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설교

요한계시록 강해(30)-다시 살아나는 두 증인(계11:7-13)

등불지기 2012. 3. 3. 18:32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마지막 시대의 교회는 어떤 자아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까?

가중되는 핍박과 시련속에 있는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어떻게 대처하여야 합니까?

환난 속에서도 즐거워하게 하는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어디서 나는 것입니까?

김광락 선교사 올림.

 

요한계시록 강해(30)

 

다시 살아나는 두 증인

 

본문: 계11:7-13

 

11:7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11:8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이니라

11:9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11:10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11:11 삼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11:12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11:13 그 시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은 오직 성령의 능력을 받지 않고서는 도무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계시록 11장에서 배우는 것은 교회가 가져야 할 자아상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은 ‘증인’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 공동체로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증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면 안됩니다. 증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됨됨이를 가진 사람을 뜻합니다. 종종 증인이 되는 것은 거리 모퉁이에 서서 전도지를 나눠지고 가가호호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는 일로 연상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을 열심히 행한다고 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증인"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말투스'에서 비롯된 단어인데, ‘말투스’에서 ‘순교자’를 뜻하는 '마터'(martyr)라는 영어 단어가 나왔습니다. 증인은 '순교자'를 의미합니다. 순교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자신의 믿음 때문에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죽음까지도 그 믿음을 빼앗아 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계시록에서 증인은 자신의 증거를 다 마친 후에 목숨을 바치기로 작정된 사람을 의미합니다. 문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진정한 증인이 되지 못한 채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려고 한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증인이 되는 것은 말로 전하는 것 이상입니다. 즉,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이 제시할 증거를 위해서 목숨을 건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한 말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이유는 그 말을 뒷받침해줄 만한 삶을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람들에게 "당신은 정말 예수께서 주시는 기쁨을 알아야 합니다. 그분은 당신에게 큰 기쁨을 주십니다."라고 하지만 정작 자신은 늘 침체되어 있고, 비관적이라면? 사람들은 믿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비웃을 것입니다. 사실 실제 행동 때문에 우리가 한 말은 전혀 의미 없고 무시당할 수 있습니다. 삶이 없는 말은 효력을 잃습니다. 생활에서 나타나는 행동으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삶을 통해 뒷받침되지 못한다면 우리의 말은 아무런 효과도 없을 것입니다. 증거하는 것보다 증인이 되는 것이 우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증인될 능력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성령이 임하면 증인이 됩니다. 성령은 무능한 자에게 증거의 능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베드로의 실패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하셨을 때 베드로는 용감하게 나서서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분명 베드로는 충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했습니다. 베드로의 결연한 고백은 결코 허풍이나 거짓말로 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마음은 의지로 충만했습니다. 그는 정말 그리스도를 위해 죽을 각오를 했습니다. 그렇게 고백할 순간만큼은 진실한 고백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의 불꽃은 금방 꺼지기 잘한다는 사실을 베드로는 몰랐습니다. 자신의 의지로 증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베드로 자신은 몰랐던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실패 때문에 많이 웁니다. 예수님을 실망시켜 드리고 싶지 않았고 주님을 위하는 마음은 진실했지만, 자꾸 실패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더 이상 어떠한 것도 예수님께 약속하길 원하지 않는 지경에 도달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불과 몇 주 후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죽이는 일을 공모했던 그 사람들 앞에 서게 되었을 때 베드로는 얼마나 담대하게 말했습니까? 사도행전 4:5-12을 한번 읽어보십시오. 사람들은 베드로가 담대히 말하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겼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권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령은 우리를 돕는 자이시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있기를 원하는 모든 것을 구비시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증거의 능력을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증인이 되도록 능력을 주십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담대함과 지혜를 주십니다. 참 성령의 능력은 증거의 현장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온전히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종종 우리는 삶 속에서 우리 연약함이 드러날 때 곧바로 그것을 스스로 바로잡으려고 시도하는 것을 봅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우리 자신의 힘으로 잘못된 점을 고치려고 합니다. 조금만 더 열심을 낸다면 우리의 본성에 잘못된 부분을 고치고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실수한 것을 인정하면서 성령을 의지하기보다는 다시 자신의 의지를 새롭게 함으로 만회해보려는 시도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야 하겠다는 생각보다는 여전히 자기 자신의 의지와 능력을 더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되풀이되는 실패의 원인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무력함에 대해 완전히 절망하고 포기하고 굴복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는 승리의 기쁨을 맛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7:24) 먼저 인간으로서 자신에 대한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내 안에 아무런 선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자력으로 스스로를 구할 생각을 포기하고 자신이 곤고한 사람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우리가 해 드릴 수 없는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육신으로, 자기의 노력과 의지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을 단지 믿음으로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어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시고 하나님께서는 한 가지 대책을 마련하셨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온전히 신뢰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뱃속에는 성령의 강물이 흘러넘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하나님의 이상을 이룰 수 없지만 예수님을 믿을 수는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을 향해 문을 활짝 열게 되는 것입니다. 내 자신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나 자신을 온전히 맡겨버릴 때 하나님은 성령의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사람의 힘으로 하려고 할 때 참으로 비참해지고 힘들게 됩니다. 구약의 스가랴 선지자 시대에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일을 시작했을 때 돌도 돈도 인력도 없었습니다. 이때 선지자 스가랴에게 주신 환상은 순금 등대와 두 감람나무에 대한 환상이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그 의미를 물었을 때 하나님의 응답은 이것이었습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4:6) 스가랴 선지자에게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성전은 오직 하나님의 성령으로 건축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너희가 돌이 없고 돈도 없고 인력도 없어서 성전을 어떻게 건축할 수 있느냐고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영으로 되는 것이다. 성전은 성령으로 건축될 것이다. 돈이나 돌이나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 다만 너희들은 하나님의 성령을 온전히 의지하여라.”는 뜻입니다. 위대한 건축 역사를 앞두고 고민하는 스룹바벨 총독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인 것입니다. 오늘 내 힘으로 잘 해보려고, 내 의지로 좀 더 개선해보려고 하는 시도를 주님 앞에 다 내려놓고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온전히 바라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하십시오. 성령의 능력을 주십시오." 이렇게 성령의 능력을 받을 때, 성령의 능력을 온전히 의지할 때 비로소 교회는 증인 공동체로서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게 되어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두 증인’에서 ‘두 감람나무’로 ‘두 촛대’로 이어지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이것이 지난 시간에 살펴본 말씀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종말에 교회가 가져야 할 자화상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제가 여러 번 강조하는 대로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라, 지금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해야 하는 교회가 가져야 할 자화상에 대한 것입니다. 지금 지상 교회가 어떤 역사관과 교회관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어떤 사명을 가지고 전진해야 하는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계시록 11장에서 ‘신실한 증인’이라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증인 공동체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리고 훌륭한 증인들을 배출해왔습니다. 교회는 그들을 진정 자랑스러워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하며, 의지해야 합니다. 그것이 두 증인을 두 감람나무로 소개한 배경입니다. 교회가 이렇게 성령의 능력을 받을 때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고, 나아가서 세상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두 촛대라는 말씀의 의미였습니다. 교회는 신실하게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고 기록한 대로 교회는 세상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땅을 친다는 말은 세상 사람들이 의지하고 믿는 것들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치명타인 것입니다. 복음은 죄악이 충만한 세상에 떨어지는 하나님의 방망이인 것입니다. 성령의 권능을 받은 교회가 세상에 대하여 복음을 외치는 것은 세상을 치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 선전포고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정죄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공격적으로 복음을 전해야 할 증인 공동체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교회는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성령의 능력으로 세상을 책망하며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것은 때가 있습니다. 교회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마치기전까지는 세상의 종말이 결코 오지 않을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고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7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터인즉”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저희”는 두 증인으로서 성령의 능력을 받은 증인 공동체를 의미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경배하는 자들 가운데서 세워질 것입니다. 성령의 공동체는 그 사명을 마칠 때가 있습니다. 그 사명을 다 감당하기 전까지는 주님이 오시지 않을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사명을 다 감당하기 전까지는 결코 죽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독재자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하나님의 교회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핍박과 환난을 당하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무한한 격려와 위로가 되었음이 분명합니다. 왜냐면 사명을 다 감당하기 전까지는 결코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사명을 다 감당하기 전까지는 결코 죽지 않을 것임을 알고 사십시오.

