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강해(50)
새 예루살렘의 영광(1)
본문: 계21:9-17
21: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21: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21: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21:12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21:13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21:14 그 성에 성곽은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이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21:15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척량하려고 금 갈대를 가졌더라
21:16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21:17 그 성곽을 척량하매 일백사십사 규빗이니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
지난 시간 우리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예비하신 신부를 결혼식에 등장시키는 장면이라고 했습니다. 이 결혼식의 주례는 성부이시며, 결혼식의 주인공은 어린양과 그 신부인 교회라고 했습니다. 아담이 잠들었을 동안 성부께서 하와를 준비하신 다음 하와를 아담에게로 이끄신 것은 역사의 마지막에 있을 이 우주적인 결혼식을 염두에 두신 일이었습니다. 지난 시간 우리가 중요하게 살펴본 것은 성부께서 그 아들을 너무나도 사랑하고 계신다는 점과, 그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신부를 예비하고 계신다는 점이었습니다. 신부를 단장하는 것은 성부께서 그 아들을 위하여 하시는 일입니다. 아들을 위하여 신부를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게 만드실 분이 성부이십니다. 우리는 이점을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아름답게 단장하는 것은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부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아름답게 단장된 신부는 성부의 손에 이끌리어 어린양 앞으로 인도됩니다.
그런데 이 결혼식에서 매우 특이한 것은 성부께서 신부의 눈물을 씻어주신다는 점입니다. 성부께서 신부를 아름답게 단장하시는 방법은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신부를 신부답게 하는 것은 땀이 아니라 눈물입니다. 신부가 자신을 단장하는 것은 선행이나 노력의 땀방울이 아니라 환난 속에 흘린 눈물입니다. 이 결혼식장에 오기까지 신부는 반드시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교회의 영성은 땀이 아니라 눈물입니다. 눈물로 범벅된 신부를 위로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보십시오. 시련을 통과하게 하심으로 신부를 단장하신 성부께서는 최후의 순간에 신부의 모든 눈물을 닦으시고 위로하시며 신랑 앞에서 영광스러운 신부로 세우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믿고 따르는 모든 인생들이 이 복된 잔치에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비전을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혼인잔치에 주인공이 될 것이라는 소망이야말로 진정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품어야 할 것입니다. 하늘로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을 우리는 늘 바라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모든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결코 낙심하지 않으며 계속 순례의 길을 전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이 우리에게 주려고 하는 위로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린양의 신부에 대해 좀 더 살펴보려고 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마지막 결혼식의 전말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본문은 우리의 눈을 신부에게 집중하게 하고 있습니다. 9절 말씀을 보십시오.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결혼식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될 신부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볼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결혼식에 하객으로 참여해보았다면 가장 많이 시선을 두는 곳이 어디입니까? 바로 신부의 모습입니다. 신랑보다는 신부의 모습에 더 많은 시선을 둡니다. 신부를 구경하기 위해서 하객들은 애씁니다. 온통 하객들의 눈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신부에게 쏠려 있습니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의 마지막에 거행될 장엄한 결혼식을 소개한 뒤 신부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신부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는 것은 오늘 우리들의 즐거움입니다. 본문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이 즐거움을 맛볼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보게 되었습니다. 어린양의 신부는 누구입니까? 바로 주님의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교회의 영광에 대해 살펴볼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가 얼마나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지, 또 얼마나 아름답게 치장했는지 살펴볼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있을 이 결혼식에 등장할 신부의 아름다운 자태를 그려보기 바랍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교회의 모습입니다. 교회는 무엇입니까? 건물입니까? 아닙니다. 바로 여러분들이 주님의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영광을 아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의 영광을 아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소망인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참 비전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진정한 자존감입니다. 오늘날 비전이나 소망이라는 말은 너무나 이기적인 야망이나 야심 찬 계획을 뜻하는 단어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세상적인 의미에서 비전이 아니라 오늘 천사들이 보여주는 비전을 붙들어야 합니다. 이 비전 앞에 다른 모든 세속적인 비전들은 의미를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오로지 참된 소망을 붙잡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비전은 하늘의 천사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어떤 천사가 이 비전을 보여주려고 합니까? 요한에게 어린양의 신부를 보여준 천사는 다름 아니라 요한에게 음녀의 심판을 보여준 바로 그 천사였습니다. 계시록 17:1을 보십시오.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천사는 자기 마음대로 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시지 않으면 어디든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시키지 않으시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계시의 장소입니다. 음녀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소는 광야입니다.(17장 3절) 반면 어린양의 신부의 영광을 보여주는 장소는 높은 산입니다.(21:10절) 둘 다 계시의 전달자는 일곱 대접을 가진 천사입니다. 이러한 장소의 변화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백성이 광야생활을 할 때에 배우는 것은 음녀와 같은 세상의 정체에 대한 지식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보좌에 가까이 나아갈 때 배우게 되는 것은 교회의 영광에 대한 지식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교회의 모습, 지상에서는 온갖 허물과 문제들로 가득찬 모습만 보이는 교회이지만 하늘에서 바라볼 때의 교회는 전혀 다른 모습인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시는 어린양의 신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에 대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재앙을 담당한 천사가 요한에게 먼저 음녀의 심판을 보여주고 난 뒤, 이제 어린양의 아내를 보여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살아갈 때 자신의 정체를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음녀의 모습과 어린양의 신부의 모습은 확연히 구분됩니다. 그래서 서로 비교해보고서 분별하는 법을 배우라는 뜻입니다. 음녀에게 미혹을 받지 말라는 뜻입니다. 순결한 신부의 정체성을 유지하라는 뜻입니다. 이 분별의 지식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에서 약해지고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을 살 때에 음녀의 화려함과 위엄에 미혹을 받거나 혹은 주눅이 들 때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초라해질 때가 있는 겁니다. 그러나 어린양의 신부가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알게 된다면 음녀의 모습에 미혹되거나 위축될 염려는 없을 것입니다. 음녀의 미혹을 받아 우상숭배하며 적그리스도를 섬긴다면 재앙을 받아 멸망할 것이지만, 어린양의 신부로서 자신이 단장되고 준비된다면 재앙을 피하여 구원을 받을 것이란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9절 말씀은 양자택일의 문제를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음녀가 되거나 아니면 어린양의 신부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음녀에 속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어린양의 신부입니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습니까?
