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정감록이나 다빈치코드처럼 대하면 결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메시지를 받을 수 없습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요한계시록 강해(29)
두 증인, 두 감람나무, 두 촛대
본문: 계11:1~6
11:1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11:2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11: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11:4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11:5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지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11:6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 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우리는 점점 난해하고 어려운 본문을 대하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피하지 말고 침착하게 서서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요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인터넷으로 대변되는 정보화 사회입니다. 즉, 정보가 사람들을 지배하는 사회를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원하면 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확신 때문에 그런지 아니면 추구하는 정보가 너무 많아서 그런지 몰라도 요즘 사람들은 이해하기 조금만 어려워도 금방 포기하고 맙니다. 마치 인터넷에서 정보를 검색하다가 창이 뜨지 않으면 금방 닫아버리고 다른 창을 열듯이 말입니다. 사실 인터넷 문화는 조급하고 성급한 한국사람들의 기질과 딱 맞아떨어집니다. 우리나라에서 IT산업이 발전하는 것은 국민성과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요즘 교회에서는 진지하게 성경본문을 연구하는 흐름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본문의 진정한 의미를 가지고 씨름하는 자들이 사라져갑니다. 생각하게 하는 설교는 인기가 없습니다. 그저 느끼게 하는 감성적 설교가 더욱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요즘 골치 아픈 교리문제를 가지고 설교하는 사람 보셨습니까? 저는 중학교 3학년 때 친구들과 천년왕국논쟁을 벌이기도 했고, 믿음과 행위의 관계에 대해 토론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것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식으로 그냥 쳐다보고 있는 듯합니다. 자신에게 직접적인 의미를 주는 것이 아니라면 거들떠보지 않으려 합니다. 자기가 원하는 정보들은 언제든지 얻을 수 있다는 이 생각은 지금 이 세상이 우리 마음에 집어 넣어주는 생각입니다. 이렇게 정보화시대에서 신앙생활 하는 것은 점점 피상적으로 되어갈 것이며 점점 그 깊이를 잃어갈 위험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보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더욱 더 진지하게 성경을 연구하는 흐름을 강조해야 합니다. 목회자와 리더들부터 먼저 성경을 그냥 읽는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연구하여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진지하게 연구하고 깨닫는 일에 힘쓰는 모습을 서로 보여주어야 할 때입니다.
자, 이제 본문말씀을 한번 살펴보도록 합시다. 우리는 계시록 9장을 보면서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엄청난 재앙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10장에 들어와서 우리는 엄청난 재앙의 환상 뒤에 이어지는 두 번째 환상을 보게 됩니다. 문맥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10장이 전체적으로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종말의 때는 재앙의 때이지만 동시에 복음을 전해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이런 끔찍한 재앙을 보면서 우리는 끝이 다가왔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가 받은 사명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위기의 때일수록 우리는 더욱더 사명에 충실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을 맡겨주셨는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을 받았습니까? 우리는 말씀을 맡았습니다. 어떻게 받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처음 말씀을 주실 때는 참으로 꿀처럼 달콤하지만 그 말씀을 소화하고 간직하고 살아갈 때는 참으로 비참하고 비통하기 그지없는 것입니다. 반면, 세상은 어떻습니까?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립니다. 그러나 그럴 때 토해놓을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 오히려 내 안에서 다음과 같은 음성이 들리는 것이 진정한 사명의 특성입니다: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지금 이 시대는 참으로 끔찍한 재앙들을 많이 목격하지만 그러나 그럴수록 교회는 주님 오신다는 사실을 세상에 드러내어야 할 때입니다. 지금은 교회가 예언사역에 충실해야 할 때입니다. 지금은 위기의 때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가 사명을 감당해야 할 때입니다. 사도 요한은 주의 말씀 때문에 밧모섬에 갇혀서 쓰라린 경험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계시를 담당한 천사장은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그러나 앞서 살펴본 10장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 때 비로소 해석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즉, 교회의 예언사역, 복음전파, 말씀사역의 특성과 관련된 것입니다. 1절을 볼까요?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라고 했습니다. 계시를 담당하던 그 천사는 사역이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 다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줍니다. 갈대는 요한 사도 당시 척량도구였습니다. 길이는 약 3m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요즘이야 줄자나 거리 측정계가 있지만 고대세계에서는 갈대로 길이를 재곤 했습니다. 보통 갈대로 길이를 재는 경우는 신축하거나 보수할 때 혹은 건물을 허물어버릴 때입니다. 계시를 담당한 천사는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성경을 전체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며,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성전은 어떤 곳입니까? 성전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만나는 곳입니다. 에덴동산은 최초의 성전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디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까? 예루살렘 성전입니까? 아닙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가능합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여러분, 언제나 신약성경은 건물로서의 성전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언제나 성전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구약에서의 성전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일으키겠다”고 주님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실체가 왔으므로 모형은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믿고 경배하는 자들 역시 성전의 일부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4:16)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2:21,22)
