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를, 왕노릇하는 일을 물질적인 차원에서 이해하는 분들을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거스틴으로부터 종교개혁자들에 이르기까지 하나님 나라, 천년왕국, 성도의 왕노릇 등을 물질적인 차원에서 이해하는 모든 시도들이 이단으로 규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 안에서 여전히 그렇게 이해하고 있는 목회자들과 교인들이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성도의 왕노릇 역시 먹고 마시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본문을 문자적으로, 물리적인 차원으로 이해한다면 결코 하나님의 말씀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요한계시록 강해(46)
천 년 동안 왕노릇 하는 성도들
본문: 계20:4-6
20: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20: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우리는 지난 시간에 결박당한 용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용이 천 년 동안 무저갱에 감금되어 있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일들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셨을 때 어떤 일들을 행하셨습니까? 인생들을 정죄하고 하나님께 끊임없이 참소하는 사단을 결박하시고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을 고치시며 죄를 사하시며 십자가로 사망의 권세를 묶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일들 때문에 사단은 더 이상 성도들을 참소하거나 사망의 권세 안에 가두어놓을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영원한 사망의 울타리 안에 가두어 놓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 세계 만국에 생명의 복음이 전파되는 길이 활짝 열리기 되었습니다. 이것은 정말 엄청난 대사건입니다. 구주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인류 역사 상 가장 획기적인 일이 발생했던 것입니다. 구주께서 행하신 일들로 말미암아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정죄의 시대가 이미 지나가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이것을 묵시라는 장치를 통해 말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그림을 통해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계시록은 그것을 용이 무저갱에 결박된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그림을 통해 위대한 복음의 핵심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그림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고난 속에 있는 교회를 위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모든 인생들을 사망의 권세 아래 가두어 놓고 통치하던 용이 결박되었다는 사실은 환난과 핍박 속에 있었던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두 가지 의미를 주었을 것입니다. 첫째는 환난과 핍박과 같은 시련을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를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용이 결박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성도들은 풍랑 속에서도 고요히 잠을 주무실 수 있었던 예수님처럼 시련의 바람 속에서도 유유자적하게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원수들은 겁만 줄 뿐이지 실제로는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박되었다는 말이 주는 위로인 것입니다. 두 번째는 천하만국에 이 생명의 복음이 전파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위로와 격려를 받게 되었을 것입니다. 용은 무저갱에 결박되었기 때문에 만국을 미혹할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구원의 복음이 전 세계에 전파되고 있습니다. 시련 속에 있던 교회는 복음이 전 세계에 전파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힘을 얻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고 하신 말씀처럼 겉모양은 시련을 당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 전진하고 있으며, 속사람은 그분의 말씀으로 날마다 새로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이제 가로막을 수 있는 세력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고난 속에 있던 교회는 한없는 위로와 소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시련을 당할지라도 복음은 결코 시련을 당하는 법이 없습니다. 이제 구주의 복음은 전 세계에 전파되어 사단에게 속아 종노릇 하는 인생들을 해방시키고 있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새 생명을 얻게 되는 놀라운 축복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모든 인생들을 정죄에 빠뜨리던 용이 결박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교회를 향하여 천하에 다니면서 두루 복음을 전하라고 분부하셨던 것입니다. 미시적인 관점에서는 실패하고 넘어지는 것 같지만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교회는 영광스러운 승리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요한계시록은 시련 속에 있는 성도들에게 역사 전체를 바라보는 눈을 제공해줍니다. 승리하는 삶의 비결은 관점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관점이 바뀌면 삶이 달라집니다. 우리나라에서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학생이 열등감에 시달리다가도 중국이나 미국과 같은 넓은 나라를 여행하고 오면 별것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영적인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물 안 시각’을 가지고서는 결코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거시적인 안목은 모든 시련 속에서 충분히 인내하며 견딜힘을 제공해줄 뿐만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 힘을 갖게 해줍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주님이 의도하시는 것입니다. 분명 부분적으로 볼 때, 용이 시퍼런 눈과 무시무시한 힘으로 교회를 누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용은 이미 쇠사슬에 결박된 채로 무저갱에 던져져 결코 제대로 힘을 쓸 수 없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될 때 우리는 늘 넘어지고 실패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시각을 가지게 될 때 우리는 참으로 담대하고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고난과 핍박이라는 현실만을 보지 마십시오. 우리를 힘들게 하는 문제들만을 보지 않도록 하십시오. 사소한 문제들에 온통 우리 마음과 시선에 뺏기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대국에 몰입하면 수가 보이지 않지만 떨어져서 전체를 보기 시작할 때 비로소 수가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소규모 국지전에 실수하고 패배할지라도 괘념하지 마십시오. 전투에 지더라고 전쟁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보다 큰 규모의 전쟁이 어떤 양상으로 흘러가는 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눈을 들어 요한계시록이 보여주는 거대한 구원 역사의 흐름을 주목해보십시오. 우리 구주의 오심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이 모든 인류의 철천지 원수인 용의 운명을 어떻게 바꿔 놓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이 고난 속에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우리 주님의 위로입니다. 그것이 환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하며 소망을 붙잡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제 요한계시록 본문은 용의 결박과 함께 성도들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용이 결박된 기간 동안 하늘의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 하고 있다는 매우 영광스러운 광경입니다. 4절 말씀을 보십시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노릇 하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이 바라본 것은 ‘보좌들’이었습니다. 보좌란 임금이 앉는 자리입니다. 여기서 보좌는 매우 존귀하고 위엄이 있으며 결코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을 보여줍니다. 사도 요한은 ‘거기 앉은 자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매우 당당하며 위엄차 보입니다. 그들은 매우 존귀하며 기품이 있어 보입니다. 그들이 누굽니가? 보좌에 앉은 자들이란 누구를 가리킬까요? 