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설교

요한계시록 강해(38)-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계15:1-8)

등불지기 2012. 3. 3. 18:58

구속의 역사를 한 눈에 보여주는 정말 멋진 본문입니다.

우리의 눈이 문제에만 골몰하거나 우리의 야망에만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은혜로 높이 떠서 멀리 바라보고, 높은 데서 내려다보는 그런 시야를 갖기를 소망합니다.

새들 중의 왕인 독수리처럼..

김광락 선교사 올림.

 

요한계시록 강해(38)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

 

본문: 계15:1-8

 

15:1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15:2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닷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15: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15:4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15:5 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

15:6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5:7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세세에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에게 주니

15:8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인하여 성전에 연기가 차게 되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오늘 읽은 본문은 요한계시록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우리가 본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먼저 일곱 교회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보좌에 있는 일곱 등불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일곱 인이 떼이는 것을 보았고, 일곱 나팔이 울려 퍼지는 소리를 들었고, 일곱 우레가 발했지만 생략되었고, 이제 우리는 일곱 대접이 쏟아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 가장 중요한 몸통은 바로 일곱 인과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입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가리키는 것으로 서로 다른 것들이 아닙니다. 인류를 죄악에서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악을 심판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대해 말하면서 사실 하나님의 쏟아 부어지는 심판에 대한 표현들이 많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일곱 인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계시되고, 일곱 나팔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경고되고 있으며, 마지막 일곱 대접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시행되고 있습니다. 모두 다 한 가지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을 다루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일곱째 인이 떼어질 때 일곱 천사가 일곱 나팔을 받지 않습니까? 그리고 일곱째 나팔이 울릴 때 일곱 천사가 일곱 대접을 받지 않습니까? 즉, 일곱 인이나 일곱 나팔이나 일곱 대접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사건의 연속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곱 대접은 사실 일곱 나팔에 포함되어 있고, 일곱 나팔은 일곱 인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일곱 인은 천상의 어린양께서 개봉하고 계십니다. 요한계시록의 이러한 구조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인간의 역사 가운데 어떻게 실행되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류역사 속에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실행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계시되고, 하나님의 심판이 경고되고, 하나님의 심판이 실행됨으로써 실행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이 삼중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일곱 째 인에 일곱 나팔이 포함되고, 일곱째 나팔에 일곱 대접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확실하며 또한 점진적으로 강력해질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특별히 하나님의 구원이 완성되기 위해서 인류가 경험하게 되는 재앙이 세 가지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인류에게 임하는 화는 다섯째 나팔, 여섯째 나팔, 그리고 일곱째 나팔입니다.(계8:13) 첫째는 영적 재앙으로서, 무저갱에서 올라온 귀신들의 횡포입니다. 둘째는 홀로코스트로서 인류는 대학살의 참사를 겪게 될 것입니다. 셋째는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부는 순간 쏟아 부어지게 될 일곱 대접의 재앙입니다. 일곱 대접의 재앙은 인류가 경험하게 되는 마지막 세 번째 화에 속합니다. 마지막 재앙으로서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끝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하게 해 두어야 할 것은 두 번째와 세 번째 사이에 하나님의 마지막 추수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인류는 세 번째 재앙으로서 일곱 대접이 자신들 머리 위로 쏟아 부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인데 그 전에 그리스도는 영광중에 오실 것이고 교회는 변화를 받아 공중으로 들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백성은 마지막 세 번째 재앙을 겪지 않을 것입니다. 굳이 시간적으로 따지자면 그리스도의 재림, 성도들의 부활, 그리고 교회가 들림 받는 사건과 거의 동시적으로 일곱 대접은 쏟아 부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부연 설명이 필요하므로 일곱째 나팔을 울려 분 11장 이후 일곱 대접 재앙이 본격적으로 부어지게 될 16장 사이에 12, 13, 14장은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 사이에 막간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특히 마지막 세 번째 재앙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상주시고,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는 것으로서(계11:18) 하늘에서 시작된 영적 전쟁이(12장) 지상에서 어떻게 확대되고 있으며(13장) 그 가운데서 구원받은 자들과 우상 앞에 엎드려 절한 자들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으며 결국 최후의 날에 그들을 어떻게 상과 벌을 주실 것인지(14장) 하나님이 행하실 큰 일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오늘 읽은 요한계시록 15장은 마지막 재앙의 서곡이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14장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께서 상과 벌을 주시는 장면을 보았는데 자연스럽게 우리는 15장에서 상을 받는 자들의 감격스러운 노래와 함께 하나님의 진노가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고 대적한 자들에게 임하기 위해 장엄하게 준비되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16장은 마지막 재앙의 집행, 그리고 17장은 마지막 재앙의 결과로서 바벨론의 멸망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8장은 마지막 재앙의 당위성과 세상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권면을 담고 있습니다. 그 이후의 흐름에 대해 다시 한번 언급할 기회가 있겠지만 요한계시록은 주된 교리적 요점을 반복하여 강조하면서 점차 절정으로 향하여 가는 히브리 문학의 전형적인 구조를 띄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서론 본론 결론 혹은 기승전결 식의 구성으로 보면 제대로 본문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14장에 구름을 타고서 영광스럽게 임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해 말한 다음, 19장에 이르러 흰말을 타고서 승리하면서 임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고 있는 본문에 이르러서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사건은 두 번 발생한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요한계시록의 구조를 잘 이해하지 못한데서 생기는 오해입니다. 나중에 살피겠지만 승리하는 그리스도에 대해 말한 다음 20장에 천년왕국에 대해 말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왕노릇 하심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현재적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즉, 백성이 떠들고 나라들이 모여서 진동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같이 왕노릇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결국 겉으로 볼 때는 패배하는 것 같고, 권세들에게 끌려가서 죽임 당하는 것 같고, 고난과 핍박이 많은 것 같지만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승리하는 자들로 살고 있다는 매우 감동적인 선언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자, 다시 오늘 읽은 본문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절은 앞으로 진행될 하나님의 대접 재앙에 대한 선언에 해당하며, 2절에서 4절까지는 구원받은 자들이 감격스러운 노래를 부르는 장면, 그리고 5절에서 8절까지는 하나님의 심판이 부어지기 위해 준비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전체적으로 한 가지 적용을 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찬양이 고난의 때에 더욱더 빛을 발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쭉 읽어 가다보면 의인들의 노랫소리를 자주 들어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의 노랫소리는 매우 절망적이고 부정적인 상황 속에서 들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밤이 가장 어두울수록 별은 더욱 빛나는 것처럼 1절에서 하나님의 마지막 재앙이 선포되는 순간에 모든 인생이 절망할 수밖에 없는 가운데 즐거이 노래부르는 일단의 무리들이 있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 무리들 가운데 우리 자신의 얼굴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 재앙이 선포된 시점에서 절망하기는커녕 노래를 부르는 무리들 가운데 우리가 함께 서 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이 요한계시록의 편지를 돌려가면서 읽었던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고난을 받고 있다면 본문에 기록된 노래가 진정한 감동으로, 아니 자신이 직접 부르는 것과 같은 감흥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상황이 나빠지고 어려울수록 하나님의 백성들은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즐겁게 노래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자신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미 이루신 하나님의 큰 일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감정과 상황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은 채 그들은 즐거운 찬양을 주님께 올려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찬양을 주께 드린 적이 있으십니까? 어려운 가운데 기쁜 찬양을 불러보신 적 있습니까? 힘들고 어려울 때에 여러분에게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신 구주를 찬양해보셨습니까? 그때 구주께서 여러분에게 어떠한 위로를 주시던가요? 우리가 진정 주님을 안다면 그분의 위로도 알 것입니다.

