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설교

요한계시록 강해(51)-새 예루살렘의 영광II(계21:18-27)

등불지기 2012. 3. 3. 19:45

주님, 제 마음 눈을 밝혀주셔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어떠한지 보게하여 주십시오.

서로 비교하고, 낮은 자존감으로 힘들어하고 상처받는 일이 없도록

주님 앞에 선 내 모습의 영광스러움을 보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스도의 찬란한 신부로서 당당해지게 해주십시오.

세상의 부귀영화 앞에서도 결코 주눅들지 않게 해주십시오.

김광락 선교사 올림.

 

요한계시록 강해(51)

 

새 예루살렘의 영광(2)

 

본문: 계21:18-27

 

21:18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21:19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세째는 옥수요 네째는 녹보석이요

21:20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정이라

21:21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21:22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21: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21:24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

21:25 성문들을 낮에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는 밤이 없음이라

21:26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

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그리스도의 영광과 교회의 영광은 요한계시록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먼저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여주면서 시작합니다.(1장) 이제 요한계시록은 끝부분에서 우리에게 교회의 영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21-22장) 요한계시록을 계속 읽어 갈수록 우리는 교회의 영광을 알게 됩니다. 그 아름다움을 볼 때 우리는 참으로 황홀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변화산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실 때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이 어떤 것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너무 황홀한 나머지 “주여,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이곳에서 초막을 짓고 계속 살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마17장) 마찬가지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이 보여주는 그리스도의 영광, 그리고 교회의 영광 앞에서 우리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자들이 바라본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육신의 눈으로 볼 때 그분은 참으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으며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는 외모”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예수님은 참으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면 교회는 한낱 인간들이 이기적으로 모여서 자기들끼리만 교제하는 이상한 집단처럼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눈으로 볼 때 세상에서 교회만큼 영광스러운 곳은 또 없습니다. 오직 믿음의 눈을 통해서만 그 영광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는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통해서 이 복된 영광을 여러분과 함께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즐거운 일인지 모릅니다. 이 영광을 바라보는 것은 우리의 힘이요 기쁨입니다. 이 힘으로 모든 일을 능히 감당할 수 있으며, 이 기쁨으로 어떤 시련에서도 넘치는 감사를 드릴 수가 있습니다. 이 영광을 아는 지식이야말로 모든 환난 가운데서 기쁨으로 견디며 승리하게 하는 능력입니다.(골1:11)

저는 그리스도인의 성숙도를 그 영광을 아는 지식으로 측정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교회의 영광을 알 것이라는 말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흠 많고 결점이 많은 지상 교회들 속에서 흠 없고 거룩한 천상 교회를 바라볼 수 있다면 참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성숙함은 바로 그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의 영광을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는 여러 종류의 교단들, 교회들, 제도와 정치의 다양함 속에서 때로는 교회의 어떤 모습을 보고서 실망하거나 절망할 때가 있습니다. 한때 세상에 높은 윤리기준과 정치기준을 제시했던 교회가 지금은 세상의 기업보다 못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치부와 타락과 권위주의와 세속화의 길을 걸어가는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가로등 같은 십자가는 많지만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 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 같은데 마치 백화점의 바겐세일처럼 마케팅 전략을 펼치는 모습을 보면 이곳이 과연 하나님을 섬기고 영혼을 섬기는 교회인가 아니면 돈을 벌기 위한 회사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시 교회의 영광을 바라보고 회복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영광은 교세의 확장이 결코 아닙니다. 믿음과 교리의 순수함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정체성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위기는 다름 아니라 정체성의 위기입니다. 어쩌면 요한 사도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로마의 핍박 아래 쓰러져가는 주님의 교회를 바라보면서 늙어가는 자신의 황혼기를 바라보는 것처럼 안타까움을 느꼈을는지 모릅니다. 살아생전 오실 것 같았던 주님은 기다려도 오시지 않고 오히려 원수들은 더욱 사나운 모습으로 날뛰고 있으니 말입니다. 마지막 남은 사도는 목숨이 다해가고 있으며 교회들은 핍박 아래 약해지고 쓰러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구주와 교회의 영광을 아는 지식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세상 속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를 바라보면서 여러 가지 이유로 가슴 치는 모든 주의 종들을 위로하시기 위해 주시는 계시의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교회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가장 적절한 말씀입니다.

