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설교

요한계시록 강해(47)-천년 후에 일어날 일들-최후의 결전(계20:7-10)

등불지기 2012. 3. 3. 19:27

요한계시록 강해(47)

 

천 년 후에 일어날 일들(1)-최후의 결전

 

본문: 계20:7-10

 

20:7 천 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20:8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라

20:9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

20:10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우리는 지난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 때문에 성도들이 왕노릇 하고 있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복음의 핵심을 그처럼 단순하고도 명료하게 그려주는 그림은 또 없을 것입니다. 성도들이 이와 같이 왕노릇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용을 결박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현재 우리는 용과 그 부하들의 적개심을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에게 겁만 줄 뿐 실제로 우리 영혼에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성도들이 가진 지위와 신분과 영생에 대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의 인격이나 삶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주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성령으로 사역하기 시작하면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실 때 이 변화는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구속사업을 다 완성하셨을 때, 용은 결정적으로 그 권세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용은 더 이상 인류를 정죄할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용은 깊은 무저갱에 결박된 채로 던져졌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이 어떤 일을 했는지를 보지 마십시오. 주님이 전하신 천국복음을 아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행하신 일들을 보십시오. 만약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신 일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안다면 우리는 적들의 그 어떠한 횡포와 협박에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더욱 더 담대하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위기에서도 죽음을 향해 비웃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성도들의 왕노릇입니다. 성도들의 왕노릇은 유대주의자나 유토피아주의자들이 상상하는 그런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개념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사망의 권세를 비웃고 새 생명 가운데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려주셨습니다. 우리의 영이 살아나서 하나님을 자유롭게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용은 살아난 우리의 영을 결코 건드리지 못합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니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5:18) 그래서 환난 핍박 속에서도 성도는 오히려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성도는 절망하거나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환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과연 우리의 영은 살았습니까? 우리의 영은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있습니까? 그래서 감히 왕노릇 하는 이러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바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들 때문에 가능한 왕노릇이 진정 우리의 삶의 근본적인 태도입니까?