자,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마지막 재앙을 볼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어떻게 끝나게 될 것인지 볼 것입니다. 인류가 경험하게 될 세 번째 화가 어떤 것이며, 어떻게 임할 것인지 볼 것입니다. 이 광경을 보는 것은 대단히 경이롭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이처럼 무섭고 무자비한 심판을 일곱 대접에 담아 쏟아 부으실 수 있는가?’라고 의아해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쏟아 부어지게 되는 심판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몸서리칠 것입니다. 그때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고 절규했던 빌립보 간수장처럼 구원을 얻기 위해 무릎을 꿇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니 어떻게 하나님이 그럴 수가?’라고 하면서 의도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드러낼 것입니다. 혹시 어떤 사람들은 가혹한 심판을 내리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욕하며 항의하면서 스스로 무신론자임을 내세울 것입니다. 그들 편에서 보면 그렇게 반응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가혹한지는 앞서 14장 20절에서 잠시 언급이 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일 천 육 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이것은 다분히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그리스도께서 받으시고 흘리신 모든 피를 부정하게 여긴 자들이 그리스도와 같이 성밖으로 내쳐져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가운데 그들 스스로 피를 흘리게 되는 하나님의 진노의 깊이와 범위는 참으로 철저한 것입니다. 말굴레까지 닿았다는 말은 사람의 키 크기만큼 피의 강물이 이루었다는 말이며, 1,600 스다디온에 퍼졌다는 말은 320km까지 피의 강물이 흘러갔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깊고 광범위할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전 인생을 다 삼킬 규모이며, 전 세계를 다 포함할 규모인 것입니다. 이토록 철저하고 가혹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두 가지 반응으로 극명하게 갈라지게 됩니다. 2절부터 나오는 무리들처럼 감격과 환희로 찬양을 부르는 자들이 생기거나 혹은 16장 9절과 21절과 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는 자들 혹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14장 마지막 부분에서 간단하게 언급한 하나님의 심판이 16장에 들어가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시행되는 지 자세히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14장과 16장 사이에 있는 15장에서 우리는 저마다 테스트를 받게 될 것입니다. 즉, “이 최후의 재앙에 대해 우리는 찬양하는 자로 나타날 것인가, 아니면 훼방하는 자로 나타날 것인가?”입니다. 그것이 1절에서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이라고 말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행하신 오병이어의 이적을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그 이적을 보고 그를 자신들의 왕으로 삼으려 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피해 도망가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다녔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실망시키셨습니다. 대신 예수님은 바다 가운데 홀로 고난을 겪는 제자들에게 친히 찾아 가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을 통해 단지 떡만을 생각한 사람은 결국 예수님에 대해 실망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을 통해 영생의 말씀을 생각한 사람은 끝까지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의 진정한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 그 이적 때문에 오히려 예수님을 대적하게 될 수 있습니다. 말씀 없이 체험만을 추구하는 ‘표적주의 신앙’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마12:38-45) 이적은 있는데 말씀이 없는 집회를 조심하십시오. 체험은 있는데 말씀은 없는 자칭 ‘은사주의자들’을 조심하십시오. 말씀에 착념하지 않는 모든 ‘지도자’들을 조심하십시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지만 결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지는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늘에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진 장면을 ‘크고 이상한 이적’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 무시무시한 재앙선포가 우리가 하나님을 잘 알고 있는가 모르는가를 결정짓는 관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 최후의 재앙이 선언된 상황에서 감격으로 하나님을 의롭다고 찬양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구원받은 백성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만약 여러분이 이 선언을 듣고 하나님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거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이 심판이 어떻게 공의로운 일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거나 혹은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이렇게 무자비하게 심판을 내리실 수가 있단 말인가?’라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아직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 무시무시한 재앙을 내리실 때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롭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왜냐면 애굽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지은 죄악을 하나님께서 갚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하였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애굽이 그들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 재앙을 내리시는 것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구원이 점점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애굽인들은 하나님을 향해 원망했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1절 말씀은 시금석입니다. 영적으로 우리의 소속이 하늘나라인지 아니면 세상나라인지 우리의 근본을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한 절 말씀의 간결하지만 매우 강력한 선언에 대해 어떻게 반응을 보이는 가에 따라 내 안에 성령께서 거하시는 지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세상에서 구원받은 사람이 분명하다면 세상에 이토록 가혹하고 잔혹한 재앙을 내리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을 반드시 의롭다고 인정하고 또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이 내리시기로 작정한 그 무서운 심판을 보면서 즐거이 하나님을 의로우시다고 찬양합니다.

