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복음! 복음!
김광락 선교사 올림.
요한계시록 강해(36)
영원한 복음
본문: 계14:6~13
14:6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14:7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14:8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14:9 또 다른 천사 곧 세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14:10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14:11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14: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그간 평안하였나요? 여러분들의 기도로 2주간에 걸친 티벳정탐여행을 성공적으로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70여 시간 비포장도로를 버스를 타고 티벳땅으로 올라가는 길은 참으로 험하고 멀었지만 특별한 사고가 없었던 것은 하나님의 크신 도우심 때문이었습니다. 평균 해발 4,000에 이르는 고지대라 산소가 50%가 부족한 티벳이란 땅은 정말 ‘땅끝’이라 칭할만합니다. 땅끝에서 하나님의 부흥이 임할 것을 한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고산지대에 단기적으로 반응하는 육체적인 고통--현기증이 자주 나고 손발이 저리고 두 다리가 풀어지고 숨이 가쁘고, 등등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그곳에서 본 것은 티벳 사람들을 지배하는 거대한 흑암의 세력이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그곳에서 그 땅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어둠의 권세에 대항하여 목숨을 걸고서 주님의 이름을 높이며 영적 전투를 벌이고 있는 몇몇 한국 선교사들의 활약상에 너무나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 땅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곳에서 사역하는 주의 종들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라마불교의 거대한 영적 흑암뿐만 아니라 고독함이라는 자신과도 싸우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번 여정은 그 동안 다녔던 정탐여정 중에 가장 힘든 여정이었습니다. 많은 돈을 들여, 그것도 고생하면서 그 땅으로 갈 때 사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고 여러모로 회의가 든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렇게까지 고생하면서까지 그 땅으로 온 우리들의 발걸음에 대해 그곳 선교사님들과 현지 교회가 적지 않은 도전을 받는 것을 볼 때 생각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론을 내리기를 우리들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선교사들의 필요에 따라서 이러한 ‘사서 고생하는 식의 선교여행’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최전방에서 목숨 걸고 치열하게 싸우는 전투병과 후방에서 계속 물자를 실어 나르는 보급병이 서로 민첩한 교통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관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 모두가 처한 삶의 자리에서 진정한 선교후원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하든지 최전방과 연결되어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최전방에서 가지지 않으면 안될 치열한 영성이 여러분 자신에게로 흘러들어올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이 나라 이 민족을 기적적으로 왕성하게 하신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사실 이 민족이 전 세계에 무엇으로 기여할 만한 것을 가지고 있습니까? 정치, 경제, 사상, 혹은 교육적인 분야에서 기여할만한 것이 있습니까? 중국 허베이 성의 절반도 안 되는 작고 작은 땅에서 조급하고 성질 나쁜 반도기질이 전 세계를 도덕적으로 주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단 한 가지 불같은 고난으로 점철된 고통의 역사 속에서 정금같이 단련되어 하나님 한 분만을 간절히 찾고 부르짖을 수 있다는 것만이 유일하게 이 민족이 전 세계에 내놓을만한 유산일 것입니다. 이 민족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신뢰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전 세계에 기여하는 것만이 21세기에 한국이 살아남을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가장 힘들고 어려운 오지로 나가서 선교하는 사역자들을 가장 많이 소유하고 있습니다. 물론 단순 통계로 본 수치이고, 선교지에서 발생하는 분쟁도 문제로 대두되고 있지만 표면적으로 보면 우리나라가 선교에 있어 무시하지 못할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한국 선교사들의 활약상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삶이 선교지향적이 되도록 하십시오. 제가 볼 때 우리가 받은 것들을 최선을 다해 나누어주는 것만이 경쟁지향적인 21세기에 생존하는 길입니다.
