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참 실재인가?
문화에 관해서 생각해 보자. 문화란 무엇인가?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하다 보면 다양한 행동 양식의 이면에는 그러한 행동을 뒷받침하는 가치관의 체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무엇이 옳으며 무엇이 최선인가에 대한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가치체계(value system) 이면에는 “무엇이 참인가?”(what is true)라는 믿음체계(belief system)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체계의 이면에는 더 근원적인 체계인 세상이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 즉 세계관(world-view system)이 있다. 세계관이란 무엇이 실재인가에 대한 대답이다.
사람들은 무엇이 실재인가에 대한 생각의 토대 위에 ‘무엇이 참인가’라고 하는 신념체계를 건설하고, 신념체계에 따라 무엇이 옳은가 하는 가치체계를 건축하며 그러한 가치관에 따라 행동을 위한 태도와 습관을 결정한다. 이러한 실재가 어떤 문화의 옷을 입는가에 대한 물음은 그 실재를 받아들이기로 한 사람의 선택과 책임이다. 이것을 다음과 같은 그림으로 나타낼 수 있다.
그렇다면 기독교적 세계관은 무엇인가? 무엇이 참된 실재인가? 이에 대해서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LOGOS)이 참된 실재라고 대답한다. 로고스에 의해 만물이 지어졌기 때문이라고 믿는 것이 기독교 신학의 요지이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실재(reality)가 아니다. 세상 만물은 보이는 것처럼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뿐이다.
양자 물리학자들은 “무엇이 참된 실재인가?”라고 묻는다면 “원자”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실재는 ‘말씀’이다. 원자가 어떻게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는가? 힉스나 쿼크는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가? 성경을 가지고 대답하면 이렇다. 양자세계를 가능하게 한 근원적인 힘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나는 이 부분에서 과학자들과 신학자들이 서로 동의할 수 없는 생각의 차이를 보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학자들은 ‘어떻게’를 설명하고 신학자들은 ‘왜’를 설명하기 때문이다.
양자 물리학자들에게 물어보라. 원자의 세계나 우주의 세계에 관찰되는 ‘미세조정’(fine tuning)이 왜 발생해야 했는가? 그것은 과연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인가? 양자의 중첩상태나 얽힘 상태에 대해 “왜 그렇게 존재해야만 합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들은 ‘이유’에 관해서는 모른다고 대답할 것이다. 반면 신학자들에게 물어보라. 신학자들에게 ‘어떻게?’에 관하여 대답하는 것은 매우 골치 아픈 일이다. 만물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물어보라. 그러면 신학자들 역시 “모른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과학은 귀납법적인 접근을, 신학은 연역론적인 접근을 취하기 때문에 서로의 관점을 인정하지 않는 한 공통분모를 발견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면 기독교 신학은 실재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는가? 모든 물질세계는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보이는 것을 ‘의미 있게 만드는 힘’이자 ‘목적대로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의 원천’인 로고스 즉 그리스도이시다. 샤르댕이 말한 대로 하나님의 로고스는 만물의 ‘오메가 포인트’이시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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