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강해(37)
마지막 추수
본문: 계14:14~20
14:14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앉았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이한 낫을 가졌더라
14:15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네 낫을 휘둘러 거두라 거둘 때가 이르러 땅에 곡식이 다 익었음이로다 하니
14:16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곡식이 거두어지니라
14:17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또한 이한 낫을 가졌더라
14:18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이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가로되 네 이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
14:19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14:20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일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고백이 주 재림에 대한 고백입니다. 구주께서 만민이 보는 가운데 영광스럽게 나타나실 것이고 만민이 그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보는 순간 주님을 믿는 우리들은 주님과 같이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할 것입니다. 그리고 공중으로 끌어올려져서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온 많은 다른 성도들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영화로운 몸으로 주님을 섬기고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다시 눈물이나 사고나 고통이나 사망이나 질병이 없을 것이며, 불의나 부조리도 없을 것이며 오직 영원한 섬김과 교제의 기쁨만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회가 붙잡고 있는 재림의 소망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그 날은 영광스럽게 들림 받게 될 기독교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재림의 소망을 가지고 계십니까? 다시 오실 주님의 그 날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까? 그러나 오늘날 현대기독교회는 점차 이 재림의 소망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마치 재림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광신도’처럼 인식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재림이 전혀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여기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현대교회에 있어 비극 중에 비극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기게 되었을까요? 두 가지 원인을 분석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재림의 신앙과 소망은 몇몇 극단적 종말론자들의 점유물처럼 인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오늘날의 교회가 점점 현세지향적으로, 물질주의적으로 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세상은 반드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세상에 그 어느 것도 영구한 것은 없습니다. 오직 우리 구주께서 오시는 그날에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전혀 다른 차원, 전혀 새로운 시스템의 세상 속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 날이 되면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모든 것들은 그 체질이 풀어지고 새로워질 것입니다(벧후3:10). 여러분, 세상이 그렇게도 좋습니까? 세상에 그렇게도 자신만의 집을 짓고 그 안에서 편안하게 살고 싶습니까? 우리의 영원한 고향과 안식처는 이 땅이 아니라 저 하늘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이 말은 이 땅에서 해야 할 일들에 대해 다 손을 놓자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저 하늘에 우리의 영원한 거처가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이 땅에서 참으로 성실하고, 참으로 신실하며, 참으로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저 마지막의 위대한 추수를 기억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땅에서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며 더욱 의롭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현대교회가 시급하게 회복해야 할 종말론적인 신앙인 것입니다. 종말의 때에 우리는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재림에 관련하여 기독교회는 두 가지 사건을 인정합니다. 그것은 휴거와 부활입니다. 휴거는 ‘홀연히 변화하여 들림 받는 사건’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지상에 생존하고 있는 성도들의 몸이 그리스도처럼 영광의 몸으로 변화하여 그리스도처럼 승천하게 되는 사건을 의미합니다. 즉, 휴거는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살아남은 성도들에게 적용됩니다. 이 휴거는 단 한 번에 일어나는 사건이며 결코 반복되지 않습니다. 반면, 부활의 사건은 그리스도의 재림시 휴거하게 될 성도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화로운 몸을 가지게 되는 사건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휴거와 부활은 동시적으로 발생할까요? 데살로니가전서 4장과 고린도전서 15장은 우리에게 부활이 먼저 발생하고 휴거가 그 다음에 연달아 발생할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안에 죽은 자들이 먼저 영생의 몸으로 일어나고 그리스도 안에 살아남은 자들이 영화로운 몸으로 홀연히 변화되는 것입니다. 사실 ‘휴거’라는 단어는 성경에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교회가 변화하여 들림 받을 것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영광중에 오실 때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입게 될 것을 알고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사건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영화로운 몸을 가지게 되는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과 같은 영화로운 몸을 가지게 될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언약의 머리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표가 되시기 때문에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그리스도 안에 잠자는 자들이 깨어서 영화의 몸을 입고 나타날 것이며,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가운데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살아남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같은 영화의 몸으로 홀연히 변화하여 공중으로 끌어올려져서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부활한 의인들과 함께 교제의 인사를 나누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의인들의 부활만이 아니라 악인의 부활 역시 동시적으로 발생할 것인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영화로운 몸으로 갑자기 변화하는 사건에 이어 땅에 거하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은 영원한 심판의 형벌을 받을 수 있게끔 준비되기 위해서 그들 역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생명의 부활과 사망의 부활로 구분하고 있지만 휴거의 사건이 두 번에 걸쳐 일어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부활과 휴거의 본질을 이해한다면 시간적 순서를 두고 두 번에 걸쳐 일어난다는 세대주의적(dispensationalism) 가르침은 용납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가르침은 언약의 본질과 그리스도의 구속사적 위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언약의 머리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들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모든 자들에게도 해당되는 일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나타나실 사건은 그리스도인들이 영화로운 몸으로 나타날 사건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두 번 반복되지 않듯이 그리스도인들의 휴거 역시 두 번 반복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교리를 접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두 가지 종류의 마지막 추수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곡식을 추수하는 장면(14-16), 둘째는 포도를 추수하는 장면(17-20)입니다. 