저는 티벳땅을 여행하면서 거대한 전쟁이 어떤 양상으로 일어나고 있는지 주목하고자 했습니다. 실제로 저는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영적 전쟁의 실상을 그곳에서 직접 볼 수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에서 우리는 하늘에서 시작된 전쟁이 13장에 와서 지상에서 계속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린양의 승리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있을 곳이 없게 된 붉은 용은 땅으로 추방당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땅에서 하늘로 구속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수가 차기까지 자기 마음대로 활약을 펼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땅으로 추방된 붉은 용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훼방하고 방해하기 위해서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라는 두 꼭두각시를 전면에 내세워서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자기의 시기심과 분노심을 땅에 실현하고자 합니다. 13장은 땅에서 벌어지는 영적 전쟁의 실상을 우리에게 낱낱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는 온갖 권력과 속임수를 다 동원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훼방하고 땅에 사는 사람들, 즉 불신자들이 하나님을 찾지 못하도록 역사합니다. 진리를 찾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사람들로 하여금 정신을 혼미하게 만듭니다. 말 그대로 “정신없이” 살게 만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모방한 것들을 보여주면서 그 앞에 절하게 합니다.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과 경배를 중간에 가로채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원수 마귀가 땅에 실현하고자 하는 자신의 야망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과연 그들의 횡포 아래 누가 살아남을 수 있단 말입니까? 이에 대한 응답으로서 하나님은 14:1-5의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이처럼 무시무시한 영적 전장에서도 머리털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고 안전하게 보호받는 일단의 무리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로서 하나님의 통치와 구속의 완성을 의미하는 시온산에 어린양과 함께 서 있는 자들입니다. 사40장과 엡6장 등을 보면 ‘서 있다’는 표현은 성도의 견고한 구원에 대한 확신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번 단기선교에서 저는 중국 공안들이 제 아무리 교회를 핍박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감옥에 집어넣을지라도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서 있는’ 소수의 사람들을 만나서 서로 교제할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큰 감동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으로 전신갑주를 삼아 굳게 서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치열하게 영적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현장에서도 ‘서 있는’ 영혼들의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실로 큰 감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택한 자들이며,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자들로서 어떤 상황속에 집어 던져져도 결코 흔들림 없이 하나님을 섬길 것입니다. 그들에게 상황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시온산에 어린양과 함께 서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어떻게 해서 시온산에 어린양과 함께 서 있을 수 있게 되었습니까? 그들이 전쟁통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이 대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천사들로부터 전해진 3가지 소식이 그들로 하여금 그러한 복된 위치에 서 있게끔 했습니다. 세 천사들이 각각 전한 소식은 성도로 하여금 인내와 믿음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사실들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복된 소식이며, 두 번째는 인류의 운명에 대한 소식이며, 세 번째는 경고의 소식입니다. 천사들로부터 전해진 이 세 가지 소식은 우리 개인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는 결정적인 소식입니다. 한 가지씩 살펴봅시다.
첫째 천사가 들려준 음성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6절을 봅시다.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시온산에 어린양과 함께 선 사람들이 누구며 어디서 왔느냐에 대한 대답으로서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 중에 전파된 영원한 복음을 듣고 믿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복음은 특별한 계층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과 백성에게 전해질 보편적인 소식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공중에 날아가는데”라고 했습니다. 천사가 왜 공중에 날아갑니까? 복음이 전 세계에 공개적으로 전파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결코 비밀집단이 소유하는 특별한 지식이 아닙니다. 모든 나라와 족속에게도 전해져야 할 소식입니다. 그러면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복음은 관계회복입니다. 그것은 피조물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가 외치기를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고 한 것입니다. 복음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우리가 섬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여러분에게 정말 ‘복된 소식’으로 들립니까? 내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가까이 섬길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이것보다 더 복스러운 소식이 어디 있을까요?
그런데 왜 ‘영원한 복음’이라고 했을까요? 하나님을 영원히 섬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 일시적이거나 다시 인간의 실수나 하나님의 변심 등으로 깨어질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회복된 관계는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다시 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복된 소식인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미련함 때문에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질 일이 없을 것입니다. 구원의 확실한 근거는 나의 밖에서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혹 나의 실수로 다시 구원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혈로써 그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전 세계 모든 민족에게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천사가 이 소식을 쥐고 있습니까? 천사가 복음을 전 세계 민족에게 직접 전파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계1:1을 참조하십시오. 천사는 계시를 전달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지만 복음전파의 특권은 오직 사람에게 맡기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모든 민족과 방언과 족속에게 찾아가서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사의 위치가 얼마나 고귀한지 알아야 합니다. 복음을 들고 각 족속과 방언으로 찾아가는 일은 하늘의 천사가 부러워하는 일입니다. 하늘의 천사가 함께 하는 일입니다. 하늘의 천사가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땅끝에서 복음을 들고 사투를 벌이는 하나님의 종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들을 후원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복음의 최전선으로 끊임없이 이어져야 합니다. 최전방에서 치열하게 싸우는 전투병이 되든가 아니면 끊임없이 물자를 조달하는 보급병이 되십시오.
