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강해 도중에 종교개혁주일(2002년 11월 1일)을 맞이하여 설교한 내용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내용과 교회론은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기에 올려봅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교회, 영광스러운 집이여!
본문: 마태16:13-20
16:13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6:14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6: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6: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16:20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계속 보면서 알게 되는 것은 교회의 영광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참으로 영광스러운 곳입니다. 왜냐면 교회는 주님의 몸이며, 신부이며, 거룩한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아는 자는 반드시 교회의 영광도 알 것입니다. 주님을 아는 지식은 교회를 아는 지식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주님의 지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오늘날의 많은 소위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 대해 너무 관심이 없는 것에 대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주님의 몸인데도 말입니다. 아마도 교회에 대해 무관심해져가는 이유는 조직이나 기구나 단체에 대한 거부감 때문일 것입니다. 반면 교회에 대해 관심이 있다고 해도 대부분 건물이나 조직이나 ‘개혁되어야 현실 문제’에만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교회가 개혁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정작 교회 자체에 대해서는 얼마나 관심이 있습니까? 교회가 비판받고 개혁되어야 할 문제들에 대해서는 잘 알면서 과연 교회의 영광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세상이 교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지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 정작 주님이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에 대해 도대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교회의 영광에 대해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교회를 영광스럽게 섬길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교회에 대한 무관심, 교회론에 대한 무지는 곧 주님에 대한 무지입니다. 그것은 또한 오늘날 우리가 방향을 상실한 채 영적으로 방황하는 진정한 이유라고 믿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대한 무관심이 팽배해져가는 것은 영적 침체와도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지금 부흥이 일어날 때입니다. 그것은 교회의 영광을 깨닫고 옛날과 같이 다시 회복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주님이 자신의 전부를 다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곳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주님에게 있어서 전부와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교회를 당신의 기업(portion, 보배로운 소유, 전 재산)으로 여기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교회를 사랑하는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교회를 사랑하지 않고서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아직까지도 교회를 한낱 조직체나 종교단체로만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주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분명 조직의 성격도 있지만 사실은 그리스도를 주라 부르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주님의 관점에서 교회는 가장 영광스러우며 가장 보배로운 곳입니다. 주님은 이 교회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세상에 없습니다. 주님은 교회를 자신의 전부로 여기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교회가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왜 교회 다니는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왜 교회에 나오십니까? 은혜받기 위해서? 친구들 만나기 위해서? 만약 여러분이 무엇을 얻기를 기대하거나, 또는 교회 안에서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교회에 나온다면 아직도 교회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오는 참된 이유는 그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교회 나오는 전부라면 우리는 교회를 내 유익을 위해 이용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가 사라지면 우리는 가차 없이 교회를 등지게 될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교회를 단지 이용하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초대교회는 심한 몸살을 앓기 시작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오랜 세월 동안 지하 무덤에서 지내던 교회가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자기들의 안식처로 삼기 위해 적당히 헌금하고 출석하면서 교회를 자기들의 ‘방패’와 ‘우산’으로 이용하기 시작했고, 교회는 그 때부터 적당히 타협하면서 세속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때 걸렸던 몸살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 교회에 나오는가에 대한 분명하고도 올바른 대답을 간직하지 않는다면 교회가 세속화되는 것에 기여하게 될지 모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나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만약 저에게 교회에 왜 나오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내가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혹은 “이곳은 하나님의 집이요, 또한 내 집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내 집에 내가 들어오는데 왜 여기 들어오는가라고 묻는 것보다 황당한 질문은 없을 것”이라고 덧붙이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질문한 사람에게 다시 반문하겠습니다. “당신은 왜 집에 들어갑니까?” 여러분은 “그야 당연히 내 집이니까 들어가는 거 아니냐?” 라고 분명 대답하겠지요. “내 집에 들어가는데도 특별한 이유가 필요하냐?”고 하겠지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교회에 가는 이유도 그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집이며, 또한 우리들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사흘이나 애타게 찾으시던 요셉과 마리아에게 어리신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내 아버지의 집에 거하여야 할 줄을 알지 못하십니까?”라고 대답했던 것처럼 우리는 세상을 향하여서 언제든지 “이곳이 내가 영원히 거할 집”이라고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과연 교회를 자기 집으로 여기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이 감격스럽게 선포했듯이 “이곳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집이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고백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중에 과연 교회의 중요성, 교회의 영광을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다시 한번 더 강조합니다. 저는 주님을 아는 지식과 교회를 아는 지식은 거의 동일하다고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교회론’을 주제로 한 종교개혁세미나는 참으로 우리에게 유익했다고 믿습니다. 어쩌면 올바른 교회론 이야말로 개혁자들이 진정 추구했던 부분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교회에 대해서 처음으로 언급하신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교회’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언급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교회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이 본문을 결코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서 주님이 생각하신 교회가 어떤 곳인지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과연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셨을까요? 예수님은 ‘교회’란 단어를 ‘에클레시아’(ecclesia)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부름 받은 자들’이란 뜻입니다. ‘from’을 뜻하는 ‘에크’라는 말과, ‘calling’을 뜻하는 ‘레시아’란 말이 서로 합쳐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를 문자적으로 정의할 때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자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복음서에서 ‘에클레시아’는 오늘 본문과 마태복음 18:17, 두 곳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교회’란 신조어를 만드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경에 보면 이 단어가 무려 70회나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즉, ‘교회’란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사용하신 단어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이미 사용된 단어라는 말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이 ‘에클레시아’에 해당하는 단어는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총회(모임)’을 뜻하는 ‘카할’입니다. ‘카할’이란 히브리어 단어는 ‘부르다’는 뜻이 있습니다. 역시 하나님께서 불러내신 자들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이 특별히 부르시어 구별하신 백성들의 총회를 의미 있게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먼저 우리는 교회라는 단어를 통해 매우 중요한 점을 몇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겠습니다.
