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5장) 이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identity)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참 뜻을 한번 살펴보려고 합니다. (저는 오늘 원주에 있는 13개 공공기관 신우회 연합예배에 참석하여 이 말씀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첫째, 세상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정체성은 소금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세기 로마인의 문헌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었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중요한 것은 태양빛과 소금이다." 그래서 1세기 로마 군인들은 소금을 월봉으로 받곤 했습니다. 그만큼 소금은 황금처럼 귀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소금을 언급한 본문을 찾아보면 이렇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소금은 언약을 상징했습니다. 언약을 기념할 때는 소금을 뿌려야 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도 같은 의미로 소금이 사용됩니다. 마가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관계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언약이 없는 관계는 언제나 깨어지기 쉽습니다. 좋은 관계도 언약이 없이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소금언약이란 부패하지 않고 변하지 않는 관계를 말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소금과 같다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화평케 하는 자'(peace-maker)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다니는 직장이나 교회가 서로 하나가 되지 못하고 반목 질시 분열 분쟁에 휩싸여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소금역할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금의 맛을 잃어버린 징후입니다. 그것은 곧 멸망이 임박했다는 뜻입니다. 맛을 잃으면 결국 버려지게 되고 사람들에게 밟히는 신세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둘째, 세상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정체성은 빛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빛이 되도록 노력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둠을 몰아내는 빛은 그 존재 자체에 있는 것이지 우리의 노력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을 확고히 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저 빛으로서 살아가면 됩니다. 그러면 "산위의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등잔을 말 아래 두지 않고 등경위에 둔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 의미는 우리가 우리의 신분과 정체성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속에서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 존재인지 당당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실 때 가장 먼저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첫째 날 "빛이 있으라"고 하셨고 그 말씀에 따라서 빛이 생겨났습니다. 그 빛은 하나님의 영광과 신성과 능력을 반사하고 있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빛을 보시고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넷째 날 하나님께서는 '광명체들'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는 해달별과 같은 천체들입니다. 넷째 날 만드신 광명체들은 첫째 날 만드신 빛을 운반하는 운반체였습니다. 태양이 어떻게 빛을 내는지 보십시오. 태양은 매 초마다 수소원자 6.5억톤이 핵융합을 그 중심부에서 일으키고 있습니다. 첫째 날 하나님께서 만드신 수소원자들이 넷째 날 태양의 중심부에서 서로 융합하는 순간 엄청난 빛과 에너지가 뿜어져 나옵니다. 태양 중심부에서 생겨난 빛과 열 에너지는 10만 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태양 표면으로 이동하게 되고, 그것은 8분 19초의 시간을 달려서 지구 표면으로 쏟아져내립니다. 그래서 모든 생명체가 그 빛 에너지를 받아서 생명을 유지하며 살아갑니다. 수소원자 그 자체는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수소 원자 네 개가 모여서 헬륨원자를 만드는 과정 속에서 우리가 보고 느끼는 가시광선을 포함한 빛 에너지가 나옵니다. 우리는 각자 엄청난 에너지를 가진 수소원자와 같습니다. 그러나 수소 원자가 서로 만나서 핵융합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어둔 세상을 밝게 비추는 빛과 열 에너지가 나옵니다. 비결은 연합에 있습니다. 우리가 다니는 직장이 왜 문제가 많습니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왜 어둠이 활개치며 다닙니까? 믿는 자들이 서로 연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빛 에너지를 가지고 있음에도 연합하지 않으면 아무런 빛을 낼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더러 세상에서 소금과 빛이 되도록 노력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관건은 우리의 노력 여부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문제의 핵심은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서 얼마나 확신하고 있는가 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을 얼마나 알고 세상 속에서 당당하게 여기고 살아가느냐입니다. 우리의 새로운 신분에 대한 확신의 정도에 달린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정체성을 이해한 사람들이 하나 둘씩 서로 모여서 연합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서로 사랑하기 시작할 때 저절로 맛을 내고 저절로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제가 삼십 수 년 전에 전방에서 현역으로 군복무할 때 저는 새벽 5시가 되면 소대와 중대를 돌아다니며 잠자던 신우들을 깨워서 새벽기도를 하자고 했습니다. 새벽마다 예배당에 모여서 찬송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루 일과를 시작했습니다. 그럴 때 놀라운 기적들이 많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던 부대가 평온해지기 시작합니다. 사건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일어나도 그것이 기가 막힌 방법으로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하루는 수류탄 하나가 사라져서 대대 전체가 발칵 뒤집힌 적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던 수류탄을 어디서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신기하게도 군생활이 힘들어 자살하기 위해 수류탄을 훔쳐서 몰래 가지고 있던 한 일병이 안전핀을 뽑기 전에 수류탄을 가지고 저를 찾아온 것입니다. 저는 그 친구와 상담했고 위하여 기도해주었습니다. 그는 후방 부대로 전출했고 부대는 다시 평온을 되찾았습니다.
이런 일들이 여러번 일어나자 제가 교회 일을 열심히 하기 위해 훈련에 열외되어도 뭐라고 말하는 간부는 없게 되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커피를 끓이고 경계근무를 서는 병사들을 찾아다니는 일을 해도 어느 간부도 저를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임진강 근처에서 경계근무를 할 때에도 넓게 흩어져서 근무를 서는 중대와 소대를 방문하는 것이 어렵지 않도록 헌병이 타고 다니는 짚차를 제게 내주었고, 저는 짚차를 타고 다니면서 중대를 심방할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소대별로 중대별로 그리고 대대별로 그 바쁜 근무 일정 속에서도 짬을 내어 모여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찬송하고 기도하던 신우들이 있었고, 신우들의 기도와 예배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셨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힘, 어둠을 밝히는 빛은 믿는 형제 자매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서로 모여서 연합하는 데 있습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저는 믿습니다.
2024년 9월3일 화요일 원주 13개 공공기관 신우회 연합 예배에서 나눈 말씀 요약
김광락 목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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