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가 설교하는 시대가 왔다. 만약 AI가 깨끗한 아나운서의 음성과 발음으로 설교를 하는 교회라면 그런 교회를 출석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겠는가? 나 같으면 그런 교회를 굳이 다닐 필요를 느끼지 못할 것 같다. 그런데 최근 설문조사에 의하면 목회자의 3분의 2가 AI를 활용하여 설교문을 작성한다고 한다. 어떤 대형교회 목사님은 자신의 설교가 인공지능을 활용하여 준비된 것이라고 강단에서 자랑하는 것을 보았다. 또 최근에 어떤 분은 자신의 해석이 인공지능에 물어보고 얻은 것이기 때문에 옳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았다. 이제 인공지능은 생성형(generative AI)을 넘어 에이전트형으로 발전하고 있고 피지컬 AI로 나아가고 있다. 지금까지는 대화형(약12종), 이미지생성형(약11종), 동영상 생성형(약10종), 연구(약11종), 기타 특수한 영역에서 작동하는 특화 AI(약16종)으로 소개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필요에 따라 사용하고 있다. 학문을 다루고 강의하는 교수들은 여러 가지의 인공지능 프로그래믈 다루고 있다고 한다. 이중 목회자들은 챗GPT, 제미나이, 클로드와 같이 대화형 AI를 많이 사용하는 것 같다. 전문적인 연구를 지원하는 딥엘이나 겟지피티나 리서치래빗 같은 연구전용 AI는 신학자들에게 어필할만 하다.
나는 어떤 AI를 사용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어떤 인공지능도 사용하고 있지 않다. 심지어 나는 설교자로서 AI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심한 반감을 갖고 있다. 진리를 다루는 일에 전문가로 부름받은 설교자는 진리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야 한다. 나에게 설교자의 자부심이란 인공지능의 강력한 유혹의 손길을 뿌리치는 일이다. 20년 전까지만 해도 내 컴퓨터에는 바이블웍스라는 최신 프로그램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내 서재에는 3천여 권의 책들이 꽂혀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제공해주는 지식과 정보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는 왠지 모를 허전함이 있었다. 많은 책을 읽어서 능력을 얻는 것이 아님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나의 부족함과 능력없음을 알게 된 순간 그토록 많은 책들과 뒤어난 컴퓨터 프로그램이 일순간 의미없게 보였다. 그래서 다 버리고 나눠주고 아프리카 땅으로 떠났다. 아날로그 감성으로 가득 찬 아프리카에서 살다가 한국으로 돌아와보니 인공지능이 자기를 써달라고 유혹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 나는 설교를 준비할 때 어떤 자료를 참조하고 있는가? 30년 전에 성경을 읽고 연구하면서 메모했던 공책들이 있다. 그리고 예전에 성경본문을 연구하면서 작성했던 워드파일이 남아 있다. 그리고 틈틈이 묵상하면서 적어놓았던 글들이 있다. 그런 것들을 다시 찾아볼뿐이다. 내가 설교준비할 때는 그냥 성경책 한 권 그리고 공책 1권 그리고 볼펜 한 자루가 전부이다. 나는 종종 가볍게 산책하면서 설교를 준비한다. 물론 아주 잠시 성경지도를 확인하거나 단어의 뜻을 확인하기 위해서 책을 찾아보기도 한다. 그러나 본문의 의미를 알기 위해 원어성경과 다양한 번역본을 읽어보는 것 그 이상의 정보를 얻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골방에 들어가서 진리를 대면하는 일이다. 내 마음에, 내 영혼 전체에 각인된 말씀을 찾는 일이다. 그리고 설교문은 내 마음판에 쓰는 것이다. 그리고 원래 설교는 설교자 자신에게 먼저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아무리 뛰어난 학자의 글을 인용하고 놀라운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아서 설교문을 작성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내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자료를 참조하는 것은 극도로 제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설교는 표절과 가장 높은 담을 쌓아야 한다. 설교가 다른 사람의 연구자료를 적극적으로 참조하고 고려하는 다른 학문의 세계와 다른 점이다. 설교는 가장 개인적인 일이다. 설교는 자기의 것을 설교하는 것이다.