첫째, 교회는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입니다.
교회를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에 대해 말할 때 창세전에 예정된 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훨씬 이전에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자들을 미리 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정하셨고, 정하신 그들을 복음의 말씀으로 부르셨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셨고, 그들을 또한 이미 영화롭게 하셨습니다.(롬8:30) 이들이 바로 교회입니다. 지금 성부께서는 이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단장하고 계십니다. 이 교회가 있는 자리는 하나님 보좌 앞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이 교회를 가리켜서 ‘하늘에 거하는 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성도를 가리켜서 ‘하늘에 앉히운 자’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교회는 창세전에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작정이 아니면 결코 이해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작정 속에서만 자기들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아니면 그들은 자신들의 위치에 대해 아무 것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이 아니면 결코 우리 자신을 설명할 수 없습니까? 우리가 왜 여기 있는지 하나님의 선택이 아니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참 교회의 일원이 된 것입니다.
둘째,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교회를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단어는 ‘소명’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일단의 무리들이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자동적으로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찾아가셔서 불러내십니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작정하신 자들을 불러내시는 방식은 복음의 말씀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5:25)고 하셨고, 또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요10:16)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10:14,15)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늘의 부름을 받아 한 목자 아래 있는 한 무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아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을 아는 것입니다.(엡1:18) 이 교회를 이루기 위해서 주님이 죽으셨고, 이 교회를 이루기 위하여 복음이 우리에게 전파되었고, 이 교회를 이루기 위하여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부르심의 소망인 교회에 대해서 더욱 알려고 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것입니다. 교회는 신자들의 참된 소망이요, 비전의 핵심입니다. 교회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 그것이 아무리 거창하다고 해도 비전이 아닙니다.
부르심을 받았다면, 이제 부르심의 소망을 알려고 애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세상에서부터 불러내신 사람은 첫째 복음에 대한 확신이 있으며, 둘째, 부름 받은 것에 대한 감격이 있으며, 셋째, 부름 받은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복음의 말씀으로 부르십니다. 부름을 받는 죄인은 넘치는 감격과 감사로 반응합니다. 부름 받아 교회 안으로 나오는 자들에게는 성령을 보증으로 주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증거로서 각 사람에게 지식과 은사를 주십니다. 그래서 부름 받은 사람들은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성령과 은사를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어떤 목적으로 나를 부르셨는지 알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성령이 가르쳐주시는 바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성령이 교회를 섬기라고 주신 은사들을 점검해보십시오. 거기에 부르심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은사를 따라 교회를 섬길 때 우리는 비로소 참된 ‘안정감’을 얻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오래전부터 이 일을 위해 준비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더욱 즐겁게 그 일을 하게 됩니다.(엡2:10) 교회를 위해 여러분이 성령 안에서 즐겁게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비전입니다. 그 비전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교회와 주님의 영광을 가르치시기 위해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과 주님의 몸을 이루고 섬기기 위해 각자에게 나눠주신 성령의 은사와 상관없는 모든 ‘거창한 계획’을 쓰레기통에 집어던지십시오. 그것들은 참 비전이라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를 알지 못하고서 참 비전을 소유할 수 없으며, 성령의 은사를 갖지 못하고서 참 비전을 실행할 수 없습니다.
셋째, 교회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카할’은 ‘하나님의 총회’로서 결코 몇 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총회’는 오직 하나이지요. 즉, 하나님은 교회를 하나로 보고 계십니다. 세광교회, 갈현교회, 구산교회, 사랑의 교회, 온누리 교회 등등은 이 하나 된 교회의 일부일 뿐입니다. 처음에 저는 교회를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곳이라고 표현한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러나 사실 인간적으로 보면 우리가 보는 교회는 전부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결코 살 수 없는 비참한 죄인들의 모임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죄와 부패가 끊임없이 노출되는 곳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가장 힘들어지고 상처받는 곳입니다. 늘 서로 분쟁하고 다투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교파가 많습니까? 좁은 한국에서 이단을 제외하고 교단이라 자처하는 곳은 무려 300개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곳이라구요? 저는 태어나면서 지나온 ‘교회들’이 분열되고 서로 분쟁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많은 친구들이 교회를 등지고 떠나가는 모습들을 보아왔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상당히 힘들어했습니다. 교회가 분쟁하고 분열되는 모습을 보는 것만큼 가슴 아픈 것은 없었습니다. 서로 분파를 나누고 서로를 정죄하고 비판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큼 힘든 것은 또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교회가 하나라구요?
