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강해(39)
일곱 대접 심판
본문: 계16:1~21
16:1 또 내가 들으니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일곱 천사에게 말하되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 하더라
16:2 첫째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나더라
16:3 둘째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으매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
16:4 세째가 그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으매 피가 되더라
16:5 내가 들으니 물을 차지한 천사가 가로되 전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
16:6 저희가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저희로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 하더라
16:7 또 내가 들으니 제단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 하더라
16:8 네째가 그 대접을 해에 쏟으매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우니
16:9 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워진지라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며 또 회개하여 영광을 주께 돌리지 아니하더라
16:10 또 다섯째가 그 대접을 짐승의 보좌에 쏟으니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16:11 아픈 것과 종기로 인하여 하늘의 하나님을 훼방하고 저희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더라
16:12 또 여섯째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더라
16:13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16:14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16:15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16:16 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16:17 일곱째가 그 대접을 공기 가운데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가로되 되었다 하니
16:18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이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어찌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옴으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
16:19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16:20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데 없더라
16:21 또 중수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내리매 사람들이 그 박재로 인하여 하나님을 훼방하니 그 재앙이 심히 큼이러라
오늘도 복된 말씀으로 여러분과 함께 교제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 계시의 말씀을 읽고 듣고 가슴에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계속해서 요한계시록을 살펴보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역사관을 정립해나가도록 합시다. 우선 지난번 나누었던 말씀을 다시 살펴보기 원합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본문인 15장은 인류가 경험하게 될 마지막 재앙의 전주곡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마지막 재앙이 속히 임하리라고 선포되었을 때에 하늘에 노래가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그 노래는 시온산에 어린양과 함께 선 무리들이 부르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한 자들의 노래입니다. 그런데 15장 본문은 관점을 달리하여 불이 섞인 유리 바닷가에 서서 노래를 부르는 자들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세가 한 일과 같이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머나먼 옛날 옛적에 모세의 손을 통해 큰 구원을 이루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때 구원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감격과 동일하면서도 더욱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님이 주신 구원을 노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출애굽기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는 구원에 대한 그림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요한 사도에게 먼저 보여주신 것이 ‘불이 섞인 유리바다’였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펼쳐진 ‘수정과 같은 유리바다’(계4:6)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보여주고 있는데, 진노를 뜻하는 불은 바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홍해바다에서 구원하신 사건을 이해하지 못하면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한 구원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없듯이 ‘불붙는 유리바다’를 이해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홍해바다는 예표이며, ‘불붙는 유리바다’는 실체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구원을 이해한다면 홍해바다에서의 사건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추격해 오던 바로의 군대에게서 구원받은 이스라엘이 바닷가에 서서 기뻐 뛰놀며 찬양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들은 우리를 삼키려고 달려드는 짐승에게서 구원받은 것 때문에 기뻐하며 찬양하는 이 무리들이 누군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원수가 없다면 하나님의 구원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를 집어삼키려고 하는 흉악한 세력이 누군지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많은 개념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는 몰라도 어쩌면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자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개념적인 지식으로 구원받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지식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개념적으로 훌륭하게 설명할 수는 없어도 하나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반대로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잘 알고 여러 권의 신학서적을 읽고 논문을 쓰고 남을 가르칠 줄 알아도 전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에 대한 개념적인 지식을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인격적인 지식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수적이고, 개념적인 지식은 교회의 보호를 위해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아는 것이 먼저고 그 다음이 하나님에 대해 더 알아 가는 배움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맛보아 알라고 했습니다(시34:8)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오직 전쟁의 상황에서만 가능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 도다”(시34:7)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34:8) 위급한 상황, 주린 상황, 절대적인 도움이 필요한 한계 상황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여러분이 만일 죄 때문에 절대적인 절망을 해보았다면 하나님을 맛보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면 우리의 인식에 있어서 반드시 달라지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말은 우리를 삼키려고 입을 벌리고 달려드는 원수들이 누군지 알고 있는 것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원수는 죄요, 세상이요, 마귀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 때문에 자복하며 통회하며 슬퍼해 보지 못했다면 하나님의 의를 진정 알고 있다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 사면을 받았을 때의 감격을 다른 사람이 대신 알지 못하듯이 하나님을 아는 것도 다른 사람이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안다는 것은 절체절명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나를 삼키려는 세력에 쫓겨 죽음의 그림자가 내게 드리워졌음을 알고 애통해보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할 수 있단 말입니까? 회개는 천국의 관문입니다. 애통하는 것은 위로 받는 길입니다.