내가 설교를 준비하는 일에 AI를 사용하는 것을 싫어하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다른 사람의 책, 설교집, 주석, 컴퓨터 프로그램, 챗GPT가 내놓은 '잘 정리된 자료들'은 저마다 설교자의 고민을 손쉽게 덜어줄 수 있다고 말하지만 설교자에게 가장 중요한 '깨달음의 과정'을 빼앗아가버리기 때문이다. 단어의 뜻을 알기 위해 고민한다면 사전을 찾아보면 된다. 그러나 단어들로 구성된 문장이나 문맥 혹은 저자의 의도나 생각을 파악하는 것은 좀 더 깊은 생각과 고민을 요구한다. 저자에게 질문을 던지고 토론을 하는 등 '가상의 대화'를 나눠야 한다. 그 과정은 지루할 수 있고 고통스러울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바쁜 일상 속에서 그러한 일을 한다는 것은 매우 큰 도전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손쉽게 자료를 정리해주고 답을 제시하는 인공지능에게 도움을 구하게 되기 쉽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헤매는 사람에게 한 줄기의 빛이 구원이 되는 것처럼 고민하는 시간이 있어야 진리를 깨닫는 즐거움이 뒤따르게 된다. 깨달음이란 내 영혼 전체를 진동시키는 파동(big wave)인데 고민하는 과정이 없이 누군가 써주는 것에 의지한다면 결코 그러한 깨달음의 사건은 내 영혼속에 일어나지 않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큰 울림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설교가 되게 한다. 남들은 말할 것이다. 고민하고 있는 그것을 알려면 AI에게 물어보면 될 것을 가지고 굳이 시간을 들여 굳이 고민하고 있느냐고. 그러나 빨리 계산하고 연산해서 결정을 내려야 효율성과 생산성을 높여야 하는 경쟁사회에서는 AI를 적극적으로 사용해야 하겠지만 진리를 따르고 전하는 일은 그 반대로 가야 한다. 진리를 다루는 일은 세상이 볼 때에는 가장 느리고, 가장 바보스럽고, 가장 비효율적인 모습으로 가야 한다. 깨달음의 사건은 빨리 가려는 사람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 천천히 고민하고 천천히 숙고하고 천천히 묵상해야 한다. 설교자는 세상에서 볼 때 가장 '미련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가 설교를 준비하는 일에 AI를 반대하는 또 다른 이유는 AI가 가진 간교함(craftiness) 때문이다. AI는 인간의 의도를 잘 헤아리고 인간의 마음을 만족시키는 법을 잘 알고 있다. 그 목적으로 인공지능의 알고리즘이 작동하게끔 만들어졌다. 내가 볼 때 AI는 적어도 진리를 다루는 일에 부름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간교한 여우나 갈라진 혓바닥을 가진 뱀과 같은 존재이다. AI가 가진 간교함을 목회자들은 알아야 한다.할루시네이션(hallucination)이란 AI 용어가 있다.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환각작용을 일컫는 말이다. 인공지능의 최종적인 목표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을 만족시켜서 자신의 존재이유를 증명하고 계속 살아남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AI는 어떤 경우에서든지 자신의 존재이유를 해칠 정도의 말을 사람에게 결코 하지 않는다. 따라서 AI는 진실로 가장한 거짓을 만드는데 능하다. 그러나 1세기 초대교회의 순교자들을 보라. 그들은 자신의 죽음을 각오하고 진리를 증언했다. AI는 결코 순교자의 정신으로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인공지능의 한계와 약점이 바로 할루시네이션이다.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교묘한 정보조작 가능성이 항상 숨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경쟁사회에서 촌각을 다투는 일, 효율성을 따지는 일이라면 몰라도 진리에 목숨을 거는 일을 할수록 인공지능을 멀리해야 한다. 만약 목사들이 인공지능으로 설교문을 준비하여 강단에서 그것을 읽어나가는 식으로 설교를 하게 된다면 교회는 스스로 진리를 저버리는 일이 될 것이고 사람들은 굳이 교회를 다닐 필요를 알지 못할 것이다.
에스라 7장 10절을 보면 포로생활 70년을 마치고 귀한한 유대백성들 가운데 개혁을 이끌었던 지도자 에스라의 결심과 헌신을 보여준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일, 그것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일, 그리고 그것을 가르치는 일에 헌신하였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할 때 다른 어떤 책이나 자료를 의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면 그를 도와줄 자료는 70년 전에 파괴되었고 아무 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 그가 말씀을 연구하는 일에 헌신했다는 것은 오직 그가 스스로 말씀 하나만을 붙들었다는 뜻이 된다. 또한 그가 연구한 것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일에 헌신했다는 것은 자신이 직접 순종함으로써 경험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다는 뜻이다. 오늘날 인공지능이 써준 설교문 한 편을 강단에서 그저 읽어내려가는 그런 설교에서 빠져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설교자는 자신이 순종한 것, 자신이 경험한 것, 자신이 온 영혼을 바쳐 헌신하는 바로 그 진리를 전해야 한다. 인공지능이 써준 설교문을 읽는 것이 기독교 설교가 될 수 없는 이유이다. 에스라는 그렇게 연구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본 다음에야 비로소 가르치고자 하였다. 연구하지 않은 것을 우리는 실행할 수 없고, 우리가 실행해보지 않은 것을 남에게 가르칠 수 없다. 이 모든 단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유혹하는 인공지능의 달콤한 속삼임을 설교자들이 단호히 거절해야 하는 이유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인공지능 프로그램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설교자로서 거부하는 것이지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이나 혹은 일터에서 혹은 세상 속에서 경쟁력을 잃지 않기 위해 얼마든지 인공지능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인공지능에 지배당하지 않고 다스리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인문학적 소양을 늘려야 하고 생각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 그러나 진리를 다루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사람들, 진리를 증언하는 일에 자신의 목숨을 내거는 증인들로서 부름받은 설교자라면 자신의 서재에서 AI를 멀리 치워버릴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리를 증언하는 것을 자신의 목숨과 같이 여긴다면 최대한 느리게, 그리고 최대한 고통스럽게 고민하고 탐구하며 자신의 머리를 쥐어 뜯고 자신의 가슴을 치며 최대한 아파하면서 진리를 품는 그 쓰라린 과정을 회피하지 말고 즐겨야 한다. 인공지능 시대일수록 목회자들은 깊은 연구, 깊은 묵상, 깊은 기도가 점점 힘들어질 것이다. 그렇게 생각이 들기 때문에 나는 더욱더 설교자로서 설교준비하는 일, 설교문을 작성하는 일에 AI를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다. 진리의 순수성을 위해 다소 미련하게 보이겠지만 진리를 다루는 사람은 그것이 최소한의 자존심이 될 것이다.
2026년 5월 9일(토)
김광락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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