그러나 저는 ‘교회들’(churches)이 아니라 ‘하나 된 교회’(the church)를 보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지상교회(earthly church)가 아닌 천상교회(heavenly church)를 말입니다. 유형교회(form church)가 아닌 무형교회(formless church)를 말입니다. 전투적 교회(militant church)가 아닌 승리적 교회(victorious church) 말입니다. 가현교회(visible church)가 아닌 불가현교회(invisible church) 말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이 둘은 서로 동일하다고 주장하지만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 둘은 서로 얽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마13장 참조) 여러분, 이러한 구도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계속 살펴보면서 늘 보아왔던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구도 속에서 환상을 보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저도 늘 전투적으로 치열하게 싸우며, 때로는 패배하는 모습의 ‘교회들’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하나로 서 있는 ‘교회’를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어렵고 힘든 시기에서 교회를 등지고 떠나가고픈 유혹이 들 때 주님은 주님 앞에 영광스러운 신부로 서 있는 참 교회를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럴 때 여전히 죄악과 본성이 만연한 지역교회들을 섬기면서도 여전히 황홀한 감격으로 직분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들에 대해 실망하면서도 여전히 교회의 일원이 된 것에 대해 감격하면서 자기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크고 작은 지역교회를 잘 섬기되 하나 된 교회를 늘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광교회 소속의 청년들이지만 주님의 교회에 소속된 성도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소속감이 다 필요합니다.
그래요. 참 교회는 하나입니다. 성령께서 불러 모아 한 무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주님이 보시는 참 교회는 오직 하나뿐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거듭나서 이 교회의 정회원이 되었습니다. 반면, 카톨릭은 성령의 중생보다는 교회의 세례를 통해 정회원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주님의 교회에 회원이 되었다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면, 참 교회는 하나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줍니까? 먼저 우리는 그리스도를 주로 부르는 자들끼리 서로 다투고 분쟁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 점에 대해 고린도전서를 읽어보십시오. 하나 되지 못한 상태에서 주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가를 보십시오. 성찬을 거행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라는 바울의 권면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 지극히 개인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안타까운 것입니다.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우리가 얼마나 지켰는지 돌아보라는 말씀인데 말입니다. 또한 우리는 모임을 늘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이들의 습관과 같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그날이 가까울수록 서로 권하면서 더욱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히10:25) 모임에 나오지 않으면 찾아가서 나오라고 권해야 합니다. 자녀가 집을 나갔는데도 가만히 있는 부모는 없겠지요? 하물며 하나님의 집을 나갔는데 가만히 있으면 되겠습니까? 이것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은 매우 특별한 사건입니다. 왜냐면 믿는 자들의 모임 가운데 주님께서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들이 특별해서가 아닙니다. 믿는 자들의 모임 가운데 주님이 영광스럽게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 영광스럽게 임재하시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희생하셨고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위해 주님께서 지불하신 값은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더 귀하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교회의 영광과 중요성에 대해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넷째, 교회는 거룩합니다.
이것은 앞서 말한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참 교회는 하나이며, 또한 매우 거룩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거룩하게 하셨고 또 그렇게 보고 계십니다. 교회는 지극히 거룩한데 왜냐면 교회는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의 아들께서 그들의 죄 값을 다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분의 것으로 성별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라고 부릅니다. ‘성도’는 성경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붙여진 가장 영광스러운 칭호인데(요즘은 이렇게 자신을 부르는 것을 싫어하는 분들이 교회 안에 많은 것 같습니다) 자신의 삶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교회들’ 안에서 온갖 죄와 부패의 냄새를 맡을 수 있습니다. ‘거룩한’ 백성은커녕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은 또 얼마나 저지르는지 현실의 모습을 보면서 답답한 심정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의 ‘교회’는 지극히 거룩하며 순결합니다. 주님이 그렇게 간주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모든 의를 믿는 자에게 거저 전가해주십니다. 여러분, 이것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현상은 도무지 아니지만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저는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가 개혁되어져야 할 문제들로 가득 찬 곳이라고 외쳐지면 질수록 교회가 거룩하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교회들’이 나를 실망시킬수록 나는 더욱 더 ‘교회’를 사랑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들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들’은 썩어 부패하여 가지만 ‘교회’는 참으로 거룩하고 순결한 신부로 예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계14:4,19:7,8)
그래서 저는 교회들을 위해 해산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으로 수고한 교회들은 내 영광의 면류관이 될 것입니다. 왜냐면 주님께서 피 흘리시기까지 사랑하신 자들은 순결하고 거룩할 뿐만 아니라 이미 영화롭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썩어 없어질 ‘교회들’의 숲 속에서 저는 결코 더러운 것이나 부정한 것이 틈타지 않는 ‘교회’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모두 다 바알에게 무릎 꿇을지라도 7,000의 순결한 백성을 남겨두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바라보았다면 엘리야는 결코 좌절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들 가운데서 섬기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들’이 부패할수록 ‘교회’의 거룩함을 고백합니다. 교회들이 나를 실망시킬수록 저는 너무나도 자랑스러운 교회에 일원이 되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싶습니다. 교회의 거룩함을 고백한다고 교회들의 잘못을 옹호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잘못된 것을 보면서도 침묵하라는 얘기가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런 종교개혁세미나는 결코 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재미있는 이벤트를 열어서 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어 모으는데 주력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재미가 아니라 거룩을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거룩한 교회’임을 알기 때문에 ‘교회들’ 가운데 있는 죄와 모순에 대항하여 더욱 더 싸워나갈 힘을 얻게 됩니다. 