그러면 성전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라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분명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6째 인을 뗀 후에 큰 진노의 환상을 본 후에 144,000명을 인치는 장면을 보지 않았습니까? 마찬가지로 이제 6째 나팔이 울려 분 후에 큰 재앙의 환상을 본 다음 성전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은 안전하게 보호받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재앙의 날에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견고하게 세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재앙의 날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고 한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유대 성전은 이방인들이 접근할 수 있는 뜰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직 제사장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구역이 있었는데 그곳으로 침범하는 이방인들은 즉시로 성전파수병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도록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제가 볼 때 성전 밖 마당은 이방인의 뜰로서 교회당 안에 있지만 여전히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몸은 교회에 나오는데 마음은 여전히 세상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못합니다. 자기 힘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못함을 알고 비참해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믿음만으로, 전적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알면 참으로 그리스도를 섬기지 않을 수 없고, 하나님께 경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된 경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언제까지 성전 밖 마당만 밟을 것입니까?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으로 담대히 들어오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하는 자가 되십시오. 이 종말의 때에 하나님의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거룩한 사람들이 되십시오.
그러면,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고 하신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참으로 난해한 말씀입니다. 저는 계시록에 나오는 본문들을 사도요한의 시각과 그 시대적 배경에 입각하여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묵시문학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거룩한 성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유형 교회를 가리키는 것이라 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교회를 핍박하고 짓밟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사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무형교회는 짓밟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사를 보십시오. 원수 마귀는 세상 권력을 동원하여 교회를 핍박하고 없애려고 수없이 시도해왔지만 결코 하나님의 교회를 없애지 못했습니다. 북한교회와 중국교회를 한번 보십시오. 유형교회는 핍박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형교회는 결코 핍박받지 않습니다. 지난번 방문한 중국가정교회가 박살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참으로 가슴 아팠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래도 교회는 건재할 것이라고 믿고 하나님께 찬양드릴 수 있습니다. 성전 밖 마당은 짓밟혀도 성전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은 안전하게 보호받는다고 본문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무너뜨릴 세력은 세상에 어디에도 없습니다. 저는 이 교회의 영광을 믿습니다.
그러면 ‘마흔 두 달’은 어떤 기간일까요? 계시록에서 ‘마흔 두 달’은 여러 가지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한 때 두 때 반 때’ 혹은 ‘삼 년 반’ 혹은 ‘1260일’ 등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숫자를 볼 때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믿습니다. 즉, 이 기간은 주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으로서, 교회가 예언사역, 즉 복음전파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기간을 의미합니다. 환난과 핍박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을 끝까지 감당해야 할 기간이 있습니다. 언제부터 언제까지입니까?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오실 때까지 이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11:26) 그러므로 본문에 기록된 42달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입니다. 만일 문자적으로 42달이라고 한다면 요한 사도 개인이 42달만 예언사역을 감당했다는 식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말씀을 받아먹는 요한은 증인된 교회를 대표하는 것이며, 42달 동안 예언사역을 감당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신약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충성된 증인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오심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교회의 복음전파에 대해 계속 말하고 있습니다. 3절에,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여러분, 본문을 어려워하지 마십시오. 쉽게 보십시오. 즉, 성경 전체를 염두에 두고 문맥을 따라 전체적으로 보십시오. 여기서 말하는 ‘나의 두 증인’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4절에,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라고 했습니다.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는 히브리어 문법상 ‘두 감람나무 곧 두 촛대’라고 번역하는 것이 정확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두 증인’은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 네 명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두 증인, 두 감람나무, 그리고 두 촛대는 모두 같은 존재들입니다. 이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여러분, 우리가 지금까지 견지해온 바를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해석하기 쉬워질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종말에 교회가 주님 죽으심과 다시 오심을 전해야 할 사명이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두 증인 역시 신약의 교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자연스럽습니다. 만약 ‘두 증인’을 특정 인물이나 특정 집단으로 국한시킨다면 본문 전체에 많은 혼란을 불러일으킵니다. 본문을 계속 보시면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킨다고 했고 저희를 죽인다고 했습니다.(7절) 특정 개인이나 특정 집단이라고 하면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어떻게 개인과 특정 집단에 대해 전쟁을 벌일 수 있습니까? 또한 두 증인은 늘 함께 사역하고 함께 죽으며 함께 부활합니다. 이것이 특정 개인이나 집단으로 보면 도무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역사상으로 보더라도 또 앞으로 보더라도 한꺼번에 함께 죽은 증인도 없었거니와 앞으로도 불가능합니다. 개인이나 집단은 그 나름대로 고유한 존재목적과 존재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보십시오. 특정 개인이나 집단으로 볼 때, 그들의 죽음을 땅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이 보고 기뻐한다는 것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들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두 개인만이 부활하게 되는 것도 이해되지 않습니다. 성경 어디에서 교회의 휴거는 말하고 있어도 두 사람만의 휴거에 대해서 말하는 곳은 없습니다. 본문에 말하는 ‘두 증인’이란 말은 물리적인 숫자개념이나 문자적인 인물 개념으로 보면 본문의 진정한 의미를 놓쳐버립니다. 본문에 ‘두 증인’은 그리스도의 신실한 교회를 가리킵니다. 두 증인은 성령의 능력 받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증인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교회의 모습은 증인 공동체입니다.
