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과학, 그리고 우주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등불지기 2024. 8. 29. 18:40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양자의 입자-파동의 이중적 상태가 관찰의 행위를 통해 주변 환경과 관계하기 시작할 때 입자로 고정이 되면서 질량이 생기게 되고 질량에 따라 시공간의 곡률이 발생하게 된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시간개념은 공간개념과 함께 결합되어 있는데 시간의 변화를 느끼는 것과 공간의 변화를 느끼는 것이 함께 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공간의 변화와 함께 시간의 변화를 느끼게 되는데 이럴 때 우리는 시간이 흐른다.”라고 일반적으로 표현한다. 사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며 공간 또한 절대적으로 고정된 것도 아니다. 질량에 따라 느끼는 일종의 착시현상과도 같다.

 

물리학자들이 이해하는 시간은 이렇다. 열역학 제2 법칙에 따라 무질서 정도는 시간이 흐를수록 증가한다. 열을 온도로 나눈 값을 말하는 엔트로피는 무질서의 정도(degree of disorder)이다.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말은 또한 정보의 양이 증가하는 것과 같다. 시간에 따라 정보의 양이 점점 많아지는데 이러한 정보의 변화를 느끼는 것을 시간이 흐른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시간을 성경은 크로노스라고 부른다. 크로노스는 하나님께서 빛을 만드시고 빛으로 모든 만물을 만들면서 생겨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시간도 창조된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은 창조주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성경은 이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 3:8)

 

피조물인 인간은 시공간에 제약을 받지만 빛 가운데 계신 하나님은 시공간에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으신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만물 가운데 계시므로 시간 속에 계실 수도 있으시다. 하나님은 시간 위에 계시면서 동시에 시간 안에도 계신다! 성경에는 많은 예언자들이 있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 예언자들의 역할은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이스라엘과 열국의 과거, 현재, 미래를 해석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시간을 초월하신 하나님께서 시간 안에서 일하고 계심을 잘 보여 주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 현재와 미래가 모두 확정된 사건으로 존재한다. 즉 사람에게 직선으로 느껴지는 시간이 하나님께는 점으로 존재한다

 

시간의 화살은 피조물이 느끼는 시간을 나타낸다. 만물은 시간의 화살에 역행할 수 없다. 만물은 오직 과거만 기억할 뿐이며 미래를 확신할 수 없다. 사람은 시간의 흐름을 느끼고 있으며 그것을 역행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모든 물질은 시공간에 갇혀 있으며 벗어날 수 없다. 벗어나려면 빛보다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데 빛으로 만들어진 물질은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러나 빛을 만드신 하나님은 시공간을 만드신 분이므로 시공간에 영향을 받지 않으며 사람이 보는 것과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신다. 하나님에게 있어 시간은 시간의 흐름이 아닌 한 점으로 인식이 된다. ‘하나님의 날을 선포한 선지자들의 말씀은 여러 개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날이 하나로 중첩되어 묘사하고 있음을 잘 보여 준다. 예언서를 잘못 해석하여 이단이 되거나 망하는 이유는 이러한 중첩현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특정 시간과 사건으로 고정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양자역학의 발달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과 일반상대성 이론을 생각해 보자. 전자는 시간이 빛의 속도에 영향을 받는 것이라면, 후자는 시간이 공간(중력)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빛의 속도에 가까워질수록 시간이 느리게 가며 빛의 속도와 같아질 때는 시간이 멈추게 된다(특수 상대성 이론). 중력이 크게 작용하는 장소에서는 시간이 적게 되고, 중력이 약하게 작용하는 곳에서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많게 된다. 만일 중력이 없는 곳에서는 시간이 멈추게 될 것이다. 시간은 속도 때문에 늦춰지기도 하고(특수 상대성 이론), 또한 질량 때문에 늦춰지기도 한다(일반 상대성 이론). 지구에서 100초가 흐르는 동안에, 우주선에서의 시간은 겨우 60초 흐르는 것이다. 특수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만약 빛의 속도로 우주선이 날 수만 있다면 우주선 안에서의 시간은 흐르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빛을 창조하시며 빛 가운데 계신 하나님께는 사람들이 느끼는 시공간의 제약이 없다. 시간은 하나님께 아무런 문제가 되지 못한다. 하나님께는 천년이 하루 같다. 또한 하루를 천년 같이 보내실 수 있다. 사람에게 늦다, 느리다, 혹은 약속이 더디 이루어진다고 느껴지는 것이 하나님께는 전혀 다르게 작용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람의 시간대가 아닌 하나님의 시간대를 가지고 살 것을 말하고 있다. 시간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관점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또 다른 시간이 있다. 그것은 어떤 사건이 결정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때이다. 카이로스라 부르는 이 시간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 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3:1-8)

