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설교

요한계시록 강해(32)-하늘의 큰 이적(계12:1-6)

등불지기 2012. 3. 3. 18:37

이 설교를 할 때가 2002 월드컵 때였군요^^ㅎㅎ

제 설교문을 읽는 모든 분들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요한계시록 강해(32)

 

하늘의 큰 이적

 

본문: 계12:1-6

 

12:1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12:2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

12:3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

12:4 그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 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12:5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12:6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이백육십 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여러분 얼굴이 오늘따라 무척 밝아 보입니다. 한국이 월드컵 4강에 진출하게 된 것이 그렇게 기쁩니까? 좋습니다. 아무튼 4강에 들어간 성적보다는 한국축구가 많이 발전한 것 때문에 더 기분이 좋습니다. 한국축구가 발전하게 된 요인에 대해서 최근 여러 각도로 분석이 나오고 있습니다만 제가 신문을 통해 알게 된 것은 새삼 리더십과 기본기가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의 평가와 시각에 흔들리지 말고 꾸준히 기본기를 갈고 닦고 기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저는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사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국내의 많은 축구전문가들은 한국축구에 대해 평가하기를 체력과 정신력은 모자라지 않는데 기술이 유럽이나 남미 팀에 비해서 모자란다는 평가를 내렸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대표팀을 맡는 감독마다 기술과 전술 연마에 온 힘을 쏟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히딩크라는 외국인이 관찰한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그의 눈에는 기술은 훌륭한데 체력과 정신력이 낙제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적에 관계없이 계속 체력훈련과 몸싸움 훈련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세계의 강팀들과 계속 시합을 붙게 했습니다. 그래서 선수들의 가능성을 최고로 끌어내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 점차적으로 자신감을 회복하고 좋은 성적까지 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석은 아마 저보다는 여러분들이 더 잘 알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저는 영적인 전투를 치루는 여러분을 코치하는 목자의 입장에서 굉장히 의미심장한 교훈을 받았습니다. 결과나 평가에 연연하지 말고 기본기를 갈고 닦는 훈련에 치중하자는 것입니다. 방법이나 요령에 골몰하지 말고 오직 기도와 말씀이라는 기본기에 충실하도록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배웠습니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방법이나 전략을 배우려고 하기 이전에 먼저 기본기를 다시 배워야 합니다. 기본기가 약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진짜 자신감과 실력은 기본기에서 우러나오는 법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공적으로 세상을 살기 위해서는 기본기에 충실해야 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영적 전쟁터 속에 있는 교회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기도와 말씀, 그리고 떡을 떼는 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본질이 아닌 것들을 과감히 떨쳐버리고 본질에 충실한 삶을 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계속해서 성경을 연구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도록 합시다. 계속해서 요한계시록을 공부하고 있습니다만 매일 만나지 못하지만 그래도 매주일 요한계시록의 본문을 살펴오면서 우리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것들을 알고 숙지하는 데 힘써야 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자, 오늘부터 12장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계시록 12장부터 14장까지는 일곱째 인을 떼는 것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곱째 인을 떼는 사건은 하나님의 구속계획이 완성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구속계획이 완성되는 것은 실로 굉장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12장부터 14장까지를 ‘위대한 막간’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습니다. 오늘 마지막 인을 떼는 것이 가지고 있는 위대한 의의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면 12장을 통해서 우리는 마지막 인을 떼는 일이 어떤 의의를 가지고 있는지 한번 살펴보도록 합시다. 여러분, 지난 시간 11장을 통해서 무엇을 배웠는지 기억하고 계십니까? 11장은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라고 선언하면서 끝맺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12장은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우리는 12장부터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과 그들을 멸망시키시려는 하나님의 큰 일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벌이시는 위대한 전쟁을 보게 될 것입니다. 계시록 12장은 영적 전쟁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전쟁에 대한 환상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승리가 어떤 과정을 통해 완성되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무대는 큰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땅과 하늘입니다. 11장은 땅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말씀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땅에서 인류가 경험하는 재앙들을 보아왔습니다. 이제 12장부터는 우리의 시선을 하늘에 고정시켜서 도대체 그곳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늘에서 무엇이 보입니까?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 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고 했습니다. 이 여자의 모습을 보십시오. 이 여자는 해와 달과 열 두 별의 영광을 입고 있습니다. 이 여자는 누굴까요? 이 여자가 문자적으로 한 개인을 가리키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어떤 한 여자가 태양을 입고 달을 신고 머리에는 열 두 별이 둘러 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장르는 묵시적 예언서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바로 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묵시적 표현에 대해 익숙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묵시적 표현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성경 전체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전체적으로 성경을 볼 때 이 여자는 다름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공동체를 가리키는 말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여자는 ‘영적 이스라엘’ 혹은 ‘신구약의 교회’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십시오. 성경을 처음부터 읽어보면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을 ‘신부’로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시87:3에 “하나님의 성이여 너를 가리켜 영광스럽다 말하는도다.”라고 했고, 사60:2,3에는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고 했습니다. 