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물을 본다는 것의 의미
2,500년 전 그리스 철학자 엠페도클래스(Empedocles)는 눈에서 빛이 나온다고 했다. 눈에서 나오는 빛으로 사물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2,000년이 흘러서야 태양에서 나오는 빛이 물체에 닿아서 색이 결정된다는 것과 물체에 반사된 빛이 사람의 시신경을 자극하여 사물을 인식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과학자 뉴턴에 의해 빛의 스펙트럼이 밝혀지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빛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즉 어떤 물체가 그 자체로 고유한 색을 내는 것이 아니라 빛을 반사하는 방식인 것이다. 물론 어떤 물체는 스스로 빛을 내기도 하는데 그것을 흑체라고 한다. 스스로 열을 내는 물체는 빛도 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태양에서 온 빛이 물체에 부딪히게 되면 물체의 원자는 빛과 반응하여 고유한 색을 반사하는데 반사된 빛이 사람의 눈에 있는 시신경에 부딪히게 되고 그것이 신호로 바뀌어 뇌에 전달되면 뇌가 그것을 분석하여 뇌 속에서 영상을 만드는 것이다. 만약에 빛이 없다면 사람은 아무것도 볼 수 없다. 무엇을 보기 위해서는 빛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 원리는 신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인식하는 데 빛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고, 빛이 없이는 아무것도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그의 저서 『국가』에서 동굴의 비유를 말했다. 사람들은 어두운 동굴 안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것을 바라보고 그것이 진리인 양 믿으면서 살아간다. 동굴 안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보고 있는 그림자를 ‘실재’로 인식하며 살아간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동굴을 벗어나 바깥 세계를 경험한 다음 돌아와 친구들에게 말해 주지만 동굴 안의 사람들은 믿지 않으려고 할 뿐 아니라 그를 비웃고 심지어 죽이려고 위협하기도 한다. 자신이 실재라고 믿고 있는 것과 다른 실재를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불쾌감과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인간 본성이다. 오늘날에도 이 비유는 우리에게 많은 것, 특히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인식)의 한계에 관하여 생각하게 한다.
사실 사람은 모든 빛을 다 받아들이지 못한다.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빛의 범위는 가시광선에 불과한데 이것은 전체 빛의 스펙트럼에 비하면 아주 작은 범위에 불과하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가? 사람이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모든 세계를 다 보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보지 못하는 세계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다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보지 못하는 세계를 알 수 있을까? 우리가 보지 못하는 세계를 인식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믿음’이다. 나는 감마선이나 엑스선 또는 자외선을 보지 못했지만 있다고 믿는다. 도구를 사용하여 관찰한 과학자들의 증언을 믿기 때문이다. 이처럼 믿음은 우주 만물을 바라보는 하나의 인식체계이다. 믿음으로 사물을 바라본다는 것은 우선 내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겸허히 인정하는 것이며, 내가 보지 못하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포함한다.
믿음이란 인식체계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 ‘언어로 구성된 이론체계’를 필요로 한다. 이것은 과학에서 이론을 가지고 실험을 하는 것과 같다. 이론 없는 실험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론이 있기 때문에 실험하는 것이며, 실험을 통해 이론을 확인한다. 마찬가지로 ‘믿음’은 어떤 ‘이론체계’를 전제로 하고 있다. 예를 들어 물건을 살 때 체크카드를 사용하는 것은 은행에서 만든 내 계좌에서 지불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행동이다. 믿음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이론체계’가 있기 때문에 믿음이 가능한 것이다. 그 ‘이론체계’가 사람이 임의로 만들어 내는 것이라면 이것은 ‘불법’에 해당한다. 마태복음 7장에서 주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며 선지자 노릇을 한 자들을 항하여 예수님은 ‘불법을 행한 자’라고 규정하신 것을 보라.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임의로 ‘이론체계’를 만들고 그것에 따라 어떤 유효한 결과를 만들어 내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불법’을 행한 것이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지어졌다. 현대 과학기술은 사람이 눈으로 볼 수 없는 세계를 보기 위해 많은 장치들을 만들어 내고 있고, 또 실험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세계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고 있다.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서 입자가속기를 만들어 실험하여 원자의 내부 세계를 들여다보며 빅뱅 초기 우주의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단언하건대 들여다보면 볼수록 ‘보이지 않는 것들’로 가득한 세상을 보게 될 것이다. 결국 과학자들은 여러 가지 추론과 가설을 만들어서 그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설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실험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과학의 경계 너머에는 결국 신념의 영역이 있는 것이다.
양자역학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는 이것이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과연 실재(reality)인가? 아니면 단지 환상인가? 혹시 홀로그램은 아닌가? 아니면 컴퓨터 게임과 같은 시뮬레이션인가?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실재’임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래서 양자역학에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론들이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코펜하겐 해석이 있다. 모든 물질의 입자-파동 이중성이 관찰행위에 따라 파동의 성격을 잃어버리고 입자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물리학자들이 코펜하겐 해석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 다세계 해석을 내놓기도 하고, 결정론적 해석을 내놓기도 하며, 인식론 자체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철학의 영역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결국 해답(정답이 아닌)은 이것이다. 결국 ‘보는 것과 아는 것’에 관한 문제이다. 과학자들도 관찰과 실험으로 실체를 관찰하다가 결국은 믿음의 영역과 만난다. 어떤 신념체계를 선택할 것인지만 남을 뿐이다.
결국 보는 것, 즉 인식의 문제를 극복해야 한다는 점에서 과학과 철학, 그리고 신학은 서로 한 자리에 만나고 있다. 과연 어떤 신념체계가 옳았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과학자들은 실험을 통해 증명하려고 하고, 철학자들은 이성과 논증을 통해 증명하려고 하고, 신학은 계시를 통해 확인하려고 한다. 서로 자기가 보는 것이 실재(reality)라고 주장하지만 결국 인생의 종말과 역사의 종말의 순간에 판명 날 것이다. 나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더하지도 말고 덜어 내지도 않으며 말씀의 가이드를 따라 보며, 알며, 믿으며, 행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삶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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