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강해(40)
큰 음녀의 받을 심판
본문: 계17:1~18
17:1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17:2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17:3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17:4 그 여자는 자주빛과 붉은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17:5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17:6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내가 그 여자를 보고 기이히 여기고 크게 기이히 여기니
17:7 천사가 가로되 왜 기이히 여기느냐 내가 여자와 그의 탄 바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을 네게 이르리라
17:8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기이히 여기리라
17:9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17:10 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이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간 동안 계속하리라
17:11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저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
17:12 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다만 짐승으로 더불어 임금처럼 권세를 일시 동안 받으리라
17:13 저희가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더라
17:14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17:15 또 천사가 내게 말하되 네가 본 바 음녀의 앉은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
17:16 네가 본 바 이 열 뿔과 짐승이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17:17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니라
17:18 또 내가 본 바 여자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하더라
지난 시간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큰 재앙을 보면서도 끝까지 고집을 부리면서 회개하기를 거부하며 하나님과 싸우려하는 인생들의 어리석은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진노의 손에 빠져 들어가면서도 전혀 신경쓸 것이 없으니 제발 내버려두라고 고함치고 있습니다. 회개하는 것을 죽는 것보다 더 싫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완고함은 이미 그들 자신이 버림받기로 작정된 자들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계속 고집을 부리는 것은 이미 심판을 받기로 작정되었다는 뜻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고, 거만은 넘어짐의 앞잡이며, 고집불통은 징계의 신호입니다. 주님의 진노의 막대기는 완고한 자의 등을 위해 예비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모든 교만한 죄인들은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비하신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몇 단계에 걸쳐서 작은 재앙을 내리십니다. 한 번에 안 되면 또 내리십니다. 계속 반복되는 재앙에는 분명한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러한 재앙을 경험하면서 인생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첫째는 자기들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회개하고 생수의 근원 되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회개함으로써 자신들이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알면서도 계속 고집을 부리고 회개하기를 거부하며 미적거리다가 결국 최후까지 하나님을 대적만 하다가 멸망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결코 회개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계속 고집을 피움으로써 결국 화를 자초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영원한 형벌에 처해졌을 때 결코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못할 것입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을 미워하고 싫어하고 대적했다는 것을 그들 양심이 증인이 될테니까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언제나 점검해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 삶 속에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우상들이 있는지 늘 살펴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것들을 보십시오. 우리가 자랑하는 것들을 보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인지 아니면 우상인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데 때로는 미련하여 잘 구분하지 못한 채 살아가기도 합니다. 때로는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을 섬긴다는 명분으로 사실은 우상을 숭배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우상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거부하시거나 제거하신다고 가정해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주를 위해 세운 계획이 어쩌면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우상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만일 주께서 그것을 실패하게 하신다면 이라고 가정해보십시오. 그리고 그것이 주를 위한 좋은 계획이며, 주께서 주신 약속이라 가정해보십시오. 마치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자녀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던 것처럼 주께서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가정해보십시오. 그럴 때에도 욥처럼 주님께 찬양을 올려드릴 수 있습니까? 아니면 욥의 아내처럼 하나님을 욕하고 죽고자 할 것입니까? 내가 믿었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고, 내가 믿었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고, 내가 주님을 위해 행하는 모든 일들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나를 좌절시키실 때에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 생각해보십시오. 모든 종류의 고통이나 시련은 나로 하여금 참 하나님이 누구며, 헛된 우상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주는 하나님의 도구인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이런 부분까지 생각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미련하게 태어나서 미련한 채로 자라나서 주께서 계시하여 주지 않으시면 도무지 깨닫지 못할 정도로 어둡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것이 우리가 의지할만한 참 반석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해 우리가 믿고 의지하고 붙드는 바로 그것에 재앙을 내리십니다. 인생들이 하나님 아닌 것들로 즐거워하는 바로 그 우상들에게 직접 직격탄을 내리십니다. 