본문은 새 예루살렘의 아름다운 모습을 상세하게 그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교회의 모습입니다. 계속해서 신부의 아름다운 자태를 감상하겠습니다. 우리 마음으로 그 아름다운 모습을 그려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시는지 귀를 가만히 기울여보기 바랍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는 새 예루살렘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과 성곽입니다. 성은 하나님이 구원하신 백성들의 총회를, 성곽은 하나님의 보호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즉, 성과 성곽은 하나님 나라를 가리킵니다. 주의 나라를 보십시오. 11, 12절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 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 두 천사가 있고...”라고 묘사한 것이 18절에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본문이 묘사하는 방식은 멀리서부터 점점 거리를 좁혀 들어가면서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원근법을 따라 예루살렘 성 안으로 가까이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럴 때 점점 우리는 황홀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의 시선을 성벽에 고정시키고 있습니다. 멀리서 바라볼 때는 “크고 높은 성곽” 이었는데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까 성곽이 ‘벽옥’으로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여기서 ‘성벽’은 하나님의 크신 구원과 보호하심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성벽이 벽옥으로 쌓였다는 말은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구원이자 방패가 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면 계시록 4:3에서 벽옥은 하나님의 형상을 묘사하는 보석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성벽이 벽옥(jasper)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새 예루살렘의 보호막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성을 파수하고 보호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성곽은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이 성의 방패가 되십니다. 그분 자신이 그의 백성을 친히 두르시고 계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얼마나 견고하고 안전한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 자신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와 같은 보호하심을 입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믿음뿐입니다. 아브람을 보십시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아브람이 소돔왕의 제안을 거절한 것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급을 바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상주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이와 같이 믿음으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상 주심을 바라볼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의 방패와 상급이 되어주겠다”고 친히 약속하셨습니다.(창15:1) 여러분, 구원을 받으셨습니까? 거듭 말하지만,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곧 하나님 자신을 방패와 상급으로 받았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을 얻은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을 얻은 것이 아니라면 무엇을 얻는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하나님을 얻는 것이 아니라면 세상 모두를 다 가진다고 하더라도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려도 하나님 한분만 얻는다면 진정한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성벽’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구원에 대해 생각할 때 하나님 자신과 분리하여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친히 크고 높고 영화로운 성곽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구원을 받았습니까? 아니 하나님 자신을 얻었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의 방패와 상급이 되어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시고 영화로우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성곽이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여러분을 친히 두르시고 계심을 믿으십시오. 아무도 여러분에게 주어진 영생을 넘볼 수 없고 빼앗아 갈 수 없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면 성은 어떻습니까? 본문에 “그 성은 정금과 맑은 유리 같더라”고 했습니다.(18절) 성곽은 하나님의 보호를 의미한다면, 성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전체 총회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건설하신 새로운 사회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로 이루어진 사회입니다. 그런데 이 성이 정금과 같고 맑은 유리와 같이 맑다는 것은 이 총회가 매우 귀하고 정결하며 흠이 없으며 책망할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교회가 실수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생애에 중대한 죄악을 범했지만 성경은 그가 일평생 하나님 앞에 온전했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보십시오. 그래도 교회가 정금과 같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습니까? 교회가 흠이 없어서 결코 책망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써 교회를 어떻게 단장하셨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리스도는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말씀으로 교회를 깨끗하게 하시고 거룩하게 구별하셨습니다. 교회가 거룩하다는 말은 피 값으로 지불하여 하나님의 것이 되었기 때문에 구별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에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자기 앞에 서 있는 영광스러운 신부로 여기고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모든 죄와 허물들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계십니다. 교회가 실수나 허물이 없다는 것은 그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기 것으로 주장하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얼마나 실수가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께서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간주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나는 죄를 범하지 않거나 죄가 없다거나 혹은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범하는 죄는 그리스도에게 상처를 주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내가 죄를 범해도 회개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죄를 미워할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더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골1:22)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불같은 열심은 반드시 그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단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며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흘리신 피는 너무나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보혈을 흘리신 사람들은 실로 정금과도 같이 배우 보배로운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교회를 조직이나 단체로 보지 말고 구주께서 피 흘려 죽기까지 사랑하신 사람들 하나 하나를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귀합니까? 사람의 가치가 귀해서가 아닙니다. 사람은 몸이나 마음이나 어느 하나라도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은 없습니다. 사람이 가치가 있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귀하게 보시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그렇게 귀하신 보혈을 흘려주셨기 때문에 귀한 존재들입니다. 구주께서 피 흘려 죽기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에 귀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선한 일을 했거나 땀 흘려 수고를 했기 때문에 귀한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여기 매우 평범한 돌멩이 하나가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 자체는 아무 가치도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대통령과 같은 매우 높은 사람이 그것에다가 대단한 가치를 부여한다면 매우 비싼 것이 될 것입니다. 교회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교회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그 성이 정금과 같다는 말은 너무 간단하게 표현한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바라볼 때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그런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나 같은 사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치르신 값비싼 대가를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행위는 별 볼품이 없는 것들뿐입니다. 그러나 나 같은 인생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그 모든 선한 일들을 생각해보십시오. 바로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자존감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또 맑은 유리와 같다고 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피 흘려 죽기까지 사랑하신 백성들이 결코 흠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맑은 유리는 요한 당시에 매우 값비싼 물건이었으며, 가장 깨끗한 보석이라고 여겨졌습니다. 맑은 유리는 그 어떠한 티나 더러운 것도 다 드러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볼 때 얼마나 흠이 많습니까? 하물며 우리가 다른 사람을 볼 때 더욱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를 통해서 교회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들의 죄는 이미 전부 다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와 허물들이 다 씻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교회는 아무런 죄가 없다고 주장해도 된다는 말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거짓말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죄를 고백함으로써 우리의 양심을 씻어야 합니다. 언제나 정결한 심령을 사모하면서 자백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백하면 할수록 하나님은 더욱 우리를 귀하게 보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애통해하며 자복하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면 할수록 하나님은 더욱 더 우리를 사랑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라볼 때는 참으로 허물투성이 인간들이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를 ‘보배로운 백성’으로 ‘정금과 맑은 유리’처럼 여기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는 참으로 감사할 뿐입니다. 참으로 감사한다면 우리는 더욱 더 정결함을 사모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불의와 더러운 것을 싫어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계시는지를 제대로 아는 인생이 마음대로 온갖 죄와 더러운 것을 감히 행할 수 있겠습니까? 내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고통을 겪으신 예수님을 안다면 그럴 수 있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복음의 소망입니다. 복음의 소망을 붙잡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지를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참 소망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의지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충만을 경험하게 하기 원하시며, 우리와 화목을 누리기를 원하고 계시며, 우리를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전혀 없는 거룩한 신부로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세우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시려고 하는 의지를 이해할 때 비로소 우리는 참 소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날마다 넘어지고 실수하는 삶을 살면서도 오히려 선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할 수 있는 이유인 것입니다. 우리는 신실하지 못해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은 늘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본문은 오늘 우리에게 참 소망이 어디에 있는가를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붙잡아야 할 소망은 다름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려고 하는, 그리고 우리를 이토록 거룩하고 아름답게 단장하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를 아는 지식에서 솟아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계획과 의지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과 의지를 바라보십시오.

