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강해(48)
천 년 후에 일어날 일들(2)-최후의 심판
본문: 계20:11-15
20:11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20: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지난 시간에 우리는 역사의 마지막에 있을 놀라운 이벤트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지금 구세주의 복음은 전 세계로 전파되면서 택하신 자들을 불러 모아 거대한 집을 짓고 있습니다. 마침내 구주께서 영원히 거하실 집이 완공될 때 하나님께서는 친히 복음의 원수들을 불러 모아 그들로 하여금 축포를 터뜨릴 것입니다. 그러나 승리의 폭죽이 터지기 직전에 주님의 교회는 역사상 가장 절망적인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교회는 잠시 원수들에게 포위되고 고립될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큰 영광을 목격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교회는 잠시 세상에서 절망감을 맛볼 것이지만 그러나 곧 그것은 환희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절망감의 깊이만큼 기쁨이 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준비하시는 이 준공식의 전말에 대해 보여주는 이유는 오늘 우리가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결코 낙심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함입니다. 오히려 교회의 시련은 기회가 됩니다. 보십시오. 모든 땅의 백성들을 모아서 일심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게 만든 이가 우리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제 아무리 사납게 날뛰는 용이라도 하나님의 손에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를 잠시 대적한 원수들의 최후는 또한 어떠합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향해 일심으로 전쟁을 벌이려고 시도하지만 사실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못한 채 영원한 멸망의 불 속으로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교회를 향하여 잠시 으르렁거리지만 그러나 그들은 즉시 불못으로 집어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한계시록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을 보게 됩니다. 역사상 가장 극적인 드라마를 연출하시는 하나님의 솜씨를 보고서 감탄하지 않을 인생이 없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복음의 원수들이 영원한 불못에 던져지게 됨으로써 우리의 구원이 최종적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다시 우리를 미혹하거나 범죄하게 만들 세력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결코 범죄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소망입니다. 결국 모든 악의 세력은 영원히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복음의 원수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잠시 위협하겠지만 그들은 곧 영원한 불못에 던져질 것입니다! 이 장면을 보고서 세상은 두려워하겠지만 교회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오히려 소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최후승리가 이미 작정된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악의 축들이 영원히 멸망하게 될 것을 바라보기 때문에 오늘 교회는 더욱 더 악에 대해서 저항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즐거워하며 소망 가운데 참고 견디면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원수가 멸망할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악에게 지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오히려 선으로 악을 대항하면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악이 멸망하게 될 이 마지막 장면을 우리가 마음으로 그릴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악의 세력이 사납게 도전할지라도 모든 인내와 소망이 우리 안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환난이 극심할수록 소망이 더욱 커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천 년 후에 일어날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 살펴볼 것입니다. 최후의 결전 직후에 최후의 심판이 뒤따를 것입니다. 최후 심판의 장면 역시 고난 속에 있는 교회를 위로하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교회는 최후 심판대 앞에 서게 될 인생들이 형통하거나 또는 교회를 대적할 때도 결코 요동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이제 곧 최후의 심판이 있으니 어서 속히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오라”고 담대히 외칠 것입니다. 자, 사도 요한이 보는 것을 우리도 봅시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은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11절)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이 가장 먼저 본 것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였습니다. 여기서 보좌는 심판과 통치를 의미합니다. 보좌는 하늘의 법정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보좌가 크다는 것은 보좌에 앉으신 이의 위엄과 권위를 말해줍니다. 그분은 성부 하나님으로서 지극히 높으신 분이십니다.(창14장) 이제 우리는 이 보좌 앞에서 일어날 인류의 마지막 재판을 생각나게 해줍니다. 또 이 보좌가 흰 색이라고 특히 색깔을 강조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지극히 거룩하심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면 그 어느 누구라도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 지 스스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내가 왜 죄인이냐?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이냐?”라고 항변하는 사람이라고 흰 보좌 앞에 서기만 하면 입을 다물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인생의 첫 번째 반응이 바로 자신이 죄인임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경험해보셨습니까? 하나님을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은 곧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자신이 곧 죄인임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의가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심령이 가난한 자’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크고 흰 보좌 앞에 서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은 정말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울어 보셨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크고 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분은 지극히 거룩하며 높으시며 참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이 내리시는 판결은 지극히 공정하며 의롭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그분이 내리시는 판결에 이의를 달지 못할 것입니다. 이렇게 공의의 판결을 내리시는 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가장 위대한 재판장이십니다. 그분은 참으로 의로우시며 진실하시며 거룩하십니다. 그분이 그러하시기 때문에 모든 고아와 과부들이 그분을 찾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계시기 때문에 최후의 심판은 온 인류가 결코 피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그분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분의 심판대에 서지 않기 위해 바다 끝에 가서 숨어도 반드시 하늘의 법정에 출두하게 될 것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심판의 자리에 앉으신 하나님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곳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 온 세상이 하나님의 불꽃같으신 눈앞에 사실은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피라 하늘이 연기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같이 해어지며”(사51:6)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3:10)라고 했습니다. 모든 인생들이 그분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과 같습니다. 인류 역사의 마지막에 심판의 보좌에 앉으신 위대한 재판장의 모습을 온 인생들이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분 앞에 모든 인생이 벌거벗은 자처럼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분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거나 숨거나 자신을 가리는 행위는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요! 그러나 죄인들은 그분의 낯을 피하여 자꾸만 도망 다니고 있습니다. 하늘의 법정에 자진 출두하지 않고 자꾸만 피난가고 있습니다. 현재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도망자의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여러분은 어디에 있습니까?
