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MP 이야기

내가 양자역학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

등불지기 2026. 5. 9. 17:55

 

어제 뉴스를 보니 대한민국의 코스피지수가 7500을 돌파했다고 한다. 미국 대 이란 전쟁으로 전세계적으로 기름값과 물가가 오르고 삶이 힘들어지는데 투자자들은 기꺼이 지갑을 열어 반도체 산업에 돈을 투자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도체 산업이 호황을 맞는 이유는 인공지능이 발달하고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돌리기 위한 데이터센터를 건립하는 데 천문학적인 예산을 쏟아붓고 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 산업을 주도하는 미국만 해도 4천 개 정도되는 데이터 센터를 건립하려고 하는데 한 개의 데이터 센터를 건립하는데 들어가는 예산이 1조가 넘는다고 한다. 그리고 1개의 데이터 센터에는 최소한 1만 개의 인공지능 칩이 들어가고 1개의 인공지능 칩을 만들기 위해 고성능의 GPU와 1만 개의 메모리가 들어간다고 한다. GPU는 미국에서 만들고 HBM 메모리는 한국에서 만들고 대만 TSMC는 각각 조립하여 인공지능 칩을 생산한다고 한다. 그리고 하나의 데이터 센터를 작동시키는데 1기가 와트의 전력을 생산하는 발전소 즉 1개의 원자력 발전소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한 발전소를 건설하고 운영하기 위해서 건설업이나 에너지를 싣고 오는 배를 건조하는 조선업도 필요하다. 따라서 반도체 산업을 뒷받침하기 위해 건설, 조선, 화학 등 여러 방면에서 투자가 활발하게 일어나는 것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현실이다. 

 

인공지능에 들어가는 핵심 반도체는 전기와 전자를 통해 작동하는 것이고 그 배경은 양자역학이란 학문적 기초가 있다. 양자역학이 어떻게 발달하게 되었는지 이해하는 것은 현대 디지털 문명을 이해하는 원리가 된다. 18세기 영국의 산업문명은 기계와 화학이 주도했고 이제 21세기 디지털 문명은 양자역학이 주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양자역학을 공부하는 것은 비단 이 시대를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양자역학에서 자주 등장하는 대칭성(symmetry)이란 말이 있다. 물리학의 주요 특성을 기술하는 단어인데 물리학자들이 물리적 현상을 이해하고 연구하는데 통찰력을 제공하는 방법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글이나 영상 예를 들어 소설, 그리고 영화나 드라마를 '독창적이다' '창의적이다'라고 할 때 어떤 기준을 가지고 그렇게 말하는 것일까? 대칭성의 원리를 이해하면 창의성 또한 이해할 수 있다. 노벨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소설을 보면 대칭성을 발견할 수 있다. 창의성이 높게 평가되는 그림이나 영화 혹은 드라마는 모두 대칭성을 가지고 있다. 이 대칭성은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실 때 창조된 모든 만물에 내제된 원칙이다. 빛을 창조하시고 어둠을 분리하셨고 밤과 낮을 구분하셨다. 이 대칭성의 원리를 오래전부터 동양학자들은 나름 음양론이나 오행기론 등의 개념으로 삼라만상을 설명하려고 했었다. 창의적이라고 할 때 그 의미는 하나님의 창조원리에 가깝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가 양자역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 또한 마찬가지다. 신학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최신 물리학을 공부하는 것이다. 굳이 양자역학이어야 하는가하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형이상학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거리가 먼 것 같은 형이하학을 살펴보는 것이므로 양자역학이 아닌 다른 영역도 괜찮을 것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신학을 배우려는 입문자들에게 인문학을 먼저 섭렵할 것을 권한다. 루터 칼빈같은 종교개혁자들은 신학만 아니라 법학 또는 인문학에도 능통했었다. 나는 신학대학원에 진학하기 전에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처음 영문학을 학교에서 배울 때 촘스키의 비평학이나 논리학 또는 시학이나 영미문학에 관해 공부하는 것이 나중에 신학을 공부하는데 무슨 도움이 될런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인문학을 공부하고 신학을 공부하는 것과 인문학을 거치지 않고 신학을 공부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만약에 처음부터 신학을 전공했다면 반드시 인문학 혹은 신학의 반대편이라 여겨지는 수학이나 물리학을 공부할 것을 권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를 이해하려면 밝은 면만 볼 것이 아니라 어두운 면도 보아야 하듯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죄의 상태를 들여다보는 것도 필요하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인간을 아는 지식과 깊은 연관이 있다.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아는가 하는 것은 인간을 얼마나 아는가를 가지고 판가름할 수 있다. 이것 역시 대칭성의 원리이다. 양극단은 서로 통하는 것이다.