그러면, 이제 세상에 일곱 재앙을 내리시는 하나님을 의롭다고 찬양하는 무리들에 대해 자세히 살펴봅시다. 사도 요한은 일단의 무리들을 보고 있습니다. 2~4절을 읽어봅시다.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가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자, 이 무리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은 지금 하늘 보좌 앞에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대로 보좌 앞에 있는 이 무리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보좌 앞에 서서 노래하는 시점은 머나먼 미래의 시점도, 과거의 시점도 아니라 영원한 시간임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시간과 장소는 하나님 앞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영원한 실존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을 하나님께서 자신의 보좌 앞에 있는 자들로 간주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이와 같이 영원하고 견고하며 복된 위치에 있음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유리 바닷가에 서서 찬양하는 무리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대로 ‘불이 섞인 유리바다’는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거룩하심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거룩하신 성품에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란 유리바다를 통과해야만 하기 때문에 하나님 보좌 앞에 불붙는 유리바다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좌 앞에 서 있는 이 일단의 무리는 그러한 유리바다를 통과하였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통과했습니까? 그들은 ‘오직 믿음으로’ 이 유리바다를 통과했습니다. 그러면 그들의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믿음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개념적인 지식이 아니라 인격적인 지식입니다. 인격적인 지식은 삶 속에서 증명될 것입니다. 본문2절은 그 믿음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날 수 있었을까요? 그들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결코 우상 앞에 절하지 않는 삶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진실하다는 것을 증명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을 진실로 알고 있다면 넉넉하게 짐승과 그 우상과 그 이름의 수를 이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한다면 결코 우상과 그 이름의 수를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짐승에 대해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불붙는 유리바다를 벗어나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 앞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거문고’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감을 의미합니다. 노래를 부르는 자들은 영감을 아주 중시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멜로디와 화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노래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거문고를 가지고 있습니까? 혹시 거문고 위에 먼지가 뽀얗게 쌓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거문고 줄이 끊어져 나간지 오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떤 상황과 고난 속에서도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신령한 거문고’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어릴 때부터 배워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인들만이 하늘에서 내려준 ‘악기’로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이 악기는 기타나 피나오나 신디사이저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주시는 영감인 것입니다. 비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가진 노래의 가사를 흉내낼 수 있을지 몰라도 결코 그들이 가진 찬양의 영감을 흉내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계십니까?