진리가 아닌 것들과 목숨 걸고 투쟁해야 합니다. 교회의 거룩함은 오로지 복음진리의 순수성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에 대한 타협은 세속화를 낳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참 교회는 하나이며, 또한 거룩하기 때문에 모든 ‘교회들’은 연합과 일치를 위해 노력해야 함과 동시에 진리가 아닌 것들과 싸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최근 교회들 간에 연합운동이 강조되는 것은 참으로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한편 안타까운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연합운동의 흐름 속에 진리를 위해 함께 싸우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한 연합인지 의구심이 듭니다. 이것은 교회의 일치운동이 자칫 세속화운동으로 전락할 위험을 안고 있다는 뜻입니다. 교회의 거룩을 위해 일치를 훼손하거나, 혹은 일치를 위해 거룩을 훼손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것은 용납하되, 틀린 것은 배격해야 합니다. 다르다고 배격하거나, 틀린데도 용납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른 것을 이해와 용납을, 틀린 것은 단호히 회개를 촉구해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에 따라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단호히 출교하며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겨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거룩을 지켜야 합니다. 일치와 순결은 오늘날 교회개혁의 나침반입니다. 교회가 건강하고 성숙해지면 이 두 극단 속에서 길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건강하지 못한 교회는 순결을 상실할 것입니다. 또 성숙하지 못한 교회는 일치를 상실할 것입니다. 회개운동을 통해 교회는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연합운동을 통해 교회는 성숙해질 수 있습니다. 회개와 연합은 바로 우리 교회 안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교회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개혁되어야 할 지상교회를 바라보면서 결단코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원리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교회’라는 단어 하나를 가지고서 몇 가지 의미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그러면, 오늘 본문이 주님의 교회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교회는 신앙고백적 공동체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제자들에게 질문하신 것은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먼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신 다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주님과 교회에 대해서 이리저리 말하고 있는 것을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 중에는 세상 사람들이 하는 말대로 교회에 대해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우리는 주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한 우리 자신의 고백이 매우 중요합니다. 어릴 때부터 들어온 대로 고백하지 마십시오. 선생님들이 가르쳐준 대로 고백하지 마십시오. 청년들이 세상이 교회에 대해 평가하는 것에 대해 너무 민감한 것 같습니다. 교회에 대해 여러분 자신의 생각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여러분 자신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오직 여러분 자신의 고백을 주님께 드리십시오. 교회는 바로 그런 곳입니다. 교회는 예수님께 대한 신앙고백으로 하나 된 공동체입니다. 교회의 사활은 이 신앙고백에 있습니다. 다른 것은 다 무너져도 이 신앙고백만큼은 무너져서는 안 됩니다. 신앙고백이 살아있으면 교회도 살아있는 것입니다. 예배는 무엇입니까? 신앙고백을 드리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고백하시겠습니까? 그리고 주님의 교회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고백하시겠습니까? 이 고백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에 나와도 아무런 감격도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내가 이 ‘반석 위에 내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이 반석은 베드로 자신도 아닙니다. 베드로가 고백한 예수님 자신이 참된 반석이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엡2:20고 했던 것입니다. 교회가 서 있는 곳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리스도가 빠진 곳은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아무리 훌륭한 조직과 건물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우리 자신을 한번 돌아봅시다. 우리는 과연 이 만세반석되신 그리스도 위에 세워져 있습니까? 우리 청년부는 이 반석위에 과연 서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에 대한 고백이 정말 우리에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임에서 정말 중심이 되십니까? 우리의 대화와 권면과 가르침에 있어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아니면 그 모임은 교회라기보다는 차라리 친목회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기 위해 날마다 모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 알기 위해서 모입니다. 우리의 대화와 가르침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는” 모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려는 것이 아니면 왜 여기 나오셨습니까?
둘째, 교회는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태어나는 공동체입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우리가 마음대로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우리가 교회 안으로 태어나야 합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라고 신앙고백 했을 때 그것은 자신이 연구해서 알게 된 것이 아니라 하늘의 아버지께서 그에게 그것을 계시하여 주신 것입니다. 교회는 이처럼 하나님이 그리스도에 대해 계시하여 주신 자들의 모임입니다. 교회에 대해서 가장 큰 오해는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교회를 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교회를 우리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교회 안으로 선택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성부의 계시를 받은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눈 먼 자가 노력한다고 사물을 잘 보는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의 의지와 결단에 따라 믿음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내게 임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계시 의존적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만 볼 수 있다고 믿는 자들입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들처럼 계시를 받을 수 있다고, 그 계시는 성경과 동일한 권위가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에 동조하는 것이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면 본문에 주님께서 “알게 하신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성경을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가장 탁월한 책이라고 믿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경을 사랑해야 합니다. 교회가 성경을 읽고 연구하면서 그리스도를 알게 될 때 교회는 진실로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지 않는 교회는 진정한 의미에서 개혁될 수 없습니다. 계속 배워야 합니다. 천국은 영원히 주님을 알아가는 기쁨으로 충만한 곳입니다. 진리에 대해 알아가는 기쁨이 없는 교회는 이미 처음 사랑을 상실한 것입니다.