지난 시간에 특별히 제가 강조한 것은 성도들이 이렇게 왕노릇 하는 것은 구주의 재림 이전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이라고 하는 지금 우리가 왕노릇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근거는 예수님께서 공생애 동안 전부 다 이루신 구속사역, 예수님이 하신 말씀, 로마서 5장, 에베소서 2장 등에서 기록된 사도 바울의 복음,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부른 베드로의 말씀, 그리고 동일한 저자에 의해 기록된 요한복음과 요한서신 등입니다. 세세히 구절들을 제시하면서 논증하고 싶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왕노릇’이라는 단어 그 자체가 주님이 재림하신 이후에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주님이 영광스럽게 재림하신 이후에 성도들이 왕의 노릇이나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감히 왕의 행세를 하며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영광중에 재림하시기 이전이라야 그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요점은 그리스도 안에서, 즉, 그리스도 때문에 왕노릇 하는 것은 현재 새 생명 가운데서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육체의 부활을 바라보기 이전에 현재 그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는 삶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영화의 몸을 입는 것은 오로지 지금 부활의 생명 안에서 살아가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새 생명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있어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이 지금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왕같은 제사장이 되어서 세상에서 허세라고 비웃을 정도로 당당하고도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는 까닭은 우리 구주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이미 행하신 일들을 우리가 믿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병으로 신음하고 있고, 삶의 고통이 많지만, 그리고 여전히 세상은 우리를 비웃고 협박하지만, 그러나 우리의 영이 살아나서 참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것을 우리의 원수 마귀는 결코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정죄할 자는 이미 깊은 무저갱에 갇힌 채 꼼짝도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본문은 천 년이 지난 후에 일어날 일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천 년이 차매” 성도들이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할 때가 있습니다. 새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는 기간은 하나님이 친히 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때를 정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어떤 일들이 일어납니까? 오늘 본문은 복음전파의 기간이 끝날 때 세상은 잠시 극심한 혼돈과 무질서에 빠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크신 영광을 보게 되는 전조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해주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과연 그 일들이 언제 어떻게 일어날까요? 본문을 봅시다. “천 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라”(7,8절)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천 년이 끝날 시점은 언제일까요? 천년이란 기간은 천국복음이 전 세계에 전파되는 기간이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지어져가는 기간입니다. 전파되는 복음의 말씀은 그 뜻을 다 이루기까지 결코 전진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지상교회는 넘어져도 주의 복음은 결코 쉬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완성되기까지 말입니다. 그래서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설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년이 끝날 때는 하나님의 집으로서의 교회가 완성될 때를 가리킵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집이 건축 중에 있습니다. 그리고 건물 재료를 모으기 위해 지금 온 세상에 구주의 복음이 전파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천하만국에 복음이 전파되어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작정된 모든 인생들이 주님 앞으로 다 나올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가리켜서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2:20-22)고 말씀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구주의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어져서 하나님의 집이 완공되었을 때 그 집에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임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지상에서 구속사업을 완성하시고 하늘로 올리우신 이유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야 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임하실 처소를 마련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가 지금 임하는 것입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구주께서 승천하신 것은 영광스럽게 재림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의 집은 구주의 복음을 두루 전할 때 복음을 듣고 나오는 영혼들로 지어져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론과 종말론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 요한계시록을 보면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보다는 하나님의 교회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파되는 복음이 결국 그 목적을 달성할 때 다시 말해서 교회가 완성될 때 그리스도는 영광스럽게 재림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전에 세상은 잠시 극도의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혼란입니까? 그것은 인류가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영적 흑암일 것입니다. 무저갱에 결박된 용이 잠시 풀려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다 주님 앞에 나오기 전까지 용은 결박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집이 완공되자마자 하나님은 결박된 용을 잠시 풀어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는 까닭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더욱 극적으로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던 자들에게는 결코 변명할 수 없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영원히 거하실 집에 영광중에 임하시기 전에 매우 극적인 낙성식을 거행하실 것입니다. 이 낙성식에 복음의 원수들을 들러리로 세우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축포를 터뜨리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랍고도 탁월한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집이 완공되었을 때 하나님의 집을 시기하고 대적하던 모든 원수들을 다 동원하여 축포를 터뜨리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건물이 완공되었을 때 축포를 터뜨리고 경쾌한 음악이 연주되면서 오색 종이가 바람에 날리고 풍선이 날아가는 이벤트를 보셨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 하나님은 역사의 마지막 날에 모든 인생들을 깜짝 놀라게 해 줄 극적인 이벤트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온 인류는 하나님이 치밀하게 준비하시는 준공식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집이 완공되었을 때 준공식을 어떤 방식으로 진행하실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고난 중에 처절하게 인내하며 전투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자들을 놀라게 해주시려고 깜짝 이벤트를 준비하십니다! 모든 인생들이 그 이벤트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떠한 상황 속에 있더라도 결코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장차 행하실 놀라운 일을 기억하십시오. 그럴 때 고난 중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는 오히려 크게 기뻐하며 노래 부르며 웃으면서 참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역사의 마지막 날에 극적으로 보여주시려고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깜짝 이벤트가 기대되지 않습니까? 저는 그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흥분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고난 중에 있는 모든 백성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자, 그러면 그 이벤트는 어떻게 진행될까요? 본문을 보십시오. 우선 하나님은 무저갱에 결박된 용을 잠시 풀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예정하신 백성들이 모두 주님 앞으로 나왔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저는 셜록 홈즈의 추리소설을 정말 재미있게 읽은 적이 있습니다. 나흘 만에 여섯 권을 읽었을 정도니까요. 그 중에 [바스커빌 가문의 개]라는 제목의 책이 참 재미있었는데 그 책을 보면 사나운 개를 사용하여 사람을 죽이는 범인이 나옵니다. 범인은 아주 사나운 개를 훈련시켜서 아주 은밀한 곳에 가두어 놓습니다. 그리고 범인은 자신이 죽이려고 하는 사람의 옷이나 신발을 훔쳐다가 개에게 냄새를 맡게 한 후에 그 사람을 황무지로 나오게끔 유도를 합니다. 그런 다음에 그 개를 풀어놓습니다. 개는 냄새를 따라가서 그 사람을 물어 죽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이 소설책을 참으로 재미있게 생각하는 것은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본문의 상황을 상상하는데 조금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사나운 개가 풀려날 때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섬뜩함을 느낍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천 년 동안 결박된 채로 지내면서 용은 이를 갈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용을 풀어놓아 마음대로 다니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지 않기로 작정한 모든 인생, 하나님께로부터 영원히 버림받게 될 모든 인생들이 용의 사나운 이빨에 희생될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습니까? 하나님의 교회가 용이 무저갱에서 풀려나게 될 것을 생각할 때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풀려난 용은 이제 물을 만난 고기처럼 미친 듯이 뛰어다닐 것입니다. 천 년 동안이나 영혼에 굶주린 악마의 표효하는 소리를 상상해보십시오. 그러나 용은 결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아무런 해를 끼칠 수 없습니다. 단지 겁을 줄 뿐임을 기억하십시오.