요한 사도는 새 예루살렘의 성곽을 보다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jasper)이요, 둘째는 남보석(sapphire)이요 셋째는 옥수(chalcedony)요 넷째는 녹보석(emerald)이요, 다섯째는 홍마노(sardonyx)요 여섯째는 홍보석(sardius)이요 일곱째는 황옥(chrysolit)이요 여덟째는 녹옥(beryl)이요 아홉째는 담황옥(topaz)이요 열째는 비취옥(chrysopra년)이요 열한째는 청옥(jacinth)이요 열둘째는 자정(amethyst)이라”(19,20절) 이러한 보석들을 열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각각의 보석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요한이 목격한 성곽의 기초석들이 이러한 보석들로 단장되었다는 말은 매우 귀하고 보배스럽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특별히 여기서 언급된 보석들은 대제사장의 흉패에 물리는 보석과 같습니다.(출28장 참조.) 제사장들이 입는 의복을 살펴보면 새 예루살렘 성을 묘사한 것과 흡사한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제사장이 입는 의복의 특징은 그 가슴에 ‘판결흉패’라는 12보석을 물린 판을 다는 것입니다. “아론이 성소에 들어갈 때에는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기록한 이 판결 흉패를 가슴에 붙여 여호와 앞에 영원한 기념을 삼을 것이니라. 너는 우림과 둠밈을 판결 흉패 안에 넣어 아론으로 여호와 앞에 들어갈 때에 그 가슴 위에 있게 하라 아론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판결을 항상 그 가슴 위에 둘지니라.”(출28:29,30) 제사장의 가슴에 붙이는 12보석판을 ‘판결흉패’라고 이름 붙인 이유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12가지 형형색색의 보석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의롭다고 하시는 선언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의롭다 선언하신 것 위에 서 있는 자들입니다. 즉, 칭의가 그들의 모든 기반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이 칭의의 교리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칭의가 무너지면 교회도 무너지는 것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된 백성들을 그들의 행위와 공로에 아무런 관계가 없이 그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즉, 칭의는 그 아들의 의를 그 아들을 믿는 자들에게 거저 전가해주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일입니다.