셋째, 교회는 주님이 세우시는 집입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세운다’는 단어는 교회가 하나님의 집(성전)이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구약의 성전과 같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으로서 건축되었고 지금 완공을 향하여 지어져가고 있습니다.(엡2:22) 교회는 지어져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주님의 교회를 세운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너희들의 교회를 짓겠다.”거나 “너희가 내 교회를 지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교회는 주님이 친히 지으시는 것입니다. 스룹바벨 총독이 하나님의 성전을 지을 때 스가랴 선지자가 받은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4:6)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돈이나 사람의 공력이나 땀이나 수고나 의지로 짓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교회의 참 일군입니까? 성령을 의지하여 봉사하는 자가 참된 봉사자입니다. 주님이 주님의 영으로 친히 세우시는 교회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을 참으로 의지해야 하겠습니다. 성령으로 봉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과 교회의 영광에 대해 알게 해 주십니다. 성령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대한 멘토(mentor)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는 교회는 생명력이 없습니다.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게 성령을 의지할 때 힘 있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는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는 교회가 하나님을 섬기는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여기서 ‘반석’이라는 단어에 대한 로마 카톨릭의 해석에 대해서 꼭 언급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반석 위에 내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로마 카톨릭은 ‘반석’을 베드로 자신을 가리킨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로마 교황주의가 근거하고 있는 유일한 말씀입니다.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에 가보면 이 말씀이 금박으로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로마 교황은 베드로의 사도직을 계속 이어받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누구에게 사도직을 계승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이러한 억지주장은 베드로의 사후 200년이 지나서야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또 한 가지 베드로의 인격위에 ‘내가 내 교회를 세운다’고 하셨다면 베드로 아닌 다른 사도들이 세운 교회는 주님의 교회가 아니란 말입니까? 또 한 가지 마18:18에 보면 베드로에게 주신 천국열쇠를 다른 제자들에게 똑 같이 주고 계십니다. 또 만일 반석이 베드로 자신이라면, 예수님은 베드로(페트라) 위에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원문은 여성명사 ‘페트라’가 아니라 남성명사 ‘페트로스’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너는 페트라다. 내가 페트라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너는 페트라다. 내가 페트로스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반석은 베드로의 인격이 아닙니다. 이 반석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예수님 자신에게 세워지지 않는 교회는 참 교회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반석위에 내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을 때 그 반석은 베드로 자신이 고백한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고백한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참 토대가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인숭배나 마리아숭배를 가르치는 교황은 거짓 사도입니다. 사도가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한 자로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하라고 보냄 받은 자가 아닙니까? 로마 교황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목격했습니까? 그리스도에 의해 파송되었습니까?
넷째, 교회는 왕노릇하는 공동체입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음부’란 문자적으로 죽음을 뜻합니다. 계시에 의해서 그리스도가 주이심을 깨달은 자에게 하나님은 영생을 주십니다. 그는 사망의 권세를 결코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그에게는 영원한 내세의 소망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승리하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완벽한 교회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지만 참된 교회는 그리스도 때문에 승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의 ‘승리’와 다릅니다. 참된 교회는 참으로 승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우리가 지난 시간까지 한 달여 기간 동안 계시록 20장을 살펴보면서 종말의 때에 성도들이 왕노릇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았기 때문에 다시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롬5:17)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5:21)고 했습니다.
주일마다 모여서 기도할 때 우리 주님은 “주여 지난 주일에는 늘 실패하고 넘어지는 삶으로 주님을 부끄럽게 했습니다. 부디 불쌍히 여겨주사 용서하시고 다시 승리하는 삶을 살게 도와주소서”라고 자괴감에 빠진 고백을 듣기 보다는 “주여, 지난 주일에는 주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앞으로도 주님의 은혜 안에서 살도록 도와주소서”라고 고백하기를 원하신다고 저는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늘 넘어지고 실패했다고 하는 고백만 하는 것은 죄인을 불러서 믿음을 갖게 하시고 의롭다고 칭하시고 새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큰일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스스로 드러내는 것뿐입니다. 은혜보다는 율법주의로 살아왔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뿐입니다. 이제 제발 그런 고백은 집어치웁시다. 늘 부족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주님의 은혜 때문에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살 수 있었다고 고백합시다. 주님의 은혜 때문에 사망을 향하여 비웃음을 날릴 수 있었다고 고백할 수는 없습니까? 개인적인 기준에 의하면 늘 넘어지고 실패하는 삶이지만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 때문에 감히 부족한 우리들이 왕노릇 하면서 살 수 있었다고 고백할 수 없겠습니까? 다음의 찬송은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모일 때마다 부를 수밖에 없는 찬송입니다.
