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알고, 적을 알고!
때를 알면, 방황할 일도 패배할 일도 전혀 없습니다..
진리를 아는 순간 거짓은 힘을 잃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곧 능력입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요한계시록 강해(35)
시온산에 선 사람들
본문: 계14:1~5
14:1 또 내가 보니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14:2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
14:3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사천 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14:4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14:5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지난 시간에 우리가 살펴본 것을 간단히 정리해봅시다. 12장에서 우리는 하늘에서 벌어진 큰 전쟁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 전쟁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13장에 들어와서 점점 가시적인 모습으로 전쟁이 발전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늘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쫓겨난 사단이 지상으로 내려와서 증오와 복수의 이를 갈고 있는데 13장에서 우리는 마귀의 증오심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마귀는 자신의 분노심을 역사의 전면에 드러내지 않고 대신 두 하수인을 앞에 내세워 성도들과 싸우려고 하고 있습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적그리스도로서 절대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세상군주를 가리키고 있으며,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은 온갖 이적으로 사람을 속이고 미혹하게 하는 거짓 선지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마지막 종말의 큰 전쟁이 바로 이러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며, 이에 대해 우리는 늘 깨어서 진리의 말씀에 충성함으로써 싸워나가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무력이나 폭력으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무기는 다름 아니라 바로 이 두 가지, 강력한 군주의 위협 앞에서도 굴하지 않을 정도로 진리에 대해 변함없이 충성하는 것과 미혹되지 않게끔 진리의 말씀을 잘 배우고 분별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문맥을 먼저 잘 이해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것은 무시무시한 모양을 한 짐승들을 교회가 직면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짐승들을 생각할 때마다 소름이 오싹 돋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짐승을 대면해야 하는 우리는 참으로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닐 것입니다. 누가 그들과 싸워 이길 수 있을까 걱정되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다음 환상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은 하나님의 교회가 겉으로는 당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사실은 가장 안전하고 견고한 곳에 보호받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유형교회는 깨어지고 실패하고 좌절하고 넘어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무형교회는 가장 안전한 곳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이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요한계시록에서 몇번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깨닫게 될 것입니다. 6장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말한 후에 7장에서 창세전에 하나님이 택정하신 자들이 있다고 하시면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마찬가지 논리로서 12, 13장에서 무시무시한 전쟁에 대해 이야기한 다음 14장에 들어와서는 가장 안전한 곳에 보호받는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그들을 해할 자가 없을 것이고 아무도 그들을 포로로 잡아갈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 본문을 찬찬히 들여다봅시다. 1절에,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 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 어린양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시온산에 섰다고 했습니다. 시온산은 어떤 곳일까요? 시온산은 예루살렘이 위치한 산으로서 다윗산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시온산이라고 할 때는 다윗왕이 강력한 나라를 건설했을 당시를 떠올리는 것입니다. 시온산에는 예루살렘 도시와 예루살렘 거민과 함께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전이 있는 것입니다. 시온산은 하나님의 구속과 통치가 완성된 곳으로 인식되는 곳입니다. 광야에서부터 이리 저리 옮겨 다니는 언약궤와 성막이 정착한 곳이며, 다윗이 가장 강력한 통치를 전세계 만방에 보여준 곳이 바로 이 시온산입니다. 그래서 시온산은 유대인들에게 과거를 회상하고 그리워하는 마음과 함께 앞으로 도래할 강력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마음을 압축하여 표현하고 있는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온산이 문자적인 의미일까요? 히브리서 12장을 보시면 결코 문자적인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시온산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그런 땅이 아닙니다. 시온산은 바로 하나님 나라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어린양이 시온산에 섰다는 말은 매우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비록 연약하게 보일지라도 가장 견고하고 안전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힘없고 약해보이겠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보다 더 안전한 것은 세상에 아주 없습니다. 아무리 무시무시한 짐승이 우리를 위협하고 전쟁을 벌이고자 할지라도, 이방이 떠들고 나라들이 모여서 진동할지라도, 세상의 온갖 난리와 재앙 속에서도 가장 안전한 피난처는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 그곳입니다. 주님과 함께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에 있는 것입니다.