그런 다음에 요한사도는 ‘하늘의 증거장막의 성전’이 열리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성전으로부터 나오는데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세세에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그들에게 주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이 장면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이 단지 짐승에게서 벗어난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가 온전히 부어질 때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리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바다에서 구원을 받았지만 성막이 완성되었을 때 비로소 그들이 받은 구원이 완성되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들이 받은 구원 역시 짐승에게서 영원히 벗어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가 온전히 쏟아 부어지게 되고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가 성전에 충만하게 임재하심으로 우리와 함께 거하실 때 비로소 구원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게 될 16장 본문 역시 출애굽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출애굽기를 읽어보셨다면 애굽 나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신 일을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 10가지 재앙들이 어떤 것들이었습니까? 간단히 나열하면, 피, 개구리, 이, 파리, 생축의 죽음, 독종, 우박, 메뚜기, 흑암, 그리고 장자의 죽음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을 가만히 보면 출애굽 당시 애굽에 내린 10가지 재앙과 유사한 재앙들이 나옵니다. 사실 계시록에서 세 번에 걸쳐서 일곱 심판이 임하는데 모두 애굽에 임한 열 가지 재앙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일곱 대접 심판만 생각해봅시다. 첫 번째 대접이 쏟아질 때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나타납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10장에 나오는 여덟 번 째 재앙을 연상케 합니다. 두 번째 대접이 쏟아질 때 바다가 피로 변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대접이 쏟아질 때 강과 물 근원이 피가 됩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7장에 나오는 첫 번째 재앙을 생각나게 합니다. 다섯째 대접이 쏟아질 때 어두움이 임하는 것은 출애굽기 10장에 기록된 흑암의 재앙을 떠올리게 합니다. 여섯째 대접이 쏟아질 때 나타난 개구리 같은 귀신들은 출애굽기 8장에 나오는 개구리 재앙을 그려줍니다.
이것은 전체적으로 무엇을 말해줍니까? 우선 하나님이 애굽에 내리시는 재앙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에 필수적이었듯이 역사의 마지막에 내리실 재앙도 역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는 데 있어 필수적이라는 것입니다. 차이점은 애굽에 재앙을 내리신 다음에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바다를 건넜지만 종말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리바다를 건넌 다음에 하나님의 진노가 이 땅위에 쏟아 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즉, 새 이스라엘은 마지막 재앙을 경험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읽은 16장이 전체적으로 하는 말씀은 하나님이 내리시는 마지막 재앙으로 인하여 우리가 받은 구원이 완성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구원을 위해 애쓰거나 싸울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원수들이 멸망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본문에 기록된 이 모든 장치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생각할 때 도움을 주고자 영감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먼 옛날 사랑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애굽에 재앙을 내리신 하나님께서 역사의 마지막에 재앙을 내리시는 것은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의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원수 마귀를 멸하심으로써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옛날 옛적에 바로의 군대를 홍해에 빠뜨리심으로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원하신 것을 분명히 하셨듯이 원수 마귀와 그에 속한 모든 자를 멸하심으로써 참 어린양의 피로 구원하신 것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여호와이십니다. 출애굽기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시작하시기 위해 재앙을 내리셨다면, 이제 종말의 때에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재앙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본문을 전체적으로 살펴볼 때에 발견하게 되는 사실은 세 번에 걸친 일곱 심판이 서로 비슷한 패턴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일곱 나팔과 매우 흡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가장 분명한 것은 앞의 네 가지가 서로 비슷하고, 나머지 세 가지가 서로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특히 나팔 심판과 대접 심판이 매우 흡사한데, 나팔 심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처음 네 가지는 땅, 바다, 강과 샘물, 그리고 태양에 대접이 쏟아 부어지게 됩니다. 앞의 네 가지는 하나님의 심판이 모든 자연계에 임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나머지 세 가지는 하나님의 심판이 모든 영계에 임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이 완전하고 완벽하게 임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완전하다는 사실을 본문이 강조하면서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행하시는 심판은 결코 모자라거나 일부 지역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전 우주적으로 시행될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가 받은 구원이 우주적인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의 차이가 있습니다. 일곱 나팔의 재앙은 부분적입니다. 그런데 일곱 대접의 재앙은 전체적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고 교회가 들림 받고 이 땅에 부어지는 재앙은 가히 충격적입니다. 