풀려난 용이 어떤 일을 합니까? 본문을 보니까, “땅의 사방의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라”고 했습니다. ‘땅의 사방의 백성’ 즉,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백성들을 다 동원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게 만들 것이라고 했습니다. 용은 풀려나자마자 모든 불신자들의 영혼에 침투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향하여 마지막 적개심을 품도록 만들 것입니다. 그때는 하나님의 백성과 아닌 사람들이 극명하게 둘로 갈려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용은 모든 불신자들에게 총동원령을 내려 하나님을 교회를 대항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는 그들의 수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천문학적인 숫자가 될 것입니다. 역사의 마지막 날에, 우리 구주께서 영광 중에 재림하시기 직전에 하나님의 교회는 교회를 향한 세상의 적개심이 절정에 다다른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에서 완전히 고립되고 따돌림 당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시기 직전에 하나님의 교회는 잠시 궁지에 몰리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이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바로 이것은 하나님이 준비하시는 깜짝 이벤트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살펴봅시다. 여기서 말씀하는 ‘곡과 마곡’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분명, ‘땅의 사방의 백성’ 즉, 영적으로 죽은 자들, 불신자들을 가리킵니다. 특별히 ‘곡과 마곡’이라고 부른 것은 에스겔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성취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에스겔서 38장과 39장을 보면 곡과 마곡에 대한 예언이 매우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래에 대해 예언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은 해방될 것이고 평안히 거하면서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들을 지켜주는 보호장치가 없지만 그들은 평안히 거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성이 되시고 방패가 되십니다.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벧전1:5)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보호하심을 받고 있지만 알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그분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알지 못한 채 태평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일단의 백성들을 일으켜서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 전쟁을 벌이도록 하실 것인데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과 또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시고자 함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줄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을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질투를 보여줄 것입니다. 태평하게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또 크신 능력으로 보호하시는 지 체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워하는 땅의 모든 백성들 역시 하나님의 큰 능력이 어떤 것인지 마지막으로 한번 겪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장면은 먼 옛날 애굽을 탈출하던 이스라엘을 뒤쫓아 진멸하려고 온 애굽 군대가 총 동원되어 분노의 기세로 추격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솜씨를 생각나게 해줍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은 앞뒤로, 그리고 좌우로 오도 가도 못한 채 갇히고 말았지만 그러나 사실 그것은 자기 백성들과 그들을 추격해오던 백성들 모두에게 능력과 거룩을 나타내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고도로 연출된 것이었습니다.

