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설교

요한계시록 강해(27)-이만만 마병대(계9:13-21)

등불지기 2012. 3. 3. 18:18

요한계시록 강해(27)

 

이만만 마병대

 

본문: 계9:13~21

 

9:13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들으니 하나님 앞 금단 네 뿔에서 한 음성이 나서

9:14 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하기를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 하매

9:15 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예비한 자들이더라

9:16 마병대의 수는 이만만이니 내가 그들의 수를 들었노라

9:17 이같이 이상한 가운데 그 말들과 그 탄 자들을 보니 불빛과 자주빛과 유황빛 흉갑이 있고 또 말들의 머리는 사자 머리 같고 그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오더라

9:18 이 세 재앙 곧 저희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을 인하여 사람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하니라

9:19 이 말들의 힘은 그 입과 그 꼬리에 있으니 그 꼬리는 뱀 같고 또 꼬리에 머리가 있어 이것으로 해하더라

9:20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그 손으로 행하는 일을 회개치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9:21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을 회개치 아니하더라

 

우리는 계속해서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살펴오고 있습니다. 창세기가 신구약 성경의 서론이라면 요한계시록은 결론입니다. 우리가 창세기부터 성경을 쭉 읽어왔다면 요한계시록은 전혀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 66권의 전체 흐름 속에서 요한계시록을 보아야 길을 잃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을 극단적으로 잘못 해석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이유는 요한계시록의 위치를 잘못 잡기 때문입니다. 즉, 다름 아니라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모든 말씀의 요약이자 결론이라는 점에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른 성경, 이를테면 로마서와 마태복음과 같은 문체와는 사뭇 다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성경에서 엄연히 흐르고 있는 선지자들의 전통 위에 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볼 때 구약의 선지자들이 외쳐온 말씀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때 원칙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역사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즉, 당시 1세기 로마교회와 흩어져 있던 소아시아 교회의 성도들의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둘째, 성경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선지자들의 글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가르치신 종말에 대한 가르침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세 번째로, 문맥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전후 글의 흐름을 잘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의도를 가지고 어떻게 글이 흘러가고 있는지 관찰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석할 때 우리는 엉뚱한 해석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참신하고 기발한 해석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본문이 말하고자하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이렇게 요한계시록을 살펴볼 때 우리는 전혀 새로운 메시지가 아니라 우리가 오래 전부터 이미 수없이 들어온 메시지를 듣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우리는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게 될 때 나타나는 현상을 보게 됩니다. 글의 흐름을 다시 한 번 볼까요? 네 번의 나팔소리는 자연계에 재앙을 가져옴을 보았습니다. 환경의 고통입니다. 만물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고통 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날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환경과 생태계에만 고통이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어서 불게 되는 다섯째 나팔소리는 영적인 재앙을 불러옵니다. 정신적인 고통을 말합니다. 인류는 환경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심령 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돈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고 허망한 가르침을 따라다님으로써 겪는 허무와 공허는 가히 죽음의 고통보다 더 심각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오늘 살펴보게 될 여섯째 나팔소리는 사람들의 대학살을 불러옵니다. 단지 정신적인 고통만이 아닙니다. 인류는 끔찍한 육체적인 고통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은 인류가 경험하고 있는 홀로코스트, 대학살에 대한 장면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다섯째 나팔이 불릴 때 하나님 앞 금단 앞 네 뿔에서 한 음성이 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보이는 금단은 어떤 곳입니까? 성도들의 기도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곳입니다. 계8:3-5을 보십시오.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고 했습니다. 여섯째 천사장이 나팔을 울려 불 때 나타나는 현상은 성도들의 기도의 응답으로 이루어지는 현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종말을 사는 성도들은 탄식하면서 하나님의 완전한 구속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탄식은 불의한 세상을 살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늘 불의를 목격하면서 그 심령이 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의로 인하여 탄원하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눅18장에 불의한 재판관을 향하여 계속 끈질기게 탄원을 올리는 가난한 한 과부의 모습은 오늘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세상의 불의와 부조리를 보면서 성도들은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개입과 구원을 갈망하고 탄원합니다.

