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설교

요한계시록 강해(53)-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계22:8-15)

등불지기 2012. 3. 3. 19:51

요한계시록 강해(53)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본문: 계22:8-15

 

22:8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22:9 저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

22:10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22:11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22:14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22:15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

 

우리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은 모든 인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우리는 차원이 다릅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시며 초월하시지만 우리는 유한하며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만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먼저 길을 열어주지 않으시면 불가능합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계시”(아포칼립시스)라고 대답하겠습니다. 계시는 하나님께서 먼저 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이 ‘계시’란 말의 숨은 뜻은 “커튼을 벗기다” 혹은 “감추인 것을 드러내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 “계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시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선행이나 명상을 통해 하나님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알 수 있다고 하는 다른 종교와 기독교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입니다. 구원은 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구원은 수행하고 명상하여 “깨달음”을 얻는 것이 곧 구원이라고 가르치는 불교와 다릅니다. 불교는 스스로 하나님이 되는 길을 가르치지 결코 하나님을 만나는 길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물론 기독교 역시 “깨달음”을 말하지만 불교처럼 삼라만상의 이치와 존재의 근본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아는 것이 우리의 영광이요 구원입니다. 여러분,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를 기억하십니까?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듣고 나름대로 연구하고 묵상해서 예수님에 대한 굉장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니고데모의 자부심을 예수님께서는 여지없이 깨뜨려버리셨습니다. “네가 거듭나지 않고서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이 말씀은 니고데모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자연인의 상태에서는 결코 진리를 알 수 없고 볼 수도 없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껏 그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종교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계시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지 결코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계시를 받은 사람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계시를 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에 대한 개념적인 지식을 얻는 것을 의미합니까? 개념적인 지식을 ‘믿음’과 혼동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2:19)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계시를 받는 사건을 가리켜서 성령을 받는 사건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은 계시의 영이십니다. 그래서 계시의 사건은 곧 성령의 사건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물론 책상에서 여러 신학서적을 탐독한 뒤 하나님에 대해서 여러 가지 지식을 쌓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지 못하면 결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유능한 신학자라고 반드시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남을 가르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코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마음에 감추인 은밀한 계획을 깨닫게 해줍니다. 여러분이 저에 대해서 많이 안다고 할지라도 저의 영을 가지지 않은 이상 저에 대해서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저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울고 있을 수 있습니다. 저의 영이 아니면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의 영을 여러분에게 나눠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영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계시와 성령의 중요성에 대해서 분명히 말씀합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은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2:10-14)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까? 성령을 받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서 우리가 사실상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영적 무지를 발견해야 합니다. 자신의 무지를 알지 못하면 하나님도 알지 못합니다. 실제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서 얼마나 무지한가를 절실히 체감하게 됩니다. 반면,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심령이 주린 자’로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영적 무지를 발견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무지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음에 대해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처분을 겸손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온유한 자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의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며 온유해야 하는 등 성령을 받기에 합당한 상태로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 말씀의 권위를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의 유일한 통로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순전함을 인정하면서 그 말씀에 가감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심령’이 되어서 간구해야 합니다.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저희 마음을 예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시10: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51:17)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의 영을 받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얻기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그 은혜를 온전히 믿고 바라는 것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만 매달리는 것뿐입니다. 아무튼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심령이 그 은혜를 받기에 합당한 상태로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겸손해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십니다.”(벧전5:5)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싶습니까? 계시의 성령을 받고 싶습니까? 성령이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아는 참 지식을 주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최대한 낮추십시오. 그리고 겸손히 하나님이 주실 은혜를 바라고 기다리십시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겸손하고 사모하더라도 이것이 없이는 안 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분이 얼마나 영광스러우시며, 그분이 죄인들을 위하여 행하신 은혜로우신 일들은 진심으로 믿는 것입니다. 단지 지식적으로만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온 마음을 다하여 전폭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내 모든 것을 다하여 그분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성령을 받습니다.