예를 들어, 둘째 나팔이 불리게 될 때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된 반면, 둘째 대접을 바다에 쏟았을 때는 바다 전체가 피같이 되어 모든 생물이 죽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마지막 재앙은 참으로 끔찍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대한 천사들의 반응과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을 의로우시다고 찬양하는데 반해, 사람들은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천사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내가 들으니 물을 차지한 천사가 가로되 전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 저희가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저희로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 하더라. 또 내가 들으니 제단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 하더라.”(16:5-7) 물에 심판의 대접이 쏟아질 때, 물을 담당한 천사는 불평하고 원망하기는커녕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가혹하게 심판하시는 것이 정당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저희가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니 저희로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이 무시무시한 심판에 대해 여러분은 하나님의 일이 매우 정당하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하시는 큰 일에 대해 불평하거나 항의할 것입니까?
어떤 사람이 제게 와서 “목사님, 출애굽기를 읽는데 참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애굽에 그토록 가혹한 재앙들을 내리실 수가 있단 말입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해 본문은 정확히 대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행하시는 것이 지극히 정당하다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재앙을 이토록 무섭게 내리시는 것에 대해 도저히 이해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저희가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무고한 피를 흘린 일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애굽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400년 동안이나 행한 그 가혹한 행태에 대해서는 왜 분노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 불공평해 보이고, 너무하다 싶어 보일 때에 우리는 악을 미워하는 마음이 없고 오히려 악을 옹호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보아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불의를 미워하고 분노한다면 하나님이 행하시는 의로우신 심판 앞에 예배드리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불의의 편에 서 있다면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들이 부조리로 느껴질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에서 본다면 애굽에 내리시는 재앙에 대해 결코 불평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애굽의 시민이라면 하나님께 대하여 원망하고 항의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여러분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 가를 보면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에 속한 백성인지 아니면 세상 나라에 속한 백성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이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천사들의 반응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 재앙을 받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을 인정하기는커녕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하며 대적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9절, “이 재앙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며 또 회개하여 영광을 주께 돌리지 아니하더라”고 했고, 11절에도 “아픈 것과 종기로 임하여 하늘의 하나님을 훼방하고 저희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더라”고 했으며, 21절에도 “또 중수가 한 달란트나(약, 30kg)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내리매 사람들이 그 박재로 인하여 하나님을 훼방하니 그 재앙이 심히 큼이니라”고 했습니다. 나팔의 재앙에서는 그래도 몇몇 사람들이 회개하는 일들이 있었지만 대접의 재앙에서는 사람들이 회개하는 일을 결코 찾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면 이미 택함 받은 백성들은 천사들의 손에 의해 주님이 나타나신 공중으로 이미 들림 받았기 때문입니다. 들림 받지 못하고 남아 있는 그들에게는 철저한 진노의 재앙만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재앙을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결코 회개하지 않음으로써 자신들이 하나님을 싫어하고 증오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택한 사람인지 아닌지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는 가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지금은 이 마지막 재앙이 다가오기 전으로서 회개의 때요, 은혜 받을 만한 때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구주께서 언제 어떻게 오실 지 우리는 결코 그 날과 그 시를 알 수 없지만 깨어 회개하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함으로써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우리 자신의 소속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면 여러분의 소속이 이 땅이 아니라 하늘나라임을 분명히 하십시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거짓을 용납하는 분은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해야 합니다. 