세상에서 불의한 일을 보고 탄식함에 따라, 성도들의 탄원에 대한 응답으로 심판이 시행됩니다. 이것은 6장에서도 살펴본 것입니다. 진리를 사수하기 위해 피 흘린 순교자들의 탄원으로 말미암아 여섯 째 인을 뗄 때에 그 응답으로 하늘로부터 진노가 쏟아지는 것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여섯 째 나팔 역시 마찬가지로,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핍박받는 성도들의 기도는 엄청 무서운 것입니다! 여러분, 약자를 업신여기지 마십시오. 약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것만큼 화를 자초하는 것은 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약한 자와 고아와 과부의 편에 항상 서야 합니다.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언제나 약한 자 없는 자 고아와 과부를 업신여길 것입니다.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자를 대하는 태도 여부에 따라 하나님의 긍휼어린 구원과 긍휼 없는 심판이 결정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불의한 모습을 보면서 탄식하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탄식으로 안타까워하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을 간구 할 줄 모른다면 아직 거듭나지 않은 것입니다. 지난 주간 우리는 매스컴을 통해서 얼마나 자주 보아왔습니까? 이제는 불의한 소식을 접하는 것이 너무 일상화되어서 무감각해져 있지는 않습니까? 불의에 대한 불감증은 곧 내 영혼이 어두워져있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본문은 세상의 불의로 고난 받고 하나님께 탄식기도를 드리는 백성들 때문에 이 세상에 어떤 재앙이 임하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를 통해 이루어지는 사건은 성도들의 이러한 탄식기도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입니다. 불의한 일로 고통 받는 성도들 때문에 여섯째 재앙은 신속하게 임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어떤 재앙입니까? 환경의 파괴로 인한 고통, 그리고 귀신들 때문에 겪는 고통이외에도 인류가 겪고 있는 또 다른 고통이 무엇입니까? 금단의 네 뿔에서 어떤 음성이 들립니까?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14절) ‘큰 강 유브라데’ 역사적으로 해석할 때, 유브라데 강은 에덴동산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를 윤택하게 하는 큰 강이었고, 바벨론 문명이 생겨나게 한 강이었습니다. 요한 사도 당시에는 유브라데강을 중심으로 로마제국과 파르티안 제국이 서로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파르티안 제국은 당시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기마병을 보유한 나라였습니다. 파르티안 제국의 기마병은 로마제국에게 가장 큰 위협이었다고 합니다. 어쩌면 오늘 본문 16절 이하에 나오는 기마병의 모습은 당시 1세기 로마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있었던 파르티아인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이 본문을 성경적으로 해석할 때, 유브라데 강은 바벨론 문명의 근원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알듯이, 중국문명의 근원에 황허강이 있고, 인도 문명의 근원에 갠지스와 인더스강이 있었고, 이집트 문명의 근원에 나일강이 있었습니다. 강을 중심으로 고대문명이 발생했습니다. 강은 비옥한 토지와 신속한 교통과 교역을 보장해주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바벨론 문명은 이스라엘 역사에 가장 큰 악영향을 미쳤습니다. 유브라데강 유역은 바벨론 문명의 중심지요 근원이었는데 바벨론 문명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크게 핍박하던 전과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네 개의 고대문명 중에서 바벨론 문명만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크나큰 피해를 준 것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 문명이 의지하는 생명줄인 유브라데 강에서 네 천사가 풀려나서 하나님의 심판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가 풀려나는 것은 곧 바벨론 문명의 몰락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몰락할까요? 큰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 문명의 발달이 오히려 인간에게 크나큰 재앙의 원인이 될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유브라데 강 유역에 결박된 네 천사’는 어떤 자들입니까? “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예비한 자들이러라.”(15절) 그들은 악한 천사, 타락한 천사로서, 하나님의 구속계획을 이루는 도구로서 쓰임 받기 위해 준비되었습니다. 여러분, 선악에 대한 이원론을 조심하십시오. 선과 악이 서로 대치하고 있고 하나님은 선이라는 범주에 묶여 있는 그런 분으로 보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선의 범주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 살펴본 것이 무엇입니까?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악령들의 세력 역시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도 악한 날에 쓰임 받기 위해 준비하십니다. 인류에게 재앙을 가져다주고 피해를 입히는 악한 자들이 존재하지만 그들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와 능력을 드러내고야 말 것입니다. 지금은 그것을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지만 우리는 곧 그들의 존재가 오히려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와 무궁하신 능력과 영광을 드러내는 것을 보고야 말 것입니다.