그런데 그들이 부르는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는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모세의 손을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옛 이스라엘이 부른 노래와 같이 어린양의 희생을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새 이스라엘만이 부를 수 있는 찬양을 뜻합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우리는 옛 이스라엘이 홍해바다에서 어떻게 구원받았는지 그 광경을 그려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만화 영화인 [이집트왕자]에서 홍해바다가 갈라지는 장면이 제일 압권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이 그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보좌 앞에 선 것처럼 기쁨과 감격과 환희로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진노와 거룩이라는 불붙는 유리바다와 악한 세상 특히 짐승의 흉악한 이빨에서부터 구원받는 순간이야말로 압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받은 구원에 대해 생각할 때 이러한 압권에 대해 잘 압니다. 옛 이스라엘이 홍해바다를 벗어나 애굽 전차와 말들과 군인들의 시체가 둥둥 떠다니는 홍해바닷가에 섰을 때 그들이 가진 감격으로 소고를 치면서 찬양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과 동일한 감격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소고가 아닌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서 자신들을 세상에서부터 구원하여주신 하나님을 그렇게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찬양하게 될 날은 머나먼 미래의 어느 날이 결코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시간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은 그렇게 찬양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모세의 지도하에 구원을 경험한 구약의 이스라엘 공동체가 경험한 것과 어린양의 희생하에 구원을 경험한 새 이스라엘 공동체가 경험한 것이 서로 비교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불이 섞인 유리 바다와 파도로 일렁이는 홍해바다를 보십시오. 애굽의 전차부대를 삼켜버린 파도가 넘실대는 홍해바닷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소고를 치며 노래했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거문고를 가지고 노래합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바로와 그 전차들을 삼켜버린 홍해바다와 그리스도인들을 삼키려는 적그리스도와 거짓선지자들을 오히려 삼켜버린 하나님의 공의의 유리바다가 서로 비교되고 있습니다. 바다에 빠져버린 애굽의 멸망과 바다에 빠져버린 바벨론의 최후(계18:21)가 서로 비교됩니다. 하나님께서 고난 받는 이스라엘을 위해 모세를 보내셔서 구원을 이루게 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모세보다 더욱 탁월하신 어린양을 보내셔서 완전한 구원을 이루게 하신 일이 서로 비교되고 있습니다. 자신들을 삼키려는 바로의 칼에서 구원받은 것과 우리를 삼키려는 짐승의 입에서부터 영원히 받은 구원입니다. 지금의 비교는 단순한 비교가 아니라 보다 철저하고 보다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구원이 성취된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종으로서, 제2의 모세요, 인류의 죄를 담당하신 천상의 어린양이십니다. 그림자로서의 출애굽의 구원경험은 오늘날 세상에서 구원받은 자들의 중생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사건의 단순한 반복이 아닙니다. 하나는 그림자요, 하나는 실체인 것입니다. 구약은 그림자를 보았지만 지금 우리는 실체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출애굽은 신약의 새 출애굽이 되었습니다.