이제 요한은 성문을 통과하여 성안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 열 두 문은 열 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21절)고 했습니다. 성문들은 진주로 되어 있다는 것은 성문들이 매우 위엄이 있고 존귀하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특별히 진주라는 보석은 성도들의 믿음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참된 믿음으로 이 성에 들어갈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참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그것은 불같은 시련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입니다. 저는 그것을 ‘연단받은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그 성문이 진주로 되어 있다는 말은 오직 연단 받은 믿음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고대 세계에서 진주는 시련의 눈물을 의미했습니다. 이것은 성곽을 떠받치는 열두 보석과는 분명 다른 차원의 성격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성격입니다. 영광스러운 천국의 교제에 들어가려면 진주로 만든 문들을 통과해야 합니다. 오늘날 연단 받는 믿음에 대해서 교회는 점점 무지해져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험을 견디고 참는 일에 ‘옳다’고 인정함을 받지 않으면 영광의 면류관을 받아 쓸 수가 없습니다. 단련된 믿음이 아니면 시련의 불과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 시온성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126:5,6)고 했으며,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시84:6,7)고 했습니다. 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성도들의 즐거운 교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성도의 교제는 눈물의 가치를 아는 자들에게 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눈물의 골짜기를 통과한 성도들만이 기쁨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이제 요한은 문들을 통과하여 성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문자적인 뜻으로 볼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영광을 보여주는 장치들입니다. 특히, ‘성의 길’은 성도들의 교제와 사귐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습니다. 저는 ‘교통한다’는 표현은 ‘교제한다’는 말보다 더욱 그 의미를 잘 그려준다고 믿습니다. 성도들이 서로 교제하는 것은 다른 동기나 목적이 개입되지 않습니다. 성도들의 사귐은 매우 순전하고 순결하며 매우 보배로운 것입니다. 성도의 사귐을 귀하게 여기십시오. 성도의 사귐에 다른 동기가 개입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천국의 교제는 매우 거룩하며 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다음에, 요한은 이제 성안에 나 있는 길을 통하여 깊숙이 들어갑니다.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22절) ‘성전을 보지 못했다’는 말은 ‘아무리 찾아보아도 성전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새 예루살렘 성에는 성전이 있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 어린양이 친히 그 성전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본문은 하나님의 주되심과 전능하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라는 명칭은 하나님의 장엄하심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새 예루살렘 성에는 성전이 따로 없습니다.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 사귀고 교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 예배당을 ‘성전’이나 강대상을 ‘제단’이라고 부르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주님께서 친히 임재하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다른 중보자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직접 전능하신 분의 이름을 불러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서 교제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이 늘 함께 있습니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23절)고 했습니다. 성전이 필요 없듯이 이제 태양도 필요 없습니다. 새 예루살렘 성에는 결코 어둠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언제나 찬란하게 빛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요한복음을 읽어보시면 '밤’ 혹은 ‘어두움’이란 단어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밤’은 ‘영적 무지’나 ‘죄악이 지배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무지한 상태를 ‘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4,5)고 했습니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 안에서 우리는 모든 영적인 진리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모든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잘 아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계시하여 주신 것만큼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하여 주신 것은 우리가 믿고 순종하는 데 필요한 부분에 제한되어 있습니다.(신29:29참조) 오직 성령의 빛으로 우리 어둔 심령을 조명해주신 정도만큼만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날에는 결코 그런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거나 깨닫지 못하는 부분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지금은 희미하지만 그날에는 모든 것을 밝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날에는 우리가 진리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 알고, 그 영광의 빛을 따라 우리가 평소 이해하지 못했던 모든 부분들이 명확하게 그 실체를 드러내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 찬란하게 빛나게 될 것에 대해서 오래 전에 이미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입니다. “다시는 강포한 일이 네 땅에 들리지 않을 것이요 황폐와 파멸이 네 경내에 다시없을 것이며 네가 네 성벽을 구원이라, 네 성문을 찬송이라 칭할 것이라.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취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영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다시는 네 해가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영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마칠 것임이니라”(사6018-20)