역사의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교회가 직면하게 될 상황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고립되고 포위되도록 하신 이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곡과 마곡에 대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합니다. “인자야, 너는 마곡 땅에 있는 곡 곧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에게로 얼굴을 향하고 그를 쳐서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 곡아 내가 너를 대적하여 너를 돌이켜 갈고리로 네 아가리를 꿰고 너와 말과 기병 곧 네 온 군대를 끌어내되 완전한 갑옷을 입고 큰 방패와 작은 방패를 가지며 칼을 잡은 큰 무리와 그들과 함께 한 바 방패와 투구를 갖춘 바사와 구스와 붓과 고멜과 그 모든 떼와 극한 북방의 도갈마 족속과 그 모든 떼 곧 많은 백성의 무리를 너와 함께 끌어내리라”(겔38:2-6) 여기서 우리는 마곡이란 단어는 지명을, 곡이란 단어는 그 지방을 다스리는 왕호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학자들은 마곡이란 땅이 흑해 연안의 어떤 지방이라고 말합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말하기를 그들은 야만적이고 거친 수구디아인들로서 팔레스타인 북방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에스겔서는 그 땅을 다스리는 왕의 이름이 곡인데, 그는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이라고 말합니다. 로스, 메섹, 그리고 두발은 족속의 이름을 가리킵니다. 로스는 지금의 러시아의 어원이고 메섹과 두발은 지금의 터키와 중동지방의 특정 민족을 가리킵니다. 즉, 마곡은 곡의 왕국이며, 곡은 온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통치자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중요한 것은 전쟁을 주도하는 그들이 어떤 민족이냐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합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갈고리로 그들이 아가미를 꿰고 끌어낼 것이라고 합니다. 무저갱에서 풀러나는 용은 사실 하나님께서 갈고리로 그 아가미를 꿰어서 끌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용에게 미혹 받아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그들의 모습도 역시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그들의 명줄을 쥐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원수가 제 마음대로 활동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그 아가미를 쥐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아무리 큰 힘과 분노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한다고 할지라도 결코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교회의 원수들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께서 잠시 사용하시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행하시려고 하는 깜짝 이벤트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대언하는 말씀을 조금 더 들어보십시오. “너는 스스로 예비하되 너와 네게 모인 무리들이 다 스스로 예비하고 너는 그들의 대장이 될지어다. 여러 날 후 곧 말년에 네가 명령을 받고 그 땅 곧 오래 황무하였던 이스라엘 산에 이르리니 그 땅 백성은 칼을 벗어나서 열국에서부터 모여들어 오며 이방에서부터 와서 다 평안히 거하는 중이라 네가 올라오되 너와 네 모든 데와 너와 함께 한 많은 백성이 광풍같이 이르고 구름같이 땅을 덮으리라”(겔38:7-9) 하나님께서 곡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곡으로 하여금 전쟁할 마음을 주시고, 전쟁을 준비시키신다는 것입니다. 곡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미움과 분노로 가득 차서 많은 민족과 족속들을 불러 모아서 연합군을 조직하여 전쟁을 하도록 계획하는 것은 사실 하나님의 계획대로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평안히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정말 무방비 상태입니다. 사실은 하나님께서 큰 능력으로 그들의 성벽이 되어주시는 것이지만 사실 그들은 그것을 전혀 깨닫지도 못하거나 인간적으로 보면 그들은 정말 자신들을 보호할 능력이 없다는 뜻입니다. 얼마 전 인도네시아나 파키스탄 등지에서 주님의 교회가 무슬림 무장단체에 의해서 테러를 당할 때 교회는 자신을 보호할 능력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처럼 역사의 마지막 날에 무방비 상태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벌떼 공격을 감행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을 하나님께서 이미 알고 계십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네 마음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나서 악한 꾀를 내어 말하기를 내가 평원의 고을들로 올라가리라 성벽도 없고 문이나 빗장이 없어도 염려 없이 다 평안히 거하는 백성에게 나아가서 물건을 겁탈하며 노략하리라 하고 네 손을 들어서 황무하였다가 지금 사람이 거처하는 땅과 열국 중에서 모아서 짐승과 재물을 얻고 세상 중앙에 거하는 백성을 치고자 할 때에”(겔38:10-12) 주님은 그들의 악한 꾀를 이미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 처할지라도 결코 낙심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고, 우리를 지켜줄 성벽도 없지만 평안히 거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원수들의 계략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더욱 더 우리를 안심시키기에 충분한 이유는 사실 하나님께서 친히 이 모든 일을 주도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주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그 일들을 주도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네 고토 극한 북방에서 많은 백성 곧 다 말을 탄 큰 떼와 능한 군대와 함께 오되 구름이 땅에 덮임같이 내 백성 이스라엘을 치러 오리라. 곡아 끝 날에 내가 너를 이끌어다가 내 땅을 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말미암아 이방 사람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어 그들로 다 나를 알게 하려 함이니라”(겔38:15,16)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왜 무저갱에 갇힌 용을 풀어놓아주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공격하도록 내버려두신단 말입니까? 도대체 지상교회로 하여금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되도록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래서 우리에게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미련한 마음으로는 놀라운 지혜로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감히 다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판단하려는 시도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재어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시려는 것은 자신의 거룩함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곡이 이스라엘 땅을 치러 오면 내 노가 내 얼굴에 나타나리라 내가 투기와 맹렬한 노로 말하였거니와 그 날에 큰 지진이 이스라엘 땅에 일어나서 바다의 고기들과 공중의 새들과 들의 짐승들과 땅에 기는 모든 벌레와 지면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내 앞에서 떨 것이며 모든 산이 무너지며 절벽이 떨어지면 모든 성벽이 땅에 무너지리라.”(겔38:18-20) “그러므로 인자야 너는 곡을 쳐서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 곡아 내가 너를 대적하여 너를 돌이켜서 이끌고 먼 북방에서부터 나와서 이스라엘 산 위에 이르러 네 활을 쳐서 네 왼손에서 떨어뜨리고 네 살을 네 오른손에서 떨어드리리니 너와 네 모든 데와 너와 함께한 백성이 다 이스라엘 산 위에 엎드러지리라 내가 너를 각종 움키는 새와 들짐승에게 붙여 먹게 하리니 네가 빈들에 엎드러지리라 이는 내가 말하였음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또 불을 마곡과 및 섬에 평안히 거하는 자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내가 내 거룩한 이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알게 하여 다시는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않게 하리니 열국이 나를 여호와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겔38:1-7)