그러면 왜 하필 ‘두 증인’이라고 했을까요? 구약에서부터 증거는 두 사람 이상이어야 그 증거가 참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오르셨을 때 모세와 엘리야 두 증인이 나타나서 예수님을 증거했지 않습니까?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전도자들을 파송할 때 둘 씩 둘 씩 짝을 지워 보내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여기서 ‘두 증인’이라는 말은 실제로 ‘두 사람’을 가리키는 것보다는 ‘신실하고 참된 증거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두 증인’을 매우 기발하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구약교회와 신약교회’ ‘모세와 엘리야’ ‘율법과 은혜’ 혹은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맥상 가장 자연스러운 것은 ‘두 증인’이란 ‘두 개인’ 혹은 ‘두 집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신실한 증거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권세를 준다는 말은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권세를 부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실 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분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18-20)고 하셨습니다. 복음 전할 사명을 이해하는 자는 권세를 소유한 자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갖고 계시는 주님이 복음을 전파하는 교회와 항상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라고 했을 때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스가랴서를 읽어본 그리스도인이라면 잘 알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환상 중에 순금 등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감람나무에서 기름이 촛대로 계속 흘러내려서 촛대가 계속 불을 밝힐 수 있는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그 의미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됩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4:6) 그리고 요한 사도에게도 동일한 의미로 선포되었습니다.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계1:20)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신실한 증거자로서 교회는 성령으로 충만하며, 성령의 능력을 항상 공급받으며, 세상에 복음의 빛을 비추이고 있는 모습입니다. 신빙성 있고 참된 복음의 증거는 성령충만하며 세상의 빛으로 부름 받은 교회가 감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간 성령의 은사에 대해 말씀을 배웠습니다. 성령강림절을 앞두고 참으로 적절한 주제였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증인이 되도록 성령의 능력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로 뒷받침되지 못하는 복음증거는 참으로 나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되 항상 성령의 능력과 은사를 의지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없이 가르치는 말씀은 사람을 살리지 못하는 죽은 교리에 불과할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인정하고 환영하며 의지해야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동시에 성령의 능력만으로는 안됩니다. 우리는 성경을 연구하고 깨닫고 가르쳐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과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것이 서로 함께 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진실하고 참된 증거를 세상에 제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받기만 하면 됩니다. 그 은혜는 우리가 증거할 내용이 되시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마음에서부터 솟아나는 것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7:38) 성령의 능력으로 성경 말씀을 신실하게 가르치는 것만이 세상을 밝히 비춰주는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는 길입니다.