그곳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어린양의 영광이 찬란한 빛이 될 것입니다. 모든 어둠을 밝혀주게 될 것입니다. 그 빛이 얼마나 찬란하고 탁월한지에 대해서 요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24절) 여기서 말하는 ‘만국’과 ‘땅의 왕들’이 누구입니까? 새 예루살렘의 주민들과 다른 무리들이 세상에 있다는 말입니까? 역사의 마지막에 세워질 새 예루살렘 성 말고 다른 민족과 왕들이 있다는 말입니까? 세대주의 천년설은 여기서 맹점을 드러냅니다. 어떤 사람들은 새 예루살렘 성이 세워지면 천년 동안 성도들이 그 성에서 살면서 세상을 다스리며, 세상의 나라들과 세상의 통치자들은 새 예루살렘으로 공물을 정기적으로 바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분히 유대주의적 해석입니다. 만약 그런 해석이 맞다면 계시록 20장에서 천년 동안 왕노릇한 후에 최후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에서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합니까? 무슨 유성이 내려오는 것이란 말입니까? 본문에서 만국과 땅의 왕들은 누구란 말입니까? 최후의 심판을 받았는데 다시 그들이 살아서 다른 나라를 이루어서 살 것이라는 말입니까?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보면서 요한계시록이 어떤 구조를 가지고 서술하고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혼란을 빚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나선형 방식으로 진리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오래된 저술습관 중에 하나입니다. 서론 본론 결론이라는 직선적인 서술 구조가 아닌 것입니다. 만약 나선형이 아니라 직선적인 서술구조라면 최후의 심판 후에 만국이 존재하고 땅의 왕들이 존귀와 영광을 가지고 성으로 들어오는 것을 도무지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이미와 아직’이라는 구도 속에서 파악한다면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은 이미 임하여 있지만 아직 임하지 않은 것입니다. 분명, 만국과 땅의 왕들은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믿지 않는 사람 중에서 가장 존귀한 자라고 할지라도 이 도성으로 들어올 때는 자신들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하여 이 성에 경의를 표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성에 들어오게 되는 자는 그 어느 누구라도 최고의 영광을 가지고 들어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헌신을 의미합니다. 그토록 이 도성의 장엄함과 존귀함이 탁월하다는 말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뛰어나고 탁월하며 높은 명성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이 성으로 들어올 때는 모든 영광과 존귀를 주님께 돌리면서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 찾아왔던 부자 청년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말씀은 새 예루살렘 성이 세워졌는데 믿지 않는 이방인들이나 세상 통치자들이 존재할 것이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오직 새 예루살렘 성의 영광과 존귀를 강조하기 위해서 기록된 것입니다. 이처럼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나라에 들어오는 데 고개를 뻣뻣이 쳐들고 의기양양하게 들어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 성은 너무나도 뛰어나고 탁월하고 영광스럽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그 어떤 존귀한 자라도 모든 존귀와 영광을 나타내지 않고서 이 성에 들어올 수는 없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뛰어난 자라도 교회의 영광을 일단 볼 때 그들은 즐거이 자신을 헌신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새 예루살렘 성의 주민이라면 이 성에 들어올 때 여러분이 어떤 영광과 존귀를 바치면서 들어왔는지 기억하실 것입니다. 아마 자신의 모든 영광과 존귀를 바치겠노라고 서원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도성의 영광과 존귀와 탁월함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아마 이 도성의 바깥에 아직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참 헌신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면 이 도성의 영광을 아직 알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지금 그 성은 모든 만국을 향하여 활짝 열려 있습니다. “성문들을 낮에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는 밤이 없음이라”(25절)고 했습니다. 성문들을 닫아두는 이유는 밤이 있기 때문입니다. 밤이 되면 적군들이 기습해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성문을 굳게 잠그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않는다는 말은 안전하다는 말입니다. 원수들의 공격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적의 기습은 전혀 없습니다. 밤은 지나가고 오직 환한 대낮만이 있을 것입니다. 모든 어둠의 세력이 사라졌기 때문에 더 이상 문을 닫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범죄할 가능성도, 미혹을 받을 가능성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목적으로 문이 열려 있습니다. 아직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이 들어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성의 주인장이신 그리스도께서는 회개하는 모든 죄인들을 영접하시기 위해 문을 활짝 열어놓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진리로 나아오는 자들은 거부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회개하는 자들은 이 성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구원의 날입니다. 온 세계에 구주의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지금 들어가야 합니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자들은 이 영광스러운 도성으로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지체하지 마십시오. 머뭇거리지 마십시오. 기회는 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주께서 재림하시면 이제 문은 굳게 닫힐 것입니다. 그 때는 소리치고 두드려도 굳게 닫힌 문은 열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마25:11,12) 지금 새 예루살렘 도성은 천하만국을 향하여 활짝 열려 있습니다. 어서 들어갑시다.