바로 그때 여러분은 두 가지 반응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는 즉각적으로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거나,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알면서도 오히려 불평하고 원망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계속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내 방식대로 살테니까 제발 날 좀 내버려 두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의 경고에도 계속 고집을 부리던 사람들은 이제 세 번째는 더 이상 회개할 기회가 박탈된 채 그냥 원망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회개하도록 재앙을 내리시기도 하지만 어느 선을 넘어가게 되면 그들이 확실히 지옥의 자녀임을 증명하기 위해 재앙을 내리시기도 하십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상황이 어떠하든지 간에 정말 중요한 것은 그것에 우리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이실 것입니까? 나를 힘들게 하는 여러 가지 것들을 만날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 자신의 행동을 주목해보십시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제의 실마리가 바로 내 안에 있다는 원리를 붙잡으십시오.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나의 밖에 있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찾아보시면 바로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하는 자리까지 나아가신다면 당신은 모든 문제를 풀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회개하기를 죽어도 싫어합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결국 망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세상’의 실체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나라 족속 방언을 음행의 포도주로 취하게 해서 결국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시게 만들었던 큰 음녀의 최후를 볼 것입니다. 14장에서 시작된 음녀의 심판은 19장까지 계속됩니다. 그리고 19장 중반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승리에 대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원수들이 차례로 멸망해 가는 과정을 묘사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승리가 어떠한 것인지 강조하는 것입니다. 15, 16장은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의 최후를, 그리고 17, 18장은 음녀 바벨론, 두 짐승의 최후를, 그리고 20장은 용의 최후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할 대상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대상이 보다 근원적인 대상으로 옮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싫어하고 짐승을 따르는 사람들이 먼저, 그 다음이 세상, 그리고 마지막에 전 세계를 지배하던 어둠의 제왕인 사단이 멸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다 심화되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심판을 보십시오. 자연계에서 영적인 세계로 심판이 진행되는 것을 보십시오. 또 사람에서, 세상으로, 세상에서 붉은 용으로 옮겨가는 하나님의 심판을 보십시오. 이러한 광경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구조와 흐름을 알면 계시록의 메시지는 의외로 이해하기 쉽고 단순 명료하며 깊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계속 반복되는 것을 주의 깊게 관찰해보시면 본문이 진정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인 17장은 세상의 진상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붉은 짐승을 탄 음녀(창녀)라는 것입니다. 16장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바벨론이 무너지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이제 17장에 들어와서 그 바벨론의 정체에 대해서,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통해 무너지게 되는 지 좀 더 설명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요점을 말한 다음 확대하여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전체적으로 말해주고 하는 것은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이는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5-17) 여러분,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한 것은 세상에서 살지 말고 세상을 등지고 기도원에나 들어가서 살라는 이야기일까요? 가정을 등지고 가족을 버리고 살라는 이야기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은 믿음을 저버리는 행위인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세상을 등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세상에 동화되라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세상을 변화시키라고 도전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세상 사람이 자기들과 똑같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살며, 우리는 자기들 편이라고 생각하며, 자기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산다면 세상에 동화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은 세상적인 가치관을 거부하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에 궁극적인 소망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영원한 집을 지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소속감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이 영원히 있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오직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을 살아갈 때 세상이 어떤 곳인지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우리에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우리가 개혁해야 할 세상, 우리가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세상, 그래서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마치 광야와도 같은 세상이 어떤 곳인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세상은 어떤 곳입니까? 자,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에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1절)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대행할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요한에게 보여주고자 합니다. “많은 물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에 대해 말해주고자 합니다. 여기서 ‘큰 음녀’는 5절에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이며, 18절에,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인 것입니다. 이 음녀의 정체는 바로 세상나라인 것입니다. 세상 나라는 하나님 나라를 대적합니다. 세상 나라는 하나님을 아는 것을 싫어합니다. 세상 나라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세상 나라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훼방합니다. 세상 나라는 하나님을 아는 즐거움 대신에 세상 풍속이라는 모조품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제공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에 세상 풍속을 좇아 살았던 자들입니다. 우리를 미혹하여 하나님으로 즐거워하지 못하도록 적극 가로막는 세력이 있습니다. 지금도 세상나라는 세상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실체를 모른다면 세상을 살면서 왜 힘든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이 세상나라의 정확한 실체를 알아야만 하겠습니다.