이들은 다름 아니라 구주를 믿는 모든 성도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중생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에 대해 이미 잘 말씀하였습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2:4-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3:1-3)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하여 약속하시기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계3:21)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늘보좌에 앉은 자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승리한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세상을 심판하는 권세는 세상을 정죄하는 권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미움을 받는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세상을 정죄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세상을 정죄하는 행동입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오직 믿음으로 살았을 때 그의 삶이 세상을 심판하였습니다.(히11:7) 성도들이 세상을 심판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삶이 지극히 훌륭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속했고,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살아가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을 정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여러분이 세상을 심판하는 권세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보고서 세상은 정죄 받는 느낌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주님을 부르며 의지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서 세상 사람들은 스스로 정죄 아래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음을 알고 계십니까? 그러므로 세상에서 미움을 받고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결코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변명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세상 사람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고 입증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단지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하는 자로서 당당하게 살면 됩니다.
또 사도 요한은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노릇”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보좌에 앉은 자들과 그들이 권세를 가졌음”에 대해서 부연 설명하는 것입니다. 보좌에 앉은 자들이 누군가? 이에 대해서 “그들은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한 자들”이라고 본문은 스스로 대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간단히 말해서 순교자들과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죽임을 당한 자들을 보십시오. 순교자들의 삶을 한번 보십시오. 그들은 세상적으로 보면 가장 비참한 인생들입니다. 세상에서 그들을 존경하거나 알아주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들은 보좌에 앉아 심판하는 권세를 가졌습니다. 그들의 삶과 죽음은 세상을 정죄하고 있고, 세상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순교자는 아니지만 언제든지 순교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기 때문에 결코 자칭 메시아의 권위를 주장하는 자들에게 무릎 꿇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우상숭배는 가장 혐오스러운 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에서 승리하는 자들이 누굽니까? 주님의 말씀 때문에 죽임 당한 자와 그것 때문에 죽임 당하는 것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유일하심을 알기 때문에 우상에게 절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때문에 결코 적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담대함이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참된 지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고 있다면,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다면 그분의 말씀 때문에 죽임 당하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상 앞에 절하는 것을 가장 치욕스럽고 죽는 것보다 더 무서운 죄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우상숭배를 거절하는 것이 스스로 함정을 파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스스로 왕따 당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굉장히 독단적이고 잘난 채 하는 모습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계시고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섬긴다는 자부심으로 전혀 개의치 않는 자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승리하는 자들, 보좌에 앉은 자들의 참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습니까? 참으로 하나님을 알고 있다면 여러분은 기꺼이 그분을 위해, 그분 때문에 죽임을 당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며, 우상 앞에 절하는 것을 진정 가장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인가 아닌가 묻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는 참 지식이 있는가 없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을 섬기는 자부심이 있는가 없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우상을 혐오하는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당대의 군주 앞에서도 당당하게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라고 말했던 것과 말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이 당당함과 담대함은 우리가 살아계시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자부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 아니할지라도’ 결코 우상에게 절하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안에 이러한 자부심이 있는지요? 우리는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고 있으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섬기고 있다는 이러한 자부심이 있는지요?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 죽임 당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일임을 알고 계시는지요?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심과 영화로우심과 참되심을 안다면 순교자가 되는 것보다 더 큰 영광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이러한 당당함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먼저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실로 얼마나 엄청난 특권인지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얼마나 우리를 당당하게 해주는 것인지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상 앞에 결코 절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순교자가 되든가 아니면 언제든지 순교자가 될 준비를 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들이 바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그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노릇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수를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처럼 치열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말씀은 또 없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 그리스도의 복음이 역사 가운데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왜 그리스도 복음의 진수가 될까요? 구주의 복음은 곧 생명의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살았다’는 이 표현에 대해 논란이 많은 이유는 예수님께서 이 표현을 어떤 의미로 사용하셨는지를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언제든지 예수님의 말씀이 해석의 바른 기준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어떻게 이 단어를 사용하셨습니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여기서 ‘산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육체의 부활이요, 또 다른 하나는 영생으로서의 부활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후에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요5:2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5:24,25)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살아난다’는 말씀이 오늘 계시록의 본문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에 가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6:44) 그리고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요6:57)고 하셨습니다.