교회의 원수들이 일치단결하여 모여서 공격해올 것이지만 이것은 사실 하나님의 각본대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탁월한 지략가이신 하나님께서 그 일을 주도면밀하게 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까닭은 당신의 거룩함을 드러내셔서 다시는 그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역사의 마지막에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극적으로 드러내시는 거룩함을 목격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교회를 대적하던 자들은 영원히 수치와 모욕을 당할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은 영원토록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의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는 깜짝 이벤트의 전말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게 될 때에 지금 살아가는 가운데서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을 만난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위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소망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할 때 소망이 생깁니다. 교회는 역경과 시련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함으로써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환난은 소망을 낳는 것입니다.(롬5:3,4) 우리가 이 소망을 배우는 것은 다름 아니라 원수들의 핍박과 협박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고난당한 것이 자신에게 유익이 되었다고 고백했던 것입니다.(시119:71)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이 소망을 가지게 된 것은 다름 아니라 원수 하만 때문이었습니다. 하만이 유대인을 증오하고 미워하였지만 그러나 사실은 절망 중에 있던 유대인들에게 소망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이벤트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워하는 원수들은 철저히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오히려 힘들고 어려울수록 더욱 더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때문입니다.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믿습니까?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이것이 고난 중에 있던 교회를 향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인 것입니다.

고난 중에 있던 교회가 무시무시한 용이 무저갱에서 나와서 땅에 속한 백성들을 다 불러 모아서 하늘에 속한 백성들을 향하여 최후의 싸움을 붙일 것이라는 소식에 더욱 낙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불신자들이 다 모여서 일치단결하여 교회를 향한 적개심으로 불타 있는 모습을 보십시오. 게다가 바다의 모래와 같은 엄청난 무리들이 “지면에 널리 펴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둘러 포위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9절) 선지자 엘리사의 사환이 아람 군대가 도단 성을 둘러 포위하게 되었을 때의 그 절망감처럼 교회는 이제 끝이 온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바로 그것은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연출하신 상황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과 능력을 보여주시려고 그렇게 연출하신 것입니다. 보십시오.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그들이 영원히 멸망 받아도 결코 변명할 수 없는 근거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그들이 영원히 찬양하여도 결코 부족하지 않다는 근거를 제공하시기 위함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 본문을 공부하면서 무엇을 배웠습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어떤 일을 행하십니까? 하나님의 집으로서 교회가 완공될 때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준공식을 거행하신다고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역사의 마지막에 행하실 일을 아는 것이 지금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영광 중에 재림하시기 바로 직전에 일어날 일들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교회가 직면하게 될 원수들의 마지막 도전을 아는 것이 오늘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난 속에 있는 여러분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지극히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원수들과 여러분에게 친히 증명할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거짓과 죄를 제외한 모든 상황을 주도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이십니다. 심지어 교회가 고통을 당하고 시련을 당하는 것조차 하나님의 놀라운 솜씨에 의한 것입니다. 그 모든 고난과 시련은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을 드러내시려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매우 중요한 장치들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교회가 완성되었을 때 교회 안에 주께서 영광스럽게 강림하시기 전에 원수들과 백성들에게 자신의 거룩을 먼저 드러내실 주님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원수들에게는 영원한 수치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영원한 찬송을 주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해보십시오. 그 하나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의 고난과 시련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부디 환난 속에서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대신 환난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경륜을 생각함으로써 소망을 발견하십시오. 부디 우리에게 닥쳐오는 고난과 시련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젊었을 때 사서 고생해야 합니다. 젊었을 때 환난과 시련을 통해 정금같이 단련되어야 합니다.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더럽고 어렵고 힘든 일을 싫어합니다. 처음부터 즐기고 취하고 편한 길을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결코 소망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영웅은 시련을 통해 만들어지듯이, 그리스도인은 환난과 핍박을 통해 성숙해집니다. 그 어떠한 상황이 여러분을 절망하게 만듭니까? 사면초가와 같이 사방이 원수들로 포위되어 있습니까? 뒤에는 바로의 군대들이 추격해오고, 앞에는 깊은 바닷물이 여러분이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습니까?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우리 하나님께서 바로 그러한 상황으로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당신의 거룩함을 보여주시려고 말입니다. 당신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가르쳐주시려고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이외에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게 만들어주시려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도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마십시오.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하나님만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을 잠잠히 기다리십시오. 잠잠히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