먼저, 세상나라의 위치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세상 나라가 있는 곳은 ‘많은 물위’입니다. “많은 물위에 앉았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몇몇 세대주의적 해석자들처럼 ‘큰 강 유브라데강’을 단지 문자적으로 취급한다면 ‘물위에 앉았다’는 말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해석의 원칙은 일관성입니다. 어느 부분은 문자적으로, 어느 부분은 비유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지 일관성을 지켜야 합니다. 분명, ‘많은 물위에 앉았다’는 말은 비유적입니다. 그것은 세 가지 정도로 해석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는 생수의 근원 되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세상문명의 특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고대 바벨론은 유브라데 강에 건설된 나라였습니다. 유브라데 강은 그 성안에서 성밖에도 흘러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바벨론은 당시 세계 최고의 관개 시설과 기술을 자랑했다고 합니다. 바벨론은 이 관개시설을 만들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70년 동안 노예로 부려먹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물위에 앉았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 아닌 것으로 자신들의 근원을 삼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많은 물위에 앉았다는 말은 그들의 삶의 근거가 참으로 불안정한 토대라는 것입니다. 땅과 달리 물은 자주 파도가 칩니다. 물은 자주 모양이 변합니다. 바벨론도 그랬고, 로마제국도 그러했습니다. 그들의 권력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유브라데강을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유브라데 강을 자신의 생수의 근원으로 의지합니다. 영원토록 자신들을 먹여주고 보호해줄 근원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착각 속에서 살아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아닌 것들로 힘의 원천으로 삼는 이들은 언젠가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닌 것들은 모두 다 의지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세 번째는 구약 성경에서 ‘많은 물’이라고 할 때 그것은 ‘많은 권능’ ‘넓은 영향력’등을 가리킵니다. 음녀는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본문은 세상이 어디에 있는지 다른 각도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요한에게 그리스도인들이 고난당하는 삶의 주소인 세상이 어떤 곳인지 보여주시고자 하십니다. 그곳은 광야입니다.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3절)고 했습니다. 한때 구원받은 이스라엘이 애굽을 탈출하여 이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으로 전진했습니다. 이 광야는 시험을 받는 곳이며 내가 과연 주님을 사랑하는지 아니면 내 안에 또 다른 우상이 존재하지 않는지 점검하기 위하여 마련된 곳입니다. 우리는 광야에서 비로소 내 안에 있는 죄성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즉시 데려가신 이유는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늘 유혹 받고 넘어지는 인생들을 대표하여 시험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광야에서 예수님이 승리하심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자들이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본문 14절 말씀은 그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어린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양은 만주의 주시오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그리스도인의 승리에 대해서는 20장에서 자세히 살펴볼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광야란 삶의 자리입니다. 이 광야는 세상을 의미하며, 그리스도인들은 순례자들로서 이 광야를 통과하여 하늘나라로 전진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성령은 인생들이 넘어지고 실족하는 광야의 상황을 보여주기 원하십니다. 우리는 이 광야를 똑바로 응시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세상의 실체와 유혹을 받아 음녀와 연락을 즐기고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여 있는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똑바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과 다른 족속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영원한 집을 지으려고 하거나 그들과 같은 부류임을 열심히 증명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자, 세상은 이러한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제 음녀로 비유되고 있는 세상의 정체를 좀더 살펴봅시다. 음녀가 누굽니까? 성경에서 창녀는 우상숭배자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 아닌 것들로 즐거워하는 자들입니다. 본문은 세상을 창녀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창녀들의 어미라고 했습니다(5절) 이 음녀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그리고 음녀가 하는 일들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을 제대로 알기 위해 우리는 17, 18장에 묘사되고 있는 바벨론 즉, 세상 나라의 모습과 19, 21장에 묘사되고 있는 새 예루살렘, 즉 하나님 나라의 모습과 서로 비교하면서 읽어보아야 합니다. 참된 의미는 다른 것과 서로 비교보지 않으면 잘 알 수가 없는 법입니다. 여러분, 계시록 후반부를 자세히 보십시오. 음녀의 모습과 악한 일들이 먼저 드러난 다음에 나중에 동일한 천사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신부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계시록 후반부에서 의도하고 있는 것은 창녀의 모습과 그리스도의 신부의 모습을 서로 비교하여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정체와 신분을 분명히 할 수 있도록 본문은 격려하고 있습니다. 창녀와 신부를 보십시오. 바벨론과 새예루살렘을 보십시오. 세상나라와 하나님나라의 백성을 보십시오. 그들은 입는 옷부터 다릅니다. 창녀는 붉은 옷을, 어린양의 신부는 흰옷을 입고 있습니다. 참고로 로마사람들은 붉은 색 옷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자주색 물감으로 천을 물들게 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비용이 들었기 때문에 붉은 색 옷은 아무나 입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루디아는 자주장사로서 그녀가 팔던 자주물감은 굉장히 비싼 고가품이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음녀가 입은 곳과 치장한 것을 보십시오. 즉, 부자들만이 입을 수 있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화려함과 사치는 세상나라의 트레이드마크입니다.