피난처 있으니 환난을 당한 자 이리오라
땅들이 변하고 물결이 일어나 산 위에 넘치되 두렵잖네
여러분 보십시오. “그와 함께 한 십사 만 사천”의 무리가 누구이겠습니까? 문자적으로 십 사만 사천 명이라고 보지 마십시오. 문자적인 수로서 144,000명만 이러한 영적 전쟁에서 안전하게 보호받는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144,000명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습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것이며, 가장 안전하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고 확신한다면 본문에 나오는 십사 만 사천 명의 무리 가운데 여러분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입니다. 본문에서 ‘서 있다’는 말이 두 번 나오는데 이 말은 견고함을 대변하는 말입니다. 견고함을 자랑하고 있는 모습을 보십시오. 아무도 자신을 정죄하거나 해칠 수 없다고 당당하게 자랑하는 모습을 ‘서 있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악한 짐승이 우리를 삼키거나 하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면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들이 귀신들리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데도 귀신들이 우리를 사로잡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도대체 누굽니까? 그들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이 분명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5:18) 그러므로 마귀의 능력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잡고 통치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두려워하십시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능력을 주목하는 순간 마귀가 주는 모든 두려움은 떠나갈 것입니다. 태양이 중천에 떠오르면 안개는 저절로 사라지는 법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강력한 군주로서의 메시아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어린양이십니다. 바로 이것이 유대인들의 시오니즘과 기독교인들의 시오니즘이 다른 점입니다. 교회는 피 흘려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와 왕으로 믿습니다.
그런데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름은 인격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어떤 이름을 들으면 가장 먼저 그의 인격과 성품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만약 어떤 이름을 들었을 때 그 인격과 성품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를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누굽니까? 다름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아는 것은 인격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들이 자신들의 안전과 견고함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막연한 자기 확신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고 말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어린양 되신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있으며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마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그들이 어린양과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가장 완벽한 모습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자들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있음으로써 스스로 견고함과 안전함을 자랑하는 자들이며, 어린양과 성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고 있는 자들이며, 그들의 성품 속에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는 자들이며, 그들 스스로를 하나님의 것,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즐거이 인정하는 자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의 인사말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다음과 같이 완벽하게 정의하였습니다.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롬1:6,7)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자신을 하나님의 것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것으로 인정하고 계십니까? 자신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사실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사람임을 믿습니까? 몸은 이 땅에 있지만 실제 우리가 하늘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놀라운 사실을 기쁜 마음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있는 곳은 지상이 아니라 바로 천상입니다. 진실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즐거이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노래를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것으로 보고하고 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 여기 하늘에서 나는 소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보장받은 견고함과 안전함 때문에 즐거이 부르는 성도들의 노랫소리입니다. 그런데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다’는 말은 권능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이 즐거이 부르는 구원의 확신에 대한 노랫소리는 사실 하나님의 크신 권능을 대변해주는 것입니다. 원래 많은 물소리는 하나님께서 죄악으로 점철된 세상을 노아의 홍수로 심판하실 때 온 세상에 들렸습니다. 죄인들은 하늘의 창들이 열리고 땅의 샘이 터질 때 그 많은 물소리를 분명 들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물소리는 하나님의 강력한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심판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가슴 벅찬 감동으로 노래 부르는 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의 죄악을 영영히 심판하신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멀리 옮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리 높여 즐거이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이 노랫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다고 한 것은 참으로 청아하고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황홀하기 그지없는 소리입니다.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황홀하게 만들까요? 세상에서 가장 황홀한 노래는 사랑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노랫소리는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보다 더 아름답고 이보다 더 청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이 노랫소리를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하늘에서 들리는 이 노랫소리를 들어보셨습니까? 구원의 절대 안전을 보장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권능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즐거이 부르는 노랫소리를 따라 여러분도 함께 불러보셨습니까?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아직 맺혀 있는 그 때에
