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과학, 그리고 우주

설교

등불지기 2024. 8. 30. 13:46

 

 

기독교에서 설교행위는 매우 특별하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택한 백성을 설교라는 행위를 통해 부르시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설교는 양 떼를 먹이는 하나님의 방법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는 교회의 모든 예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순서가 된다. 설교가 살아 있으면 교회도 살아 있게 된다. 설교는 교회에 생명을 불어넣는 수단이며, 새로운 생명을 탄생하게 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성경에서 설교를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설교행위보다 설교자의 정체성이 우선한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정체성을 선포자로 세우심을 받은 자로서 소개하고 있다.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딤후 1:11)

 

우선 설교는 재판정에서 하는 증언(testimony)이다. 그리고 설교자는 증인(witness)이다. 설교하는 행위는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이루어진다. 사람에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설교자는 하나님 앞에서 말하는 사람이다. 설교는 논쟁도 아니고 주장도 아니며, 정보를 전달하는 강의도 아니고 설득도 아닌 선포이다. 설교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증언행위이므로 설교자가 설교를 올바르게 한다면 설교자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진동하게 될 것이다. 왜냐면 하나님의 말씀은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한 원천적인 진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는 떨림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대면할 때 떨면서 죽은 자와 같이되었던 많은 선지자들의 떨림이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전 2:3)

 

설교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에 관한 메시지이다. 그러한 메시지는 전적으로 기록된 성경의 범위 안에 있어야 한다. 따라서 설교를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겠다. “설교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어떠한 일을 하셨는지에 관하여 하나님과 증인들 앞에서 신실하게 증언하는 행위.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딤전 6:12)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설교자가 하나님을 뚜렷하게 의식하는 것이고 동시에 증인들의 눈을 바라보는 것이다. 눈 마주침(아이 컨택)은 증인이 참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증언의 권위는 웅변이나 화술에 달린 것이 아니라 성경의 권위와 성령의 임재에 대한 확신에서 나온다. 살아 있는 설교는 하나님의 빛이 회중에게 비치는 은혜의 통로가 된다. 이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은 영혼의 안식과 믿음을 갖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기적을 낳는 힘이 있다. 그 힘이 활성화되려면 설교자는 하나님을 응시하고 청중을 응시해야 한다.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3:4)

 

설교자에게 있어 설교는 목숨을 건 증언이기 때문에 그 준비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설교는 미리 준비해야 하며, 이를 위해 가능한 오래전에 본문을 연구하여야 하며, 충분히 묵상하여야 하며, 자신의 삶 속에서 스스로 실천하며 적용함으로써 메시지가 설교자 자신의 삶의 전부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 설교자의 설교 연구는 대체로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본문 연구이고 다른 하나는 설교 연구이다. 본문 연구란 성경 본문에 대한 원어적, 문법적, 역사적, 교리적 해석을 하며, 묵상과 실천을 통해 자신의 내면에 깊이 스며들게 하는 과정이다. 반면, 설교 연구란 설교의 구성과 흐름에 관하여 연구하는 것이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7:10)

 

설교자는 항상 연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고, 묵상하는 일과 기록하는 일을 습관적으로 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연구하고 묵상하는 과정 속에서 깨달은 것을 기록하는 것이다. 설교자 자신에게 먼저 그 말씀을 깊이 적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말씀을 하나님 앞과 증인들 앞에서 실실하게 증언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 보는 것으로 설교를 준비하게 된다.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 14:19)

 

설교자가 자신의 마음에 새기는 작업이 중요하다. 원고는 종이에 쓰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야 한다. 강단(pulpit)에서는 원고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강단에서는 오로지 자유로워야한다. 설교자가 자유로울 때 성령께서도 자유롭게 운행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설교자는 자신을 온전히 부인해야 하며, 복음의 메시지에 스스로 결박당해야 한다. 자신을 부인하고 복음을 개방해야 한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빛을 가리는 방해물이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기독교에 있어서 설교는 정보전달이 아니라 사건이다. 흔히들 설교한다고 하면 잔소리하다’ ‘가르치려 하다’ ‘훈계조로 말하다’ ‘개념전달의 의미로 생각한다. 많은 목사들은 대언한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아니다. 설교는 어떤 사건이 발생하는 순간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 설명할 때 물질세계가 파동으로서 존재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적인 파동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렇다면 설교란 행위는 하나님의 진동을 중심으로 설교자와 회중에 함께 공명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공명이 발생하지 않는 설교를 설교라 할 수 없다.

 

설교는 청중의 마음속에 진동을 일으키는 행위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설교자 자신이 증인으로서의 분명한 정체성을 확립하고 있어야 하며, 자신이 전달하게 될 그 말씀에 대한 깊은 깨달음울림을 가져야 한다. 자신이 깨닫는 기쁨이 없는데 어떻게 듣는 사람들을 깨닫게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말씀은 전하는 자에게 먼저 사건으로 다가와야 한다. 또한 설교자는 자신의 음성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자신의 목소리를 항상 깨끗하게 유지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물리학자들에게 공명’(resonance)이란 현상은 익숙하다. ‘공명현상혹은 공진현상’(resonance)이란 특정한 주파수를 가진 물체에 같은 주파수를 외부에서 가하면 진폭이 커지는, 즉 에너지가 커지는 현상을 말한다. A라는 전원장치와 B라는 회로장치는 떨어져 있다. 전원장치에서 발생하는 주파수가 회로의 주파수가 서로 일치할 때 공명현상’(또는 공진현상)이 발생하게 되어 회로에도 전류가 흐르게 되는 것을 관측할 수 있다. 오늘날 휴대폰을 선이 없어도 충전시킬 수 있는 기술이 이 원리로 만들어진 것이다.

 

'신학, 과학, 그리고 우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회: 빛의 공동체  (0) 2024.08.30
하나님의 선교  (0) 2024.08.30
깨달음과 거듭남  (0) 2024.08.30
기독교 생명윤리  (0) 2024.08.30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  (0) 2024.0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