생전에 우리가 또 다시 모였네 예수의 보호하심을 늘 찬송하리라
주 예수 은혜를 힘입어 살 동안 싸움터 같은 세상에 두려움 없었네
주 예수 변챦는 큰 사랑 베푸사 이때것 인도하셨고 늘 인도하시리
구주의 권능을 힘입어 살았네 그 은혜 찬송 하려고 이곳에 모였네 (찬280)
다섯째, 교회는 천국열쇠를 쥐고 있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기 때문에 거룩과 순결을 지켜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주님은 교회에 치리의 권세를 부여하셨습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교회의 거룩을 위해 출교할 수도 있습니다. 출교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죄인들을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정면 대치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출교의 대상은 오직 교회의 권면을 듣지 아니하고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는 모든 죄인들이 오는 곳이지만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결코 들어올 수 없는 곳입니다. 교회가 회개하지 않는 자, 즉,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을 출교할 때 그것은 곧 하늘에서 판결내린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권징은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거룩함을 유지하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잃어버린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치리의 권세입니다. 서로 사랑하며 섬기는 것에 서로의 죄를 책망하며 서로의 죄를 자신의 죄로 간주하며 자신이 회개할 자인 것처럼 여기는 마음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잠언은 우리에게 적절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잠27:5,6)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나니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와 같이 아름다우니라.”(잠27:9)고 했습니다. 다른 지체가 상처받을까봐 책망하지 못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도 섬김도 아닙니다. 그 얼굴 앞에서 책망하는 것은 그 사람을 섬기는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책망이야 말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가장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우리 모임에 이것이 없다면 어쩌면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충 대충 눈치만 보면서 사귀는 그런 사교 클럽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거룩함을 회복하기 위해 죄를 책망하는 일과 회개를 권면하는 일과 다른 지체들의 죄를 자신의 죄로 간주하고 함께 회개하는 이 일을 힘써 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가 회복되는 지름길입니다. 죄를 보고도 가슴 치지 않는 것, 책망하지 않고 간과해버리는 것, 그리고 책망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뒤에서 정죄하는 것들은 모두 우리 교회에서 개혁되고 사라져야 할 부분입니다.
그러면 본문에 의지하여 오늘날 ‘교회들’이 개혁되어져야 할 부분은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까지는 원리적인 측면만 살펴보았다면 이제부터는 좀 더 실제적인 측면에서 개혁되어야 할 과제를 찾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저는 로마 카톨릭 교회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 중에 개혁되어져야 할 부분 몇 가지만 제시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개혁의 소극적인 측면으로서 로마 카톨릭에게서 영향을 받은 부분, 즉 아직도 제대로 개혁되지 못한 부분이고, 둘째는 개혁의 적극적인 측면으로서 교회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목표로서 모델을 정하는 것입니다.
첫째, 개혁되어야 할 것 중에 흔히 사용하는 몇 가지 용어에 관련된 뿌리 깊은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들은 은연중에 우리의 세계관이나 가치관을 결정지을 수 있기 때문에 성경에 근거한 정확한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사용되는 비성경적이면서 특히 로마 카톨릭에서 영향을 받은 용어로서는 가장 먼저, ‘사제’라는 말, ‘성직자’ 혹은 ‘평신도’라는 말, 예배당을 가리켜서 ‘제단’이라고 하는 말, 간혹 ‘사자’ 혹은 ‘사도의 계승’라는 말 등은 모두 카톨릭에서 영향을 받은 말입니다. ‘성지순례’라는 용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2세기까지는 ‘제단’이나 ‘제사’라는 말이 예배당이나 예배에 적용된 적은 없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성전건축’이란 용어를 결코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목사를 ‘제사장’이라고 부른 적이 결코 없었습니다. ‘축복기도’를 받으려고 목사에게 가는 법이 없었습니다. 이에 대해 교회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왕같은 제사장들이며, 하나님의 종들이며, 세상으로 보냄 받은 자들로서 ‘사도적 삶’을 살아야 하며, 자신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사로 드리는 것이 참 예배임을 부단히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지나치게 목회자에게 의존적인 교회구조 역시 개혁되어야 할 부분입니다. 목사는 결코 지역 교회의 ‘제사장’이나 ‘성직자’가 아니며, ‘평신도’를 위해 중보의 기도를 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신학교에 입학할 때 ‘선지학교’에 들어가는 ‘선지생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특별한 지위로 올라가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신학생이 되는 것이 ‘주의 종’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주의 종’이 되는 것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헌신에 대해서 요즘 한국교회는 마치 중세교회의 수도사가 되는 과정처럼 인식하는 것 같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가서 자기 생애를 바치지 않으면 주의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단 말입니까?