모든 인생들이 하나님 눈앞에 벌거벗은 채로 있습니다. 이제 성경은 이 장면을 좀더 확대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라고 했습니다. 모든 인생들이 심판자이신 성부 하나님 앞에 드러날 것인데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인생들은 ‘죽은 자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죄인들입니다. 첫째 부활에 참여하여 왕노릇하는 성도들은 여기서 제외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죄인’을 ‘죽은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던 것처럼 범죄한 순간 아담은 하나님과 분리되어 영적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죽은 아담 이후에 출생한 모든 인생은 죽은 채로 태어났습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채로, 하나님의 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상태로 태어났습니다. 이렇게 범죄한 아담으로부터 앞으로 태어날 모든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를 면하게 될 인생은 하나도 없습니다.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라는 말은 하나도 예외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아담 이후에 출생한 모든 인생들이 다 죄인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 것과 죄를 범한 것은 동일한 의미입니다. 남에게 피해를 끼친 것만 죄의 전부가 아닙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가지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죄의 기준은 내 생각이나 윤리강령이 아닙니다. 죄의 기준은 하나님의 의요 영광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흰 보좌 앞에 세웁니다. 모든 죄인으로 하여금 크고 흰 보좌를 바라보게 합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자신이 참으로 비참한 인생이며 하나님의 자비가 아니면 도무지 살 수 없는 인생임을 깨닫게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보고 자신이 용서받지 못할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자비가 주어집니다. 복음은 모든 죄인들을 십자가에 못 박은 다음에 다시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보좌가 한편으로 형벌을 선언하는 곳으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영원한 사면을 선언하는 곳으로 그려줍니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지 못하는 자들은 인류 역사의 마지막에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지금 복음을 듣고 하늘의 법정에 자진 출두하지 않으면 역사의 마지막 날에 강제로 출두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결코 희망이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째 부활에 참여함으로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할 인생도, 죄와 허물로 이미 죽은 자로서 둘째 사망의 해를 받게 될 인생도 반드시 한번은 하나님의 크고 흰 보좌를 바라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의 마지막에 흰 보좌를 바라보는 것은 절망적인 것입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지금 우리가 흰 보좌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후의 결전에 참여하고 다시 변명할 수 없는 심판을 받고 영원한 형벌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지금 주님 앞에 항복을 선언하고서 하나님의 흰 보좌 앞에 서야만 합니다. 하늘의 법정에 스스로 자진 출두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서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긍휼만을 구해야 합니다. 비록 그 앞에 서는 것이 자신의 수치와 허물이 드러나는 고통이 되지만 살기 위해서 그 고통쯤은 기꺼이 감수해야 합니다. 죄인으로 판정되어 영원토록 고난을 받는 것보다 잠시 죄인으로 판정되는 아픔을 통해서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을 경험하는 것이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고통은 잠시뿐이지만 기쁨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순간의 기쁨을 위해 영원한 고통을 선택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현명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보좌 앞에 두 종류의 책이 놓여져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행위를 기록한 책들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책입니다. 복수로 표현된 ‘책들’은 각 인생별로 그 행위를 적어놓은 책입니다. 단지 육적인 행위만이 아니라 마음에 숨은 생각이나 동기까지 다 기록해두었습니다. 무슨 무익한 말을 했든지 간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마음을 품었는지도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기의 양심이 그것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은 율법으로 율법 없는 이방인은 양심의 법으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책인 생명책은 창세전에 하나님이 예정하신 인생들의 이름입니다. 어린양의 피로 죄 값을 지불한 인생들의 명단입니다. 이 명단은 창세전에 기록되어졌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으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을 인생들의 이름들을 기록해두셨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아담을 창조하시기 전에 여러분의 이름들을 기록해두셨습니다. 그러면 이 두 책이 하는 역할이 무엇입니까? 행위를 기록한 책은 심판의 근거로, 생명책은 구원의 근거로 하나님의 법정에서 제시될 것입니다. 죄인들은 자기 행위가 기록된 책에 따라서 결코 변명할 수 없는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것에 대해 결코 원망하거나 항변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자기 행위기 기록된 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자신이 죄와 허물로 죽은 ‘죄인’임을 알지만 동시에 자신의 죄 값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흘리신 보혈로 남김없이 다 지불하셨다는 책을 보면서 놀라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흘리신 피로써 모든 빚을 탕감해주신 명단에 자기 이름이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알고서 감격해 마지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모든 행위가 기록된 책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그 책에 의하면 여러분은 결코 용서받지 못할 인생임을 알고 계십니까? 그런데 또 다른 책에 여러분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모든 빚이 탕감된 명단에 여러분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습니까?