귀에 은은히 소리 들리니 주 음성 분명하다
그 청아한 주의 음성 울던 새도 잠잠케 한다
내게 들리던 주의 음성이 늘 귀에 쟁쟁하다
주가 나와 동행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이 감격의 노래는 아무나 흉내 낼 수 없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 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고 했습니다. 땅에서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이 누굽니까? 어린양의 피로 죄 값을 지불하고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어린양의 피로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난 사람만이 이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예수님의 전 생애가 지금 나에게 크나큰 긍휼과 은혜임을 아는 사람,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이 바로 이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2:8,9) 그러므로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풍성하신 긍휼과 그 크신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면 이 감격의 노래를 부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과거의 일들이 지금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결코 이 새 노래를 부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향해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새 노래’라고 한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구원의 감격을 노래한 찬송들을 우리가 따라 부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실로 가슴 벅찬 감동으로 부를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새 노래’라는 말은 바로 그것을 가리킵니다. 여러분, 저는 모태신앙으로서 찬송가를 여러 번 부르면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찬송가에 있는 곡조와 가사들이 정말 내게 의미 있는 것으로 살아 움직여 오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부터였습니다. 수없이 불렀지만 그러나 어느 순간엔가 자신에게 살아 움직이는 의미로 부르는 그 노래가 바로 ‘새 노래’인 것입니다. 이 노래는 앞으로 그렇게 나를 구원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시점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입니다. 지금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권능과 사랑에 압도당하여 즐거이 부르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새 노래’를 부르고 있는지 아닌지는 우리 심령이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을 것입니다. 땅에서 구속함을 받은 자만이, 성령으로 새로워진 심령만이 이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누굽니까? 이 마지막 시대에 짐승들이 미쳐 날뛰는 가운데서도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즐거운 마음으로 노래 부르는 이 사람들이 대체 누굽니까? 난리와 난리 소문이 무성하며 지상 교회가 넘어지는 모습을 보면서도 두려워하고 절망하기는커녕 가장 안전하다고 외치며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에 대해 이처럼 즐거운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과연 누구란 말입니까? 세상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들에 대해 본문은 다섯 가지 특성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 이들은 순결합니다. 본문에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고 했습니다.(4절)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바보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바보들은 십사 만 사천 명은 다 남자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을 가리키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런데 이 사람들의 특징은 영적으로 순결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여자로 더불어 더럽힌다’는 말은 구약에서는 우상숭배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에서도 세상나라를 음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에서 바울 사도는 영적 순결에 반대되는 것에 대해 잘 말했습니다. 첫째, 세상 풍속을 즐기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문화생활을 즐기는 것입니다. 둘째, 공중 권세 잡은 자를 추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배를 경시하고 싫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셋째, 자기 육체의 옥심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보다는 항상 자신의 뜻만을 추구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언제나 자기중심적으로 살고 자기욕심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순결의 반대인 것입니다.
잠언서를 자세히 읽어보아도 역시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을 음녀 혹은 음녀와 짝하는 사람으로 비유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영적으로 순결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유일하심을 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유일하심을 아는 참 지식이 우리를 영적 순결을 지키게 만들어 줍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고 말할 때는 하나님만이 홀로 높임을 받으실만하며 다른 어떤 것에도 비견될 수 없는 유일하신 분이란 말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유일하심을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을 다른 그 어떤 것에도 비교할 수 없는 분으로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유일하심을 진정 알게 되었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로 알게 된 것이며, 그 결과 우리는 정절을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유일하심을 알기 때문에 모든 종류의 우상숭배를 미워하고 대적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청년 파우스트처럼 자기 영혼을 썩어질 아무 피조물에다가 팔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 몸과 영혼과 온 정성을 한 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예배의 기본 영성을 결정짓는 중요한 지식입니다. 하나님의 유일하심에 대한 지식이 없이 우리는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결코 드릴 수 없습니다. 십사 만 사천,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유일하심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유일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으며,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피조물에도 자기의 영혼을 팔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들입니다. 