이 계시의 사건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계시를 받은 자로서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가슴 벅찬 일입니다. 왜냐면 계시를 받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드러내시는 그분의 영광을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표적을 보았고 믿었다”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단지 기적만을 본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예수님께서 드러내신 자신의 영광을 본 것입니다. 그 영광을 볼 때 우리 안에 참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를 받는 사건은 우리 삶 중에서 가장 행복한 사건입니다. 여러분은 이 계시를 받으셨습니까? 그리고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셨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자다!”라는 인식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는 세상에서 당당하게 해줍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우리는 이 계시의 중요성을 여러 번 알게 됩니다. 요한계시록이 보여주는 여러 가지 비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단지 비전을 바라보는 것이 전부라면 이 책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자연인의 눈에 이 요한계시록의 책만큼 괴상하고 황당한 책은 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으로 당신의 교회를 향하여 끊임없이 말씀하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책은 교회를 위한 책입니다. 오직 귀 있는 자들만이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요한계시록을 살펴보면서 어떤 음성을 들었습니까?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움과 교회의 영광스러움, 세상 속에 있는 교회가 어떤 운명에 처해 있으며 어떤 과정을 통해 영화로운 단계에 이르게 되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비밀입니다. 그리고 세상과 교회에 대한 비밀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세상 속에 어떻게 실현될 것인지에 대한 비밀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비밀을 하나님께서 교회를 향하여 공개하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더 이상 감출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이 비밀은 모든 교회들에게 알려졌으며 또 알려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세상에서 교회를 통하여 어떻게 실현될 것인지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명확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세상 속에 있는 교회들이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모든 시련을 참고 견디게 해주는 복된 지식입니다.