반면 어린양의 신부가 입는 옷은 깨끗한 흰옷입니다. 영적으로는 그리스도의 피에 씻어서 희게 된 옷인데 또한 사회적으로 그들의 신분이 넉넉하지 못한 자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입니다(마5:3). 그들은 “세상의 미련한 자”들이며 “세상의 약한 자들”이며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고전1:27,28)입니다. 음녀의 차림새는 화려하고 사치스럽습니다. 그러나 어린양의 신부는 매우 수수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입는 옷까지도 세상과 달라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딤전2:9,10)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으로 자신을 아름답게 단장하고 치장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벧전3:3-5) 무엇이 정말 아름다운 모습인지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미인이요 미남인지 알아야 합니다.
정말 아름다운 것은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에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지혜의 왕 솔로몬이 시골뜨기 처녀 술람미를 사랑했고, 바로 이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렇게 자신을 단장하는 법을 모릅니다. 그런 것은 없다고 외칩니다. 그리고 외모로만 판단합니다. 세상은 외모를 단장하는 일에 얼마나 바쁜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속사람을 단장하는 일에 바빠야 하는 줄 믿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추구하는 스타일을 따라가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미지를 추구하는 세상, 늘 새로운 패션을 강조하는 세상과는 무엇인가 달라야 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참으로 슬픈 비극 중에 비극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세상과 경쟁하여 이김으로 무엇인가 보여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결코 경쟁하여 이기는 수준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믿는 자들은 세상과 다르게 삶으로서 탁월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참 경쟁력입니다. 세상은 겉모양으로 승부하려고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은 본질로 승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볼 것인가 보다는 주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보실 것인가 늘 고민해야 합니다.
그런데 음녀의 모습과 성도의 모습을 비교해보시면 겉모양만 다른 것이 아니라 그 하는 일에 있어서도 다릅니다. 음녀의 일과 어린양의 신부가 하는 일을 보십시오.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 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여기서 땅의 임금들이나 땅에 거하는 자들은 땅에 소망을 두고 통치하고 살아가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땅에 소망을 두면서 살아갑니다. 그들은 땅을 자신의 근본으로 여기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한 분만으로 즐거워하는 성도의 삶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제 제 아내가 저를 시험하는 질문을 하나 던졌습니다. “여보, 우리에게 1억이 갑자기 생긴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그때 제가 교회를 개척하는 일에 전부 투자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곰곰히 생각한 다음 몇 억을 가지더라도 정말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는 세우지 못할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제가 혹시 집을 사고 싶다거나 차를 사고 싶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지 시험하려고 했다는 겁니다. 어쨌든 간에 우리는 이러한 질문들로 늘 우리 자신을 시험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러저러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과는 분명 달라야 합니다. 다른 방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못하고 억지로라도 그렇게 살려고 몸부림칠 필요가 있습니다. 다르게 사는 것이 힘든 것이 아니고 자랑스러운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회사든 식당이든 간에 요즘은 크고 많은 것을 자랑하지 않고 다르게 하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듯이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다를 때 자신이 천국시민권자라는 사실에 더욱 자부심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라면 세상과 다를 때 그것은 곧 불행과 동일한 것처럼 여깁니다. 왜냐면 하늘나라에 대한 소속감이 없기 때문이지요.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큰 세력에 대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네가 본 바 여자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고 했습니다.(18절) 세상 사람들이 땅에 소망을 두면서 살아가는 것은 다분히 이 음녀의 유혹에 넘어갔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음녀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음녀로부터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음녀에게 자기 영혼을 팔며, 음녀는 그들에게 삶의 만족과 기쁨을 제공해줍니다. 그들은 음녀로 더불어 쾌락을 즐기며, 음녀로 더불어 우상을 섬깁니다. 그 결과 그들은 모두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는 일에 도취되고 말았습니다.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 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2절) 겉으로는 으리으리하고 화려하고 번드레하지만 그 하는 일들은 참으로 징그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화려한 외모에 감추어진 행동을 보면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여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과 교회의 차이점입니다. 음녀가 하는 일은 자기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함께 망하자는 것입니다. 함께 쾌락을 즐기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의 손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음행의 포도주’는 어떤 것입니까? 우상숭배의 쾌락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으로 즐거워하지 않고 세상에서 썩어질 것으로 즐거워하는 쾌락에 세상은 모든 크고 작은 자들을 초대하고 있는 모습을 보십시오.