또한 목사로 안수 받는 것은 중보의 권리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의 사명은 성경을 잘 가르치고 권면하는 것이지 성도들이 스스로 예배하고 주의 뜻을 구하는 일을 가로막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는 “담임목사가 개업예배를 인도하지 않으면 축복이 오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데 이것은 매우 심각한 상태인 것입니다. 목사의 축복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평신도는 축복권이 없다’고 생각하도록 만든 장본인이 누굽니까? 교회를 사유화하려는 자들이 아닙니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의 이름으로 축복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심방이나 예배시 중보의 권리를 내세우는 것은 그리스도를 대신하려는 중대한 죄인 것입니다. 우리의 중보자는 오직 한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성직매매나 교회의 세습과 같은 것도 역시 배격되어야 할 부분입니다. 담임목사나 혹은 당회가 교회 안에서 왕노릇 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왕같은 제사장으로 임명 받았는데도 말입니다(벧전2:9). 사역자의 제왕적 모습은 주님이나 사도들이 보여준 것과 거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로마 카톨릭에서 온 것입니다. 주님은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지 말라고 하셨고,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교회를 임의로 좌지우지하는 모든 시도들이 교만한 행위인 것입니다.
또한 건물이나 예배형식에 치우치는 것 역시 개혁되어야 할 부분입니다. 이 시대의 ‘교회들’은 이상할 정도로 건축 노이로제에 걸려 있는 것 같습니다. 건물만 세우면 교회는 저절로 부흥할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게는 건물이 완공되고 나자마자 교회의 위기가 찾아옵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그리고 건물은 성전이 결코 아닙니다. 돈이나 사람이나 건물에 의해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으로 세워집니다. 이를 위해 지역 교회는 성경에 입각하여 바른 교회론, 성령의 은사와 직분, 그리고 모든 성도들이 공히 감당해야 할 사역에 대해 분명하게 가르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교회가 이 일에 게을리 한다면 교회는 끊임없는 미신과 광신과 맹신의 늪으로 추락할 것입니다. 중세시대를 보십시오. 교회 건물 수는 많았지만 복음에 대한 분명한 확신과 지식은 없었습니다. 건물과 신도수는 많았지만 대부분 영적인 흑암에 갇혀 버린 그때와 지금이 비슷하지 않습니까? 홍수가 난 곳에 먹을 물은 없다고 하는 말처럼 라디오와 TV 등 어디서든지 설교를 들을 수 있지만 참 복음의 메아리는 어디서 들리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지금 이 시대에 개혁이 필요한 것입니다.
둘째, 개혁자들이 가르친 은혜의 방편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실천에 옮길 필요가 있습니다.
개혁되어야 할 부분만 언급하면 우리는 치우치기 쉽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참된 개혁은 본받아야 할 모델을 발견하는 데 있습니다. 모델을 보지 못하면 잘못을 지적만 하다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먼저 개혁자들이 제시한 모델이 무엇입니까? 첫째, 성경이고, 둘째 복음에 입각한 은혜의 방편입니다. 교회는 성경의 권위를 회복해야 하며 이를 위해 성경관을 제대로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대로 진리를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복음에 대해 분명하게 선포해야 합니다. 개혁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분명한 복음 선포가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먼저 분명한 복음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에 실패하면 그 어떠한 개혁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또한, 개혁자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방편으로서 기도, 성경읽기, 성경을 가르치기, 복음의 신앙으로 서로 교제하기,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기, 성례를 올바로 거행하기를 강조했습니다. 개혁은 비성경적이고, 복음의 진리에 반하는 것을 바로잡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개혁은 틀린 것을 뜯어 고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해야 할 일을 바로 하는 것입니다. 개혁은 거품을 제거하고 본질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환난과 핍박과 순교가 있을 때는 신앙의 거품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련과 핍박의 시대가 지나가고 점점 시간이 흘러 ‘안정적인 삶’을 살기 시작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타성에 빠져들기 시작하고 신앙의 쓸데없는 거품이 일기 시작합니다.
개혁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른 지식입니다. 본질과 본질이 아닌 것을 먼저 구분하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따라서 참 개혁은 부단히 성경으로 돌아가는 몸부림입니다. 성경은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지난 세대뿐만 아니라 오고 오는 여러 세대에 있어 모든 교회와 성도들의 삶에 있어 유일하고도 최종적인 규범이기 때문입니다. 결코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개혁은 종교개혁자들의 교회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개혁자들은 자신들에게 초점을 맞출 것을 강요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개혁자들의 전통을 넘어서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1세기 예루살렘 교회, 안디옥 교회, 빌립보 교회 등이 보여주었던 아름다운 전통을 계속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부단히 읽고 가르치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참된 교회의 모습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를 보십시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행2:42 이하를 읽어보십시오. 첫 열매를 바쳐드리는 오순절이라는 절기의 의미와 같이 성령이 임하여 첫 열매로 시작된 주님의 교회가 보여준 모습을 보십시오. 안디옥 교회를 보십시오. 에베소와 빌립보 교회를 보십시오. 그들이 보여준 삶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들의 언어와 생활습관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한번 보십시오. 개혁은 개혁자들을 본받는 것이 아닙니다. 개혁자들이 추구하던 목표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개혁자들의 후예들입니다. 그러나 개혁자들의 후예라는 것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또 다른 극단을 낳을 소지가 있습니다. 종교개혁자들도 역시 시대적 한계를 안고 있습니다. 우리는 개혁자들의 선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영광, 은혜, 성령, 영원한 복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개혁자들이 아니라 개혁자들이 추구했던 복음의 후예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개혁자들의 후예가 아니라 사도들의 후예로 자처해야 합니다. 사도들이 가르친 복음, 그들이 보여준 삶의 본, 그들이 어떻게 교회를 섬겼는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개혁은 부정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긍정해나가는 것입니다.