그러나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저희’를 실제적인 사람으로 볼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특정 개인으로 보면 이후 문맥에서 많은 혼동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래서 다분히 ‘두 증인’은 실제적인 두 인물이라기보다는 상징적인 불특정 다수로서의 성령의 능력을 받은 그리스도의 증인들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합당합니다. 사실 교회의 역사는 증인들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순교자들이야말로 교회의 면류관입니다. 그들은 사명을 다 감당하고 당당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들의 죽임 당함은 교회를 파멸로 몰아가기는커녕 교회의 부흥으로 이어졌습니다. 이것이 본문이 그려주는 진정한 표상이라고 믿습니다. 사명을 다 감당한 순간 우리는 죽임 당함을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분명히 주님의 증인으로서 사명을 다 감당하는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이 순간은 2000년 교회 역사 속에 되풀이되고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오실 대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아 그리스도의 충성된 증인으로서 사명을 다 감당할 때 사단의 권세 아래 잠시 놓이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그리하셨습니다. 계시록은 예수님을 충성된 증인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계3:14)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시다가 그 사명을 다 감당하시자 어둠의 권세가 활개를 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요14:30,31) 예수님은 거듭 자신의 때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교회 역시 마찬가지로 그 사명을 다 감당하기 전까지는 결코 목숨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사단은 세상 권력을 이용하여 그들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그들을 이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죽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혼은 결코 죽이지 못할 것입니다.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저희 시체’는 사명을 다 감당하고 죽임을 당한 후에 남은 폐허와 잔해를 의미합니다. 충성된 증인들이 죽은 다음에는 교회는 어쩌면 건물만 덜렁 남을 지 모릅니다. 그 시체는 “큰 성 길”에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곳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다분히 영적이고 상징적입니다. 여러분, 소돔과 애굽과 골고다 언덕이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소돔과 애굽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한 도시를 가리킵니다. 소돔처럼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을 의미합니다. 애굽이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을 학대한 것처럼 하나님의 종들과 백성들을 핍박하는 곳입니다. 충성된 증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런 세상의 한 가운데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명을 다 완수하신 다음에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교회 역시 그것을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영광의 길을 뒤따르는 것입니다. 8절에서 말씀하려고 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고난받는 초대교회에게 주는 격려의 말씀입니다. 죄악과 핍박의 도시에 살면서 힘들어하는 그들에게 하는 말씀은 그들보다 먼저 있었던 많은 하나님의 종들과 백성들도 함께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며, 구주께서 친히 죽임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지금 교회는 그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는 중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교회가 경험하는 순교가 전 지구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만일 ‘두 증인’을 특정 개인이라고 가정해보십시오. 두 사람이 죽었을 때 온 세상 사람들이 그 시체를 목도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영적으로 보아야 하지만 동시에 매우 상식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흘 반’은 하나님이 작정하신 특정한 기간으로서 매우 짧은 때를 의미합니다. 교회사를 보십시오. 교회가 순교자를 배출하던 시기는 교회로서는 매우 암울한 때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매우 짧은 때입니다. 곧바로 하나님의 영광과 부흥케 하심이 뒤따르는 모습을 볼 때 우리는 고난은 짧고 영광은 길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고난을 당하는 때가 있지만 그 기간은 매우 짧다고 말함으로써 위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흘 반 동안은 그 시체가 무덤에 장사되지 못한 채 지내게 될 것입니다. 원래 시체를 장사하지 않고 목도한다는 것은 수치와 경멸과 모욕을 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본문은 성령의 능력 받은 증인들이 그 증거의 사명을 다 감당하고 순교하게 됨으로써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수치와 모욕을 당하게 될 것을 말해줍니다. 증인들은 사명을 다 감당하고 영광스럽게 순교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시각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시각에서 볼 때 순교자들처럼 비참한 인생을 또 없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증인들의 죽음을 비웃고 조롱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조롱하고 비웃는 기간은 얼마 가지 않을 것입니다. 순교자들의 죽음으로 오히려 교회가 영광스럽게 일어서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분명 교회는 그리스도의 증인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능력을 받은 증인들입니다. 그들은 순교자로 부름 받은 자들이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10절에 보면 선지자로 일컬어지기도 합니다. 선지자라는 말은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전령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고로”라고 했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두 선지자’를 특정 인물이나 개인으로 해석하는 견해를 조심하십시오. 생각해보십시오. 