분명 예수님은 부활의 의미를 두 가지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영혼이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는 의미로 사용하시기도 하고, 또 육체의 부활을 뜻하기도 하셨습니다. 이렇게 요한복음에서 죽음과 사망, 그리고 부활의 의미가 어떻게 선포되고 있는지를 안다면 오늘 동일한 저자의 손에 의해 기록된 요한계시록 20장에서 기록된 ‘살아서 천 년 동안 왕노릇’하는 것에 대해서 이해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어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요한복음에서 사용된 어휘 역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는데 먹는 날에 죽었습니까? 육신은 죽지 않았지만 그 영혼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6:63)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2:1)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셨고”(엡2:5)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골2:13)“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골3:1)이라고 선포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에 기록된 “살아난다”는 이 단어는 육체가 살아나는 미래의 부활이 아니라 영생을 얻는 현재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듣고 그 심령이 살아나는 사건을 의미합니다. 이제 더 중요한 문제는 적용입니다. 이 단어를 통해 우리는 진지하게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살아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와 허물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이 지금 하나님 앞에 살아 있습니까? 육신이 아니라 여러분의 영이 살아있습니까? 하나님과 사귀는 관계입니까? 그러면 어떻게 다시 살아납니까? 죽은 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이 들려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삽니다. 듣는 자가 살아나는 때는 바로 이 때입니다. 바로 지금이 주 예수의 복음을 들어야 할 때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노릇”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기서 ‘천 년’이란 기간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계시록의 말씀을 처음부터 보아왔지만 계시록에 기록된 여러 가지의 숫자들은 모두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묵시의 형식을 통해 영원한 복음의 메시지가 선포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묵시의 형식이 어떤 것인지를 안다면 문자적인 의미에서 천 년은 아니라는 것도 알 것입니다. 1,000의 숫자는 통치의 숫자입니다. 견고함을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천 년 동안 왕노릇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초림에서부터 재림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새로운 생명, 영원한 생명 안에서 통치하며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말하는 왕노릇을 세상적인 의미에서 실제적인 왕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왕이 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왕과 같은 행세를 한다는 것입니다. 저 같으면 주님이 재림하신 다음에야 비로소 ‘왕노릇’이나 하는 것을 거절하겠습니다. 영광의 주님이 재림하신 다음에 왕이 되는 것도 아니라 겨우 ‘왕노릇’나 하는 삶이 왜 필요합니까? 겨우 행세나 하는 것은 재림 이후에는 의미가 없습니다. 왕노릇이 의미가 있는 것은 주님이 영광스럽게 오시기 이전이라야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부디 이 말씀을 세속적 의미에서 왕이 되는 것이라고 이해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유대인들이 그렸던 그러한 왕노릇이 결코 아닙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십시오. 계시록 1:6에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 역시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하심이라”(벧전2:9)고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재림 이후에야 왕같은 제사장이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일서 2:13에도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실제로 원수 마귀를 이겼으니까 생활 속에서 왕노릇하라는 말씀입니다. 승리하는 성도의 모습은 바로 그것입니다. 이겼다는 사실을 알고 왕노릇하는 자들입니다. 죄와 사망과 사단의 권세를 조롱하고 비웃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미 ‘악한 마귀’를 이겼다는 사실을 모르고 왕의 행세를 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노릇’하는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로 말미암아 용이 결박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결코 우리의 선행이나 도덕적으로 훌륭한 삶이 ‘노릇’하게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왕노릇 하는 삶은 어떤 모습입니까? 여러분, 보십시오. 사망의 권세를 마음껏 조롱하는 사도 바울의 고백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의 외침입니다. 왕노릇 하는 성도들의 멋들어진 함성입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15:55-57) 로마 감옥에 있을 때에도 오히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고, 또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2,13)고 외칠 수 있는 모습을 보십시오. 어떤 상황과 문제에도 위축되기는커녕 하나님의 사랑에서 결코 끊을 수 없다고 외칠 수 있는 모습을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성도들의 왕노릇 하는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겉모습은 영락없이 초라하고 보잘 것 없으며 만물의 찌끼처럼 비웃음 당하고 버림 받은 자처럼 살지만 그러나 실제 삶은 왕의 행세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에 대해 왕은커녕 아무것도 알아주지 않지만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그렇게 행세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의 권세를 한껏 비웃고 조롱하는 모습이야 말로 참으로 거듭난 자들의 왕노릇 하는 참 모습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입니까?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약동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을 향해 조소할 수 있습니까?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초연해질 수 있습니까? 저는 교구를 섬기면서 여러 번 장례를 치러보았습니다. 그때마다 제 마음속에 분명한 확신으로 남는 것은 이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만이 죽음 앞에서 당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체념하면서 받아들이는 그런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영광스럽게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단지 죽음 앞에 초연해지는 모습을 보이는 자들을 수도사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환영하고 사도 바울처럼 차라리 몸을 떠나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 더 좋다고 고백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만이 고백할 수 있는 바입니다. 세상은 그것을 허세라고 비웃겠지만 성경은 그것을 왕노릇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죽음을 비웃을 수 있습니까? “사망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조소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왕노릇은 이와 같이 사망의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누리며 새 생명 가운데서 활동하는 것입니다. 왕노릇 하는 자들은 다음과 같은 찬송을 부르면서 온갖 시련과 환난 속에서도 즐거워합니다.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옛 것은 지나고 새 사람이로다
그 생명 내 맘에 강 같이 흐르고 그 사랑 내게서 해 같이 빛난다.