앞으로 계시록은 큰 음녀 바벨론과 어린양의 성을 서로 비교하여 보여줄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과 바벨론 성이 어떻게 비교되고 있는지 보십시오. 바벨론을 가리켜서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고 했는데, 새예루살렘 안에서는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 생명나무가 열매를 맺고 있으며, 그 잎사귀는 열국을 회복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세상은 쾌락의 술을 마시게 하고 하나님을 떠나 음란에 빠지게 하는 반면, 교회는 생명수를 사람들에게 제공하고 만국을 소생케 하기 위해 그 생명나무 잎사귀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요점은 이것입니다: 성도는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기 욕망을 채우는 일에 급급하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즐기는 일에 바쁘지만 성도는 세상을 살리고, 자기 자신이 아니라 이웃을 기쁘게 하는 일에 바쁜 사람들입니다.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만 살아간다면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간다면 세상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지금 내가 누구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점검해보십시오. 내 삶의 방향이 어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누구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살아갑니까? 자기 자신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입니까? 과연 내 삶 속에 방향성이 있습니까? 이제 막 거듭난 사람이 자신을 거듭나게 하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을 이해하지 못하고서 계속 자신만을 기쁘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헤어 나오지 못하는 고통과 시련의 늪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본받아서 자신을 기쁘게 하려고 살아가는 한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치유책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의지하여 남을 섬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남을 섬기는 자리로 자신을 던지십시오. 단 그 대가로 자신이 기뻐하는, 자신을 기쁘게 하는 무엇인가를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기대감을 가지고 남을 섬긴다면, 남을 섬긴 다음에 그런 기대감을 갖는다면 또 다시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그냥 남을 사랑하고 섬기는 데서 기쁨을 찾도록 하십시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힘들어하고 실패하고 넘어지는 이유는 구원의 목적을 망각하고 상실한 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어두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소망을 알만큼 지혜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순례자의 신분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순례자의 영성을 상실하면 광야 같은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한없이 외로울 것이며,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이곳은 우리가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야 할 광야인 것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그런데 여러분, 광야에 무엇이 있습니까?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3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여자는 세상 나라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붉은 빛 짐승은 사치와 호화스러움으로 치장한 적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적그리스도를 알아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적 그리스도는 화려함으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그 화려함에 세상 사람들은 홀딱 반하게 될 정도입니다. 그런데 음녀가 붉은 빛 짐승을 탔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세상 나라와 적그리스도는 이처럼 서로 결탁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세상나라는 적그리스도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서로 공생관계에 있다는 것을 주목해보십시오. 적그리스도의 권력과 카리스마는 세상나라와 깊이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언제나 절대 권력은 절대부패를 의미했습니다. 절대 권력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호화사치와 타락과 부패가 만연했던 것을 기억해보십시오. 자신을 신격화하는 절대 권력에 의지하여 음녀는 사람들을 계속 타락시키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본문이 보여주는 음녀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3절)라고 했습니다. 적그리스도의 특징으로서, 신성모독의 발언을 서슴지 않는 것과, 스스로를 신격화하는 모습, 그리고 절대 권력을 추구하는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적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음녀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4절)라고 했습니다. 세상 나라는 겉모양만 볼 때 매우 사치스럽고 호화스러움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세상나라는 외모를 중시하며, 외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경향이 지배적입니다. 외형주의와 물량주의는 세상나라의 특징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외모를 숭배하고, 외모를 중시하고, 외모를 따라 모든 것을 판단하는 세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면의 아름다움은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하든지 잘 보이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열심을 냅니다. 학벌과 경력으로 어떻게 하면 이력서를 잘 꾸밀까 고민하며, 최첨단 패션은 어떤 것인지 늘 고민합니다. 그러한 것을 추구하면서 점점 속사람은 공허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 음녀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4절)라고 했습니다. 