이것은 역사의 마지막에 있을 위대한 사건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 두 가지 종류의 추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생명의 추수로 나오지만 다른 한 사람은 사망의 추수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선택할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모든 인류에게 피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습니다. 생명의 부활로 나오게 될 사람들은 짐승의 수를 이기고 하나님만을 경배하는 자들입니다. 반면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될 사람들은 하나님의 유일하심을 모른 채 우상을 숭배하고 절하는 자들입니다. 누가 곡식인지, 아니면 누가 포도송이인지는 우상숭배의 죄를 이기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주님께서 각 사람들을 확인하시는 것은 그 이마나 손에 찍힌 표일 것입니다. 영원 전에 인친 사람들이 있고,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이 극명하게 서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주님은 누가 방언을 할 줄 알며, 누가 중생할 때 크게 울었느냐고 질문하실 필요가 전혀 없으십니다. 주님은 당신의 사람을 친히 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단지 짐승의 수를 이긴 당신의 양들을 잘 알고 계십니다. 사실 ‘구원받음’의 증표로서 여러 가지를 내세울 수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크게 울면서 회개하여야 한다고 가르치기도 하고 어떤 교회는 방언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단지 이마나 손에 받은 표가 어떤 것인지 확인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우상숭배를 혐오합니다. 하나님의 유일하심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택함 받지 못한 영혼들은 하나님의 유일하심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하나님께 경배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아무 거리낌없이 우상에게 엎드려 절함으로써 자신이 짐승에게 속한 자임을 나타낼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이 만세 전에 택하신 사람이라면 짐승의 수를 이길 것입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우리 구주께서 영광가운데 공중에 나타나시는 것을 봅니다. 이 위대한 환상은 현실로 이루어지고야 말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환상이 역사 가운데 이루어질 것은 굳게 믿으면서 살아야 합니다. 재림의 소망을 굳게 붙드십시오. 자, 구주께서 어떻게 나타나시는지 살펴봅시다. 14절에,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라고 했습니다. 흰 구름이 있다는 말은 영광스러운 임재를 가리킵니다. 구약성경에서 흰 구름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나타내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임재의 사건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환상입니다. 이 환상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이기도 합니다. 주 예수님께서 영광 가운데 다시 오셔서 역사의 끝을 장식하실 것이라는 소망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의 광경을 성경은 잘 묘사합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어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1:9-11) 우리는 우리 주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것을 믿습니다. 그때는 주안에서 죽은 성도들을 다시 데리고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공중에 재림하실 것입니다. 공중에 재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우리들은 그와 같이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으로 변화하여 공중으로 끌어올려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4:14-17)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우리 주님께서 공중에 나타나실 것에 대해 본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앉았는데 그 머리에는 금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이한 낫을 가졌더라.” 원래 ‘사람의 아들’(son of man)이란 표현은 ‘연약한 인간’을 가리키는 아람어 숙어였습니다. 그러나 다니엘 선지자 이후로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라는 표현은 메시아에 대한 공식적인 호칭이 되었습니다. 다니엘 선지자 이전에는 ‘인자’라는 단어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공식 명칭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인자가 그리스도라는 이 환상을 다니엘 선지자가 가장 먼저 보았습니다.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단7:13,14)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 선지자 이후 많은 사람들은 “이 인자 같은 이가 누군가?”에 대해서 서로 논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예레미야, 엘리야 혹은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추측하기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 호칭을 자신에게 적용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 대해 ‘그 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이란 호칭으로 말씀하기 좋아하셨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이 본문에서 다니엘 선지자가 바라본 그 환상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잠깐 동안 가시면류관을 쓰셨던 그분께서는 금 면류관을 쓰고 공중에 나타나실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분을 쳐다보고 땅을 두드리며 심히 통곡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손에는 ‘이한 낫’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날카로운 낫’을 가졌다는 말은 추수할 권세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데려가실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를 데려가지 않으시는 이유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곡식이 익어 고개를 숙일 때까지 농부는 서둘러 낫을 휘두르지 않듯이 주님도 마찬가지로 언제든지 우리를 데려가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지만 때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초조하게 때를 기다리는 것은 곡식이 아니라 바로 농부이듯이, 이 마지막 추수의 때를 기다리시는 분은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여러분이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것보다 주님이 여러분을 데려가실 때를 더욱 기다리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까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성전으로부터 나오는 다른 천사는 누굴까요?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구약의 성막을 떠올리면 지성소에 두 그룹이 속죄소를 덮고 있는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 천사는 언약궤를 덮고 있는 거룩한 천사입니다. 그런데 구름 위에 앉으신 인자 같은 이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네 낫을 휘둘러 거두라. 거둘 때가 이르러 땅에 곡식이 다 익었음이로다.” 어떤 사람은 어떻게 천사가 그리스도를 향하여 명령조로 외칠 수가 있느냐고 하면서 구름 위에 앉은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언어를 잘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입니다. 영어에서 높은 사람을 향해서 부탁하는 말이나 명령하는 말이나 표현은 한 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다룬 이 표현은 언약을 담당한 천사가 이제 그리스도 앞에서 하나님의 때를 선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정당합니다.