악을 미워하는 모습을 세상 사람들에게 분명히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선에 속한 자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의 정체를 분명히 하고 살아가는 것이 이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이 악을 미워하고 있는 모습을 제게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과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선에 속한 자라는 사실을 입증해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여러분이 하나님의 택한 자임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반드시 그리고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때는 은혜의 날입니다. 아직도 회개할 기회가 주어져 있습니다. 어쩌면 내일은 회개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지 모릅니다. 오늘이라 일컫는 날에 우리는 기회를 타서 어떻게 하든지 회개하고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그러나 무한정 기다리시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더 이상 회개하고 싶어도 안될 때가 오고야 말 것입니다. 그때는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인 줄 알면서도 하나님을 훼방하고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번 문이 닫힌 후에는 다시는 들어갈 기회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작은 재앙이 임할 때, 아직 무시무시한 재앙이 임하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께 경배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전 우주계뿐만 아니라 영적인 세계에까지 미칩니다. 10절에, “또 다섯째가 그 대접을 짐승의 보좌에 쏟으니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라고 했습니다. 출애굽한 백성들은 이 말씀의 의미를 잘 알 것입니다. 그들은 빛을 만드시고 빛과 어둠으로 구분하신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들을 빛과 어둠으로 구분하신 일을 경험했습니다. 이제 역사의 마지막 큰 날에 그 하나님께서 동일한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일곱째 나팔소리로 인하여 무저갱이 열려서 황충들의 등장으로 세상나라가 어두워졌던 것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경고의 나팔소리 때문에 세상나라가 어두워졌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께서는 진노의 대접을 짐승의 보좌에 쏟으십니다. 경고가 아니라 이제는 직격탄을 적의 심장에 날리십니다. 짐승은 세상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악의 실체입니다. 그런데 짐승의 보좌에 진노의 잔이 부어질 때 온 나라가 즉시 어두워집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보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악인을 심판하실 때 악인을 직접 심판하시기보다는 악인이 의지하고 있는 바를 깨뜨리십니다. 짐승의 보좌에 심판을 내리셨는데 그 온 나라가 어두워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고 신뢰하여 온 것이 하나님과 같이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며, 진실로 헛되고 헛된 것임을 그제서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심판을 내리시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회개의 때를 놓쳐버린 그들은 더 이상 회개할 수 없습니다. 이미 문은 닫혀졌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늘의 하나님을 훼방하고 저희 행위를 회개치 아니 하더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 영적인 심판으로서 여섯째 천사가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아 붓게 됩니다.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와 마찬가지로 배경은 큰 강 유브라데입니다. 바벨론이나 앗시리아나 헬라, 그리고 로마문명등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혀온 문명의 근원은 유브라데 강이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큰 강 유브라데라고 말한 것은 인류문명의 근원으로서, 특히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문명의 근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큰 강 유브라데’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큰 강 유브라데’에 내린 심판은 곧 인류의 문명 그 자체라기보다는 인류의 죄악 된 문명이 신뢰하고 의지하는 힘의 근원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어쩌면 현대문명이 의지하는 석유자원일지 모릅니다. 아니면 오늘날 정보화 사회가 의지하고 있는 것은 컴퓨터나 전기와 같은 것일 겁니다. 몇 년 전에 미국에서 ‘밀레니엄 버그’로 인하여 전 세계가 공포에 휩싸이는 내용의 드라마가 방영되어서 한참 시끄러웠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처럼 세상은 겉으로는 발전하는 것 같지만 내심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믿고 의지하는 것이 진정 영구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노를 내리시는 방식을 보십시오. 인류 자체를 심판하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물론 나중에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흰 보좌 앞에 서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것을 최후의 심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전에 하나님이 내리시는 재앙은 인류가 의지하는 바를 심판하십니다. 하나님 이외에 의지하는 것들에 재앙을 내리십니다. 그래서 인류가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 우상인지 깨닫게 하십니다. 세 번의 재앙 중에 첫째와 둘째는 회개를 촉구하는 재앙이며, 마지막 세 번째 재앙은 회개하기를 끝까지 거부하도록 만드는 재앙입니다. 출애굽기를 보십시오. 하나님은 재앙을 내리심으로써 바로의 마음을 더욱 강퍅케 하셨습니다(출10:1). 그것은 바로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고자 하심입니다. 먼 옛날 애굽 사람들이 의지하던 모든 것들에 하나님께서 친히 재앙을 내리심으로써 하나님 자신이 곧 사람들이 진정 의지해야 할 참 근원이심을 만 세상에 드러내신 것처럼 인류역사의 마지막 순간에 다시 한 번 하나님은 당신의 하나님 되심을 입증하실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던 것들의 진정한 실체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모든 우상들은 헛된 것임을 그제야 알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때는 늦을 것입니다. 회개하고 싶어도 더 이상 회개할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이미 문은 닫혀진 후입니다.