옛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구원하신 출애굽을 결코 잊지 못하고 회당에서 모일 때마다 바닷가에서 소고 치며 찬양했던 찬양을 계속 반복했듯이, 오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우리를 세상에서부터 구원하여주신 하나님의 큰 일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세와 같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우리들을 흉악한 짐승의 입에서와 세상에서 그리고 불붙는 유리바다에서 친히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우리가 어찌 그 크신 일들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의 이름으로 모일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거문고를 가지고 찬양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찬양의 제사는 성도들이 드려야 할 당연한 의무이자 특권인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그토록 중요한 시금석을 다시 언급해야 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토록 무섭게 심판을 행하실 수 있는가?’라고 질문하면서 스스로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나님에 대해서 자신이 무지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의 질문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불이 붙는 무시무시한 유리바닷가에서 그렇게 찬양 드릴 수가 있단 말인가?’라고 물을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쏟아 부어지는 재앙을 보고 어떻게 기쁨과 감격이 생길 수 있느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출14, 15장을 읽으면서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과 만나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이 그들에게 물어보십시오. “아니, 당신네들은 어떻게 시체가 둥둥 떠다니는 홍해바닷가에서 그렇게 소고 치며 즐거이 찬양할 수 있단 말이오? 저렇게 죽은 사람들이 가엽지도 않단 말이오? 저렇게 떠다니는 시신에 대해 일말의 동정도 느낄 수 없소?”