또한, 사61:10,11에는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땅이 삭을 내며 동산이 거기 뿌린 것을 움돋게 함같이 주 여호와께서 의와 찬송을 열방 앞에 발생하게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62:2-4에, “열방이 네 공의를 열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면류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바가 될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왜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를 ‘아름다운 여자’ 혹은 ‘신부’로 표현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과 그 백성이 서로 언약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서로 ‘신성한 결혼’을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예비된 신부의 아름다움을 생각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의 영광스러움입니다. 여러분은 교회의 영광을 믿습니까? 여전히 불완전하고 사람 냄새가 나지만 그래도 하나님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임을 알고 계십니까? 교회의 영광은 사람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인식될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공동체를 향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바라보시는 지는 스바냐 선지자가 잘 선포했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여러분, 우리는 자꾸만 우리의 눈으로 우리들의 초라한 모습을 보려고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경향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들의 모임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전히 불완전하지만 그래도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부름을 받은 우리들입니다. 비록 우리는 불완전하고 흠과 티가 많은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세워줍니다. 그러므로 술람미 여인이 고백한 대로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라고 말하면서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아1:5) 하나님의 큰 사랑과 은혜를 입은 자로서 우리는 이러한 건강한 자아상을 가져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 자신을 볼 줄 아는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아름다운 신부로 여기고 계십니다. 이것을 진심으로 믿으십시오.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내 사랑아 너의 어여쁨이 디르사같고 너의 고움이 예루살렘 같고 엄위함이 기치를 벌인 군대같구나. 네 눈이 나를 놀래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기슭에 누운 염소떼 같고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암양떼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고 너울 속의 너의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왕후가 육십이요 비빈이 팔십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는 그 어미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의 귀중히 여기는 자로구나 여자들이 그를 보고 복된 자라 하고 왕후와 비빈들도 그를 칭찬하는구나. 아침빛같이 뚜렷하고 달같이 아름답고 해같이 맑고 기치를 벌인 군대같이 엄위한 여자가 누구인가?”(아6:4-10) 이 여자는 주님이 그토록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까지 하신 교회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여러분을 보시는 것처럼 여러분 자신을 그렇게 보십시오. 여러분 스스로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모든 생각을 십자가에 못 박으십시오. 여러분 자신에 대해 결코 열등감을 갖지 마십시오. 여러분, 이번 월드컵 축구를 보셨지 않습니까?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하면 시합에서도 승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열등감을 십자가의 복음으로 극복해야 비로소 우리는 승리를 향해 전진할 수 있습니다. 오늘 계시록 본문은 우리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님의 신부라는 자아상을 먼저 회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하면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할 때가 되어서 아파서 애써 부르짖고 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가 해산의 고통을 겪는 공동체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해산의 고통 때문에 우리가 건강한 자아상을 가지기 힘들지 모릅니다. 해산의 고통을 겪을 때 여자는 자신이 여자로 태어난 것에 대해 원망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신부임에도 불구하고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고통 때문에 스스로 절망하고 불안해합니다. 그러나 이 고통은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큰 상급이 된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이 여자가 잉태한 아이는 누굽니까? 여자의 이 고통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자가 잉태한 아이는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가 받은 ‘여자의 후손’(창3:15) 곧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아는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에서 나실 것입니다. 그런데 메시아가 나실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한 여인이 잉태하여 해산할 때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때가 되매 이스라엘 중에서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런데 이때는 이스라엘이 참으로 고통을 겪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리스 제국과 로마제국에 의해서 짓밟히면서 이스라엘의 남은 백성들은 참으로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오실 메시아를 간절히 사모하고 부르짖었는데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 보시기에 마치 해산 할 때가 임박한 여인이 고통을 겪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공동체가 메시아가 오시기까지 겪어야 할 고통에 대해서 미리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26:17에 “여호와여 잉태한 여인이 산기가 임박하여 구로하며 부르짖음같이 우리가 주의 앞에 이러나이다.”라고 했고, 미4:10에는 “딸 시온이여 해산하는 여인처럼 애써 구로하여 낳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고통하는 것은 새 시대가 도래하기 위한 필연적인 고통입니다. 메시아를 배출하기 위해 반드시 겪어야 할 고통입니다. 이것은 신약의 교회에도 적용됩니다. 구약의 교회가 메시아를 배출하기 위해 시련을 겪었듯이 신약의 교회 역시 다시 오실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해 사단이 적대적인 감정으로 가하는 여러 시련을 통과해야 합니다. 교회가 어떻게 이것을 견뎌낼 수 있을까요? 교회가 시련을 이기기 위해서는 교회의 영광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개인에게도 적용됩니다.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 위해서 개인은 고통과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난 날에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하나님께 부르짖으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이 주실 상급을 사모하십시오. 때가 되면 여러분을 낮추시는 주님의 능하신 손이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사단 마귀는 우리를 높인 뒤 낮추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능하신 손으로 낮추신 뒤에 크게 높이십니다. 높아지기를 원하십니까? 먼저 낮아지는 법을 배우십시오. 겸손을 배운 자에게 하나님은 존귀와 영광을 입혀주십니다.