모든 인생들은 이 두 책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행위의 책에 따라 멸망의 심판으로 나아가든가, 아니면 생명책에 따라서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든가 두 가지입니다. 이것은 내 의지로 선택할 문제가 아닙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죽은 자들이 심판을 받아도 그것은 결코 불평할 수 없습니다. 죽은 자들은 말이 없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라고 했습니다. 모든 죄인들이 자기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습니다. 그들은 자기 행위에 대해 변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죽은 자들이 한 행위는 단지 심판의 근거가 될 뿐입니다. 그래서 행위로 구원받을 인생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행위는 결단코 우리를 하나님 앞에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행위는 오히려 우리는 정죄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인생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단 한 가지 희망이 있는 것은 생명책에 과연 내 이름이 기록되었을까 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의 예정 안에 포함되었을까 하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하늘의 생명책에 우리 이름이 기록되었다는 것을 안다면 이보다 더 큰 행복은 또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생명책에 우리 이름을 발견할 수 없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귀신들도 항복한다고 기뻐하고 있었을 때 귀신들의 항복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들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늘나라 생명책에 내 이름이 기록 되었는지를 알고 계십니까? 이것보다 더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소망의 근원입니다. 소망이 있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하늘나라 생명책에 우리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 소망이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을 만나도 항상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여러분에게 이 소망이 있습니까? 하늘나라 생명책에 여러분의 이름이 기록되었기 때문에 생겨나는 소망 말입니다. 이 소망이 있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찬송이 자신의 고백이 될 것입니다.
구름 같은 이 세상 모든 부귀영화 나는 분토와 같이 내어 버리고서
오직 천국의 복만 사모하며 사니 주여 내 작은 이름 기억하옵소서
주여 보배 피로써 모든 죄씻으사 나의 부정한 것을 씻어 맑히소서
흰눈 보다 더 희게 죄를 씻었으니 지금 내 작은 이름 기록하옵소서
죄가 하나도 없고 아무 병도 없는 영화롭고도 밝은 천국 올라가서
주와 같이 그곳에 길이 살리로다 이런 소망의 삶은 참된 행복이라.
주가 나의 이름 보좌 앞에 놓인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하셨을까
여러분, 죽은 자들이 어떻게 심판을 받는지 그 광경을 한번 보십시오. 그들은 하늘의 법정을 모독하며 끝까지 출두하기를 거부하고 버티다가 강제로 출두하고 있습니다.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여기서 바다는 세상을 가리킵니다. 세상에 모든 불신자들이 심판대 앞에 나올 것입니다. 또 육체적으로 죽은 자들 중에서도 모든 불신자들을 심판대 앞에 세우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적으로 산자나 죽은 자나 할 것 없이 그 영이 죽은 자들은 남녀노소 무론대소하고 모두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 역사의 마지막에 있을 최후의 심판입니다. 어떻게 죽었든지 간에 허물과 죄로 그 영이 죽은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흰 보좌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역사의 마지막에 아담으로부터 출생한 모든 죄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위대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사망과 음부와 함께 불못에 던져질 것입니다. 이것이 둘째 사망입니다. 즉, 불못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둘째 사망이라고 했으니 첫째 사망은 무엇입니까? 첫째 사망은 하나님과 분리되는 영적인 죽음입니다. 그리고 둘째 사망은 영원토록 불못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살아생전 하늘의 법정을 모독하다가 강제로 구인되어 선고를 받고 영원한 불못에 던져지는 장면을 보십시오. 세상에 이런 불행이 어디 있겠습니까? 스스로의 고집과 완고함이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영원토록 하나님의 진노의 불이 타오르는 곳, 영원히 꺼지지 않을 진노의 바다 한 가운데서 영원토록 후회와 아쉬움과 이를 가는 것으로 보내는 곳, 다시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곳, 그래서 영원한 절망과 탄식의 곳이 예비되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곳에서 타오르는 불은 사랑하는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모든 죄인들을 위해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모독한 자들을 위해 준비되었습니다. 독생자를 향하신 성부의 지극한 사랑이 그 불못을 만들었습니다. 독생자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하신 것같이 독생자를 거부하고 모독한 자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진노의 불길도 영원히 타오를 것입니다. 하늘의 성도들은 영원히 타오르는 진노의 불꽃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와 깊이와 높이와 너비를 깨달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날에 우리 모두는 그분의 사랑이 죽음같이 강하며 그 투기는 지옥의 불을 만들어내는 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이때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도 이 최후의 심판에 참여하겠습니까? 분명한 것은 구원받기로 작정된 인생들은 둘째 사망을 결코 맛보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미 살아생전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본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자신들이 죄인임을 깨닫고 크게 울어본 자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처분에 겸손히 자신을 맡겨본 자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사모해본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를 이 하늘의 법정에서 간절히 부르짖어 본 자들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바라보는 순간 하나님의 큰 자비를 맛본 자들입니다.