결박에서 풀려난 네 천사들은 누굽니까? 여기서 말하는 ‘결박된 네 천사’는 7장에서 말하고 있는 ‘네 천사’와 분명 다릅니다. 7장의 네 천사는 땅의 네 모퉁이에 서있고, 본문의 네 천사는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되어 있습니다. 7장에서 네 천사는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두는 데, 본문의 네 천사는 자신들이 붙잡혀 있습니다. 7장의 네 천사는 성도들이 인침을 받는 동안 바람을 불지 못하도록 하는데, 본문 9장의 네 천사는 풀려나서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는 임무를 수행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기 위해 준비된 악한 천사들입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기 위해 타락한 천사들이 예비되어 있으며, 작정되어 있는 결정적인 순간에 쓰임 받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잠16:4에,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최후 심판의 날에 도구로 쓰시기 위해 타락한 네 천사들을 결박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날과 시에 그들이 풀려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결박된 후 다시 풀려나게 되는 곳은 다음 아니라 인류문명의 중심지였습니다. 사람들이 살고 싶고 가고 싶은 곳에서 말입니다. 얼마 전만 해도 제 3국의 사람들은 미국에서 살기를 희망하여 미국 시민권을 얻는 것을 천국시민권을 얻는 것처럼 생각하곤 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사는 것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 사람들이 많이 밀집해 있는 곳에 공포가 엄습할 것입니다. 일시에 많은 사람이 죽게 될 것이란 두려움에 처할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보십시오. 인류의 끔찍한 재앙은 인류가 많이 모여 있는 곳에서 발생할 것입니다. 마지막 때의 인류는 대학살의 공포에 떨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문명의 발달은 곧 인류문명의 자멸을 가져올 것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에 있으면 더욱 위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문명이 발달하면 인류가 행복해질 것이라고 착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기술문명이 발달할수록 전쟁과 같은 끔찍한 대학살은 비례하여 늘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기술문명, 과학문명의 발달에 막연한 희망을 거는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려야 합니다. 그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쳐야 합니다. 주님의 날이 다가왔다고 말입니다.

여러분, 현대사를 돌아보십시오. 19세기 산업혁명은 1, 2차 세계대전을 낳았고, 과학문명의 발달은 전쟁을 낳았습니다. 최근 의료과학이 놀랄 만큼 발전하여 사람들이 건강하고 오래 살 것처럼 생각하는데, 사실은 정 반대로 흐를 것입니다. 복제기술의 발전이나 유전자 공학의 발달은 사람들이 예상치 못하는 방식으로 인류에게 큰 고통을 안겨다줄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죄성이 변하지 않는 한, 충분히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술이 발전하면 다 됩니까? 아닙니다.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이 여전히 죄인이기 때문에 죄악된 마음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전하는 기술을 가지고 죄악을 범하는 일에 사용하고 말 것입니다.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기술이 발전한다 한 들 오히려 불안에 떨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고도의 기술이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복음입니다. 죄인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이 없는 과학기술문명의 발달은 인류에게 엄청난 비극을 초래하고야 말 것입니다.

계속해서 본문을 주목하십시오. 이제 바벨론 문명의 핵심근거지인 유브라데 강 유역에 결박된 네 천사가 풀려났습니다. 본문에서 “놓아 주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그들의 권세와 능력을 제한하여 오셨지만 이제는 제한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이 네 천사는 타락한 천사로서 파괴의 본성을 펼치지 못한 악한 천사들입니다. 그들은 파괴와 살인에 굶주려 있습니다. 그들은 파괴의 영들입니다. 그들이 풀려난다는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파괴의 욕망을 마음껏 실현하게 될 것을 말합니다. 이 네 천사들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예비한 자들”(15절)입니다. 그들의 역할은 전쟁을 통해 생명을 앗아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홀로코스트를 주도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전쟁을 통해 대학살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2차 세계 대전을 통해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한 나찌 정권의 배후에 이들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심판 날은 정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예정하신 대로 심판은 이루어집니다. 사실 이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대해 실족하게 됩니다.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하신단 말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대적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어둠에 속했음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대학살, 많은 인명이 한꺼번에 잃어버리게 되는 이른바 ‘홀로코스트’를 보면서 회개하고 피난처 되신 주님께 도망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보십시오. 무저갱에서 나오는 악령들을 다섯 달 동안 제한하신 하나님께서 여기서도 그들의 권한을 제한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욕망실현의 범위를 삼분의 일까지 제한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제한하지 않으시면 아마도 모든 인류가 재앙을 당할지 모릅니다. 인류는 지금이라도 당장 멸망할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핵폭탄보다 더 무서운 수소폭탄도 개발되어 있습니다. 건물은 그대로 두고 사람만 대량으로 학살하는 생물무기와 중성자무기도 있습니다. 단추 하나만 누르면 온 세계가 핵전쟁을 경험하여 영화 터미네이터와 같이 망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핵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있는 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제한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삼분의 일을 넘지 못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의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풀려난 네 천사가 동원하는 마병대는 실로 엄청납니다. “마병대의 수는 이 만 만이니” 네 천사들이 동원하는 것은 마병대입니다. 그 수는 이 억입니다. 그 당시에도 지금도 2억의 마병대를 동원할 나라는 없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수가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악한 네 천사는 이땅의 군대를 동원하여 홀로코스트를 행할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에게 임할 전쟁의 재앙이 얼마나 극심한 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면 이 전쟁의 시점은 언제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제 3차 세계대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본문을 보면서 미래의 어느 전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은 종말에 인류가 경험해왔고, 또 지금도 경험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주님 나라 임하기 전까지 경험하게 될 전쟁의 참상과 인류대학살에 대한 것이라고 봅니다. 다시 말해서, 본문은 인류문명에 대한 분명한 경고입니다. 문명의 발달은 인류의 행복을 보장하기는커녕 오히려 홀로코스트를 방불케 하는 전쟁을 통해 자멸하게 될 것입니다.