 

나는 신학에 관심이 많다. 신학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신학과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이는 양자물리학에 관해 관심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20여년 전에 아프리카로 떠나기 전에 소장했던 수 천 권의 책들은 사라지고 이제 내게는 이제 2백 여권의 책이 생겼다.  아프리카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다음 책을 사서 읽은 대부분이 양자역학에 대한 것들이다. 물론 성경과 역사에 관한 책도 몇 권 있다. 아직도 물리학 도서를 읽는 것이 철학책을 읽는 것처럼 어렵다. 읽다가 물리공식이 나타나면 그냥 건너뛴다. 이해하지 못해도 그냥 읽어나간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내 시야를 넓혀주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에 대해 알아가면 갈수록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가 신기하고 신비롭게 다가온다. 그러한 시각으로 하늘과 우주를 올려다보면 또 다른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답답함을 느낄 때면 광해(빛 공해)가 적은 캠핑장으로 작은 천체망원경과 카메라를 가지고 떠나려고 한다. 일년에 한 두 번 밖에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숨통을 트여주는 일이다. 아프리카에 살 때 많은 사람들이 휴가때마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가 그랬다. 해발 1500이 되는 곳에서 살던 사람은 가끔씩 바닷가로 여행을 떠나야 한다. 나의 경우는 가끔 밤하늘의 무수한 별을 바라보아야 답답했던 가슴이 시원해지는 경험을 한다. 밤하늘의 은하수를 바라보는 것이 나에게 최고 최대의 위로이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원자의 세계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학문이 우주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 그렇게 시야가 넓어져야 살아가는 현재의 삶이 힘들어도 견딜 수 있다. 고난을 견디는 힘은 다름 아니라 시야가 확장되는 것이다.

 

어제는 하루 종일 양자역학자들이 말하는 파동의 원리(wave theory)를 가지고 성경공부나 설교에 관해 생각해보았다. 이런 주제로 논문을 쓰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최근 들어 인공지능에 관련한 책들을 읽으면서 설교자가 설교준비 혹은 설교문을 작성하는데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문제에 관해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고민을 많이 했는데 양자역학의 파동의 원리가 내 생각과 입장을 정리하는데 크게 도움을 주었다. 놀랍지 않은가! 신학도로서 고민하고 있는 어느 주제에 관해 통찰력을 제공해주는 것이 어느 신학자가 쓴 책이 아니라 양자역학이었다는 사실이다. 인공지능으로 준비한 설교 혹은 설교문이 실제 목회현장에서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그리고 인공지능에 관련하여 교회와 목사들은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에 관해 여러 심포지움과 발제자들의 글을 읽으면서 나의 생각과 입장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될 때 양자역학자인 드 브로이와 슈뢰딩거의 파동의 원리에 대한 개념이 의외로 내 생각을 정리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다름 아니라 설교란 행위를 파동을 일으키고 전달하는 공명(resonance)의 사건으로 이해하게 해준 것이다. 몇 년 전에 초등학생들 몇 명 데리고 소리굽쇠(pitchfork)를 가지고 공명실험을 했던 기억도 났다. 그렇게 파동의 원리를 가지고 오늘날의 설교를 바라보니 모든 것이 선명하게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설교자로서 인공지능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관해서도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양자역학은 지금 나에게 인공지능을 어덯게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와 설교자의 음성, 커뮤니케이션, 깨달음, 소통, 공감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내 생각을 확립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모른다. 내가 내 자신을 알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어쩌면 내가 가장 힘들어하는 사람일 수 있다. 잠언은 철이 철을 날카롭게 만든다고 말한다(잠언27:17절). 하나님의 은혜는 죄가 극심한 곳에 넘치게 역사한다고 사도 바울이 말했다. 설교자에게 필요한 깨달음의 은혜는 고통스러운 탐구와 묵상의 과정을 통과해야 주어진다. 어둠이 짙은 곳에 빛은 비로소 구원이 된다. 절망이 깊은 곳에 희망이 희망이 된다. 죄로 인해 신음하는 자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비로소 복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두려워 떨지 않는 인생에게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외쳐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빌립보성의 간수의 마음과 간수의 집이 모두 강력하게 진동하고 있을 때 비로소 "주 예수를 믿으라"는 사도의 전도가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을 바꾸기 위해서 나와 가장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을 가까이 해야 한다. 대칭성의 원리(principle of symmetry)는 단지 창의성의 원리일뿐만 아니라 개혁과 변화의 원리로서 또한 매우 강력하다. 하나님께서 개혁의 목소리를 괜히 광야에서 준비하시고 광야에서 부르시고 광야에서 내보내신 것이 아니다. 예루살렘 스스로 변화할 힘이 없었기 때문에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준비된 '외치는 자의 소리'는 예루살렘 안에서가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가장 먼 광야에서 오는 것이다. 양자역학자들이 만물을 관찰하고 만물의 원리를 창의적으로 찾아내는데 사용하는 대칭성의 원리는 이와같이 역사를 이해할 때에도 매우 유용하다. 그렇기 때문에 양자역학이란 학문은 신학자들에게도 매우 매력적인 탐구의 영역이 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