서 그분을 믿는 것뿐입니다. 주님이 모든 일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주님, 참으로 너무하십니다. 내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이러한 과분한 사랑을 저에게 베푸시나이까?” 이렇게 고백하면서 그분을 예배하며 그분의 은혜로우신 일들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예수님이 여러분을 위해 이루신 그 모든 은혜로우신 일들을 한번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놀라지 않을 수 없고, 그분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분을 진정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할렐루야. 아멘.
내 주님 입으신 그 옷은 참 아름다워라.
그 향기 내 맘에 사무쳐 내 기쁨 되도다.
내 주는 쓰라린 고통을 다 견디셨도다.
주 지신 십자가 대할 대 나 눈물 흘리네.
내 주님 입으신 귀한 옷 나 만져보았네.
내 발이 죄악에 빠질 때 주 나를 붙드네.
내 주님 영광의 옷 입고 문 열어 주실 때
나 주님 나라에 들어가 영원히 살겠네.
시온성보다 더 찬란한 저 천성 떠나서
이 세상 오신 예수님 참 내 구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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