이 계시에 대해 요한계시록의 결말 부분(22:6-21)에서는 보증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6절부터 보면 이 계시의 신실함과 진정함에 대해 천사, 요한, 예수 그리스도, 성령, 그리고 신부가 각각 증거하고 있습니다. 각각의 증언들은 이 계시록의 말씀이 참으로 신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을 갖게 해줍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이 책에 대해서 의심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책이 스스로 그 진정성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처음부터 끝까지 차분하게 읽기만 하면 이 책이 스스로 주장하는 권위에 압도당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교회도 이 책에 대해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6,7절은 계시를 담당한 천사가 직접 보증하고 있습니다.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결코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고 했습니다. 이제 8절에서는 계시를 받은 사도 요한이 직접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을 비교하면서 읽어보면 문체나 문법 그리고 어법에 있어서 매우 유사한 표현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서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요1:29)이라고 했고, 계시록에서는 무려 29번이나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서에서 예수님을 “로고스”라고 했는데, 계시록에서도 역시 같은 명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계19:13) 구원에 대한 설명도 같습니다. 요한복음이나 요한계시록은 모두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하늘과 땅” “빛과 어둠”에 대한 어법도 같습니다. 교리상의 차이나 불일치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는 사도 요한이 기록했다는 데 다들 의견일치를 보았습니다. 순교자 저스틴(주후140), 사도 요한의 제자였던 이레니우스(주후180),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주후200), 카르타고의 터툴리안(주후220), 오리겐(주후223), 히폴리투스(주후240), 등 이 책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주장을 전혀 모른다고 할지라도 이 책이 하나님의 계시이며 하나님의 종이었던 사도 요한이 천사로부터 받아 기록한 말씀임을 결코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 책이 스스로 그 권위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책의 권위를 확신해야 합니다. 이렇게 성경의 권위를 굳게 붙잡으십시오. 그것이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능력이 될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우리는 이 계시의 몇 가지 주목할만한 특성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는 계시의 장엄성, 둘째는 긴박성, 그리고 셋째는 책임성에 대한 것입니다. 먼저, 살펴볼 것은 이 계시가 참으로 장엄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계시는 계시를 받는 자로 하여금 깊고도 충만한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게 합니다. 이 계시를 받은 사도 요한의 반응을 보십시오.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계시의 장엄함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계시를 전달하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습니다. 우리가 이 계시의 말씀을 바르게 받는다면 우리 마음은 경외감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처럼 우리도 엎드리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이 황홀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영광에 대한 것이요 곧 우리 자신들의 영광스러운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확실한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 책이 말씀하는 대로 그리스도의 영광과 교회의 영광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게 되었다면 여러분의 가슴은 참으로 벅찰 것입니다. 감격스러울 것입니다. 이처럼 영광스러운 그리스도 앞에 여러분 자신이 얻게 될 영화로운 모습을 알고서 어찌 감격스럽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경외심이 생기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이 책에 대해서 조금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저는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참으로 장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외심은 단지 지적인 충족감이나 감정적인 카타르시스와 구별되어야 합니다. 이 장엄한 계시가 우리 안에 불러일으키는 경외감은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는데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참된 예배를 위한 경외심이어야 합니다. 9절 말씀을 보십시오. “저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고 했습니다. 계시를 담당하는 천사의 말을 주목해보십시오. 천사는 계시를 담당했을 뿐이지 자신이 계시의 근원이라고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천사는 이 계시의 충성된 청지기입니다. 계시를 운반하는 종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계시에 대해 자신의 권위를 직접 주장하는 듯이 말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에 대해서 속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들이 자신의 권위를 어디에다 두고 있는지 보십시오. 그리고 자신의 권위를 강조함으로써 무엇을 얻기를 원하는지를 주목해 보십시오.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도록 돕는 자인지, 자신에게 영광과 칭찬을 집중하게 하려는 것인지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거짓 선지자들과 적그리스도의 말에 현혹당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자신들을 주목하게 하지 결코 하나님께만 경배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에게 적절한 칭찬과 영광이 주어지지 않을 때 그들은 분명 화를 내고 짜증을 낼 것입니다. 