 

이른바 흘러가는의미로서의 크로노스의 시간은 사람에게 주어져 있다. 사람은 주어진 시간 안에서 무엇이든지 임의대로 선택하며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카이로스는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는 시간이다. 이 시간은 사람이 결코 알 수 없다. 모든 사람이 느끼고 있으나 딱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애써 무시하는 것이다. 사람이 자신이 죽을 때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이 카이로스는 오직 양자의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알고 계신다. 이 카이로스를 바꿀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것도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 카이로스는 하나님께 속한 시간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는 우주 만물은 우연과 필연 중에 어느 것에 의해 돌아가는 것인가? 우리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연과 필연이 서로 교차하는 것처럼 보인다. 양자역학에서는 모든 물질이 입자-파동의 이중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입자가 특정 위치에서 발견되는 것은 오직 확률로서만 알 수 있을 뿐 모른다고 한다. 고전 물리학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결정론적이다. 즉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초기 조건에 따라 미리 결정되어 있다. 그러나 양자 물리학 세계관에서는 확률론적이다. 우리는 물질의 방향과 흐름만 알 뿐 그 끝에 관해서는 알 수 없다. 시공간에 관해서 사람은 너무나 무기력한 존재이다.

 

사람에게 최선이란 그저 주어진 시간 안에서 즐거워하면서 사는 것뿐이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있는 시간도 결코 많지 않다는 것이 문제이다. 삶이란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것이다. 빛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빛보다 느리게 움직이도록 창조하시고 그 가운데 너무나 짧은 순간만 피었다가 지는 꽃과 같은 인생으로 살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너무나 짧은 시간의 감옥에 갇힌 인생으로 하여금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 하기 위함일 것이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3:11)

 

시간은 감옥이자 동시에 학교이다. 누구나 입학해야 하며 학교를 다니는 동안 하기 싫은 공부를 해야 하며 숙제도 제출해야 하고 시험도 치러야 한다. 하나님께서 시간 안에 사람을 가두어두신 이유, 다시 말하면 짧은 시간 동안 유한한 육체를 가진 인생으로 살도록 하신 것은 인생을 시험하고 가르치기 위해서이다. 살아야 할 시간을 다 보내고 죽는 것은 또 다른 삶을 위한 시작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얼마나 다행인가! 태양계의 항성인 태양의 일생이 100억 년이 넘는데 우리는 모두 겨우 100년도 못 되어 인생의 졸업식을 갖게 된다는 것 말이다. 누구에겐 학교생활이 즐거울 수 있지만 대부분 학교는 지겹고 답답하고 힘들다. 이러한 시간학교에 천 년을 다녀야 한다고 생각해 보라!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인생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시리니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3:18)

 

시간학교를 처음 다니는 사람은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계획을 잘 세우고 잘 준비한다면 계획한 대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지만 살아가면서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게 된다. 시간에 대해 자신이 모르는 것이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자신의 계획과 다르게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시간이 흐르는 것을 보면서 점점 시간에 대해 자신감을 잃어버리게 된다. 특히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이란 현실을 직면하면서 사람은 더욱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구원을 갈망하기 시작한다. “영원히 사는 삶이 과연 가능할까?”라고. 그때부터 인간은 진리를 찾아 떠나는 구도자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이것이 똑같이 짧은 생명을 사는 다른 동물들과 다른 인간만의 모습인 것이다. 그리고 진리를 찾은 자에게 창조주가 준비한 진짜 영원한 삶이 선물로 주어질 것이다. 이것이 유한한 시공간에 잠시 살게 하신 창조주의 의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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