주 안에 감추인 새 생명 얻으니 이전에 좋던 것 이제는 값없다.
하늘의 은혜와 평화를 맛보니 찬송과 기도로 주 함께 살리라
산천도 초목도 새것이 되었고 죄인도 원수도 친구로 변한다.
새 생명 얻은 자 영생을 맛보니 주님을 모신 맘 새하늘이로다
주 따라 사는 길 험하고 멀어도 찬송을 부르며 뒤따라가리라
나 주를 모시고 영원히 살리라 날마다 섬기며 주 함께 살리라
영생을 맛보며 주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 함께 살리라.
여러분, 주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그 영이 죽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천 년이 살기까지 살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듣고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한 모든 심령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입니다. 육으로 죽은 것은 하나님 앞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직 그 영이 사느냐 죽느냐가 관건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지 않는 자들은 이미 죽은 자들입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만의 독특한 표현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나타나는 분명한 진리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이것을 분명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첫째 부활이 무엇입니까?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영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새 생명이 그 심령에 흘러들어오는 중생의 사건입니다. 이것이 첫째 부활입니다. 이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요11:25) 이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입게 되는 영화로운 두 번째 부활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둘째 사망을 겪지 않게 됩니다. 여기서 둘째 사망은 우리의 영혼이 영원한 지옥 형벌에 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첫째 사망은 육신의 죽음을 의미하고, 둘째 사망은 영원히 하나님과 분리되는 영원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성경에서 가장 놀라운 소식을 보았습니다.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노릇하는 것은 복음의 핵심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신 다음에야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른다는 말과 거의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 다음에는 겨우 ‘왕노릇’이나 하면서 살 필요가 없게 될 것입니다. 왕이신 주 예수님을 친히 뵈옵는 그날에는 더 이상 왕노릇이나 하면서 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왕노릇 하는 것은 바로 현재여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왕은 아니지만 왕의 행세를 하는 것은 바로 오늘이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시기 이전이어야 말이 됩니다. 주님이 오시기 이전에 우리가 이렇게 왕노릇 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비록 지금은 우리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육신의 눈으로 뵙지 못하고 있지만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세상에서 위풍당당하게 사망의 권세를 조롱하고 새 생명을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죽음의 권세를 한껏 조롱하면서 으스대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비록 국지전에서는 패하고 산다고 풀이 죽거나 낙심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성령이 내주하시며 영원한 생명이 그 안에 거하고 있습니다. 이미 영생은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다시 영원한 죽음을 맛보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투에서 이기고 전쟁에서도 이기면 더 좋겠지만 전투에서 지더라도 전쟁에서 이기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실패는 할지언정 결단코 패배는 없다고 여기면서 사십시오. 남들이 보면 웃기는 모양이지만 왕노릇하는 것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마라톤선수는 100m 달리기에서 꼴찌를 했다고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인생은 마라톤과 같습니다. 이제 100m 단거리를 달려왔을 뿐입니다. 앞으로 남은 길이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최종 운명은 영화(glorification)입니다. 너무나 확실한 최후 승리를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어떤 상황 속에서도 위풍당당해질 수 있습니다. 실패와 좌절 속에서도 웃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부디 소규모 국지전에 얽매이지 마시고 보다 큰 규모의 거대한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보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은 이미 승리한 자들입니다. 믿는 여러분은 이미 세상을 이겼고 원수 마귀를 이겼습니다. 더 이상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시오. 여러분은 머나먼 미래가 아닌 바로 현재 그리스도와 함께 영생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 임하여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마음껏 원수들을 비웃으십시오. 조롱하십시오. 코웃음을 날리십시오. 이렇게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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