네 천사가 동원하는 군대를 보십시오. 그들에 대한 묘사는 매우 특이하고 무섭기만 합니다. “이같이 이상한 가운데 그 말들과 그 탄 자들을 보니 불빛과 자줏빛과 유황빛 흉갑이 있고 또 말들의 머리는 사자 머리 같고 그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오더라. 이 세 재앙 곧 저희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을 인하여 사람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하니라. 이 말들의 힘은 그 입과 그 꼬리에 있으니 그 꼬리는 뱀 같고 또 고리에 머리가 있어 이것으로 해하더라.”(17-19절) 여기서 마병대는 네 천사들이 운용하는 무기들이 틀림없습니다. 그 입에서 세 가지 재앙이 나오는데, 불과 연기와 유황인데, 이것은 인류가 학살을 경험할 때 경험한 공통적인 것으로서, 소돔과 고모라가 파괴될 때부터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전쟁과 폭탄테러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인류는 지금까지 불과 연기와 유황을 통해 엄청난 생명이 목숨을 잃는 것을 목격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 모든 배후에 악한 천사들이 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서 숨겨진 파괴의 본성을 넘치는 분노심으로 마음껏 발산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주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지금까지 약 2,000년 동안 인류가 경험한 홀로코스트를 보십시오. 인류가 목격한 참혹한 전쟁터를 떠올려 보십시오. 주님의 나라가 임하기 직전에 우리는 더욱 자주 볼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욕망과 권세를 삼분의 일까지 제한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제한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제한하지 않으시면 전 인류는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전쟁을 제한하시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택하신 자들 때문에 제한하십니다.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마24:21,22) 둘째는,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끔찍한 홀로코스트를 보면서 우리는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늘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전쟁의 대 참사를 보면서 두려워하는 것은 회개하고 주님께 나아갈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에 대하여 회개를 촉구해야 합니다. 홀로코스트는 회개하라는 하늘의 신호입니다. 9.11 테러로 말미암아 미국교회는 대대적인 회개운동이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은 하나님 앞으로 나아올 것입니다. 모든 택하신 자들이 회개하고 나올 때까지 하나님은 계속 인내하시면서 제한하실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어떤 사람들이 홀로코스트에 대해서 말씀드릴 때 예수님은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13:4,5)

그러나 이 재앙에도 불구하고 ‘남은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전쟁의 참상이 참으로 참혹하고 끔찍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사람들은 더욱 더 강퍅하게 될 것이라고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심령이 더욱 완악해지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참으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최근의 역사를 보면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인류가 경험하는 이 전대미문의 홀로코스트를 직시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은 아직도 죄인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전쟁을 허용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을 제한하시는 하나님의 의도 역시 회개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회개하고 주님께로 나아오기를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전쟁의 홀로코스트를 보면서 인간들은 자신들의 죄의 무서움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러나 본문을 보십시오. 이러한 홀로코스트를 보면서 사람들은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그들이 멸망 받을 자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그들은 오히려 더 심각한 죄를 더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그들은 5가지 중대한 죄악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첫째, 우상숭배의 죄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고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21-23) 하나님 아닌 것들에 신성을 부여하며,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며, 자신들을 지켜줄 것을 바라고 기도하며, 하나님 아닌 것에 찬양과 경배를 드리며, 하나님 아닌 것으로 자신의 보호자를 삼는 것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알지 못하는 모습, 마땅히 돌려드려야 할 영광을 사람이 만든 헛된 것들에 돌리는 모습을 보십시오.