그러면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각 민족과 백성과 방언이 들어야 할 복된 소식이 어떤 것입니까? 7절을 보십시오.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복음이란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어떤 일을 행하실 것인지 알고서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어떻게 일하실 것을 인정하고, 즉 영광을 돌리고, 그 앞에 경배하는 것입니다. 복된 소식이란 결코 인간중심으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인간에게 복된 소식이란 인간이 어떤 존재이며 인간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참으로 아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복음이란 자기가 성공하고 자기가 잘 되고 자기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필요를 온전히 채우는 것인데 인간의 필요란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 때 인간의 모든 필요가 채워집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인간의 기쁨과 행복의 원천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불만과 불안에 휩싸이게 됩니다. 진리를 알지 못하고 여러 가지 거짓말을 믿기 때문에 자유를 잃어버리고 속박을 당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아십시오. 진리가 우리를 해방시켜 줄 것입니다. 인류를 속박하는 것은 물질의 결핍이 아니라 마귀가 만들어낸 온갖 거짓말입니다. 마귀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못하게 온갖 거짓말로 속입니다.
그래서 본문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첫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어떤 일을 행하실 것인지를 알뿐만 아니라 그것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께 경배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높여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그가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왜 심판하십니까? 그가 모든 피조물을 친히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창조자이시오, 또한 심판자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과 생명의 근원을 만드셨고, 그 만드신 모든 만물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복음에 대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복음이란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인간의 진정한 필요를 채워줍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하실 일을 알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높이는 것이 인간의 최대 최고의 행복입니다. 복음이란 범죄한 인류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영원히 섬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것 자체가 우리의 행복이란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자가 된 것이 바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믿으십시오. 이 관계는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둘째 천사의 음성에 대해 살펴봅시다. 8절,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다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둘째 천사는 인류의 운명에 대해 선언하고 있습니다. 인류문명은 망한다는 사실입니다. 시온산에 어린양과 함께 선 자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소식을 듣고 장망성이란 이름의 세상에서 빠져 나와 시온산으로 순례의 길을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 뒤를 따라” 말하는 것은 영원한 복음에 이어 반드시 알아야 할 논리적인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라고 두 번 반복한 것은 구약에서 활약한 선지자들의 전형적인 선포방식으로서, 너무나 확실한 미래를 과거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나라가 이미 망한 것처럼 보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그리스도인들은 세상나라가 이미 망한 것처럼 간주할 능력이 없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세상나라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상나라가 이미 무너졌다고 간주하는 것은 자기 삶의 근본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감히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큰 성 바벨론’은 세상 나라, 세상 문명의 모체를 가리키는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세상나라’인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직장이나 가정과 같은 삶의 형태가 아닙니다.
여러분 세상은 어떤 곳입니까?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여기서 세상은 마귀와 동일시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은 물질적인 어떤 형태가 아니라 정신적인 어떤 사상의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 음행’이란 우상숭배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 문명의 모체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지식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무신론이 모든 세상문명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무신론을 가지고 세상을 지배하고 있으며 세상나라로 하여금 우상을 숭배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여러분, 무신론이 지배하는 나라를 보십시오. 무신론이 지배적인 나라일수록 끔찍하고 잔인한 범죄가 기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죄의 삯을 지불하고야 말 것입니다. 그런데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당시 시대적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 음란한 창녀가 음행하려는 대상을 먼저 포도주로 취하게 한 다음 성행위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전쟁할 때에 포도주잔을 기울임으로서 적에게 선전포고를 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제사지낼 때에도 불을 제물에 붙이기 전에 포도주 잔을 기울여 붓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제물에 붓는 포도주로 간주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무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신론적 세계관이 온 세상나라의 문명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세상을 보십시오. 무신론적 세계관에 취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진노의 날이 가까이 다가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무신론은 사실 도덕 불감증과 매우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무신론적 사고방식은 부도덕한 삶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질수록 부도덕한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더라도 그 백성이 하나님을 떠날 때 그들은 타락하기 시작했으며, 우상숭배를 할수록 성적으로 타락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8절 말씀에서 우리가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세상나라가 이미 무너졌다고 간주하고 세상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세상은 우리가 다니는 직장이나 학교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세상이란 곳은 무신론적 사고방식을 조장하는 영적 실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고함치게 만드는 사단의 견고한 진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그들의 취함은 파멸의 신호탄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에게도 적용됩니다. 