어떻게 두 인물이 땅에 거하는 사람들을 괴롭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본문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땅에 거하는 자들’은 불신자들을 가리킵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하늘에 있는 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반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을 ‘땅에 거하는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하늘에 앉히운 자들이라고 소개할 때 그 의미를 문자적인 의미로 받아들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실제적이며 영적이며 또한 실존적인 묘사입니다. 즉, 사람들이 보는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는 대로 말한 것입니다. 본문에 기록된 것들은 하나님 보시는 대로 묘사된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실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능력을 받아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 사람들은 그리스도 밖에 거하는 자들에게는 참으로 눈에 가시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면 늘 죄를 책망하며 회개하라고 외쳐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증인들은 회개의 심령을 가지고 회개의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나 세상사람들은 이 회개의 복음을 무척이나 싫어합니다. 아니 괴로워합니다. 마치 세례요한의 책망에 헤롯이 괴로워했듯이 말입니다. 그런고로, 증인들이 순교자가 될 때 그들은 속으로는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고 한 것은 자기들의 기쁨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책망하는 사람이 사라지면 세상 사람들은 속으로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그리스도 밖에 거하는 사람들, 다시 말해서 세상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책망의 말씀을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책망의 말씀에 굉장히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결코 책망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교회에게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제발 책망하는 말은 그만 집어치우고 용기를 북돋우고 격려하는 말만 해달라고 아우성치는 것입니다. 지혜가 있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참 믿음이 있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책망의 말씀에 경청할 줄 아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구원받을만한 지혜가 있는지 알기 원하신다면 일단 책망해보십시오. 그리고 어떤 반응을 하는가 지켜보십시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책망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자신의 죄를 책망하는 사람을 기뻐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 죄를 들추어내고 책망하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괴로워합니다. 그리고 책망하는 사람이 사라지면 즐거워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리스도 밖에 거하는 자들에게는 굉장히 괴로운 것이며 눈에 가시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을 받은 증인들이 순교함으로 교회가 수치를 당하고 굴욕을 당하지만 그 기간은 매우 짧을 것입니다.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잠시 교회가 침체를 겪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곧바로 하나님의 생기가 다시 불어올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서게 될 것입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사40:6-8)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자는 풀입니다. 그들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굳게 설 것입니다. 또, 하나님으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에스겔 선지자가 바라본 부흥의 환상을 연상케 합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겔37:5,6) 이 본문은 교회의 휴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부흥을 말하는 본문입니다. 생기가 임하기 직전에 교회는 이제 거의 다 죽은 것 같아 보입니다. 다시는 회생할 가능성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기가 불 때 그들은 하나님의 군대로 다시 일어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기는 여기서 하나님의 성령의 임재를 가리킵니다. 침체된 교회에 성령의 바람이 불어와 다시 부흥하게 될 것입니다. 한국교회사에서 일본 제국은 주기철 목사님을 죽임으로써 한국교회가 다시 일어서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실제로 몇몇 성도들조차 그렇게 생각하고 낙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 때문에 한국교회가 더 영광스럽게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기가 절망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교회 가운데 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본문의 이 장면은 분명 교회의 부흥과 관계되고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자, 만일 이 장면을 문자적으로 보면 어떤 문제가 발생합니까? 교회의 휴거가 두 번 있게 될 것이라는 결과가 됩니다. 두 증인이 휴거하고 또 남은 교회가 휴거하게 되는 것은 성경의 문맥에 맞지가 않습니다. 휴거는 단 한 번뿐입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4:16,17)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전15:51,52) 교회의 휴거는 마지막 나팔인 일곱째 나팔소리가 울려 불 때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미 여섯째 나팔이 불려졌고 마지막 나팔이 아직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보십시오. 저희가 발로 일어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실제적 휴거를 가리키는 것과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왜냐면 교회의 휴거는 살아남아 있는 자들이 홀연히 변화하여 공중으로 들림 받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계시록의 본문은 죽은 증인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시 발생할 휴거는 순교자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리스도와 함께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렇게 봅니다. 여기서 “저희가 발로 일어서니”라고 한 것은 침체된 교회가 다시 성령의 생기로 새 힘을 얻고 증인의 공동체로 회복될 것에 대한 환상입니다. 세상은 증인을 죽임으로써 교회가 회생 불가능할 것으로 보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생기에 의해서 교회는 다시 일어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환상은 먼 훗날 볼 것이 아니라 교회 역사 속에서 이미 수없이 보아온 그림입니다.