여섯째 천사가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붓게 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더라.”고 했습니다. 강물이 말랐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리고 그것 때문에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었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원래 유브라데 강은 바벨론 문명의 젖줄로서, 이스라엘과 바벨론 사이를 구분 짓는 경계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강을 넘어 동방의 왕들이 늘 서방을 침략할 틈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 당시 유브라데 강은 로마문명의 젖줄일 뿐만 아니라 동방의 세력으로부터 로마문명을 지켜주는 방어선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여섯 째 대접을 쏟게 되자 그 유브라데 강이 말랐다는 것은 첫째, 그것은 바벨론 문명의 몰락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면 유브라데 강은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한 문명의 젖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둘째, 그것은 더 이상 문명을 지켜주는 방어선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악된 문명을 지켜 줄만한 자연적인 보호막이 사라지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브라데강이 말라버린 결과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스라엘의 관점에서 볼 때 동방에서 오는 왕들은 항상 땅을 정복하고 멸망시키는 일을 했습니다. 로마시대 당시에도 동방에서 오는 적군들을 항상 두려워했습니다. ‘동방에서 오는 왕들’은 요한 당시 로마를 파괴할 적군의 세력이었습니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해석할 때 본문에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 되더라’는 말은 인류문명의 파괴가 이제는 카운트다운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동방으로부터 오는 왕들이 도대체 누구인가에 대해 시간을 끌면서 논쟁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근원이 말라지게 됨으로써 이제 몰락은 시간문제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죄인들이 믿고 기대었던 근원을 마르게 하심으로써 죄인들을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먼저 하나님은 죄인들이 회개하기를 오래 참고 기다리십니다.
그런데 요한은 또 환상을 보고 있습니다.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13,14절) 앞서 살펴본 대로,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에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된 네 천사가 풀려나서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게 되는데 2억의 마병대를 동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마병대의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써 사람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비슷하게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 곧 귀신의 영들이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옵니다. 여섯째 나팔의 경우, 마병대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죽이지만, 여섯째 대접의 경우는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는 더러운 귀신들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적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고 했습니다. 귀신들이 하는 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적하도록 하여 결국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심판의 날에 패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끝까지 부인하고 끝까지 대적하는 것은 다 귀신들로부터 미혹을 받아 결국 최후 심판의 날에 자신들이 패배할 수밖에 없는 인생으로 귀신들의 포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5절에,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깨어있지 않으면 귀신들의 포로가 되어 결국 하나님을 대적만 하다가 마지막 심판의 날에 영원한 패배의 수치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곧 오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주님이 도적같이 오신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는 영적으로 각성할 수 있습니다. 성도의 각성에 주님의 재림에 대한 소식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반대로 성도가 점점 무기력해지고 영적으로 깊은 잠에 빠져 들어가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빼앗겼거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진실로 믿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영광중에 오시는 그날을 진정 사모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영혼은 결코 잠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주님이 자신의 피로 만들어 입혀주신 의의 옷을 잘 지켜야 합니다. 다른 복음으로 물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갈1:8,9). ‘오직 믿음’으로 늘 깨끗하게 빨아서 희게 해야 합니다(계22:14;단12:12). 그렇지 않으면 범죄한 아담처럼 벌거벗고 다니게 될 것입니다(창3:10). ‘오직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자신의 부끄러움을 노출하게 됩니다. ‘오직 믿음’으로 살지 않고 물질의 풍요와 부유함으로 살려고 한다면 우리는 주님 앞에서 벌거벗은 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이것을 분명히 경고하셨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3:17)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은 모습에 대해 다시 한 번 경고하고 계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끝까지 하나님과 싸우고자 하는 어리석은 인생들의 전쟁에 참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전쟁은 제 3차 세계대전과 같은 물리적인 전쟁이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적 전쟁입니다. 이미 귀신들의 포로가 된 사람들은 이 말씀의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한 채 진노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원망하고 자신들의 행위를 결코 회개하지 않는 완악함과 강퍅함을 드러내기만 할 것입니다.