그런데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입니다.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지라”(3절)고 했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큰 붉은 용’은 우리의 원수 사단을 가리킵니다. 그는 교회의 원수입니다. 그 머리가 일곱이라고 한 것은 세상의 모든 권력을 쥐고 있다는 뜻이요, 뿔이 열이라는 것은 그 권세가 막강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다는 것은 부귀영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영적 존재에 대해 인정해야 합니다. 사단은 존재합니다. 그는 참으로 대단한 권력과 권세와 지식과 부귀영화를 존에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에게 엎드려 경배하는 자들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자가 누굽니까?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권력을 숭배하고 사단은 그에게 권력을 나누어주면서 자신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합니다. 사람들은 왜 권력을 추구할까요? 그것은 열등감 때문입니다. 열등감이 우리 안에 있으면 우리는 남에게 손해보고 밟히고 지는 것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열등감이 있으면 결코 남을 섬기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남을 지배하려고 하고 통제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을 자기 뜻대로 조종하려는 사람을 조심하십시오. 사람을 사용하려고 하고 움직이려고 하는 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 좋은 충고를 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자신의 뜻대로 통제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녀에게 큰 부담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매우 신사적이고 인격적이신 분입니다. 우리 마음에도 없는 것을 억지로 통제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을 기뻐 받으시거나 원하지 않는 길을 억지로 몰아가시는 분이 아닙니다. 대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기쁨을 나눠주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이 기뻐하시는 뜻을 생각하고 그 뜻을 발견할 때 하나님은 당신이 소유하신 기쁨을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이 소원을 가지고 당신의 뜻을 행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열등감을 대적하십시오. 복음으로 극복하십시오.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대신 섬기는 사람이 되십시오.

사단의 목표는 권력을 부리고 권력으로 사람을 마음대로 통제하는 것입니다. 본문 4절을 보십시오. “그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단이 한 일들을 보십시오. 하늘의 별은 존귀한 자들을 가리킵니다. 존귀한 자들을 타락시키는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십시오. 다니엘 선지자는 미리 예언하기를 “백성 중에 지혜로운 자가 많은 사람을 가르칠 것이나 그들이 칼날과 불꽃과 사로잡힘과 약탈을 당하여 여러 날 동안 쇠패하리라. 그들이 쇠패할 때에 도움을 조금 얻을 것이나 많은 사람은 궤휼과 그들과 친합할 것이며 또 그들 중 지혜로운 자 몇 사람이 쇠패하여 무리로 연단되며 정결케 되며 희게 되어 마지막 때까지 이르게 하리니 이는 작정된 기한이 있음이니라”(단11:33-35)고 했습니다. 홍수의 심판이 있기 전까지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딸들과 합하여 육체가 된 것같이 마지막 심판이 부어지기 전까지 많은 사람들이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쾌락을 즐기며 타락하는 일들이 부지기수로 일어날 것입니다. 존귀한 자들이 타락하는 일들은 사단의 작품입니다. 사단은 그 일을 성공적으로 해내는 일에 기쁨을 얻는 존재입니다.