이렇게 회생 불가능한 교회가 다시 부흥케 됨으로써 세상은 두려워 떨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다시 부흥케 되는 것은 결코 긴 세월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구경하는 자들이 두려워할 것입니다. 교회가 사라진 것처럼 보고 기뻐하는 사람들이 다시 교회가 일어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의 생명력은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생명력은 하나님의 생기에 의해서 지탱되는 것입니다. 증인들의 죽임 당함으로 교회는 죽은 듯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기에 의해서 다시 일어서게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장면을 보고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미래의 어느 순간에 볼 것이 아니라 이미 수없이 보아온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다시 잃어버린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런 계시의 세계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본문 12절을 보십시오.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저희가 듣고”라고 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 장면은 교회의 실제적 휴거와 다르다고 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계4:1에 사도 요한이 들은 “이리로 올라 오라”라고 하신 말씀은 사도 요한이 실제로 휴거한 말씀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에게 주신 “이리로 올라오라”는 말씀은 요한 사도의 휴거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요한 사도에게 하늘나라의 영광과 구속사의 비밀에 대한 계시의 사건을 의미합니다. 마찬가지로 순교자들은 하늘의 영광에 들어가게 될 것이며, 많은 사람들이 순교자들의 영광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순교자들로 인해 침체된 증인 공동체는 다시 성령의 바람으로 인하여 다시 교회의 영광, 복음의 영광, 하늘의 영광을 회복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는 말씀은 교회의 영광이 회복되는 것을 저들이 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에 큰 지진이” 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큰 지진’은 실제적인 지진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세상 사람들에게 엄습하게 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빌립보 성의 감옥이 진동함으로 말미암아 간수장이 하나님의 심판을 의식하게 된 것을 보십시오. 비록 하나님의 종들이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고, 그래서 세상은 이제 교회가 세워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의 심령은 성령의 생기로 말미암아 다시 일어났고, 그때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빌립보 간수장에게 극적으로 임한 것입니다. 이 두려움은 도시 전체에 대대적으로 임할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부흥의 증거입니다. 즉, 참된 부흥은 세상 사람들도 인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깨닫고 기절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에게 두려움이 확산되는 방식으로 부흥이 일어날 것입니다. 십분의 일은 유대인의 사고방식에서 볼 때 전체를 의미하는 수였습니다. 성의 십 분의 일이 무너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그 도시 전역에 일시에 확산될 것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교회사를 통해 여러 번 보아왔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확산됨으로 말미암아 세상은 기절하게 될 것입니다.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하나님의 진노 아래 그들은 엎드러질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는 죽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다가 죽었을 때 하나님은 모든 교회의 성도들을 다 순교의 제물로 데려가지는 않으십니다. 남은 자들을 두십니다. 그들은 어쩌면 기회주의자로서 세상과 교회에 중간을 걸치던 자들인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정말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순교할 기회를 놓쳐버린 자들인지 모릅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그들 가운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다시 회복되고 있습니다.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남은 자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다시 각성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다시 분연히 하나님의 군대로 일어서게 될 것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그들은 이제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심을 믿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갇혔지만 자신의 상황이 오히려 남은 자들을 일깨우는 하나님의 도구가 된다는 사실을 일치감치 발견했습니다.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빌1:14) 엘리야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일을 다 마치고 죽임을 당하는 위기 앞에서 절망하고 있었을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 천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19:18) 엘리야의 눈에는 자기가 죽으면 하나님의 나라가 끝날 줄 알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남은 자들을 세워두십니다.