이제 유브라데 강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말라버렸기 때문에 하나님 아닌 것들을 의지하는 모든 인생들과 죄악으로 가득 찬 인류세계는 곧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재앙을 받기로 작정된 죄인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을 대적하려고 합니다. 그들의 완악함은 그들이 심판을 받기로 작정된 것임을 증명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16절) 아마겟돈은 구약성경에서 유명한 전투가 많이 벌어졌던 갈멜산 근처의 므깃도 평원을 가리킵니다. 이 땅은 샤론 평야와 이스라엘 계곡 사이의 통로로서 이스라엘 백성과 주변 국가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습니다. 애굽의 바로느고왕이 유다왕 요시아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왕하23:29,30) 유다왕 아하시야가 예후를 피해 도망가다가 죽은 곳입니다.(왕하 9:27) 아마겟돈이란 ‘므깃도의 산’이라는 뜻으로 생각됩니다. 구약성경의 역사를 잘 알고 있는 유대인들이라면 ‘아마겟돈’은 치열한 전쟁이 자주 일어난 전장을 의미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마겟돈으로 세 왕들이 귀신들의 미혹을 받아 모인다는 말씀은 요한 당시 초대교인들에게는 로마문명의 멸망이 코앞에 이르렀다는 뜻으로 이해되었을 것입니다. 이제 아마겟돈은 인류문명의 최후를 상징하는 고유명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인류가 최후를 맞이하는 것은 유성이 날아와서 파괴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인류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 아닌 것들로 자신들의 영원한 힘의 근원으로 삼았던 것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주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치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렘2:13) 인생이 의지하는 큰 강 유브라데는 반드시 말라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죄인들은 회개하지 않으려고 버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홍수의 심판을 내리셨음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은 각성하기는커녕 함께 모여서 바벨탑을 쌓음으로써 하나님을 대적하려고 했던 것처럼 역사의 마지막에도 그리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이 본문말씀은 세상나라가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최후에 망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교리는 단순한 것입니다. 귀신들에 사로잡힌 인생들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심판을 보면서도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믿고 신뢰하던 삶의 근거가 파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기를 거절합니다. 그리고 귀신들은 그들을 미혹하여 자꾸만 하나님을 대적하도록 부추기는데 결국 완전한 패배는 작정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죄인들의 완고함은 귀신들에게 미혹받아 포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바로가 모세가 행하는 기적을 보면서도 오히려 마음이 강퍅하여 모세와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훼방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곁에서 이적을 행하던 마법사들 때문이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인생이 바라는 물 근원이 말라버릴 때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회개하고 근원되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돌아올 것이지만 하나님께 멸망할 인생들은 끝까지 회개를 거부하고 저항할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본문은 귀신들이 인생들을 꼬드겨서 패배가 결정된 격전장으로 끌어 모으고 있다는 것입니다. 왕들은 자신들의 나라가 망하게 된 것을 알면서도 회개하기는커녕 최후의 일전을 위해 서로 협력하고자 합니다. 어찌되었든 간에 그들은 회개의 방법은 결코 취하지 않습니다. 회개는 죽어도 못합니다. 그들은 끝까지 하나님과 대적하는 일을 선택할 것입니다. 자기들의 멸망이 불을 보듯 뻔한 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결코 회개하려 들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저항하고 대적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입니다. 그들의 완고함은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받아 멸망하기로 작정된 것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깨어서 흰옷을 지켜나가지 않는다면 아마겟돈으로 달려가는 왕들과 같이 하나님을 대적만 하다가 결국 망하게 될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까지 귀신들의 밥이 되어서 살고만 있을 것입니까? 언제까지 귀신들의 꾀임에 속아 넘어가서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살 것입니까?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들이여! 부디 아마겟돈으로 끌려가지 말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합시다. 회개하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삽시다. 