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강해(49)
새 하늘과 새 땅
본문: 계21:1-8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21: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21:5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21: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21: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이제 우리는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창세기에서 뿌려진 씨앗이 우여곡절 끝에 자라서 아름다운 한 송이 꽃을 피우게 되었습니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역사의 마지막에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십니다. 빛이 있으라 하신 하나님께서 이제는 해와 달의 비침이 쓸데없이 오직 어린양이 등이 되시고 하나님의 영광이 찬란하게 비취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죄로 말미암아 에덴을 잃어버린 후 방황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회복된 낙원에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죄악의 수렁으로 빠뜨렸던 마귀는 이제 영원한 불못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이제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생명나무의 과실을 죄인들이 따먹을까봐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입구를 막으셨던 하나님께서 이제는 생명나무로 나아가는 길을 활짝 여시고 계십니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지금 그 길로 나아가면서 하나님을 소리높이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 영광스러운 모습은 지금도 믿는 자들이 부분적으로 경험하고 또 보고 있습니다.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경험하는 자들은 장차 온전하게 알고 온전하게 경험하게 될 것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소망입니다. 이 소망이 있기 때문에 환난 가운데서도 오히려 즐거워합니다. 지금 우리는 잠시 세상에서 환난을 겪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실패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데 필요한 과정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실패하고 넘어지나 하나님은 결코 실패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현재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다가올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지금 환난을 당하지만 장차 큰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가 누리게 될 그 찬란한 영광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저와 여러분이 굳게 붙잡아야 할 참 소망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복된 소망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교회가 가져야 할 소망이 무엇입니까?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그리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떤 것입니까? 베드로 사도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3:10-13) 베드로 사도는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뜨거운 용광로에 모든 종류의 쇳조각들을 넣으면 그 체질이 풀어지는 것을 생각나게 해줍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대장간에서 일하는 장인과 같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장인은 쇳물을 만들어서 그것을 새로운 모양의 틀에다가 부어서 주조합니다. 마찬가지로 마지막 날에 하나님은 만물을 새롭게 창조하실 것입니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천지를 새롭게 하십니다! 지금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한 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원소들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각각 헤쳐 모여서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모든 영적인 세계와 물질적인 세계가 주님의 명령에 따라 다시 헤쳐모여 할 것입니다. 태초에 주님의 명령에 따라 무에서 유로, 흑암에서 빛으로, 그리고 무질서에서 질서로 나아갔듯이 말입니다.
이렇게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환상은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이 이 땅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과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5-17)고 말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세상이 영원한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심하십시오. 세상을 등지고 살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세상에 대해 관심을 갖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부르셨지 세상을 등지고 수도원에나 들어가서 살라고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에 대해 우리는 경고하고, 진리를 선포하여야 합니다. 그것은 그들과 함께 살되 우리의 정체성을 잃지 않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어떤 극단적인 이들은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해서 아예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세상을 구원해야 한다고 세상과 동화되어 버리기도 합니다. 세상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면 세상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이라는 분명한 정체성을 보여줄 수 있어야 그들을 각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자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결코 변화될 수 없습니다. 세상은 점점 더 악해져갈 뿐입니다. 조금 더 멸망의 때를 늦추자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때는 정해져 있습니다. 다만 세상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어린양을 열심히 믿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신분과 정체를 분명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싸워야 할 부분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세상을 등지는 것도 아니면서 동시에 세상에 동화되는 것도 아닌 삶을 어떻게 살 수 있단 말입니까? 