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관하여
하나님께서는 자신에 관하여 여러 시대를 걸쳐 여러 모양과 여러 방법으로 드러내셨다. 특별히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하나님에 관하여 사람들에게 말하게 하심으로 자신을 드러내셨다. 그리고 그것을 인간의 손으로 기록되게 하셨고 오랜 세월 동안 여러 명의 인간 저자가 자신의 개성과 경험을 살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어떤 일을 하셨고 또 하고 계시는지 기록하게 하셨지만 교리적으로 서로 모순되거나 충돌되지 않도록 세밀하게 간섭하셨다. 양자 물리학자나 천체 물리학자들이 사용하는 단어인 ‘미세조정’(fine tuning) 작업을 통해서 말이다. 이 성경은 ‘과학’이나 ‘철학’의 개념으로 보자면 ‘오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계시’의 관점에서 볼 때 결코 오류가 없다. 그것을 기반으로 신학체계나 교리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생길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학의 원천인 성경은 결코 오류가 없다.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이며 기독교 신학은 계시에 관한 학문이다. 계시(revelation)란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리시는 행위를 의미한다.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 발견할 수 없다. 인간은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범위 내에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기 위한 목적으로 만물을 창조하셨다. 그 만드신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과 신성을 드러내 보여 주고 있다. 만물을 관찰하면 누구나 발견할 수 있다. 비록 타락한 아담 이후에 출생한 인간이라도 그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러나 계시가 없이는 그분을 만날 수 없다. 그분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분이 갖고 계신 다른 생각을 더 알 길은 없다. 더욱이 아담 이후 출생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아는 빛이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특별한 방법으로 드러내기로 작정하셨다. 사람을 불러서 하나님에 관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전하게 하셨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어떤 일을 하셨는지 기록하게 하셨다. 그리고 그 기록이 비록 인간 저자의 개성과 경험으로 묻어난 것이지만 전체적으로 모순이 발생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미세한 조정’을 직접 그 기록물에 가하셨다. 이것이 성경의 영감설(theory of the Bible inspiration)이다. 성경은 성경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 17)
하나님께서 “모든 성경을 감동하셨다”라고 할 때 영어로는 “All Scripture is God-breathed.”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성경에 숨을 불어넣으셨다는 것이다. 이 표현은 성경에서 두 번 나온다. 첫째는 흙으로부터 사람을 만드시고 사람의 코에 숨을 불어넣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셨는데 그 결과 사람은 육신을 가졌지만 동시에 ‘살아 있는 영’이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동일한 방식으로 성경에 그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그래서 성경은 매우 특별한 책이 되었다. 최초의 사람이 살아 있는 영이 되었듯이 성경은 살아 있는 책이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여기서 ‘모든 성경’(all Scripture)이라고 했을 때 무엇이 성경을 성경답게 만드는가의 문제, 즉, 정경론(canonics)이 등장하게 된다. 성경을 다른 ‘성경이라고 주장하는 책들’과 구별시켜 주는 것이 무엇인가? 구약시대, 신구약 중간기 시대, 그리고 신약시대, 사도 후 교부들의 시대에 많은 책들이 있었다. 그 모든 책들 중에서 지금 우리는 66권만을 정경(canon)으로 인정하는 것인가? 정경을 정경 되게 만드는 기준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숨결’을 어떻게 증명하고 있는가? 3세기경 초대 교회 지도자들(교부)은 어떤 기준을 가지고 오늘날의 정경목록을 완성하였을까?
일단 저자의 진위성이 의심되는 책들, 이른바 ‘위경’(pseudepigrapha)은 제외하였다. 예를 들어, 『바울 묵시록』 같은 책이다. 저자가 아닌데 저자인 것처럼 기록한 것이다. 저자를 흉내 낸 위경은 항상 있어 왔다. 엄밀한 조사를 통해 저작권을 위반한 책들은 제외되었다. 그리고 저자의 진위성은 확인할 수 있으나 그 내용에 있어서 ‘신적 권위’를 인정받지 못한 ‘외경’(apocrypha) 또한 제외되었다. 외경이란 일종의 ‘문학작품’ 혹은 ‘경건서’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신적 권위를 보여 주는 특징인가?
구약성경의 경우 ‘선지자의 글’이 정경으로 포함되는 기준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39권의 구약성경 목록은 이미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훨씬 이전부터(주전 2세기) 확립이 되었다. 지금 와서 다른 어떤 책을 그 목록에 추가하자는 것은 재고할 가치가 없다. 논란이 되는 것은 신약성경의 목록이다. 베드로 묵시록이나 바울 묵시록 같은 저자의 진위가 허위로 판명 나는 책은 일단 제외가 되었다. 그리고 신약성경의 경우는 ‘사도성’이 정경과 외경을 구분 짓는 참 권위의 기준이 되었다. 사도의 정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증인들이라고 정의한다. ‘사도성’이라면 그러한 사도와 밀접하게 동역한 자들(co-worker)도 포함시키는 말이다. 사도의 제자는 포함시키지 않는다.