이 문으로 들어가는 자는 참으로 복이 있는 자들입니다.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26,27절)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이 성으로 들어오는 자마다 자신들의 방식으로 모든 영광과 존귀를 바칠 것입니다. 결코 대충 들어오지 않을 것입니다. 중국 사람들이 이 성으로 들어올 때와 미국 사람이 이 성으로 들어올 때와 한국 사람이 이 성으로 들어올 때 모두 획일적인 방법과 내용으로 영광과 존귀를 바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기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식으로 영광과 존귀를 바쳐드릴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성에는 결코 아무나 들어올 수 없습니다. 들어오고 싶다고 들어오는 데가 아닙니다. 뇌물을 바치겠다고 해서 받아주는 곳도 아닙니다. 영광과 존귀를 바치겠다고 해서 받아주는 곳도 아닙니다.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을 행하는 자들은 들어올 수 없습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5:19-21)라고 했습니다. 이 성에 들어오지 못하는 자들은 세 부류입니다. 첫째는 속된 일을 행하는 자입니다. 둘째는 가증한 일을 행하는 자입니다. 셋째는 거짓말하는 자들입니다. 속된 것은 온갖 세속적이고 음란하고 부도덕한 삶을 의미합니다. 가증한 일은 우상숭배와 관계된 것입니다.