세상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면서 세상을 유토피아로 바꾸는 것도 아닐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늘 본문에 말하는 것과 같이 “새 하늘과 새 땅”을 계속 바라보아야 합니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사라질 것을 믿어야 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토록 살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서 특히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일까요? 요한계시록에서 ‘바다’는 어떤 곳입니까? 바다는 늘 움직이며 사나운 파도가 일고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바다는 늘 변화무쌍하고 거칠고 험한 세상을 의미합니다.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바로 이곳에서 배출되고 있습니다(계13장 참조). 이러한 바다가 다시 있지 않게 되었다는 말은 다시 말해서 다시는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사람들을 미혹케 하는 일들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범죄하도록 미혹하는 자들을 배출하는 모든 환경과 원인들이 제거될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다시는 고통과 시련을 안겨다 줄 수 없게 되고 말 것입니다. 고난과 시련을 일으키는 모든 원인들이 제거되었고, 우리를 힘들게 하는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습니다. 우리를 당신의 뜻대로 부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모든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어떠한 상황을 만나더라도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그 상황은 반드시 종료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끝을 알기 때문에 교회는 결코 좌절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만일 종말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게 된다면 오늘 여러분의 삶은 분명히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 다음 요한 사도가 보고 있는 것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한 거룩한 도성에 대한 것입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고 했습니다. 하늘과 땅이 완전히 새로워졌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거룩한 성이 세워지게 됩니다. 성이라고 할 때 우리는 성 안에서 함께 살아가며 서로 교제하는 공동체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성도들은 늘 예루살렘 도성을 바라보면서 일 년에 세 번씩 순례를 하였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도성을 향하여 순례를 하면서 부르던 찬송을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예루살렘아 너는 조밀한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시122:1-4)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133:1-3) 시편에서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되어 있는데 사실은 ‘순례자의 노래’라고 해야 정확합니다. 예루살렘 도성을 향하여 순례길을 가면서 불렀던 성도들의 노래들은 장차 내려올 영원한 도성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이 시대의 나그네들이 부르는 노래들입니다. 우리가 이 도성을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이유는 그곳에서 모든 믿는 자들이 함께 모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례식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찬송을 부릅니다. “날 구원 하신 주 모시옵고 영원한 영광을 누리리라. 그리던 성도들 한 자리 만나리.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찬290) 그러나 이 찬송은 우리가 매일 불러야 할 찬송입니다. 우리가 그리던 주님을 뵈올 뿐만 아니라 보고 싶었던 성도들을 다 볼 것입니다. 바울도 보고 베들로도 보고 주기철 목사님도, 손양원 목사님도, 로이드 존스 목사님도, 스펄전 목사님도 볼 것입니다. 그리고 제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분인 외할머니도 뵈올 것입니다. 이 얼마나 복된 소망입니까?
그런데 이 성은 지금의 예루살렘 성과는 전혀 다른 성입니다. 이 성은 지극히 거룩한 성인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니”라고 했지 않습니까? 이 성은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걸작품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성을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예비하신 성입니다. 결혼식을 위하여 신부는 남편을 위하여 자기 몸을 단장합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거룩히 구별하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독생자를 위하여 신부를 친히 구별하시고 또 단장하셨다는 말입니다. 이 성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인 것입니다. 이 교회는 창세전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속에 품었던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오래전부터 예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들을 거룩히 구별하시고 단장하셨는데 이는 다름 아니라 그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서였습니다. 창세기를 보시면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만드시고서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평가하셨는데 사람을 만드신 다음에는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하시고서는 아담의 갈빗대를 취하셔서 여자를 만드시고 여자를 아담에게로 인도하셨습니다. 이것은 창세기에서 보여주는 가장 위대한 구속의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하시고 여자를 준비하셔서 그에게 인도하신 일을 통해서 충분히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님을 위하여 교회를 준비하셔서 그에게로 인도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엡5:25-27)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더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라.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5:31,32)고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참으로 크고 놀라운 비밀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위하여 신부를 예비하시고 단장하고 계십니다. 그 아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장면은 역사의 마지막에 있을 장엄하고도 매우 거룩한 결혼식 장면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결혼식에 신부로 입장하게 될 것입니다. 그날에 있을 결혼식 광경을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소망의 핵심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2,3) 여러분, 이 소망이 여러분에게 있나요? 그날에 나의 신랑 예수님을 만나 뵈올 것이라는 소망 말입니다. 