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묵상

그리스도를 본받아

등불지기 2024. 10. 8. 10:49

 

그리스도를 본받아

 

내 인생 최고의 가치와 기쁨이 무엇인가?

 

우리가 짧은 생애를 사는 동안 무엇이 최고의 가치이고 기쁨일까요? 인생이 경험할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가치와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고 닮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동행하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는 것보다 더 귀한 가치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가 온 우주에서 가장 존귀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인생의 가치기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분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기뻐하고 사는지 그 여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내 생애에서 그리스도가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사는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사도바울은 자신을 경쟁자로 여기면서 경쟁적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던 사람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감옥에 있을 때 자신들은 바울을 경쟁에서 이겼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바울의 가치관이 잘 드러납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서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1:18) 바울은 자신의 기쁨, 자신의 가치를 자신에게 두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에게 두었기 때문에 자신의 상황에 따라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을 즐기는가?

 

바울을 시기하고 경쟁대상으로 여겼던 사람들과 바울은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요?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을 진심으로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어떤 형편에 있고 어떤 평가를 받는지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바울을 경쟁자로 여겼던 그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에 있어서 자신들의 이름을 드러내기 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에 있어서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을 듣기를 원했고 자신들의 이름이 유명해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의 인생에서 최고의 가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들이었습니다. 반면 바울은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일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바울에게 최고의 만족과 기쁨을 주는 것은 자신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1:21-24)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사는가?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이란 그리스도의 가치와 삶의 방식을 나의 것으로 삼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에 대해 오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성과 인성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가 어떻게 본받을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양식과 성품을 흉내 내면서 사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은 그리스도께서 살으셨던 삶의 방식을 본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집중하셨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셨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6-8)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이란 내가 순종해야 할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집중하고 또 집중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항상 복종하는 자세를 가지고 사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입니다.

 

원망과 시비가 없도록 하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2:13)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고 있는지 여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의 삶의 방식이 나의 삶의 방식이 된다면 내 삶에 사라지게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바로 원망과 시비입니다. 원망과 시비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버지의 뜻이 내 삶에 중심이 안 되었기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입니다. 원망과 시비란 자신이 삶의 중심이 되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내가 중심인데 그런 나를 도와주지 않고 이해하지 못하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하여 원망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내가 모든 것의 중심인데 그런 시각으로 주변 사람들과 환경을 바라보게 되면 잘잘못을 가리고 따지려고 드는 경향이 새기게 됩니다. 이것이 원망과 시비입니다. 이러한 것이 내 삶에 나타난다면 그것은 내 삶에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라 나 자신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에는 원망과 시비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내가 순종해야 할 하나님 아버지의 뜻만 생각하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내 삶의 주인이 나 자신이냐, 아니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냐 하는 것은 이렇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밝히는 삶을 살라

 

이 세상은 모두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 되어서 살아갑니다. 그런 세상 가운데 그리스도인들도 영향을 받아 교회를 다니면서도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면서도 자신이 자신의 삶에 주인이 되고 중심이 되어 살아갑니다. 기도하고 방언하고 은사도 체험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삶에 원망과 시비가 끊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은 이러한 세상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러한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을까요? “이는 너희가 흠이 엇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2:15,16) 그 비결은 단 하나입니다.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연구하며 묵상하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날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밝히 깨닫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내 안에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이 넘쳐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 기쁨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2:17,18)

 

하나님의 기쁨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의 기쁨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첫째, 이단과 금욕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둘째, 율법주의에 빠져 육신의 행위를 자랑하게 됩니다. 셋째, 분열하고 분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기쁨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혹은 그 기쁨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생겨나는 여러 현상들에 대해 사도 바울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하고 있습니다(3). 그래서 사도 바울은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4) 문맥을 놓치게 되면 이렇게 반문합니다. “지금 내 삶이 힘들어 죽겠는데 도대체 어떻게 기뻐할 수 있단 말입니까?” 칼빈은 말했습니다. “열린 문만이 기회가 아니다. 닫힌 문도 기회다.” 우리 삶에 고난이 있다는 것은 잠시 멈추어서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무엇이 빠져있는지 생각해보라는 뜻입니다. 연속적인 고난으로 인해 마음이 상하여 있다면, 기도를 하고 싶어도 기도할 힘이 없다고 느낀다면 기도를 멈추고 한번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나는 지금 그리스도를 본받고 있는가?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가? 나는 그리스도가 붙잡았던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붙잡고 있는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삶,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 인생이 경험할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가치를 되찾을 때를 나에게 주신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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