특별히 거짓말하는 자들이라고 언급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거짓말하는 자들이란 “진리를 거부하고 진리를 따라 살지 않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거짓말에 대해서 모호한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말과 거짓말의 기준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한 마디 말을 하지 않아도 거짓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아침에 밥을 먹었는데 안 먹었다고 하는 것이 거짓말입니까? 그렇다면 바로왕 앞에서 십브라와 부아라는 두 산파가 한 말은 분명 거짓말인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신 것은 거짓말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신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보십시오. 그러면 십브라와 부아에게는 거짓말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또 여리고성의 기생 라합이 여리고 왕에게 한 말은 거짓말인데 하나님께서 라합을 구원하셨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입니다. 평생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자부하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거짓말하는 자로 판명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거짓말하는 자는 다름 아니라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자기 기준을 따라 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살아야 합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는 자들이 정직한 자들입니다. 잠언 30:5,6에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순전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지 않는 자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자들은 나름대로 진실하게 산다고 주장할지 몰라도 다 거짓말하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거짓말하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어떤 분이 죽을 병이 들어 병원에 입원했는데 심방 가서 “회개하고 주님을 믿으라”고 권면하니까 대답하기를 “나는 감리교 권사로서 나름대로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려고 노력했고 내 삶과 가정에 충실했다고 자부하는데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가?”라고 반박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분명히 대답하지 못하고 돌아가서 기도하는데 주님께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이 가슴에 깊이 새겨지자 할 말이 생각이 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시 병원을 찾아가서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은 것이 죄”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 말씀을 들을 때 자신이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살았고 남에게 특별히 해를 끼친 일이 없다고 해서 자신이 죄가 없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깨닫고 자신이 그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지 않고, 자기 기준대로 살았던 것,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지 못했던 과거를 깊이 뉘우치고 회개한 후 임종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에서 거짓말하는 자들은 세상이 생각하는 그런 뜻과는 분명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지 않는 자들이 거짓말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잠언에서 아굴이라는 지혜자는 이렇게 기도했던 것입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잠30:7-9) 경건생활을 하려면 두 가지 은총이 임해야 합니다. 헛된 일에 마음을 뺏기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들을 기준으로 삼으려는 인간의 죄악성을 주님께서 고쳐주셔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으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애쓰게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직 주께서 내 마음 속에 은혜를 주셔야 합니다. 두 번째는 내 마음뿐만 아니라 내 삶과 환경에서도 적절한 은혜를 주셔야 합니다. 지나치게 부유하거나 지나치게 가난한 것도 모두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장애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누가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수 있단 말입니까? 인간의 노력과 의지와 선행과 결단으로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이 성에 들어갈 수 있는 자들은 오직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작정하신 자들입니다.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고 했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작정에 달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번 작정한 인생은 반드시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특히 “어린양의 생명책”이라고 표현한 것에 주목하십시오. 천지만물을 만드시기 훨씬 이전에, 사람을 당신의 모양과 형상으로 지으시기 훨씬 이전에 성부와 성자는 영원한 협정을 체결하셨습니다. 그것은 성자께서 어린양으로 대신 죽을 인생들의 명부를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그 고유하신 권한으로 그리스도의 피 값이 적용될 인생들을 아셨고 또 정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들로 그 아들의 아내로 삼으시기 원하셨습니다. 이 놀라운 계획을 많은 선지자들이 예고해왔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성자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어린양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새 예루살렘 성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보배로운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구속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부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심으로 구속하신 자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한 자들로부터 이 복음이 천하만국에 전파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전파되는 이 복음의 말씀으로 창세전에 미리 작정하신 자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창세전에 미리 작정된 인생들은 복음의 말씀이 들리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을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듣고 부르심에 응답할 것입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은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이 다 복음을 듣고 부름을 받을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어린양의 생명책에 그 이름들이 기록된 자들입니다. 그들은 곧 깨닫게 될 것입니다. 자신들의 의지와 결단으로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 때문에 이렇게 황홀한 부름을 받게 되었음을 알고서 점점 감격해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다시 오시는 그 날에 그 감격은 절정에 달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 복음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까? 그리고 이 복음이 주는 소망이 있습니까? 새 예루살렘의 문을 통과해 들어간 자라는 감격이 있습니까? 새 예루살렘의 탁월한 영광을 알고 있습니까? 아니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영광스러움을 알고 계십니까? 우리는 점점 개인화되어가고 이기주의적이 되어가는 시대 속에서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가족은 분열되고, 교회는 점점 차가워질 것입니다. 사람들은 점점 자기 자신을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해지고 있습니다. 이럴 때 교회는 어떻게 응전해야 합니까? 요한계시록이 보여주는 새 예루살렘의 영광을 아는 지식으로 응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새 예루살렘의 영광은 오늘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필요한 모든 위로와 격려가 다 들어가 있습니다. 이 말씀에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망을 되찾아주는 힘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의 자존감의 비결이 담겨 있습니다. 이 말씀에는 그리스도인들의 담대함과 지혜와 용기가 담겨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세상의 영광 앞에서 결코 주눅 들지 않게 해주는, 아니 더 나아가서 세상에서 잠간 시험을 겪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 크게 기뻐하게 해주는 위대한 능력을 제공해줍니다. 이 영광을 아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진정한 능력입니다. 이 영광을 알 때 우리는 기쁨으로 헌신하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시11:2,3)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마13:44-46) 여러분 밭에 감추인 새 예루살렘의 영광을 발견하십시오. 그 무궁한 가치와 영광과 존귀를 깨달으십시오. 그리스도의 영광, 그리고 새 예루살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 충만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 영광스러운 어린양의 신부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