그날에 영광스러운 신부로서 그 결혼식에 입장하여 예수님과 손을 마주 잡게 될 것입니다. 그날에 주님을 친히 뵈올 것입니다. 그 날에 우리는 주님과 같이 될 것입니다. 그날에 우리는 주님과 함께 영원한 복락에 들어갈 것입니다. 여러분, 이 소망이 있습니까? 그날에 이 영광스러운 결혼식에 주인공이 될 것이란 소망이 있습니까? 이 소망이 없다면 여러분은 영적으로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이 소망을 모르고서 진정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 소망을 이해하지 못하고서 어떤 소망을 참된 소망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소망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거창하고도 허황된’ 소망과 마지막 때의 우주적인 결혼식에 사랑하는 님과 함께 예식을 올릴 이 소망 중에 어느 것이 낫습니까? 결혼식을 앞둔 형제자매들의 얼굴은 빛이 납니다. 그 기쁨이 얼굴에 나타나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기쁨은 영원한 것입니다. 이 기쁨, 이 소망 앞에 다른 모든 것은 꼼짝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제아무리 거창한 비전이라 할지라도 이 복된 소망 앞에서는 그 빛을 잃고 말 것입니다. 이 소망을 붙잡으십시오. 이 소망 앞에 모든 좋은 계획과 비전들이 오히려 더럽고 냄새나는 누더기와 같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보십시오. 이 위대하고 장엄한 결혼식에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주례자가 되십니다. 그날에 선포하실 성부의 주례를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의 보좌는 이 영광스러운 결혼식에 사회자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들리게 될 복된 선포로부터 그날의 결혼식은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 그날에 믿음을 끝까지 지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듣게 될 소리가 여기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미 그것을 듣고 있습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다 지나갔음이러라.” 어린양과 그 신부,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을 보십시오. 우리가 결혼식에 형제자매가 신랑과 신부로 서로 서약하고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을 볼 때마다 참 기쁘지 않습니까? 저는 결혼식에 참여할 때마다 참으로 감격스럽습니다. 그리고 역사의 마지막에 있을 그리스도와 교회의 아름답고도 장엄한 결혼식을 떠올리곤 합니다. 결혼식은 그날에 있을 결혼식에 대한 그림자인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장막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나타냅니다. 그날에 하나님은 영광스러운 임재로 교회를 덮으실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임재는 항상 있을 것입니다. 결코 그들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을 창설하셨을 때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가 정기적으로 있었지만 항상 있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에는 항상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실 것입니다.” 이것은 언약의 공식입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실 때마다 이 공식을 선포하셨습니다. 구약의 모든 언약들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영원한 언약에 대한 예표이며, 그림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날에는 영광의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날에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그동안 흘린 모든 눈물과 피에 대해서 위로하실 것입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종종 이 본문은 장례식 때 인용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사실 고난을 당하는 교회를 위해 주신 말씀입니다. 교회가 겪은 환난만큼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요점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의 크기는 주를 위해 겪은 고난과 시련에 비례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누구는 큰 상급을 주시고 누구는 적은 상급을 주시는 것에 대해 불평하게 될 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날에 그런 일을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면 그리스도를 위해 눈물을 흘린 것만큼 위로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고생한 것만큼 하늘나라에서의 위로와 상급이 결정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날에 우리의 눈물은 빛이 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위로를 받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도 정작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은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연단의 가치에 대해 점점 무지해져가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환난을 겪지 않고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한 사람이 있었습니까?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위로는 고난과 시련 속에서 차고 넘쳐납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오 자비의아버지시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인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인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견디게 하느니라.”(고후1:3-6) 자신이 환난을 경험하지 못한 자는 남을 위로할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남을 위로하는 자로 사용하시기 위해서 환난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환난 받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한 자가 진정한 위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상처 받는 그곳에서 우리는 동일한 상처로 힘들어하는 자를 위로하기 위해서 훈련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환난 없는 위로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본적인 종교를 만드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넘치는 위로는 고난 받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와 교회의 영원한 결혼식을 주례하시는 성부의 선언을 들어보십시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성부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와 교회가 영원한 복락을 누리게 될 세상으로 전진하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살고 있는 세상이나 환경을 새롭게 하려고 부단히 노력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스스로의 힘으로 새로운 질서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만이 만물을 새롭게 하실 수가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새롭게 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여, 우리를 새롭게 하소서”라고 부르짖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하나님은 당신의 성령을 보내시어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하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면 우리는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옛것은 지나고 새 사람이로다 그 생명 내 맘에 강같이 흐르고 그 사랑 내게서 해같이 빛난다. 