역사를 보면 무엇보다 사단은 메시아의 출현을 막으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에게 구원의 희망을 주셨습니다. 창3:15에 하나님께서 뱀에게 하신 말씀은 그들에게 절망 중에 붙잡아야 할 큰 소망이었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그래서 에덴에서 추방당한 후에도 아담과 하와는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이 와서 자기들을 구속하여 다시 에덴으로 돌아갈 길을 열어줄 것을 믿고 기대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기대와 소망은 아담이후 출생한 모든 경건한 의인들의 공통적인 소망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단은 자신의 머리를 깨뜨릴 ‘여자의 후손’에 대해서 적대감을 품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사단의 무시무시한 적대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사단은 가인을 통해 아벨을 살해한 일을 주도했습니다. 하나님은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창4:7)라고 미리 가인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주셨지만 가인은 스스로 사단의 적개심에 사로잡히는 길을 선택하고 말았습니다. ‘죄가 문에 엎드린다.’는 표현은 뱀이 문지방에 가만 엎드려 문지방을 지나는 사람들의 발뒤꿈치를 물려고 웅크리고 있다는 표현입니다. 사단은 입을 벌리고 삼킬 자를 늘 찾아다니고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단이 문지방에서 가만히 엎드려 삼킬 틈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주지하셨지만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사단은 메시아를 향한 강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존재입니다. 왜냐면 메시아는 자신을 파멸시킬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바로 이것이 성경의 역사요 영적 전쟁의 진상입니다. 우리는 성경역사에서 이러한 사단의 적개심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굽에서 남자아이를 다 죽이려는 바로의 분노심 배후에 사단이 있었습니다. 이세벨의 딸 아달랴가 유다 왕손을 다 죽이려는 일에도 사단이 배후에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하만이 유대인을 모두 죽이려는 일에도 사단이 있었습니다. 헤롯왕의 영아 학살에서도 우리는 사단의 무서운 적개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가 되자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여자의 후손’이 태어나셨습니다. 오늘 본문 5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쇠망방이)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이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지금 세상을 말씀으로 다스리고 계시며 또한 장차 세상을 심판하실 주로 이 땅에 다시 오실 분이십니다. 메시아가 출생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서 온갖 방해를 다 시도했지만 결국 하나님의 때에 동정녀의 몸에서 나셨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다 이루시고 십자가에서 구속의 대업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임 당한 지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시고 40일 만에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이제 그 보좌에서 일어나셔서 당신이 친히 사랑하셔서 보혈로 대속하여 주신 백성들을 데리러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사단의 무시무시한 적개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받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을 다 이행하시고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이제 아무도 그분을 해할 자가 없습니다. 이제 그분은 하나님의 권능 아래 있습니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소유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하나님 나의 구주로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 경배하기 위해 이 시간 이렇게 모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로 올려진 일을 기억하십시오. 이 사건이 오늘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들 역시 하나님 보좌 앞으로 올려진 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와 언약 안에서 연합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모든 자들에게 언약적으로 발생한 일도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담대하게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8:31)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15:55)라고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도 그렇게 외칠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는 이 땅에서 ‘실패한 자’처럼 살지라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만으로 사도 바울처럼 그렇게 담대하게 외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감정이 아닙니다.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 마인드 콘트롤(mind-control)이나 자기최면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위대한 의가 나타났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은 사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의 상황이나 감정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대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발생한 하나님의 큰 일을 주목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의로우신 일에 힘입어 담대하게 외치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명은 하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 안에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지만 여전히 몸은 이 땅에서 있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늘 위엣 것을 찾아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 해야 할 일들을 책임감 있게 감당해나가야 할 자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이 건강한 그리스도인의 기준입니다. 그래서 계시록은 언제나 교회를 두 가지 부류로 나눕니다. 하나는 무형교회요 다른 하나는 유형교회입니다. 전자는 승리적 교회, 하늘의 교회, 천상 교회라고 말하기도 하며, 후자는 전투적 교회, 지상 교회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오늘 계시록 12장에서는 전투적 교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메시아를 세상에 배출한 영적 이스라엘, 즉 신앙 공동체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지상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지상에 남아 있으면서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적대감을 품고 있는 사단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안심하십시오. 오늘 본문 6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 천 이 백 육십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무슨 말입니까? 베드로 사도가 말씀한 대로 하나님의 온전한 구원을 받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다는 뜻입니다. 1260일이란 기간은 구주께서 하늘에 올리신 후 다시 오셔서 그 신부된 백성 공동체를 데려가실 때까지를 가리킵니다. 1260일이란 기간은 종말의 때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 기간은 교회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때입니다. 이 마지막 기간 동안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받을 것입니다. 여전히 교회는 핍박을 받고 순교자를 배출할 것이지만 우리 안에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당신의 크신 능력으로 보호하셔서 끝까지 그 시작하신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으십시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의 능력이 어디서 경험되어지고 있습니까?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이 어디서 나타나고 있습니까? 1260일 동안 양육하기 위해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어디입니까? 바로 ‘광야’입니다. 영적 이스라엘은 사단의 적개심 때문에 외견상 고달픈 삶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 신천지로 떠난 퓨리턴들과 같이 스스로 그러한 고난과 역경을 선택한 것입니다. 마지못해서 광야로 간 것이 아니라 신앙의 자유를 찾아 광야로 도망간 것입니다. 오늘날도 신앙의 정절을 지키는 순수한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주일성수를 위해 고액 연봉을 제공하는 회사를 스스로 그것도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포기합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광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지만 그곳이야말로 하나님의 피난처가 예비되어 있는 곳이다. 광야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친히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지의 땅으로 나아갔던 선배들의 전철을 밟고 있습니까? 아니면 혹시 세상에 썩어질 것들에 집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쩌면 살아 계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크신 권능을 직접 보여주시기 위해 우리를 광야로 몰아내시기도 합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내몰아내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절박한 도움이 없이는 한시도 살아갈 수 없다면 그곳이야말로 하나님이 마련해놓으신 안전지대요 하나님의 크신 영광과 능력을 목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