자신들의 수고와 희생에 대해 알아주지 않는 것에 대해 그들은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참된 종은 자신에게 영광과 칭찬을 돌리는 것에 대해 오히려 부담스럽게 생각합니다. 참된 종은 자신들이 맡은 것을 충실하게 전달하는 것 자체로 만족하며 또한 감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참된 종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참된 청지기가 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만 경배하리라고 결심하십시오. 하나님께만 모든 영광을 돌리겠다고 결심하십시오. 여러분이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리라고 결심한다면 이 책의 말씀은 여러분에게 한없는 위로와 소망을 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책을 사랑합니다.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도록 인도하는 이 책을 저는 참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천사는 자신을 ‘종’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종’으로 인식하고 있습니까? 종의 의식이 있습니까? 주의 종은 맡겨주신 주인의 목적을 잘 알고 있습니다. 주인의 뜻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충성된 종입니다. 천사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을 때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중간에 자신이 이 계시의 근원인 것처럼 착각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변질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주인의 뜻을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주인의 목적을 저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주인 행세를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정한 목적대로 자신이 받은 계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과 보내심의 소망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반드시 충성된 청지기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소망을 잊어버리고 저버린다면 우리는 변질되고 말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많은 사람은 각기 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하나니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랴”(잠20:6)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잠25:13)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요한에게 보내셨을 때 천사는 결코 하나님의 소망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주인행세를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충성된 청지기로서 소임을 잘 감당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은 주인의 영광으로 자신의 모든 기업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천사뿐만 아니라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 모두가 함께 종된 자들입니다. 여러분이 이 책의 말씀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살아간다면 여러분들 역시 하나님의 종입니다. 종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사람에게서 영광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자입니다. 이처럼 장엄한 계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에 도움을 줍니다. 계시는 예배를 위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계시의 긴박성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고 했습니다.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이라고 했는데, 이 책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드러낸 말씀입니다. 몇 번 강조했듯이 성경이 말하는 예언이란 노스트라다무스식의 예언이 결코 아닙니다. 점장이식으로 내일이나 내년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알아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예견과 예언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이 우리에게 주는 예언의 말씀은 3차 세계대전이 언제 어떻게 일어날 것인지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세상 속에 있는 교회를 통해 어떻게 실현될 것인지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모든 교회가 알고 있는 비밀이며, 전파하고 있는 비밀이기도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예언기도”를 받는 일을 주의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예언기도”를 받는 것은 여러분의 영혼을 볼모로 잡히는 것입니다. 예언기도를 한다고 하는 사람을 조심하십시오. 저는 아가보라 하는 사람이 천하에 큰 기근이 있을 것이라고 예견했듯이 하나님의 성령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행11:28) 또한 바울 사도가 예루살렘에서 결박당할 것을 예언했듯이 예언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은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했을 때 그 예언은 점장이가 되려고 애쓰라는 말이 아닙니다.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예측하고 알아맞히는 전문가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미래를 예측할 수 있지만 성경의 범위를 벗어나서 단정하는 사람을 주의해야 합니다. 그런 식의 말들은 개인이나 교회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참 예언은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케 하는 능력이며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고 순종케 하는 능력입니다. 그것은 각 사람에게 하나님의 비밀을 밝히 드러내고 가르치는 권면과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14:19)라고 했습니다. 예언의 참 기능과 목적은 사람으로 하여금 책망하고 회개하여 진리를 아는데 이르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받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고전14:24,25)