둘째, 살인의 죄입니다. 살인을 일삼는 것은 미움과 증오심이 인생들을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홀로코스트를 통해 사람들은 더욱 사랑을 잃어갈 것이고 미움이 증가할 것입니다. 사회는 더욱 삭막해질 것입니다. 주님께서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24:10-13) 신문지상에 보도되는 살인사건은 더욱 많아져갈 것이고 그 수준도 점점 끔찍할 것입니다. 살인사건만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참된 사랑을 찾아보기 힘들어질 것이고 서로 미워하고 서로 질투하며 증오심의 노예가 되어갈 것입니다. 대학살을 보면서 우리는 서로 사랑하자고 생각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증오심을 부추기는 것을 지금도 우리는 보지 않습니까?

셋째는, 복술입니다. 복술은 마술을 의미합니다. 홀로코스트를 보면서 현대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온갖 미신에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점성술, 심령술, 복마술, 흑마술, 영매술, 점술, 등에 탐닉하게 될 것이다. 최근에 젊은이들 사이에 마술에 대한 열풍이 불고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 마술을 가르쳐주는 학원이 생겨났다고 하는 기사를 며칠 전 신문에서 보았습니다. 젊은이들 사이에 점 보러 가는 것은 유행이 된지 오랩니다. 사주를 보아주는 인터넷 사이트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10년 전만 해도 찾아볼 수 없었던 사주팔자, 점술에 대한 광고가 주요 일간지에 매일 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러한 것들에 탐닉하는 것은 괴테의 파우스트처럼 자신의 영혼을 마귀에게 팔아넘기는 행위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이렇게 미신과 마술에 사람들이 심취하는 것은 현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도피하고 싶은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로 도피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 싫어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을 무지무지 싫어합니다. 그래서 대신 하나님 아닌 것들로 하나님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넷째로, 음란입니다. 사람들은 더욱 더 성적 쾌락에 집중할 것입니다. 인류 대학살을 보면서도 인류는 회개하기는커녕 점점 성적 탐닉에 빠져들 것입니다. 성적 쾌락에 젖어 들어서 이 원초적인 두려움을 잠시 잊어보려고 애쓰지만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만 참된 평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채우려고 시도하는 한 인간은 절대로 행복할 수 없고 마음의 참된 평안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마음을 채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죄인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이루어놓으셨습니다. 다만 믿음으로 그것을 받기만 하면 되는데도 사람들은 자꾸만 멀리 도망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회개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넓은 품으로 빨리 오십시오. 그분 안에서만 참된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섯째, 도적질입니다. 사람들은 더욱 더 탐심을 따라 행동할 것이고, 탐심을 채우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사단은 사람의 욕심에 부채질을 할 것입니다.. 여러분, 요즘 카드빚이 늘어나고 있어 가계가 부도나는 가정이 많아져가고 있는 것을 아십니까? 카드 빚 때문에 강도질하는 것이 많아지고 있는 현실을 주목해보면 성경말씀대로 되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경제가 어려워질수록 도박과 복권이나 다단계와 같은 일확천금주의에 사로잡히는 사람들이 증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난주 우리는 여섯 명의 여성들을 끔찍하게도 살인한 것이 겨우 몇 백 만원의 카드 빚 때문이었다는 보도를 보면서 이 사회가 어떻게 될 것인지 깊이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탐심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사람들은 점점 탐심의 노예가 될 것입니다. 더 많이 가지고, 더 좋은 것을 가지려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갈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두려움 때문입니다. 홀로코스트를 보면서 더 많이 가져야 하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남의 것을 어떻게 하든지 빼앗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폭력적인 방법을 쓰든 혹은 법의 약점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고도의 두뇌플레이로 남의 것을 빼앗는 일에 점점 혈안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도적질을 일삼는 또 다른 이유는 마음의 공허함 때문입니다. 그래서 물질소유로 그 마음을 채우려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 죄악은 홀로코스트를 통해서 오히려 증가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1, 2차 세계대전을 통해서 목격한 바입니다. 대학살을 보면서 인류는 점점 이러한 다섯 가지 죄악의 포로가 되어 갈 것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회개하기를 거부한 결과입니다.

