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비뽑기
양자역학이 본격적으로 출현한 것은 불과 100여 년이다. 그 전에는 갈릴레이로부터 시작하여 뉴턴으로 정점을 이루고 아인슈타인으로 대단원을 이룬 고전물리학은 기본적으로 ‘결정론적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반면 양자역학은 관찰되는 순간 입자의 모습으로 결정되며 관찰되기 전에는 중첩의 상태로 존재하며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에 관해서는 단지 확률의 상태로만 알 수 있다고 한다. 양자역학에 있어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해석의 문제’이다. 즉, ‘관측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과학자들의 정의가 아직도 확립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관측하는 행위가 사물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 아직도 열띤 논의가 진행 중이다.
하나님께서 요단을 건너 가나안을 정복한 이스라엘에게 어떤 방식으로 땅을 분배하여 주셨는가? 그것은 ‘제비뽑기’의 방식이었다. 어느 지파가 어느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인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제비뽑기의 방식은 이스라엘 지파의 불평을 종식시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주권에 따르기로 결정하고 제비뽑기의 방식을 받아들였다. 제비뽑기는 땅 분배뿐만 아니라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했을 때 그 원인을 찾아내는 데 효과적인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이스라엘은 아이성 전투의 패배의 주범인 아간을 찾아내는 데 제비뽑기의 방식을 통해 성공했다. 제비뽑기는 하나님의 주권이 작용하는 특별하고 보편적인 방식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을 묻고 결정할 때 주로 사용했던 방식이 제비뽑기였다. ‘욤 키푸르’라고 불리는 1년 중 가장 크고 엄숙한 절기인 속죄일에는 이스라엘의 죄를 짊어지고 광야로 내보낼 희생제물을 선택하는 일을 제비뽑기 방식으로 결정했다. 아사셀, 즉 속죄 염소를 고를 때에도 제비뽑기를 하라고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 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찌며 아론은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를 속죄제로 드리고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는 산대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찌니라”(레 16:8-10)
때로는 군사를 선발할 때나 왕을 선택할 때, 숨은 허물이나 범죄자를 찾아낼 때, 그리고 성전의 직무를 나누어 맡길 때에도 제비뽑기 방식을 사용하기도 했다.(삿 20:9; 삼상 10:17f.; 삼상 14:36f.; 대상 25:8; 26:13) 심지어 로마 군인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옷을 나눌 때에도 제비를 뽑아 결정했다. 가룟 유다의 자리를 메우기 위해 다른 한 명의 사도를 선택할 때에도 제비뽑기로 결정했다.(행 1:26) 성경은 제비뽑기 방식이 강한 자 사이의 다툼을 해결하는 지혜로운 방식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16:33)
“제비 뽑는 것은 다툼을 그치게 하여 강한 자 사이에 해결케 하느니라”(잠 18:18)
양자역학에서는 어떤 입자의 상태가 관찰되기 전에는 결정된 상태가 아니라 중첩된 상태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관측하는 행위를 통해 결정된다고 말한다. 기독교에서의 ‘관찰하는 행위’는 사람이 하지만, 어떻게 결정될 것인지는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믿는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은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확률론적 세계관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내일 어떤 일이 있을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오직 확률로만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그러나 언제 죽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늘 밤 나는 죽을 수도 있으나 그것은 확률로만 짐작할 뿐 아무도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우연이나 확률은 존재하지 않는다. 기독교 신앙은 무가지론이나 회의론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결정론적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아신다. 내 생명의 끝이 언제인지, 우리가 사는 우주의 종말이 언제인지 시작과 끝은 하나님이 결정하셨고 하나님만이 아신다. 하나님께는 확률로 존재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심지어 미래조차 마찬가지다. 역사의 끝이 언제인지, 누가 구원을 받을 것인지 아닌지 하나님께는 불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확정된 상태이다.
뉴턴을 중심으로 한 고전물리학은 미래를 알 수 있다는 ‘결정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해 양자 물리학은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오직 확률로만 알 수 있을 뿐이라는 ‘비결정론적 세계관’이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인간이 예측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논쟁인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 신학은 앞의 두 세계관과 다른 의미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무엇이 발생할 것인지 하나님이 결정하시고 하나님만이 앞으로 무엇이 일어날 것인지 알고 계신다는 것이다. 개인의 죽음과 역사의 종말은 이미 결정이 되었다. 그 이후에 나타날 일 역시 결정이 되었다. 그러나 사람은 그것이 어떠한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오직 아는 것은 한 가지뿐이다. 내가 복음의 말씀을 듣고 내 인격 안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내가 진리 안에 있도록 결정된 확실한 증거이며 취소될 수 없는 증거라는 것이다.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요일 5: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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