“네 낫을 휘둘러 거두라. 거둘 때가 이르러 땅에 곡식이 다 익었음이로다.” 이 말씀은 역사의 마지막 추수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추수의 비유를 이미 가르치신 적이 있습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마13:37-43) 지금 이 땅에는 곡식과 포도가 서로 공존하며 살아가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과 어둠의 아들들이 함께 섞여 누가 진짜인지 제대로 구분하기 힘든 가운데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극명하게 서로 갈라지게 될 때가 올 것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곡식이 거두어지니라.”(16절)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의 상황을 이미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저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마24:30,31)
여러분, 이 영광스러운 추수에 포함될 것입니까, 아니면 제외될 것입니까? 이것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곡식이 되거나 아니면 포도송이가 되는 것은 내 노력이나 결단에 달려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나는 노력으로 내 본질이나 본성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 영광스러운 추수에 들어갈 수 있단 말입니까?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처럼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시 곡식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은 내가 천국을 결정지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겉으로 볼 때 그렇게 볼 수 있을지 몰라도 사실은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내가 교회를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천상의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죽고 교회 안으로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옛 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창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곡식이 되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해야 하거나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곡식과 포도송이로 모든 인류를 나눌 뿐입니다. 곡식은 노력해서 포도가 될 수 없고, 포도 역시 노력함으로 곡식이 될 수 없습니다. 단지 곡식으로 태어나는 것, 그리고 포도송이로 태어나는 것만이 있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영광스러운 부활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망과 심판을 위한 부활도 있습니다. 영원한 형벌을 받기 위해 불신자들의 몸이 준비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시 동시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언약의 주가 언약의 때를 성취할 때 한 사람은 영생의 몸으로, 다른 한 사람은 영벌의 몸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화로운 몸으로 부활하는 사건이 두 번에 걸쳐 발생하지 않듯이, 심판을 위한 부활 역시 두 번에 걸쳐서 일어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곡식의 추수와 포도의 추수만이 있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또 다른 찬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또한 이한 낫을 가졌더라.”(17절)고 했습니다.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 두 번째 천사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이러한 그림은 매우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성전 안에 있는 천사는 둘로서 언약궤를 덮고 있는 두 그룹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두 번째로 나오는 그룹천사는 자신이 직접 이한 낫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전에서 나온다는 말은 언약의 성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앞서 곡식을 추수하는 주체이신 인자 같은 분을 향해서 성전에서 나온 천사가 외치는 것과 달리, 성전에 나오는 두 번째 천사를 향해 외치는 천사는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입니다.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라고 했습니다. 앞서 살펴본 대로 하늘 제단은 하나님의 진노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계8:5)고 한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따라서 이 천사는 하나님의 진노를 땅에 쏟아 붓는 일을 대행하는 천사입니다. 이 천사가 이한 낫 가진 천사를 향해 외칩니다. “네 이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불신자들을 포도송이로 표현한 것은 14장 9, 10절에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고 한 말씀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매일 하나님의 진노 아래 살았던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 위에 충만히 임하여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져질 것입니다.