본문 20절과 21절에 회개치 않는다는 말이 두 번이나 거듭 강조되는 것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완악해져가는 지를 잘 볼 수 있습니다. 재앙을 보면서 인간들의 죄를 발견하고 겸손해지고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먹고 마시고 훔치고 탐닉하는 일에 집중하는 인생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람은 이처럼 타락해져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시대에도 사실 있었습니다. 즉, 전쟁을 앞두고 유대백성들은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이제 끝장날 때가 왔으니 더 늦기 전에 실컷 먹고 마시자고 하면서 회개를 촉구하는 선지자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노아가 그러했고, 에스겔도 그러했고, 예레미야도, 우리 예수님도 그런 아픔을 겪으셨습니다. 오늘날 복음을 전하는 종들도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회개는커녕 점점 마음이 완악해져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가슴 아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 사람들이 전쟁의 끔찍한 참상과 홀로코스트를 보면서 회개하지 않고, 도리어 죄악에 탐닉하는 인생들을 보면서 실망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류 역사는 현대에 들어오면서 더욱 강력한 살상무기와 군대로 인하여 끔찍하고도 참혹한 홀로코스트를 자주 보아오고 있습니다. 앞으로 과학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더욱 강력한 살상무기가 개발될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상 초유의 살상무기가 이미 만들어져 있는데도 잘 모르고 있는지 모릅니다. 저는 전방에서 군대생활을 하면서 생화학무기에 대해서 배우고 훈련받으면서 참으로 무서운 홀로코스트가 다른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북한은 세계에서 제일 무섭고 제일 많은 생화학 무기를 만들어 비축해놓고 있으며 그것을 은밀하게 수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무엇이 일어날 것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지금까지 인류가 경험하고 목격한 것만 보더라도 얼마나 참혹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홀로코스트를 보면서 겸비해지고 회개하게 됨으로써 자신들이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임을 스스로 증명합니다. 그러나 영원히 버림받을 자들은 도리어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우상숭배, 미움시기 질투, 마술과 점보는 것, 음란, 탐심에 빠짐으로써 자신들은 스스로 버림받은 자들임을 증명합니다. 전쟁과 홀로코스트는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거나 혹은 하나님을 원망하며 불평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내가 주님의 인친 자인지 이 홀로코스트 앞에서 우리는 판가름 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크신 권능으로 이러한 것을 제한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우리가 이제 생명이 있는 것도 사실은 주님의 은사입니다. 생명이 있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야 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외치며 살아야 합니다.

 

결론을 내립니다.

우리는 인류가 경험해왔고, 또 현재도 직면하고 있는 끔찍한 전쟁의 참상과 홀로코스트를 보면서,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도전 받고 있습니다. 회개하여 하나님을 찾거나 아니면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으로 죄악에 탐닉하든지 입니다. 인류가 최근 100년 동안 경험한 전쟁의 비극을 한번 보십시오. 그러한 전쟁의 참상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또한 보십시오. 그리고 점점 증가하고 있는 죄악상을 보십시오. 성도들은 이러한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 탄원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속히, 주의 나라가 임하시도록! 그리고 주의 나라가 이제 곧 임박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다가오는 그 날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남아 있는 자들에게 아직도 회개해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는 줄 생각하고 끊임없이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경고해야 합니다. 그들이 죄가 더 많아서 그런 재앙을 당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회개하지 않으면 그들처럼 망할 것을 보여주시는 줄을 알라는 주님의 메시지입니다. 이 메시지는 지금 모든 현대인들이 들어야 합니다. 주님의 날이 지금 우리들의 코앞에 바짝 다가와 있습니다. 주여, 더 이상 늦기 전에 주님을 만나게 하소서. 그리고 어서 속히 그날을 준비할 수 있게 하소서. 아멘.

 

주 예수의 강림이 가까우니 저 천국을 얻을 자 회개하라.

주 성령도 너희를 부르시고 뭇 천사도 나와서 영접하네.

주 예수님 너희를 부르시니 왜 의혹을 하면서 오지 않나.

온 세상죄 담당한 어린양은 죄많은 자 불러서 구속하네.

이 세상이 즐기는 제물로는 네 근심과 고초를 못 면하리.

도 숨질 때 위로를 못 얻으며 저 천국에 갈 길도 못 찾으리.

내 아버지 주시는 생명양식 다 배불리 먹고서 영생하라.

곧 의심을 버리고 주께 오면 그 한없는 자비를 힘입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