깨닫지 못하고 무신론에 도취해 있는 것은 파멸의 신호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인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교만한 것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이제 셋째 천사의 음성을 살펴봅시다.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짐승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고 표를 받는다는 말이 두 번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는 것과 밤낮 쉼을 얻지 못하는 것과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것은 진정한 안식과 평화를 얻지 못한 것으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천사가 외친 음성이 전체적으로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어린양과 함께 시온산에 서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유일하심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한 사람이라면 결코 우상숭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함을 받지 못한 인생은 적그리스도와 거짓선지자의 미혹을 받고 우상숭배하는 죄를 범할 것입니다. 이것은 시금석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봅시다. 우리는 우상숭배의 죄를 미워합니까? 우리는 한 분 하나님만 섬겨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는 죄를 범하지 않게 될 믿음이 있습니까? 여기서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는다는 말은 무슨 컴퓨터 바코드를 받는다는 말로 이상하게 보지 마십시오. 표는 소속감을 결정짓는 세계관을 뜻합니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소속된 사람은 결코 살아 계신 하나님, 유일하셔서 영광과 경배 받기에 합당하신 한분 하나님, 두려워해야 할 한 분 하나님으로 인식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지식이 없고, 그래서 결코 하나님 안에서 참된 평안과 안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 결과 그는 영원한 고난에 처해질 것입니다. 지금 안식을 누리는 자는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쉼을 얻지 못하면 영원한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안식을 얻습니까? 오직 어린양 되신 그리스도 안에만 참 안식이 있습니다. 시온산에 서 계시는 어린양에게서만 참 안식이 나옵니다.
여러분, 누가 선택되었는지 어떻게 압니까? 누가 구원받았는지 어떻게 압니까? 여기 확실한 시금석이 있습니다. “짐승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입니까, 아닙니까? 그러므로 성경은 말합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이 말씀은 13:10에도 나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계명이란 어떤 계명을 가리킵니까?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하나님의 계명이란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유일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반드시 인내가 뒤따르는 법입니다. 인내 없이 이러한 믿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인내함 없이 이 믿음을 어떻게 지킬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습니다.” 여러분은 성도들로서 인내를 가지고 있습니까? 우상숭배를 미워하고 살아 계신 한 분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마음이 있습니까?
이제 세 천사의 음성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음성으로 보증하십니다. 13절,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다름이라 하시더라” 하늘의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는 믿음을 인내로서 지킬 때 반드시 상급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우리가 무슨 선한 일을 했단 말입니까? 우리의 도덕적 수고에 따라 상급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행한 일”은 단지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고 산 것입니다. 때로는 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 인내한 일뿐입니다. 이 ‘일’은 우리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만을 섬기고 산 의인들을 결코 저버리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내한 것에 대해서도 “복이 있도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자금 이후로 주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나님의 유일하심과 예수님의 그리스도되심을 인내로써 믿는 자들,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 믿음을 잃지 않고 지키는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과 성령께서 친히 보증하고 계십니다. 이 얼마나 복된 말씀입니까?
여러분, 시온산에 어린양과 함께 선 무리들 중에 우리 자신이 끼어 있는지 발견하셨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시온산에 선 무리에 속하였는지 여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에 대해 보았습니다. 그들은 영원한 복음을 전해들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세상나라가 망한 것으로 간주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짐승과 그 우상에게 절하는 것은 죽기까지 싫어하고 혐오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무덤까지 인내하며 가지고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한 일은 단지 참고 견디면서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인정하며 섬기며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영원한 복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는 주 하나님께 마땅히 경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인내로써 우리의 믿음을 확증해보여야 합니다. 짐승과 그 우상에게 절하지 않고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께만 절하는 절개를 삶 속에서 입증해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한 일에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택함 받은 자들은 결국 그 인내로서만이 파악될 것입니다. 그 인내는 오직 창조주 하나님, 유일하신 하나님, 그리고 어린양을 아는 지식에서 나오는 열매인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이 지식으로 여러분의 믿음과 인내를 새롭게 하기 바랍니다. 이 믿음만 있으면 세상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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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37)-마지막 추수(계14:14-20) (0) | 2012.03.03 |
요한계시록 강해(35)-시온산에 선 사람들(계14:1-5) (0) | 2012.03.03 |
요한계시록 강해(34)-바다와 땅에서 올라 온 두 짐승(계13:1-18) (0) | 2012.03.03 |
요한계시록 강해(33)-하늘전쟁(계12:7-17) (0) | 2012.03.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