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일 천 육 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이 표현은 상당히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문자적으로 ‘일 천 육 백 스다디온’은 1스다디온이 200m에 해당하는 길이이므로, 약 320km를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이 숫자를 떠올릴 때 하나님의 진노의 크기를 상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혔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구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 밖에서 고난의 잔을 마시셨던 것같이 마지막 심판의 날에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시게 될 불신자들 역시 버림받게 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로부터 너무나 흔히 제기되는 문제 하나를 풀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이 끔찍한 심판의 광경에 여러분 중에 어떤 분들은 ‘사랑의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가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성경을 처음부터 다시 읽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에 대해 인간이 어떻게 반역을 거듭해왔는지 인간의 부패함과 완악함에 대해 다시 배우셔야 합니다. 그러나 이 영광스러운 휴거의 광경과 불신자들에게 떨어지는 무서운 최후의 심판은 핍박과 고난 중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무한한 위로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만일 곡식이라면 이 마지막 심판의 날을 그리워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큰 공의와 사랑으로 누구는 영화로운 몸으로 거두시고, 또 누구는 영원한 진노의 틀에 가두시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실 수 있냐고 항의할 수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사랑의 하나님께서 왜 불신자들을 영원한 진노의 틀에 가두어버리시는가 라고 질문하신다면 동일하게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왜 믿는 자들을 영원한 복락의 처소로 거두어 가버리시는가 라고 질문하셔야 공평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사랑의 하나님이 왜...?’라고 질문하면서, ‘공의 하나님이 왜...?’라고 질문하지는 않는 것은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인간의 필요에 맞게 생각하고, 인간의 행복을 위한 하나님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요? 자, 본문에서 사랑의 하나님께서 믿지 않고 짐승에게 절하던 자들을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져서 짓밟으시는 장면이 아직까지 그리도 잔혹하게 보입니까? 오히려 이 장면에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찬양할 수는 없습니까? 성 밖에서 고난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보십시오. 왜,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성 밖에서 고난을 받으셔야 했습니까? 과연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아들을 그렇게 내팽개칠 수 있단 말입니까? 사랑의 하나님이 이토록 불신자들을 진노의 포도주에 집어던지는 것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면 한번이라도 그 아들을 그토록 고난의 잔을 마시게 하신 것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어야 공평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불신자들과 영원히 형벌 받은 인생의 끝없는 원망과 불평에 대답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신성과 영광을 옷 입도록 하기 위해 성문 밖에서 고난의 잔을 홀로 받으신 우리 주님의 침묵에 대해 대답하고 싶습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 밖으로 나가셔서 친히 고난의 잔을 마시고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의 발걸음에 대해 우리는 진지하게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난을 받는 사람들 편에 서서 우리는 진지하게 질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을 사랑하고 믿고 따르는 성도들에겐 마지막 때의 이 무시무시한 심판이 결코 공의를 어기거나 가혹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내어주신 분께서 그 아들의 피를 짓밟고 무시하는 자들을 동일한 성 밖에 내치시고 짓밟으시는 것은 동일하게 크신 사랑의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리스도 때문에 성 밖으로 추방당하는 능욕을 받아보셨다면 이렇게 성 밖으로 그리스도를 능욕하는 자들을 내치는 하나님의 큰 일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토록 가혹하게 심판을 행하시는 하나님이 참으로 ‘사랑의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불신자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독생자 그리스도를 그토록 사랑하신 하나님의 큰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셨기 때문에 또한 역사의 끝자락에서 그토록 무섭게 심판을 내리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은 결코 가볍지 않을 것입니다. 처절하고 또한 철저할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의 때가 되면 이제 하나님의 원수들이 성 밖에서 짓밟힐 차례가 될 것입니다. 십자가로 온 인류에게 표현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한 자들이 이제 성 밖에서 고난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 밖’은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을 위해 받으신 심판을 비웃고 무시한 자들이 가게 될 자리입니다.