금잔을 가졌다는 말은 주술사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인데, 세상나라는 이처럼 온갖 더러운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신비한 방법으로 돈을 벌어들이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자기만이 가지고 있는 신비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현혹합니다. 그들이 돈을 벌고, 사람의 인기를 모으는 것은 가히 주술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황금만능주의를 온 세상 사람들에게 퍼뜨립니다. 그들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홀딱 반하여 그 앞에 엎드려서 자기도 그렇게 해달라고 사정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음녀의 손에 들려 있는 금잔을 숭배합니다. 서점을 가보면 가장 많이 팔리는 것이 적은 돈을 가지고 떼 부자가 되는 비결을 담은 책입니다. 그리고 주식투자의 요령을 담은 책입니다. 그렇게 부자 되고, 그렇게 출세하고, 그렇게 성공한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십시오. 그들의 내면을 보십시오. 그런데 사실 그 안에는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 차 있습니다. 세상나라의 겉모양과 달리 그 속을 들여다보면 참으로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대중스타의 내면에는 온갖 음란과 마약과 중독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십시오. 여러분, 우리는 사람이나 세상을 외모로만 판단하면 안 됩니다. 첫인상이나 풍기는 분위기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그 속을 들여다볼 줄 아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겉으로는 화려하여도 그 안에는 참으로 더러운 것이 가득 차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세히 보십시오. 주님의 눈으로 보십시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황금을 추구하고 성공 번영을 추구하는 세상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가진 그 신비한 능력, 마술사적인 방법으로 떼돈을 벌어들이는 방법을 알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못하게 하며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그 안에 정말 더러운 것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음녀의 이름을 보십시오.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5절)고 했습니다. 로마시대의 창녀들은 이마에 띠를 두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거기에 주인의 이름들을 기록해두었다고 합니다. 음녀의 이름이 비밀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음녀의 정체가 숨겨져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이 음녀의 정체를 잘 알아볼 수 없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이라 할지라도 음녀의 정체를 쉽게 알아보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비밀이라고 한 것은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하나도 없는 모습으로 오셨지만 사실 믿음의 눈으로 볼 때 하나님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비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정체 역시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비밀입니다. 또한, ‘큰 바벨론’이라고 하는 것은 바벨론 제국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을 힘들게 하는 세상나라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감히 대적하는 큰 세력이기 때문에 ‘큰 바벨론’이라고 했습니다. 세상나라는 그리스도인들을 싫어하고 핍박합니다. 그래서 한번 시험해보십시오. 직장 생활하면서 보다 경건하게 살고자 작정하고 몸부림쳐보십시오. 경건하게 사는 것, 즉 하나님으로 만족하며 살려고 해보십시오. 그러면 금방 음녀의 정체가 드러날 것입니다. 음녀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핍박할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말한 대로 누구든지 경건하게 살고자하는 자는 핍박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란 말은 모든 창녀들과 더럽고 가증한 것들을 배출하는 정신사상을 의미합니다. 자기 몸을 팔아 돈을 버는 창녀들을 보십시오. 쾌락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수입을 챙기는 불륜사업을 보십시오. 그들의 사상은 이 음녀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음녀는 그들을 지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쾌락을 추구하는 모든 음란한 문화를 정당화시켜주고, 또한 확산시켜주는 어떤 세력입니다. 모든 섹스산업, 스포츠산업, 스크린산업, 퇴폐문화산업 등은 음녀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영화나 연예계와 같은 분야에 조금만 몸을 담아 일해보신다면 이러한 유혹에서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음녀는 교회의 핍박과 순교자들의 배출에 크게 기여합니다.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6절)고 했습니다. 세상나라는 쾌락을 위하여 하나님을 등진 곳이기 때문에 하나님만을 즐거워하고 하나님만을 섬기는 자들을 보면 견딜 수 없어합니다. 하나님으로 즐거워하는 성도들이 핍박을 당하고 순교를 당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고소해하며 즐거워합니다. 그래서 세상나라는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예수의 증인들을 잡아 죽이는 일을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것입니다. ‘취한지라’는 말은 자신들이 왜 그렇게 하는지 모른 채 몰두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음녀를 보고 사도 요한이 이상하게 여깁니다. “내가 그 여자를 보고 기이히 여기고 크게 기이히 여기니”(6절) 사도 요한이 왜 음녀를 보고 이상히 여겼을까요? 자기도 모르고 성도들을 핍박하는 음녀의 정체는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 세력에 의해 수없이 순교의 피를 흘렸건만 교회는 이 세력의 정체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오늘도 교회 안에서도 논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도대체 세상이란 어떤 곳인가에 대해서 교회 안에서조차 제대로 인식이 정립되지 못했습니다. 