산천도 초목도 새것이 되었고 죄인도 원수도 친구로 변한다. 새 생명 얻은 자 영생을 맛보니 주님을 모신 맘 새 하늘이로다.”라고 찬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심령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그날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새로워져도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이나 세상은 전혀 새로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물이 새로워져야 비로소 모든 것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것을 분명히 약속하고 계십니다. 만물을 새롭게 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보십시오.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선언을 영원한 약속으로 삼으십니다. 하나님 자신의 모든 참되고 신실하심으로 그 하신 약속의 말씀을 보증하고 계십니다. 이보다 더욱 확실한 말씀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이 약속을 믿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하나님께서 실질적으로 선언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이루었다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이루었도다.”하신 선언은 그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처음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이제 성부께서도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십니다. 성부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이제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세상을 처음 창조하실 때 “보기에 좋았더라”고 하셨지만 “다 이루었다”고 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만물을 창조하신 분께서 마지막으로 다 이루셨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도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완성하셨지만 창조사역은 아직 완성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신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다 완성하셨기 때문에 제정하신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안식일 문제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도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요5:17) 구약에서 안식일을 선물로 주신 이유는 그들을 구속하신 하나님의 큰일을 기억하고 모든 만물을 새롭게 하심으로 완성하실 때를 바라보라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창조하신 세계를 완성하실 분이십니다. 창조하시고서 뒷짐만 지고 계시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입니다.
그러나 완성된 세계에 참여하게 될 자는 제한되어 있습니다. 오직 목마른 자들만이 그 세계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행위와 수고로 대가를 지불하여 받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목마른 자에게 주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하지 않은 자는 결코 그 생명수를 마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심령, 사모하는 심령을 원하십니다.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이신칭의(justification just by faith)의 복음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신 말씀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신칭의의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두 가지 극단적인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첫째는 모든 행위를 무시하고 경시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둘째는 이신칭의의 극단을 두려워한 나머지 어떤 모양으로든 행위의 가치를 인정하려고 함으로써 율법주의적인 경향을 보이는 것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행위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우리의 행위가 필요하다거나 가치가 있다고 하는 식의 말은 참으로 애매한 표현입니다. 성경은 ‘오직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지, ‘믿음 더하기 행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은 ‘칭의 더하기 행위’를 낳습니다. 즉, “믿음+행위=칭의”가 아니라 “믿음=칭의+행위”입니다. 여러분, 이신칭의의 도를 제대로 붙드시기 바랍니다. 선한 행위에 어떤 공로를 두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이신칭의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보고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를 낳을 수밖에 없는 믿음을 보고서 기뻐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을 ‘믿는 의지나 결단’으로 착각하는데 믿음은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지 그리스도를 믿으려고 하는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행위나, 그리스도가 없는 믿음은 결코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오늘 본문에 하나님은 ‘값없이’ 생명수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목마른 자’에게 주십니다. ‘목마른 자’를 우리는 어렵게 말해서 ‘오직 믿는 자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분명, 행위의 가치를 평가절하해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더욱더 선한 일을 힘써야 하며(갈6:6-10), 선한 일을 할 때 낙심하지 말아야 하며, 또한 서로가 서로를 더욱 권면하여 더욱 선한 일을 하도록 교훈해야 합니다. 