특별히 교회는 성례의 중요성을 새롭게 가르칠 필요가 있습니다. 성례가 없는 교회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개신교에서 성례는 그 중요성에 대해서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부분 들리는 복음선포에만 신경을 쓰는 것 같이 보입ㅂ니다. 그러나 성례는 주님이 친히 제정하시고 명령하셨습니다. 성례는 보이는 복음선포입니다. 개신교에서 인정하는 성례는 세례와 성찬입니다. 세례와 성찬의 의미에 대해 분명하게 가르칠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이 부분에 있어서 명백하게 성경을 위반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미사를 ‘제사’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일명 ‘일종제찬봉령’교리에 따라 ‘평신도’들에게 잔을 주지 않습니다. 이것은 초대교회가 보여준 것과 분명 다른 것입니다. 게다가 세례와 성찬 외에 견진, 고해, 서품, 혼인, 종부 등을 성례식에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의 전통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한 나머지 쯔빙글리와 같은 개혁자들은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례가 필요 없다고까지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말씀이 중요하지만 성례와 함께 가야 합니다. 언제나 개혁이 현실에 대한 부정에서 출발하면 치우치기 쉽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 목적이라면 결코 길을 잃을 염려는 없을 것입니다. 개혁은 반작용으로 일어난 교회운동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개혁의 동기는 언제나 주님의 변함없는 말씀이어야 합니다. 참 개혁은 언제나 말씀으로 돌아가는 운동입니다. 오직 말씀,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구주의 영광이라는 원리에 따라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참 교회 운동입니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무엇을 하는 곳입니까? 교제하는 모임입니까? 아니면 가르치는 모임입니까? 교회는 참 ‘사랑’을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기도와 찬미와 예배가 여기 포함될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구제하고 지역사회를 섬기는 일 등입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가르치고 교제하고 돌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아나서는 것입니다. 전도와 선교에 관한 모든 활동들이 여기 포함될 것입니다. 그리고 참 ‘사랑’은 결코 사람이나 세상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도 아무 빚을 지지 않으려는 그런 마음입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훨씬 복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 모두는 그 어떠한 제도나 사람에게 종이 되어서는 안 될 ‘주의 종들’이며, 그래서 빚진 자는 채주의 종이 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잠22:7)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참 ‘사랑’과 ‘믿음’과 ‘소망’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지금 세상은 교회를 바라보고 ‘자기들끼리 놀고 있다’고 비웃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교회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자기들과 같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무진장 애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세상은 교회를 향해서 “세상과 전혀 다른 곳”이라고 부르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불신자들이 편안함을 느끼는 교회는 참 교회가 아닙니다. 왜냐면 교회는 세상나라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사회와 같은 모습이 아니라 세상과 전혀 다른 모습의 사회를 보여주어야 할 곳입니다. 교회가 점점 세상을 닮아가고,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편안하게 생각하기 시작할 때, 교회를 세상과 다를 바 없다고 여기게 될 때 교회는 이미 교회의 진정한 본질을 잃은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전혀 찾을 수 없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즉, ‘대안사회’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런 방향으로 개혁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뜻깊은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여 말씀으로 개혁의 기치를 든 믿음의 선배들을 생각해봅시다. 그분들은 말씀으로 교회를 새롭게 하고 살리는 일에 생명을 바쳤습니다. 여러분은 교회가 어떤 곳인지 알고 계십니까? 교회의 영광스러움을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에게 있어서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여러분은 교회를 어떤 곳으로 생각하십니까? 어거스틴은 “교회를 어머니로 삼기를 거부하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을 수 없다”고 했고, 칼빈도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여 “다른 무엇보다도 교회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는 교인이라고 불릴 자격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교회를 소중하게 생각하십시오. 교회를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이 진정 주님을 사랑한다면 말입니다. 요즘은 교회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자들이 교회 안에서조차 많아져가고 있습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의 몸 된 교회도 알지 못하는 것이고, 교회를 알지 못하므로 교회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곧 주님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정말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분명하다면 주님께서 피 흘려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신 사람들과 함께 모이는 것이야말로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 아닙니까? 그리스도를 주라 부르는 자들과 함께 모이는 것을 부담스러워한다면 그것은 분명 주님을 아직도 알지 못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교회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거나 교회의 멤버가 되는 것을 특권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어쩌면 참 교회의 일원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자가 주님의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주님의 교회를 더욱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를 더욱 더 사랑하는 자들이 됩시다. 세상에서 이보다 더 영광스러운 집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주여, 주님이 피 흘려 사신 교회를 더 잘 알 수 있도록, 더 사랑할 수 있도록, 더 잘 섬길 수 있도록 우리 안에 지혜와 계시의 성령을 부어주소서. 아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아멘. (시8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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