요한계시록은 미래에 되어질 일들을 예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되어지고 있는 비밀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세상 가운데 있는 교회를 통해 어떻게 성취될 것인가가 분명히 드러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계시를 담당한 천사는 말하기를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고 했습니다. 다니엘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후에 인봉할 것을 명령받았습니다. “그가 가로되 다니엘아 갈지어다. 대저 이 말은 마지막 대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단12:9) 불과 400여년 후에 성취될 구속사역의 완성을 위해 다니엘은 자신이 받은 계시를 봉함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받은 계시는 인봉해서는 안 됩니다. 이 계시는 모든 교회들이 알아야 하고 또 전 세계에 전파되어져야 합니다. 로마 당시에 책을 기록하고 인봉하는 경우는 유언을 남긴 사람이 자신이 곧 죽지 않을 거란 생각이 있을 때였습니다. 따라서 인봉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드러내신 하나님의 계획이 곧 실행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책은 먼 훗날에 성취될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를 테면 중동전쟁이 어떻게 발발하며 그것이 유대나라의 회복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등등에 대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겁니다. 만약 20세기 말이나 21세기에 일어날 일들이라면 오히려 이 책의 말씀을 인봉하라고 했어야 타당합니다. 그러나 천사는 인봉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계시의 말씀은 고난 속에 있던 당시 교회들을 위해서 읽혀지고 또 전파되어져야 했습니다. 이 계시의 말씀은 또한 오늘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매일의 삶을 위한 것입니다. 이 책이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것입니다. 이 책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긴장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깨어서 주님 오심을 준비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모든 교회들을 영적으로 각성케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결코 잠잘 수 없습니다. 그리고 결코 침묵할 수 없습니다. 깨어 일어나서 우리를 통해 성취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놀랍고도 위대한 구원계획을 온 세상이 들을 수 있도록 입을 열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이 책이 인봉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이 책에 대해서 침묵하지 마십시오. 때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계시의 책임성에 대한 것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매우 단순하지만 그러나 해석하기가 까다롭습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를 그대로 내버려두라는 식으로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를 보고도 우리가 가만히 보고만 있으란 말입니?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선지자로 부르시고 보내실 때에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고 하셨습니다.(사6:9,10) 창세기에서 범죄한 사람이 생명나무 과실을 따먹을 것을 염려하시면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해보십시오.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창3:22) 하나님은 사람이 영생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죄인이 영생하는 것을 막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지도 않은 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고침을 받는 것은 원하지 않으십니다. 즉, 불의한 자가 그 불의한 일을 버리고 주께로 돌아와야 한다는 겁니다. 그 불의를 버리기 전에 의를 흉내 낼 수 없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조명이 없이는 이 계시의 말씀을 깨달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않고서는 결코 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며 교회는 세상이 이 말씀을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것이란 말입니다. 결국 교회는 세상이 점점 타락해져가 계속 불의를 행하는 것에 대해 직접적인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명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며 주어진 복음의 소망을 굳게 붙잡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꾸라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어둠을 빛으로 바꿀 수 없습니다. 오직 진리의 성령만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영광을 알게 해 주십니다. 하지만 세상은 자기들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질 것입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들은 자기들의 행동에 대해 자신들이 책임을 지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계시는 각 사람에게 분명한 책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계시를 거부하고 부정하고 마음대로 살든지, 혹은 계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살든지 개인이 책임을 지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 계시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고는 개인의 자유이지만 거기에 대해서 개인이 분명히 책임을 지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자신이 범한 불의에 대해 결코 변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계속 불의를 행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되느냐가 어떤 행동을 하느냐보다 우선될 것입니다. 거룩한 자는 계속 거룩한 삶을 살 것입니다. 이것이 종말입니다.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불의를 행하는 자가 의를 행하는 자가 될 수 없고 거룩하지 못한 자가 거룩한 자가 될 수 없습니다. 다니엘 선지자에게 계시를 전달해준 천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케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도 깨닫지 못하며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단12:10)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24:10-12) 이 계시에 대해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이게 될 것입니다. 하나는 이 계시의 말씀을 받고서 회개하고 정결케 되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 계시의 말씀을 무시하고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반응하는지는 각 사람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위해서 혹은 그 사람을 대신해서 내가 결정지을 수 있는 부분이 결코 아닙니다. 천사가 요한에게 “내버려두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이 계시의 말씀에 대해 반응하는 개개인의 책임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계시의 말씀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어떻게 반응하든지 간에 여러분이 알아서 하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의 행동에 따라 반드시 책임을 지게 될 것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계시가 선포된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영광중에 다시 오실 그때까지 사람들은 오직 자신들이 결정한 것에 대해 달리 변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게 될 것입니다.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러운 상태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적 상태를 바꿀 힘도 없을뿐더러 깨닫지도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들 외에는 죄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게 될 것입니다.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분명히 가르치셨습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마25:29)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는 사람은 더욱더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 안다고 하는 것까지도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비유로 가르치실 때 제자들이 비유로 가르치시는 까닭을 여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마13:11,12)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줄 아는 귀는 아무나 가진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으로 새로워진 인생만이 복음의 비밀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눈을 주신 인생은 천국의 영광에 대해 더 많이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귀를 주신 인생은 천국의 비밀에 대해서 더 많이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눈과 귀가 없는 인생은 알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까지도 사라지고 더욱 악화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인생이 얼마나 행복한지 여러 번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11:25-27)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영광스러운 계시를 받은 자는 참으로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계획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으며 어떻게 성취되고 있는지를 깨닫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 계시의 소중함을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장엄하고도 긴박한 계시를 받은 자입니까? 이 영광스러운 계시를 받았다는 감격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비밀을 여러분에게 알게 하여 주셨습니까? 구주의 영광과 교회의 영광을 보셨습니까? 그럴 때 여러분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그 장엄하고도 엄숙한 계시의 사건에 여러분은 땅에 엎드려 경배하고자 했습니까? 숨 막힐 정도로 탁월한 영광 앞에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고자 했습니까? 오직 하나님께만 모든 존귀와 영광을 돌리겠다고 결심했습니까? 이 계시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을 각성시켰습니까? 여러분으로 하여금 임박한 그날을 준비하도록 했습니까? 이 계시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에 획기적인 선을 그었습니까? 이 장엄하고도 긴박한 계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참으로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이 영광스러운 계시의 말씀을 사랑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여러분의 삶 속에서 더욱 의를 행하며 거룩한 삶을 살도록 역사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사랑하는 자들이 되십시오. 이 말씀을 가슴에 품는 자들이 되십시오. 그러면 이 말씀이 여러분을 어지러운 세상 중에서 지켜줄 것이며 인도할 것입니다. 이 복된 계시의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오직 그분께만 경배 드립시다. 우리의 구원이 완성될 때가 임박해 있습니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