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된 자신의 이름을 듣고 영원한 사면을 선고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흰 보좌를 경험해보았기 때문에 그들은 최후의 결전 후에 있을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는 제외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모든 인생들이 하나님의 흰 보좌 앞에 한번은 서게 될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지 못하면 그때 서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됩니까? 먼저 하나님의 흰 보좌 앞에 서는 두려움을 겪습니다. 그리고 자기 행위로는 이미 죽은 자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모든 죄를 다 지불하신 그리스도의 공로로 영원한 사면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반드시 한번은 서게 될 것입니다. 그날에 서기 전에 지금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십시오. 하늘의 법정에 자진 출두하라고 복음은 모든 죄인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의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되었는지를 확인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최후에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판결은 두 가지에 기초할 것입니다. 하나는 행위를 기록한 책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책입니다. 영원한 사망, 곧 둘째 사망의 판결은 행위를 기록한 책들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 곧 첫째 부활의 판결은 생명책입니다. 이 책은 ‘어린양의 생명책’(계21:27)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린양의 보혈로 죄 값을 지불한 명단을 기록한 책들입니다. 따라서 이 책에는 죄악이 깨끗하게 청산된 순결한 백성들의 이름들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이들은 큰 환난 가운데서 부름 받아 어린양의 피로 씻음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세상을 나그네와 우거하는 자로 살면서 기꺼이 자신들을 순례자로 처신하며 하늘 본향을 찾는 자들임을 자랑하는 사람들이며,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께 모든 소망을 두면서 살아가는 자들임을 자랑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유일한 자랑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일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들이야 말로 그들에게 진정한 ‘은혜’임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크신 능력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신 것처럼 자기들을 위해 놀라운 일을 행하신 것을 기꺼이 자랑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그 은혜’ 외에 다른 것을 자랑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과연 이런 사람들입니까?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어떤 행위 때문에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우리의 어떤 행위로 생명책에서 삭제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작정은 영원한 작정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로 작정하실 때 결코 실패하거나 중도에 변경되는 법은 없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영원불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처럼 결코 변덕스럽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창세전에 우리를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계획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획 때문에 그 아들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를 다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때문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그 계획에 포함된 인생들이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계획 때문에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보좌에 앉히셨습니다. 이 놀라운 구원을 단번에 완성하시고 나서 하나님의 계획 때문에 우리에게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때문에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가 복음의 말씀으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영으로 그리스도와 교제하며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이 계획 때문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구원경륜에서 제외된 인생들은 자기들의 행위로 말미암아 영원한 사망에 처해지게 될 것입니다. 죄인들은 세상에서 아무리 형통할지라도 결코 참된 소망을 가질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생명책에 그 이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되었는지 늘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들을 바라보며 그들을 존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러면 하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인생인지 아닌지 여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았으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삶으로 알 수 있습니다. 여기 바울 사도가 하신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빌4:3) 바울이 그렇게 확신할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이었습니까?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어디를 가든지 늘 기도와 후원으로 함께 하던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환난을 겪으면서 복음을 전하는데도 빌립보 교회가 끝까지 함께 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는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자가 분명합니다. 우리가 복을 받는 비결은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들을 사랑하고, 섬기고, 귀히 여기며, 돕는 것입니다. 이렇듯 생명은 생명력 있는 삶을 가능하게 합니다. 여러분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십시오.