그렇게 질문한다면 여러분은 아마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러분을 형제가 아닌 이방인으로 여길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이 노래를 부르는 무리들 가운데 속하지 않은 것입니다. 왜죠? 바로와 그 군대들은 그들을 죽이려고 뒤쫓아 온 원수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뻐하며 노래 부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짐승과 거짓선지자들과 세상을 향하여 진노의 대접을 쏟아 붓고자 하시는 일이 그토록 의로우신 일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를 향하신 그분의 놀라운 사랑이 되는 이 역설은 그들이 우리를 삼키려고 한 원수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면 여러분의 원수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하나님을 단지 개념적으로만 알고 있고 인격적으로 알지 못한다면 여러분을 진정 죽이려고 하는 원수들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시편을 읽어보십시오. 시편 기자는 원수들을 향하여 심판을 내리실 것에 대해 노래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탄원시들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고 있는 자만이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구원을 받은 줄 아는 것은 자신을 삼키려고 한 짐승을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세상에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의롭다고, 그러한 심판이 자신들을 향한 무한한 사랑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 구원을 받은 자입니다. 세상에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자신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본문의 상황에서 도저히 하나님을 의롭다고 찬양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극렬하고 무자비한 심판 속에서 결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라고 찬양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오직 육신의 떡만을 위해 하나님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크고 놀라운 이적을 이해할만한 말씀도 명철도 없습니다. 그들은 오직 자신들의 요구에 따라 응답하시는 하나님만을 믿을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심판을 내리시는 이 이적을 보고 그들은 하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두려우신 하나님, 영화로우신 하나님, 그리고 오직 유일하게 거룩하신 하나님, 의로우신 하나님, 만국으로부터 마땅히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십니까? 여러분을 삼키려고 하는 악한 짐승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가혹하고 잔혹한 심판의 날에 즐거이 하나님을 의롭다고 찬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거문고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을 내리시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을 겁니다. 심판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큰 일이 우리를 사랑하는 큰 증거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들의 찬양이 끝난 후 사도는 “하늘에 증거장막의 성전”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모세는 출애굽 이후 시내산에서 성막도를 받게 되었습니다. 모세의 출애굽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모형이듯이, 모세의 성막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모형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가 들린 후에 하늘에 증거장막의 성전이 열린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옛 성막에도 증거판을 보관하고 있었듯이, 하늘의 성막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진노의 대접이 기울어지기 전에 하늘의 성막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영광스러운 광경입니다. 원래 구약에서 성막은 두꺼운 가죽으로 네 겹씩 덮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늘의 장막이 공개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영광중에 오시는 그날에 하나님께서 그 종 선지자들과 사도들로 말미암아 하신 약속은 성취될 것이고, 하나님의 모든 비밀이 환히 밝혀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증거장막의 성전이 열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마지막 재앙이 쏟아 부어질 것을 의미합니다.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이 땅에 부을 천사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제사장들입니다. 빛난 세마포와 가슴에 금띠를 착용하는 것은 제사장들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진노를 담당하는 천사들이 지극히 거룩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하나님의 거룩에서 비롯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불의와 거짓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보십시오.“네 생물 중에 하나가 세세에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에게 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성전은 영광의 임재로 가득 차게 됩니다. 구약에서 출애굽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경험한 후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성막도를 받습니다. 출애굽기 40장을 보면, 하나님의 명령대로 모세가 성막을 다 만들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 앞으로 발행하였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발행하지 아니하였으며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서 친히 보았더라.”(출40:34-38) 그런데, 본문에서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인하여 성전에 연기가 차게 되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고 했습니다. 구약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성막을 다 만들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 가득 찬 것은 성막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임재의 처소로 인(印)치셨다는 뜻입니다. 이제 그 성막에서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해내신 하나님께서 매일 만나주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언제나 성막에 임재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멀리서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완전한 구원입니다. 애굽에서 성공적으로 탈출한 것이 구원의 전부가 아닙니다. 홍해바다에서 죽지 않고 무사히 빠져 나온 것이 구원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구원의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구원의 목적은 하나님의 충만한 영광에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과 날마다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영원히 즐거워하는 이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바닷가에 서서 기뻐하는 구원의 확신에 머물러 있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성막으로 나아가서 그분과 교제하며 그분의 영광을 즐거워하는 구원의 목적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제 본문 마지막 절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이제 드디어 하나님께서 고난받는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 편에서 싸우시기 위해 임하시는 것입니다. 모세의 성막에 충만한 영광으로 임하신 하나님은 하늘의 보좌 앞에 모인 백성들 가운데 다시 한 번 충만한 영광으로 임하셔서 그들과 영원히 함께 하실 것이고 그들을 위해 이제 싸우실 것입니다. 그들을 괴롭게 하고 그들을 핍박하고 그들을 삼키려고 했던 모든 원수들과 친히 싸우실 것입니다. 그들을 죽이려고 한 짐승들과 거짓 선지자들과 그들을 괴롭게 한 모든 세상에 대해 당신의 거룩하심을 쏟아 부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충만히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것은 짐승의 수를 이기고 유리바닷가를 벗어난 자들에게는 한없는 사랑과 축복으로 나타날 것이고, 짐승과 짐승에게 엎드려 절한 자들에게는 참으로 무시무시한 공의의 징표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말씀은 출애굽기의 완벽한 성취입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어떤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까? 그분은 과거 무서운 파도가 넘실거리는 홍해바다에서 당신의 거룩과 영광을 입증하신 분께서 다시 한 번 불붙는 유리바다에서 당신의 영광과 거룩을 드러내실 하나님이십니다. 과거 이스라엘을 죽이려고 뒤쫓아오던 바로와 그 군대들을 홍해바다에 깊이 빠뜨리셨듯이 다시 한 번 역사의 마지막에서 짐승과 거짓선지자들과 그들을 추종하던 모든 인생들을 유리바다에 깊이 빠뜨리실 분이십니다. 과거 그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을 직접 보고서 감격하면서 소고를 치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바닷가에서 춤을 추면서 영광을 받으셨던 것과 같이 다시 한 번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 세상에서부터 구원받은 자들에게 당신의 크신 능력을 체험하게 하실 것이고 그래서 감격스러워하며 하나님이 주신 거문고를 가지고서 유리바닷가에서 뛰놀며 올려드릴 영광의 찬미를 받으실 분이십니다. 그것은 결코 머나먼 미래의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일어나는 일입니다. 지금도 그 영광의 찬미소리는 계속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또한 과거 구원하신 그들과 함께 거하시고 그들과 교제하시고 그들을 인도하시고 그들을 위해 싸우시려고 충만한 영광의 구름으로 임하신 주께서 다시 한 번 역사의 마지막에 그렇게 임하실 것입니다. 공의로우시며 지극히 거룩하신 주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그분이 행하셨고, 지금도 행하고 계시며, 앞으로도 행하실 그분의 엄정하고 엄위로우신 심판을 찬양합시다. 그분이 하시는 모든 일이 크고 기이하며 행하시는 모든 방식이 의롭고 신실하며 거룩하십니다. 그분은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자, 이제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그분을 진정 알고 계십니까? 과거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이 지금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까? 과거 애굽의 군대들을 홍해에 쳐 넣으신 그 능력의 하나님이 지금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까? 여러분은 그 능력을 진정 알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