하나님을 자신의 근원으로 인식하면서 살아갑시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진정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제 마지막 일곱째 대접이 쏟아 부어집니다. “일곱째가 그 대접을 공기 가운데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가로되 되었다 하니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이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어찌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옴으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17, 18절) 하나님의 진노를 담은 대접을 공중에 쏟았다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본문에는 ‘공기’라고 되어 있지만 이곳은 어둠의 영들이 거하는 처소를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2: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6:12)고 가르쳤습니다. 따라서 대접을 ‘공기 가운데’ 쏟았다는 것은 사단의 처소에 대한 심판을 의미합니다. 이제 사단은 셋째 하늘에서 쫓겨나 둘째 하늘에 내려왔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바로 그곳에 직접 임하고 있습니다. 짐승의 보좌가 심판을 받고, 이제 공중에 권세 잡은 어둠의 영들에게 심판이 내려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이것으로 완성되었다는 뜻입니다. 공중에 권세 잡은 자에게 직접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것이 마지막 재앙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때까지 참고 인내하며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과 싸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최후에 공중에 권세 잡은 자들에게 하나님은 친히 심판을 가하실 것입니다. 그때는 인류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큰 ‘종말적인 현상’들이 발생할 것입니다.(18절) 그때에 전 인류는 역사상 일찍이 알지 못했던 초유의 공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 데 없더라. 또 중수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내리매 사람들이 그 박재로 인하여 하나님을 훼방하니 그 재앙이 심히 큼이러라.”(19-21절) 즉,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으로 인하여 세상나라가 멸망하게 됩니다. ‘세 영이 아마겟돈으로 왕들을 모으는 것’과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는 것’은 사실상 같은 의미입니다. 전자는 하나님의 심판의 과정으로서 파멸로 치닫는 줄 모르고 계속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을 강조한다면 후자는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로서 더 이상 파멸을 막아내기 힘든 상태로 무너지는 것을 말합니다. 성이 무너지는 것은 더 이상 방어할 수 없는 상태로, 즉, 완전 무기력한 상태로 전락된 것을 의미합니다. 세 영이 왕들을 모아 계속 하나님을 대적하지만 결국 그들의 성들은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말 것입니다. 왜 바벨론이 심판을 받아 망합니까? 요한 당시 바벨론은 로마를 암시했습니다. 로마는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고, 성도들의 피를 흘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그들이 그토록 믿고 의지했던 것뿐만 아니라 그들을 보호해주던 모든 장치들을 해체하심으로써 그들을 멸망시키십니다.
본문에서 특히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는 것을 보십시오. 일곱 천사가 대접에 진노를 담아 쏟았지 않습니까? 원래 그 대접은 성도들의 기도가 담겨져서 제단에 올려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대접에 제단으로부터 진노가 담겨져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기도를 항상 들으시는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기억하시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면 바벨론은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혀 왔고, 성도들의 피를 흘려왔기 때문입니다. 앞서 살펴본 대로 순교자들의 기도(계6:9-11)에 응답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것(계6:12-17)을 보았습니다. 또한 순교자들뿐만 아니라 고난 당하는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소리(계8:3,4)가 응답으로 돌아올 때는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계8:5). 천사는 누굽니까? 기도하는 성도들을 돕기 위해 존재하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성도들이 하늘로 들림 받아 그들이 이 땅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고난받고 핍박받기 때문에 사무친 원한과 아픔으로 더 이상 기도할 필요가 없어질 바로 그 날에, 천사들의 손에 들려진 대접에 담을 성도들의 기도소리가 더 이상 없을 때, 천사들의 손에 들려진 그 대접은 하나님의 진노로 가득 차서 부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환난 속에서 부르짖는 1세기 성도들의 기도를 듣고 계십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성도들을 슬프게 하고 괴롭게 하는 바벨론을 기억하고 계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환난 가운데 기도하는 성도들을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녀들을 괴롭히는 원수들을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친히 그들의 원수를 갚아주실 것입니다.