이러한 결정은 주후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확정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 사해바다 근처에서 또 다른 성경이 발견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지금의 정경의 목록에 추가할 수 없다. 신구약 정경목록이 확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가톨릭은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를 통해 몇몇 외경을 정경의 목록에 추가하였다. 그리스 정교 또한 몇몇 외경을 추가하였다. 그러나 개신교는 기본적으로 66권의 정경 목록만을 권위 있는 책으로 인정한다.
기본적으로 성경의 무오성 교리(doctrine of Bible inerrancy)는 원본에 한정되지만 그것이 사본으로 필사되어 전해지는 과정에서도 하나님의 ‘미세한 조정작업’(fine tuning)이 개입되었다고 하는 교리이다. 사본과 번역본의 차이는 또 다른 문제이다. 여기서 ‘무오성’ 즉 ‘오류 없음’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선 성경이 ‘과학 교과서’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3천 년 전에 기록되었을 때 저자와 수신자가 갖고 있었던 상황에 비추어서 해석(역사적)을 해야 한다. 21세기 양자역학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 입자가속기를 사용하여 빅뱅 초기 우주를 연구하는 첨단 물리학자들 같은 과학자들의 눈높이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다.
또한 성경은 ‘철학서’가 아니다. 철학이라고 할 때는 어떤 일관된 개념과 언어로 한 사람이 어떤 개념이나 이론을 집대성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3,500여 년 역사 동안 40여 명의 넘는 저자들이 각기 다양한 시간대와 문화권에서 기록한 책들의 모음이므로 철학서의 관점으로 보면 ‘오류’ 투성이로 보일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직접 개입하셔서 ‘감동’ 즉 ‘하나님의 숨결을 불어넣으셨다’는 말은 완벽한 과학책도, 철학서도 아님에도 그토록 다양한 시간대와 문화권에서 살았던 저자들에게 일일이 개입하셔서 모순이 발생하지 않도록 저자의 개성을 뭉개지 않으면서도 간섭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신학은 계시의 학문이며, 그 어떤 문헌과 과학책, 이론서, 철학서보다 성경이 말하는 바를 최고의 권위를 가진 진술로 여기고 그 권위 아래 복종하며 진술을 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만약에 성경에 기록된 대로 여리고성이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이 고고학적으로 증명이 된다면 성경 전체가 진술의 신빙성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 되며 더 나아가서 신학 자체가 존폐 위기에 몰리는 것이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그렇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라면 기독교 신앙은 거짓말로 꾸며 낸 종교가 될 것이다. 이처럼 성경의 진술을 ‘절대적 증언’으로서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기독교 신학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해석의 적절성 문제이다. 우리가 성경의 진술을 그 어떤 주장이나 논리보다 최우선의 신빙성을 가진 증언(testimony)으로 받아들일 때에 해석의 문제와 분리할 수 없다. 기본적으로 성경의 특정 본문을 ‘역사적으로, 문법적으로, 타당하게’ 해석하지 않은 경우이다. 예를 들어, 창세기 1장에 하나님께서 첫째 날 빛을 창조하셨다고 할 때 그 빛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가지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나는 ‘모든 물질의 근본을 이루는 최소 에너지 세계로서의 양자시스템’이라고 해석적 정의를 내렸지만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성경은 무오하나 신학은 언제나 완벽하지 않다. 시대를 따라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신학적 용어들과 표현들은 늘 생겨나게 된다. 따라서 신학은 늘 새롭게 진술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두 가지 해석이 서로 충돌을 일으킨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럴 때는 성경 전체에서 말하는 교리 ― 예를 들어 구원관 ― 와 충돌하여 또 다른 모순이 생기지 않는지 검토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빛을 만드시고 빛과 어둠을 구분하시고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고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라고 했을 때 그 낮과 밤은 오늘 인간이 느끼는 낮과 밤과 동일한가? 그때의 첫째 날은 인간이 느끼는 24시간의 하루를 말하는가? 이에 대해서도 해석이 다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어떤 해석이 ‘타당하다’고 할 때에는 또 다른 모순을 만들어 내지 않으며 전체적인 교리의 틀에 잘 부합한다는 그런 뜻이다.
성경이 강력하게 경고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우리가 성경을 ‘타당하지 않게’ 해석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심지어 ‘타당성을 잃은 해석’ 즉 ‘억지스러운 해석’은 우리의 영원의 문제까지도 결정지을 정도로 파괴적이다.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5-16)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8-19)
마지막으로 성경은 우리가 알고 싶은 모든 호기심을 채워 주기 위해 기록된 책이 아니다. 성경은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필요충분한 모든 것’을 기록한 책이지 우주나 원자에 관한 우리의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정보들을 모아 둔 책이 아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리학자들이나 다른 과학자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형이상학적인 영역에 관해서 놀라운 통찰력을 주는 본문(text)이 적지는 않다. 인생의 의미나 목적, 우주의 의미나 목적에 관해서 과학자들은 결코 알 수 없는 영역에 관하여 성경은 담대하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성경이 기록된 목적은 우리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란 사실을 잊지 말자. 성경은 우리의 구원과 우리의 순종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담고 있는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책이다.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신 2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