음녀는 너무나 교묘하게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활동하기 때문에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조차 참으로 명확하게 그 세력의 실체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너무 쉽게 음녀에 대해 단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잘못 하면 반문화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기 쉽습니다. 혹은 세상과 전혀 구분이 안가는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기 쉽습니다. 계2장의 두아디라 교회는 후자의 경우였습니다. 세상을 구원한다는 명분으로 세상의 방탕한 풍속과 타협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본문은 이 음녀의 실체를 제대로 보여주려고 합니다. “천사가 가로되 왜 기이히 여기느냐? 내가 여자와 그의 탄 바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을 네게 이르리라”(7절) 천사는 세상나라의 비밀에 대해 명확히 가르쳐주겠다고 말합니다.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기이히 여기리라”(8절) 천사가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한 것은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 짐승을 보고 기이히 여기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의 특성은 세상의 정체에 대해서 모른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택함 받은 자들은 세상나라와 적그리스도를 보고서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면 살아 계신 하나님,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을 알고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즐거워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한 분 하나님, 참으로 영화로우신 하나님을 섬기고 계십니까? 그분의 영화로운 나라와 권세를 알고 계십니까? 주 예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세상 나라의 화려함과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고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적그리스도가 아무리 극적으로 등장하여도 마음을 뺏기지 않을 것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9절)라고 했습니다. 조금이라도 지혜가 있다면 세상나라(음녀)가 적그리스도의 통치권(일곱 머리)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만일 적그리스도의 권력과 통치가 없다면 세상나라는 흔들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지혜가 있는 사람은 세상의 권력이 비호하지 않으면 음란 퇴폐 문화 사업이 성장하지 못할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세상나라의 의존성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것을 알면 세상에 의존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헛되며 위험한 것인가를 알 것입니다.
“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이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간 동안 계속하리라”(10절)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해석하기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어쩌면 1세기 초대교회는 이 의미를 우리보다 더 잘 알았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일곱 왕이 누군지 망한 다섯이 누군지, 그리고 아직 이르지 아니한 다른 이가 누군 지에 대해서 알려고 하면 정말 이해하기 힘든 미궁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왜냐면 본문은 누가 망한 왕들이며, 누가 지금 있으며, 누가 이를 것인지 언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문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부분을 억지로 상상하거나 추측하는 것은 본문을 억지로 푸는 것입니다. 본문이 그와 같이 기록된 방식을 통해서 우리는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찾아야 하며, 또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계시록에서 사용된 숫자는 단지 문자적인 의미로 기록된 적이 거의 없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일곱 왕’은 스스로를 신격화시켰던 모든 적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이 편지를 받았던 1세기 초대교회의 입장에서 보십시오. 스스로를 신격화했던 적그리스도의 숫자를 헤아리라고 한다면 그들은 다섯 명이 아니라 아마도 수십 명을 더 나열하였을 것입니다. 반드시 문자적인 의미에서 7명이 아닌 것입니다. 또, “하나는 있고”라는 말은 지금도 자신을 신격화시키는 적그리스도는 존재한다는 말이며, “다른 이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는 말은 앞으로도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의 세력은 결코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겁니다. “이르면 반드시 잠간 동안 계속 하리라” 그들은 스스로를 신격화하겠지만 매우 한시적이고 유한하며 또한 일시적인 존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유한한 존재이며, 그들은 심판을 면할 수 없는 존재임을 기억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저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11절) 앞서 8절에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라고 했는데, 사도 요한이 본 짐승의 실체는 역사 가운데 활동했던 적그리스도로서 앞으로 다시 한 번 더 역사의 무대에 나타나서 이전에 활동했던 적그리스도와 동일한 능력과 카리스마로 자신을 신격화할 것이라는 얘깁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는 언제나 자신을 메시아로, 하나님으로 착각하는 독재자는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지고 있는 권세 역시 유한한 것입니다. “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나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다만 짐승으로 더불어 임금처럼 권세를 일시동안 받으리라”(12절) 일곱 머리는 일곱 왕으로서 스스로를 신격화하는 적그리스도를 의미하며, 열 뿔은 열 왕으로서 적그리스도처럼 자신을 신격화하지는 않을지라도 적그리스도와 협력하고 동역함으로써 임금처럼 권세를 잠간 동안 얻게 될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서로 한 통속입니다. 