현재 하나님은 성도들을 괴롭히는 자들까지도 회개하기를 원하시며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한정 기다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하나님 아닌 것들로 자랑하며 살아가는 인생들과 전 인류에게 그들이 의지하는 것들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입증해 보이실 것입니다. 조만간 인생들과 인류가 의지하는 ‘큰 강 유브라데’는 반드시 말라버리고 말 것입니다. 인생은 반드시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역사는 반드시 종말을 맞이합니다. 그때 더 이상 회개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때에 하나님은 분연히 일어나셔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성도들을 훼방하고 대적한 모든 세력들에게 심판을 내리실 것입니다. 그들이 믿고 의지하고 자랑했던 모든 것들을 치실 것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운명이며,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히9:27). 역사도 마찬가지로 최후의 순간이 있으며 그 후에는 더 이상 회개할 수 없게 될 날이 있습니다. 오늘 21절을 보십시오.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을 보면서도 회개하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을 훼방하는 자들을 보십시오. 우리는 이러한 무리들 가운데 끼여 있지는 않은지 심히 두렵습니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지극히 정당한 심판 앞에 회개하기는커녕 이미 성령이 완전히 떠나셔서 심령이 완전히 마비되어 귀신들의 포로가 되어서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비방하고 대적하는 그런 인생으로 살다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할까 심히 두렵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간 원초적인 물음 앞에 진지하게 대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심판을 내리시는 하나님을 의롭다고 인정하며 찬양하며 경배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훼방하며 대적하며 계속 회개하기를 거부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고난당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짐승의 편에 설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 둘 사이에 결코 제 3 당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부인하지 않지만 무관심함으로써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무신론자라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아닙니다. 자신은 하나님을 믿노라고 하면서도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습니다. 공개적인 무신론자는 아닐지라도 하나님에 대해 무관심함으로써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우습게 봄으로써 하나님을 훼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간에 하나님은 지금 여러분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지금은 회개의 때요 주님을 만날 때입니다. 더 이상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때가 반드시 오고야 맙니다. 그 때는 각 사람에게 반드시 찾아올 것이며 인류 역사 속에 찾아올 것입니다. 전자는 죽음이고 후자는 재림입니다. 그 때 문이 닫혀질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성도들의 한 맺힌 기도를 들으시는 주께서 그들을 괴롭히는 원수들을 보고 계십니다. 반드시 그들을 보복하실 것입니다. 복수는 하나님의 것입니다(롬12:19). 이제 때는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어서 속히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주께로 나아오십시오. 그 못자국 난 발에 여러분의 입을 맞추십시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기회가 있습니다. 회개할 기회말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회개하면 천국은 우리의 것입니다. 회개하면 주님은 우리의 편이 되십니다.
주 예수의 강림이 가까우니 저 천국을 얻을 자 회개하라
주 성령도 너희를 부르시고 뭇 천사도 나와서 영접하네
주 예수님 너희를 찾으시니 왜 의혹을 하면서 오지 않나
온 세상죄 담당한 어린양은 죄 많은 자 불러서 구원하네
이 세상이 즐기는 재물로는 네 근심과 고초를 못 면하리
또 숨질 때 위로를 못 얻으며 저 천국에 갈 길도 못 찾으리
내 아버지 주시는 생명 양식 다 배불리 먹고서 영생하라
곧 의심을 버리고 주께 오면 그 한없는 자비를 힘입으리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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