그러나 구원에 관한 한,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수에 관한한 우리는 그 어떠한 행위의 가치를 인정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을 보십시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것은 ‘이기고 지는 것’에 달려 있는 것이지 우리의 선행이나 공로를 쌓는 것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믿는 자들은 곧 이기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믿는 자들을 ‘행동하는 자들’이거나 혹은 ‘공로를 많이 쌓는 자들’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믿는 자들은 이기는 자들입니다. 참 믿음에 대해 많은 오해가 있는데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믿음을 어떤 ‘관념’이나 ‘주의’, 혹은 ‘신조’나 ‘어떤 교리를 인정하는 지적인 동의’등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어떤 사실을 단순히 지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믿음은 본질적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믿음은 상당히 전투적인 용어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믿는 자들을 ‘침노하는 자’라고 표현하신 적이 있습니다. 믿는 자들은 결코 책상에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믿는 자들은 이기는 자들입니다. 무엇을 이기는 것입니까?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는 것입니다. 어떻게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마귀를 이긴단 말입니까? 열심히 구제하고 선한 일을 행하면 이기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참 믿음은 세상을 이미 이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시뢰하는 믿음이 아니고서 죄나 세상이나 마귀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요일5:4,5)
그러면 믿지 않는 자들은 누굽니까? 늘 지는 자들입니다. 늘 패배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지도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죽기까지 사랑하신 자들을 자기의 가족으로 여기는 마음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 마음은 늘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4:17,18)고 했습니다. 죄를 이기지 못한 인생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두려워 숨었지 않습니까? 죄인들의 특성은 이처럼 자신을 자꾸만 은폐하고, 엄폐하며, 도망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승리한 자들의 특성은 죄를 자백하며, 주님께 더 가까이 가는 자들입니다. 본무누에서도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서로 동일시되고 있습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또한 ‘흉악한 자들’이며 ‘살인자들’이며 ‘행음자들’이며 ‘술객들’이며 ‘우상숭배자들’이며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는 자들을 가리켜서 성경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들을 단지 문자적으로 보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제 6계명과 7계명 등에 대해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을 참조해보시면 이 단어들이 단지 문자적인 의미에서 끝나는 것이 아님을 알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거짓말 하는 자들’은 ‘진리를 거부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주어진 최후의 운명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믿지 않는 자들을 이렇게 무자비하게 불못에 집어던지십니까? 이것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이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 하나님만 생각하고, 그 아들을 이처럼 사랑하신 하나님은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인 것입니다. 전에 말씀드렸지만 그 아들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이 지옥을 건설했고, 지옥에서 영원한 불꽃이 타오르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너무 너무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세상을 사랑하셨는데 그 사랑을 거절하는 것이 영원한 불못에 들어갈 정도로 무서운 죄가 안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 아들을 거부하는 자들이 영원한 불못에 참예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온 인류의 운명을 결정짓는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는 가 아니면 거부하는 가입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영원한 사망이 있을 뿐입니다. 아들을 거부하고, 아들이 흘리신 피를 부정하다고 여기는 자들에게 영원한 불못이 주어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다른 각도에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영원토록 피어오르는 지옥의 화염을 보면서 하늘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영원히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계십니까? 여러분은 그분을 알고, 그분은 여러분을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뜻이 있어서 여러분을 불러주셨습니까? 여러분이 부름 받은 자임을 알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과 영광스럽게 올리게 될 마지막 결혼식에 대해서 기대하십시오. 최후의 결혼식이 저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와 교회가 결혼식을 올리게 될 그 날을 사모하십시오. 이것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붙잡아야 할 참 소망입니다. 이 소망이 없다면 여러분은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깨어 일어나십시오. 신랑되신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사랑하는 독생자를 위해서 교회를 예비하시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데렐라’ 이야기를 아십니까? 신데렐라 이야기는 바로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나는 나 자신을 신데렐라로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간주하고 사십시오. 지금 우리의 모습은 비록 누더기 옷을 걸치고 언니들에게 구박을 받고 있지만, 세상의 아무도 우리를 알아주지 않지만 그러나 우리는 진정한 ‘신데렐라’입니다. 그날에는 유리구두가 아니라 오직 믿음이란 표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신부로 판명될 것입니다. 거듭난 자들은 이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살 때에 결코 주눅 들지 않는 것입니다. 구박을 받고 멸시를 받고 시련과 환난을 겪더라도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진정한 신데렐라입니다. 바로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들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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