그날에 임할 그 심판은 무섭고 가혹하며 철저하며 혹독할 것입니다. 이 심판의 규모는 1,600 스다디온에까지 퍼질 것입니다. 본문이 기록된 당시 세계관에 의하면 전 세계는 동에서 서까지 1,600스다디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말하는 바는 하나님의 심판이 전 세계적인 규모로 임할 것이라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거절한 모든 자들이 자신이 이 피를 흘릴 것입니다. 그날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은 온전한 심판입니다.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임하는 심판입니다. 1,600스다디온까지 이른다는 말은 하나님의 심판이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함을, 말굴레까지 닿았다는 말은 그 심판이 참으로 철저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심판에 대한 환상은 이미 구약에서 예언된 것입니다. “열국을 동하여 여호사밧 골짜기로 올라올지어다 내가 거기 앉아서 사면의 열국을 다 심판하리로다. 너희는 낫을 쓰라 곡식이 익었도다. 와서 밟을지어다. 포도주 틀이 가득히 차고 포도주 독이 넘치니 그들의 악이 큼이로다.”(요엘3:12,13) 여러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 아들을 성밖에 내치사 저 무섭고도 무서운 고난의 잔을 받게 하기까지 인류를 향한 구원의 손길을 내미신 하나님의 큰 일을 가볍게 여기는 것만큼 ‘큰 악’이 또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조금이라도 그 아들을 성 밖으로 몰아 죽게 하신 하나님 편에서 생각해보신다면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죄악이 또 있겠습니까? 사랑의 하나님이 단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저 무서운 진노의 포도주 틀에 가차 없이 던져서 가혹하게 짓밟을 수 있냐고 항변할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독생자를 가혹하게 짓밟으신 하나님에 대해서 그 이유를 진정 물어보셨습니까? 과연 그 백성을 위해 성문 밖에서 고난의 잔을 마시고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것이 어찌 용납할만한 사소한 실수처럼 생각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리스도 때문에 성문 밖에서 고난을 잔을 마시면서 피 흘리기까지 (히12:4) 믿음의 싸움을 계속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천국 곡간으로 인도해 들이시고, 그리스도의 피를 부정하게 여긴 모든 자들을 성 밖으로 내쳐서 피 흘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일이 어찌 사랑이라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몇몇 형제나 자매가 배우자로 상대방을 살펴볼 때에 “다른 것은 다 좋은데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믿음이 없다는 거예요”라고 하는 말을 들을 때 저는 정말로 화가 납니다. 어찌 그 아들을 성 밖으로 내치시기까지 우리를 향한 사랑을 표현하신 하나님의 큰 일을 하찮거나 우습게 여기는 것을 아무렇게나 생각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스도를 거부하거나, 혹은 무관심으로 대하는 것을 어찌 가볍거나 사소한 일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단 말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성문 밖으로 나가게 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구혼을 거절한 것보다 더 큰 악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를 거룩케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의 잔을 다 받으시고, 피와 물을 다 쏟으신 우리 주님께서는 반드시 영광중에 다시 오십니다. 그날은 마지막 추수의 때입니다. 모든 인류, 모든 인생이 그 날을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날은 그리스도와 같이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한없는 영광과 승리의 날이 될 것이고, 그리스도의 피를 부정하게 여긴 모든 인생들에게는 그들이 대신 성 밖으로 버림받고 슬피 절규하며 피 흘릴 날이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행하실 마지막 추수는 확실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두 가지 추수의 환상을 보여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어김없이, 그리고 지체 없이 그 일을 하실 일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곡식이 무엇을 상징하고, 포도송이가 무엇을 상징하느냐는 두 번째 관건입니다.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제 속히 하나님께서 이 일을 행하실 것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추수를 준비하셨고, 이제 어김없이 시행하실 것입니다. 이제, 본문이 우리에게 묻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의 영원한 운명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영원한 결과는 어떤 것입니까? 이제 여러분은 이러한 최후의 추수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반드시, 기어코, 그리고 신속하게 시행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어떤 마음을 품고 있습니까? 다가오는 그 날에 여러분은 준비되어 있습니까? 다가오는 추수의 큰 날을 위해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단 한 가지뿐입니다. 그것은 이것입니다. 성 밖에서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를 만나십시오. 성 밖에서 외로이 심판의 잔을 받으신 그리스도와 화해하십시오. 십자가로 나아가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자백하고 그 아들의 못 박힌 발에 우리의 입을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성문 밖으로 나가신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은 찾나니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13:12-15) 성문 밖으로 나아가십시오. 성 밖으로 나가는 일은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왕따’당하고 배척받고 멸시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위해 그렇게 기꺼이 성문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성문 밖으로 나가길 부끄러워한다면 그날에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부끄러워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를 깊이 사랑하십시오. 그리스도를 자랑하십시오. 그리스도를 만나십시오. 어디에서 만날 수 있습니까? 성문 밖으로 나가십시오. 하나님의 심판이 두렵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그렇지 않는다면, 그것을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피를 대적한다면 여러분이 대신 성 밖에서 피 흘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1:8,9) 여러분,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마지막 추수의 날에 여러분의 운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운명에 대해 알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다시 질문 하나 드립니다. 성 밖에서 피 흘리신 그리스도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 할 말이 무엇입니까? 그 질문에 대한 여러분의 진솔한 반응에 여러분의 영원한 운명이 놓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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