두 증인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리라”고 했습니다. 굵은 베옷을 입고 있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언제나 굵은 베옷은 깊은 슬픔과 탄식과 애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 얼마나 난처한 일들을 만나게 되는 지 모릅니다. 만약 베옷을 입고 나타나서 ‘내가 두 증인이다’라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실제로 베옷을 입고 사람들을 유혹하려고 하는 거짓 선지자, 적그리스도에게 속지 마십시오. 베옷을 입는다는 말은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무엇입니까? 복음을 진실하게 증거하는 교회는 깊은 애통과 탄식으로 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마음과 탄식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오지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은 그 지역의 죄를 마치 자기가 회개할 것인 것처럼 여기고 깊이 탄식하고 회개하는 심령으로 복음을 전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세상 앞에서 회개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교회가 잘못한 것을 회개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세상의 죄와 받을 재앙 때문에 탄식하면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얼마 동안 복음을 전해야 합니까? 1260일간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42달과 같은 기간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유형교회가 핍박받고 고통을 받는 기간과 교회가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해야 할 기간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42달이 암시하는 바는 매우 짧은 기간을, 1260일은 매우 긴 기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감당해야 할 사명에 비해서 핍박과 시련은 매우 짧은 기간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는 날마다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해야 할 기간은 매우 긴 세월을 요하고 있습니다. 잠깐 전하고 그만두는 성질이 아닙니다. 계속 전하고 전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할 때 교회는 권세가 있습니다. 왜냐면 그들에게 복음을 맡기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서 사명을 수행하는 교회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끝날까지 복음을 신실하게 전하는 자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언제 어떻게 체험할 수 있습니까? 주신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할 때입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일을 신실하게 이룰 때 아무도 해칠 수가 없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지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을 대적하는 것은 스스로 사망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을 대적하는 것은 스스로 영적으로 죽은 자임을 드러내는 것이며, 하나님의 택함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스스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나오는 과격한 표현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여러분, 만일 이것이 문자적으로 본다면 얼마나 당황스럽겠습니까? 물론 구약에서 엘리야가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자신을 체포하러 온 50부장을 불사른 적이 있었지만 입에서 불이 나서 사람들을 태워버리는 것을 문자적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불이 입에서 나올 것을 기대해서도 안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말씀이 복음을 대적하고 핍박하는 자들을 직접 정죄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하는 사람을 대적하는 것은 스스로 생명책에서 끊어지는 것을 자초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창12:3) 입에서 불이 나온다는 이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서 전도자를 파송하시면서 말씀하신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마10:14,15) 그리고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10:32,33)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서 사람들이 거부하고 핍박하고 대적할 때 우리가 엘리야나 요한 사도가 한 때 그러했던 것처럼 불이 내려와 태워버리시라고 간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의 죄 때문에 탄식하고 대신 회개하는 마음으로 계속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불이 되어 그들을 생명책에서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명을 받은 자는 권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를 대적하지 마십시오. 그를 진심으로 축복하십시오. 협력하십시오. 기도로 도우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복을 받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복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매우 간단합니다. 사명을 잘 감당하는 사람이 되든가, 아니면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을 협력하고 축복하든가 둘 중의 하나에 분명히 서야 합니다.
왜냐면 그들은 권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음을 위임하셔서 그들을 보내셨기 때문에 파송하신 자들과 함께 하십니다. 신실한 증인들은 이처럼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 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6절)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분명 모세와 엘리야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엘리야는 그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할 때 하늘을 닫기도 했습니다. 또 모세 역시 그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할 때, 물을 변하여 피 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기도 했습니다. 이 땅에 재앙이 임하는 여러 가지 원인 중에 하나가 사명을 받고 신실하게 수행하는 자들을 대적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이 땅에 축복이 임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증인들을 축복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신약의 교회는 이 권세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고, 자신을 증인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소망을 알고 신실하고 참된 복음을 전하는 자들과 주님은 큰 권세로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을 살 때 더욱 담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 주님의 능력을 의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입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입니까? 우리는 복음을 맡은 사명자입니까? 여러분이 하나님께 받은 사명은 무엇입니까? 받았는데 잊어버리고 살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계속해서 종말의 때 여러 가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당황하게 만드는 사건들을 만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당황하지 말고 오직 우리의 사명에 집중해야 합니다. 여러분, 사건들과 상황의 변수에 요동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사람이나 사건들이나 소유에 의존하지 마십시오. 특히 청년부 형제자매들에게 부탁하는 것은 사람에게 의존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지 마십시오. 여러분 각자에게 하나님이 맡겨주신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말씀을 갖다 먹어버리십시오. 이 일에 다른 사람을 의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오직 예비된 하나님의 약속인 성령의 충만한 공급을 의지하면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다만 그분이 여러분에게 맡겨주신 말씀을 연구하고 깨닫는 일과 신실하게 가르치고 전하는 일에 성실하시면 됩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오직 성령과 오직 말씀에 전적으로 의존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리고 위기의 때일수록 더욱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명에 집중하기를 소원합니다. 주님께서 크신 권능으로 함께 하시는 증거들을 삶 속에서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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