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신학을 이 시대가 접근하여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 이 시대의 언어로 재구성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 시대가 보고 있고 누리고 있는 20세기와 21세기 현대문명(예를 들어, 통신, 컴퓨터, 휴대폰, 가전제품을 가능하게 만든 반도체 산업, 핵에너지 등)은 모두 양자역학의 발달로 생겨난 열매들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양자역학을 몰라도 양자역학의 열매를 즐기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 조금씩 양자역학에 대해 알아 가기 시작하고 있다. 언젠가는 양자역학이 모든 사람의 상식이 될 날이 올 것이다. 그렇다면 21세기를 살아갈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양자역학의 언어로 다시 쓰여야 한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그래서 최대한 선입견이 없이 양자 물리학을 살펴보기로 했다. 최대한 넓게 다양하게 연구도서를 읽고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수학적 기호와 방정식은 건너뛰고 그것이 설명하고자 하는 원리와 현상에 대해 집중하고자 했다. 그래서 배운 것이 많다. 우선, 양자역학을 통해 신학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 있다. 양자의 세계와 신학의 세계가 서로 극과 극에 위치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공통된 점이 너무나 많다는 점이다. 내가 알고 믿고 가르치던 신학이 우리가 실제 경험하는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사실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는 것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진리의 세계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양자역학을 배우면서 신학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것이 많았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새로운 진리를 발견했다고 하기보다는 내가 갖고 있었던 진리체계가 더욱 선명해지는 그런 것이었다.
둘째로, 신학을 통해 양자역학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 있다. 양자물리학은 원자의 세계를 관찰하면서 그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다. 보이는 거시세계와 달리 양자세계는 매우 신비하고 또 신기하였다. 관측할 때 파동함수가 붕괴된다든지, 양자중첩 혹은 양자얽힘이라든지 하는 말들이 너무나 신기하였지만 신학을 한 사람의 눈에는 그것이 새롭기 때문에 신기한 것이 아니라 신앙의 체계와 너무나 비슷하기 때문에 신기했다. 과학자들은 왜 그런 현상이 그런 식으로 발생하는가에 대해서는 결코 답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신학은 그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원인을 알려 준다. 나는 양자가 왜 그런 식으로 작동하는지 신학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셋째로 이 작업을 수행하면서 나는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것은 무지의 폭이 넓어지는 것과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해는 무지함을 발견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나의 무지함을 아는 것이다. 양자역학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너무 재미있었다. 그래서 신이 났지만 공부하면 할수록 리처드 파인만의 말이 맞다는 것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양자역학에 관하여 모르는 것이 더욱 많아져 갔다. 이러한 깨달음은 확실히 내가 오만과 독선에 빠지지 않게 해 주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의 말에 대해 마음을 열고 경청할 준비를 하게 만들었다. 이것으로 나는 나의 노력에 충분한 보상을 받은 것이다.
넷째로, 내가 무엇인가를 ‘진정으로’ 이해할 때 우리는 반드시 변화된다는 사실이다. 내가 하나님을 아는 순간 그 즉시 나 자신이 변화되는 것을 경험한다. 양자얽힘의 원리가 신학에도 적용되는 순간이다. 내가 양자역학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이해한 범위만큼 나 자신이 변화되었다고 느낀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내 의식이 다른 어떤 존재와 연결되었다는 증거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더욱 열망하게 되었다. 하나님을 더 알고 싶다고. 하나님을 알기 위해 더욱 노력할 것이라고. 우리는 이러한 변화를 경험함으로써 성장하게 된다.
다섯째, 하나님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원래 하나님께서 양자세계와 물질세계를 창조하신 이유는 사람으로 하여금 보고 발견하라는 목적 때문이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과 신성을 반사하고 있다. 그래서 그것을 보고 발견하게 되면 하나님께 다시 영광을 돌려드릴 수밖에 없다. 발견한 그 빛을 원주인에게 다시 되돌려 보내는 것, 이것이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을 아는 것은 무엇이 다른가? 자연을 아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하는 자연신론과 달리 하나님을 알 때 비로소 자연을 알게 된다고 믿는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 자연을 알려고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욱더 알 수 있다. 이것이 신학자가 물리학을 배워야 하고, 물리학자가 신학을 배워야 하는 이유이다.
신학자와 물리학자는 각자 오만과 독선을 넘어서기 위해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원자가 서로 결합하여 화학 성질을 띠는 다른 물질을 만들어 내듯이 그렇게 융합할 필요까지는 없다. 단지 서로를 이해하고자 노력함으로써 도움을 주고받는 친구가 될 수 있다. 신학은 겸손히 몸을 낮추어 변화하는 시대에 맞추어 새로운 옷을 입고자 자신을 개혁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그럴 때 세상은 복음에 귀를 기울이며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달려온 진리를 향한 나의 탐구의 여정을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존 폴킹혼이 자신에 관하여 한 말로써 끝내려 한다.
“저는 과학과 종교라는 두 관점으로 실재를 보는 ‘두 개의 눈을 가진 사람’(two-eyed person)입니다. 이런 쌍안경의 시야가 한 눈으로만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해 준다고 저는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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