그들은 이 순결을 지키기 위해 자기 목숨도 기꺼이 내어놓을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들은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첫 번째는 정절 곧 모든 우상숭배를 혐오하는 것이 특징이라면 두 번째는 어린양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기로 결심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께 충성합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기로 맹세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다른 말은 듣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말만 듣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것을 잘 말씀하셨습니다. “양은 그의 음성을 드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요10:3-5) 타인의 음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도리어 도망가는 것, 이것이 충성의 다른 측면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충성한다는 말은 소극적으로 말하자면 다른 교훈에 헛되이 복종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의 진리를 즐거워하며 추구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도를 위해 힘써 싸우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인도하시는 줄을 믿고 언제나 어떠한 상황에서나 항상 감사할 줄 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상황에 따라 움직이지 않습니다. 비록 상황이 안 좋더라도 오직 그리스도만을 따라가고자 합니다. 언제나 삶의 중심은 그리스도입니다. 어느 길을 선택하든 그리스도의 임재를 가장 우선합니다. 또한 어느 길을 가더라도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이 정말 그리스도께서 목자가 되시고 자신을 인도하신다고 믿습니까? 그렇다면 주 예수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설령 나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솔해가실지라도 내가 목숨을 잃는 자리로 인도하실지라도 그곳까지라도 그리스도와 함께 하겠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나를 오라 하네 예수 나를 오라 하네
어디든지 주를 따라 주와 같이 같이 가려네
겟세마네 동산까지 주와 함께 하려 하네
피땀 흘린 동산까지 주와 함께 함께 가려네
심판하실 자리까지 주와 함께 가려 하네
심판하실 자리까지 주와 함께 가려네
주가 크신 은혜 내려 나를 항상 돌아보고
많은 영광 보여주며 나와 함께 함께 가시네
셋째, 이들은 하나님의 소유, 어린양의 소유입니다.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분명 144,000명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특정 부류나, 혹은 구원받은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리스도인 중에 특정한 일부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전후 문맥상 도저히 안 맞는 말씀이 됩니다. 그들은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은 자들입니다. 여기서 구속을 받았다는 말은 헬라세계에서는 원래 시장언어로서 노예시장에서 주인이 값을 치루고 노예들을 자기 것으로 사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반면, 히브리어에서 ‘구속’이라는 말은 죄를 덮는다, 혹은 가린다는 뜻으로서 죄 값을 지불한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보든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어린양의 피로 우리 죄를 가려주시고 어린양 그리스도의 공로를 우리에게 거저 입혀 주신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을 자신의 소유로 주장하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과연 우리가 그것을 인정할 줄 아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여기며 살아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도가 누굽니까? 성도는 하나님이 소유하시는 사람들입니다. 특정 목사나 영성이 남다른 특정 그리스도인들만이 결코 아닙니다. 마틴 루터가 주장한 ‘만인제사장론’은 새로 창안한 교리가 아니라 사실 성경에 있는 진리입니다. 특정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죄 값을 지불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은 모두 특별하게 보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사실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는 말에 대해 굉장히 불쾌감을 표시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싫어하고 거부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을 이 사실만큼 자랑스러운 것은 또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자랑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사실상 하나님의 종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분명히 해야 하겠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을 위해 따로 구별된 자들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이 이렇게 구별된 자들이라는 사실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져야 마땅합니다. 우리 입장에서 볼 때 거저 구원을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사실 하나님 자신보다 더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토록 놀라운 은혜를 싸구려로 전락시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속받은 우리는 하나님 자신에게는 대단히 값비싼 존재들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그렇게 여기면서 살아가는 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특별하게 보고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관심을 어린양의 피라는 무한한 은혜에서 찾지 않고 값싸고 보잘 것 없는 걸레보다 못한 자기 의로움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매우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본문에 보면, ‘처음 익은 열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처음 익은 열매라는 말은 각별하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처음 익은 열매는 모두 하나님의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만일 시집 장가를 가서 아이를 낳게 된다면 이 처음 익은 열매가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처음 익은 열매에 대해 매우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감정은 동물들에게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동물들과 달리 사람들은 자녀든 혹은 농사를 지어서 처음 거둔 곡식이든 간에 매우 특별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감정인데 이러한 감정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함을 받은 자들을 하나님께서 매우 특별하게 보신다는 진리를 깨닫게 해주시기 위한 섭리로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이 만일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을 즐거워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때를 가장 안전한 때로 인정할 줄 안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 자신을 매우 특별하게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여러분은 매우 특별한 존재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광과 특별한 목적을 위해 따로 구별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세상에서 그 어느 보석보다 아름다운 존재로 