한 목적을 가지고 서로 협력하는 자들입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10명의 왕들이 아니라 적그리스도와 협력하는 모든 왕들을 가리키는 자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유럽연합국이다 아니라 라는 토론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합시다. 그들이 누구이든 간에 그들의 목적에 우리가 미혹 당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그럼 그들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저희가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더라.”(13절) 세상 모든 왕들은 공통적으로 적그리스도를 옹호하고 지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희가 어린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양은 만주의 주시오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14절) 세상 모든 통치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주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는 성도들을 절대로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리스도의 왕되심(kingship)이 입증될 것입니다. 그리고 택함 받은 자들,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자들, 부르심을 받은 자들, 세상에서부터 빼내심을 입은 자들, 말씀에 대해 진실한 자들은 세상 군주들의 요구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믿게 될 것입니다. 믿음으로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승리에 대해서는 나중에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단지 음녀가 어디에 있고, 어떻게 있는지, 어떤 목적으로 있는지, 어떤 활동을 하는지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 천사가 내게 말하되 네가 본 바 음녀의 앉은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15절) 음녀가 의지하고 있는 것은 세상 권력자들만이 아닙니다. 세상권력자들의 비호를 받고 있지만 또한 백성과 방언과 열국과 방언들을 의존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음녀가 망하는 광경을 한번 보십시오. “네가 본 바 이 열 뿔과 짐승이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16절) 세상이 망하는 과정은 참으로 신기합니다. 보십시오. 세상은 서로 다투고 싸우다가 망하는 것입니다.(마12:25,26) 이것이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방식입니다. 세상의 권력자들과 군주들과 자칭 메시아로 주장하는 왕들이 세상을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욕망과 탐욕과 미움과 분노가 세상을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음녀는 열 뿔과 짐승에 의존하고 있지만 사실 음녀는 열 뿔과 짐승에 의해서 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망하는 원리입니다. 세상은 서로 다투고 분열하다가 망할 것입니다.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다가 결국 공멸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모습을 주목해야 합니다. 오늘날 자본주의와 음란 퇴폐사업, 그리고 세상 권력자들을 서로 공생관계를 잘 유지하고 있습니다. 권력과 탐욕은 언제나 짝이었고 동지였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경쟁하는 것 때문에 망할 것입니다. 서로 1등이 되려고 하기 때문에 반드시 나중에는 공생하면서 잘 지내오던 상대방을 떼려 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1인자만 남는 세상, 바로 그것이 심판을 받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니라”(17절) 그들이 품는 마음도 사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들이 서로 경쟁하고 서로 이겨서 생존하려고 때로는 공생하고 때로는 삼켜버리고 때로는 상대방을 불태워 없애버리고자 하는 마음은 그들을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비전이 아닌 야망을 위해, 권력을 향해, 1인자를 향해 몸을 던지도록 하신 것은 그들을 심판하시기 위함입니다. 그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시는 것, 그래서 결국 짐승에 의해 먹혀버리고 결국 뼈도 추리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방식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어떤 곳입니까? 세상의 정체를 파악하셨습니까? 이 세상이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또 네가 본 바 여자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하더라”(18절) 음녀는 또한 땅에 소망을 두고 통치하는 모든 권력자들을 비호하고 두둔하며 옹호하고 있습니다.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스포츠와 퇴폐문화산업과 같은 것들을 장려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세상 권력자들과 세상의 우상숭배 문화와의 깊이 결속되고 결탁된 실체를 제대로 볼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음란한 세상 속에서 살 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고민합시다. 여러분의 삶의 목표와 목적을 분명히 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분명히 하십시오. 목표를 상실하고 목적을 잊어버린 삶이야말로 가장 비참한 삶인 것입니다. 부디 주께서 우리의 어두운 마음눈을 밝혀주셔서 그분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기쁘게 하지 말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과 이웃을 기쁘게 하는 삶 속에서 참된 행복을 맛보면서 그날이 오기까지 순례의 길 멈추지 않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 세상 지나가고 저 천국 가까워 나 오래 기다리던 그 영광 보인다
이 어둔 밤이 가고 새날이 밝으니 저 하늘나라 영광 참 밝게 빛난다
사랑의 구주 예수 단 샘물 내시니 목마른 나의 영이 이 샘물 마신다
이 세상 사는 동안 내 생수 되시고 그 나라 이르러서 내 기쁨 되신다
내 주의 크신 은혜 그 깊은 사랑이 내 평생 사는 동안 늘 차고 넘친다
저 천국 이르러서 그 은혜 고마워 주 보좌 앞에 나가 늘 찬송하리라
날 위해 고생하신 주 얼굴 뵈려고 내 갈길 험악하나 쉬쟎고 나간다
주 예수 신랑처럼 날 기다리시니 큰 영광중에 나가 주 얼굴 뵈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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