세상 나라는 망해도 하나님 나라는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천 년이 넘도록 지속된 제국은 없지만 하나님의 교회는 그 어떤 어려움에도 영원히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늘 핍박과 환난을 겪지만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터는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머리도 그리스도이시며, 교회는 그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조직체로서의 교회는 생겼다가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기체로서의 교회는 영원히 있을 것입니다. 단순히 계속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영광중에 나타나실 때까지 계속해서 성장하고 확장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보는 것만으로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판단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지상의 교회가 아무리 깨어지고 부서지고 넘어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주님의 교회는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으며 승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땅의 모든 족속에게 전파되면서 계속해서 성장해나갈 것입니다. 당의 모든 족속이 복음을 듣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즐거워하게 될 때 모든 족속이 구름을 타고 오시는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입니다. 성숙함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교회의 암울한 현실만을 보고 절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성숙함이란 환난과 역경 속에 있는 교회를 보면서 영광스러운 주님의 교회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기 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이 땅의 모든 교회가 가져야 할 진정한 자화상을 보고 있습니다. 교회는 증인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교회는 증인들을 배출해야 합니다. 교회의 영성은 증인들이 쥐고 있습니다. 순교자들은 교회사의 꽃입니다. 교회는 순교자들을 자랑해야 합니다. 순교자들의 삶을 보면서 교회는 다시 용기를 얻게 됩니다. 증인들이 순교할 때 교회는 풍지박산 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증인들이 흘린 피는 교회가 놀랍게 회생하는 힘이 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여지껏 보아온 역사의 비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의 상황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 할지라도 우리가 받은 사명을 잊지 않도록 합시다. 환난과 핍박이 극심하여도 교회는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교회 위에 하나님의 생기가 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이제 우리는 교회의 영광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 교회의 영광인 증인들을 자랑해야 하겠습니다. 교회의 생명력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사모하면서 계속 “오직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는 땅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될 것”을 외치며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생기를 주장하시는 하나님께 우리 자신과 우리 교회를 부탁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바람이여 우리 위에 임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