사도 베드로 역시 우리가 구원 받기로 예정된 인생이라면 그 삶으로 분명히 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특히 성장하는 삶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벧후1:10,11)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것을 행한즉’이라고 했을 때 ‘이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는 일”입니다.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인생의 특징은 이러한 진보를 보일 것입니다. 영적 성장의 방향성을 그 삶으로 보여줄 것입니다. 믿음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덕을 더하려고 할 것입니다. 믿음은 그 자체로 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믿음과 덕은 상극을 이룹니다. 또 덕은 지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덕과 지식도 극단을 형성합니다. 또 지식은 절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배울 때 치우치기 쉽기 때문입니다. 또 절제는 인내를 요구합니다. 좋은 것을 참는 것은 좋지 않은 것도 참는 것으로 완성되어야 합니다. 또 인내는 그 자체로 경건을 요구합니다. 참기만 하면 모든 것이 고통스럽습니다. 인내는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경건으로 완성되어야 합니다. 반면 경건은 형제 우애를 요구합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해야 할뿐만 아니라 우리는 형제와의 교제를 즐거워해야 합니다. 경건은 형제 우애로 보완해야 합니다. 그러나 형제와의 교제에서 기쁨을 누리면 자칫 끼리끼리 모이는 친교모임으로 전락해버리고 말 것입니다. 형제 우애는 그 지경을 넘어 죄인들과 잃어버린 영혼들과 주님을 알지 못하는 열방 등으로 나아갈 때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 우애는 사랑으로 완성될 것을 요구합니다. 참 믿음을 가졌다면 이러한 방향성을 보일 것입니다. 그가 진정으로 예정된 인생이라면 그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이러한 성장의 방향으로 그를 이끄실 것입니다. 예정된 인생이라면 이러한 일에 힘쓰는 것은 성령과 동역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일에 힘쓰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그가 생명책에 기록된 인생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인생만이 그러한 진보를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생명은 반드시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또 다른 증거는 환난 속에 소망이 있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살전1:4)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많은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도 기쁨으로 진리의 말씀을 받아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의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살전1:5,6) 그렇습니다. 우리는 택함 받은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내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만약 복음이 말과 지식만이 아니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우리에게 전해졌다면, 만일 많은 환난 가운데서도 오히려 큰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되었다면 우리는 우리의 이름이 하늘 생명책에 분명히 기록되었다고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어떠한 환난 가운데서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그 안에 내주하셔서 그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13:5)고 했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도 오히려 소망이 있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처럼 생명은 저항력이 있습니다.
그러면 아직도 믿지 않는 자들 중에 혹시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는지 여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불신자들 중에서 하늘나라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들이 누군지 알아보는 것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 즉, 복음을 전해보면 그 이름이 생명책에 있는지 여부를 알 수 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인생들은 언제나 복음의 말씀으로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온 천하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라고 분부하신 이유입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아는 것처럼 예정된 인생들은 반드시 구주의 복음에 반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양이라면 결코 목자의 음성을 거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예정된 인생은 구원 받을 것이라는 말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사단이 하는 가장 교묘한 거짓말입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어쩌면 하나님의 부름을 받지 못한 것인지 모릅니다. 언제나 복음의 말씀으로 죄인들이 부름을 받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인생은 듣든지 아니 듣든지 복음을 전하는 데 대하여 어느 정도 부담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부디 예정론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참 예정론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더 복음을 전하도록 동기를 부여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예정론을 믿습니다. 예정론은 구원의 감격이고, 찬양의 제목이며, 넘치는 확신이며, 또한 성도들의 거룩한 행실을 가능하게 하는 동기가 됩니다. 지금 여러분은 여러분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것 때문에 감사해보았습니까?
오늘 우리는 하늘의 법정에서 하나님께서 심판을 내리시는 근거로 두 가지 책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행위를 기록한 책과 생명책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고 했습니다. 이 선언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완전히 절망적인 이야기입니다. 분명 그렇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절대 희망의 이야기입니다. 내 행위와 상관없이 구원받습니다. 내 행위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은 내가 결정하는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에 의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선한 행위를 약화시키거나 부정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더욱 선한 일을 하게 만들어줍니다.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인생들이 예정론을 잘못 적용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인생들은 더욱 선행을 할 것입니다. 생명책은 우리의 선행을 약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우리의 선행을 더욱 장려하고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생명책은 종말의 시대, 특히 교회가 큰 어려움을 겪는 시기에 소망을 갖게 해줍니다. 생명책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께서 부디 우리의 어둔 눈을 밝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 생명책에 우리의 이름이 기록되었는지 우리 한번 같이 찾아보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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