간주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그리스도 안에서 믿을 수 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넷째, 그들은 그 입에 거짓말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에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말은 매우 독특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거짓말을 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진리를 말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어긋나는 말을 성경에서는 거짓말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증명은 생략하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세상이 흔히 생각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신은 거짓말을 미워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지 않거나 혹은 하나님의 말씀과 어긋나는 말을 한다면 분명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말에 대해 여러 가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말에 대해 스스로 ‘아멘’이라고 할 수 없다면 우리는 거짓말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선언하심으로써 말씀을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멘, 아멘. 내가 너희에게 하나님으로서 말한다”고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말하지 않는 모든 말들이 다 죄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5:37) 야고보 역시 같은 말을 했습니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4:15,16)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자기의 말을 되돌아보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지 늘 점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한 말을 자기 스스로가 기준이 되어 점검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말에 대해 ‘아멘, 아멘’이라고 붙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 말은 다 악한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는 것처럼 그렇게 말하려고 애써야 하겠습니다. 즉, 우리가 하는 말이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지는 않는지 항상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다섯째로, 이들은 흠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세상에 흠 없는 자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덕적으로 높은 수준의 권위를 보여주는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흠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간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만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뜻만을 추구하는 것이 그들의 삶의 방향입니다. 그 과정에서 실수와 도덕적인 죄를 범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에 죄가 그들을 결코 지배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 안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생명 때문에 그들은 결코 죄를 즐거워하거나 죄를 반복적으로 지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3:9) 그러나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죄 없다고 주장해도 좋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하기를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1:8)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모순처럼 보이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성경의 예를 들어봅시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은 참으로 실수도 많은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흠 없는 사람으로 보십니다.(창15:6) 역대기를 한번 읽어보십시오. 다윗은 참으로 생각하기도 끔찍한 죄를 지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흠 없는 사람으로 보십니다. 성경은 그를 일평생 온전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흠이 없다는 말은 우리가 도덕적으로 실수할 가능성이 없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비록 도덕적인 부분에서 죄를 지을 수는 있지만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러한 죄는 되풀이되지 않을 것입니다. 더욱 분명한 것은 그들은 언제나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는 경향성이 그들의 삶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값없이 칭의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비록 불완전하고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자기 삶 속에 실현하려는 갈망이 있습니다. 이것은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주시는 거룩한 욕구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이러한 욕구가 있습니까?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시는 것을 이것으로 확인할 수 있겠습니다. 자신의 불완전함에 낙심하지 않게 변함없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거룩한 욕구가 내 삶을 지배하는 동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욕구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본문에서 흠이 없는 자들이란 말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이제 본문을 정리해봅시다. 비록 무시무시한 짐승이 교회를 위협하고 대적할지라도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자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자들이며, 아무도 그들을 해칠 자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은 구원은 참으로 안전하며 영원히 견고한 것임을 기억합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것에 대해 잘 증명했습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음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지금 우리의 위치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우리가 시온산에 서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 만한 불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그러나 너희의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12:18-24) 이토록 견고하고 안전한 구원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우리를 죄에서 구하시려 주 예수 십자가 지셨으니
기쁘게 부르세 할렐루야 나 구원 얻었네
우리를 주께서 구했으니 이전에 행하던 악한 일과
추하고 더러운 모든 죄를 온전히 버렸네
나 지금 죄에서 사함받아 거룩한 백성이 되었으니
이 육신 장막을 벗을 때도 겁날 것 없겠네
우리가 이 세상 떠날 때에 예수의 손목을 굳게 잡고
영원히 즐거운 천국에서 주 함께 살겠네
찬송하세 찬송하세
주님 나를 구하셨네
찬송하게 찬송하세
주가 구원하셨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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