자, 천사가 보여주는 신부의 자태를 한번 감상해봅시다. 어린양의 신부가 뽐내는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하는 것은 정말 황홀한 지경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교회의 영광을 묵상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입니다. 이 즐거움 때문에 모든 어려움도 너끈히 이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에서 시련을 당할 때 교회의 아름다움을 아는 지식이 그 모든 시련과 어려움을 기쁨으로 극복하게 해주는 진정한 능력이 된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교회의 영광을 아는 것이 시련을 이겨내는 비결이 된다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 제가 말하려고 하는 요지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요지는 두 가지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영광, 그리고 교회의 영광입니다. 이 영광을 아는 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삼손에게 그 머리털이 힘이 있었다면 우리에게는 이 영광을 아는 지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영광을 알려면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는 교회의 영광을 알 수 없습니다. 어린양의 신부가 얼마나 아름다운 자태를 지녔는지 알려면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로,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둘째,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셋째,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주목해야 합니다. 본문 10절을 보십시오.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라고 했습니다.
가장 먼저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이 감동하시는 것은 곧 계시의 사건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를 감동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도무지 교회의 영광에 대해 알 수가 없습니다. 참된 비전은 오직 성령을 받은 사람만이 받을 수 있고, 또 볼 수가 있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반드시 비전의 사람이 되고, 비전의 사람은 곧 성령의 사람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성령은 우리의 마음눈을 열어 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성령은 요한은 크고 높은 산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으면 높은 산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여기서 높은 산은 믿음의 눈을 의미합니다. 앞서 음녀의 받을 심판을 보기 위해서 요한은 ‘광야’로 가야만 했습니다. 그곳에서 음녀의 모습을 잘 볼 수 있었습니다. 광야에서는 교회의 영광이 보이지 않고 다만 음녀의 모습만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제 요한은 교회의 영광을 보려면 광야가 아닌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야만 했습니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언약의 족장들이 평지가 아닌 높은 산지를 다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높은 산지에서만 현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평지로 내려갈 때는 오직 재앙만 경험할 뿐이었습니다. 롯이 요단평야로 내려갔을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야곱이 벧엘로 올라가지 않고 숙곳에 머물렀을 때를 기억해보십시오. 그러나 높은 산지에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하실 지에 대해 계시를 받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높은 산지에서 족장들을 만나주셨으며, 그곳에서 족장들은 세계를 경경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비전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영광을 보기 위해서 광야나 평야가 아닌 높은 산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고난을 겪으면서, 음녀의 유혹을 받으면서 교회의 영광을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교회의 영광은 오직 믿음의 눈으로만 파악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무엇을 보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교회를 예비하시고, 단장하시고, 어린양 앞으로 인도하시는 일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볼 때 참으로 탄식하거나 안타까운 일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분열하고 분쟁하는 모습들, 거룩하기는커녕 세속적이고 타락한 모습, 온갖 탐욕과 부정으로 얼룩진 모습들, 이윤을 추구하는 회사나 기업들보다 못한 비민주적이고 비상식적인 모습들, 카리스마의 이름으로 가려진 탐욕과 이기적인 모습들, 자기만족과 헛된 영광에 빠져 있는 모습들, 물질주의와 하나님의 축복을 혼동하는 모습들, 신본주의란 명분으로 남용되는 권위주의 모습들, 교인들을 확보하려고 노력하지만 결코 교인들의 성숙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모습들... 우리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가슴을 치며 울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판하고 욕하기에는 이미 우리의 일부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믿음의 눈을 가지고 하나님의 교회를 볼 때 우리는 참으로 황홀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며느리를 친히 준비하고 계시며, 단장하고 계시며,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어린양 앞으로 인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처지이지만 마침내 영광스러운 신부로 나타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일들을 보지 마십시오. 대신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하여 행하시는 일들을 보십시오. 광야에서 음녀에게 미혹을 받는 교회를 보지 마십시오. 높은 산으로 올라가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교회를 보십시오. 그러면 여전히 부패한 냄새가 진동하는 ‘교회들’을 바라보면서도 우리는 참으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교회’를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상교회의 교인이면서 동시에 천상교회의 교인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지상교회를 보면서 낙심하고 탄식하면서 가슴 치며 울지라도 우리는 천상교회를 보면서 탄성을 지르며 환호하는 것입니다. 현실을 보면서 탄식의 눈물을 흘리지만 그러나 장래를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이 눈물이 우리를 우리답게 만듭니다.
이제 하늘에서 내려오는 교회를 보십시오. 어린양의 아내를 보십시오. 여러분이 진정으로 속한 천상교회를 보십시오. 아니 여러분 자신을 보십시오. 새 예루살렘 도성에 무엇이 있습니까? 첫째,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곧 교회의 영광이며 여러분 자신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11절)고 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 즉, 어린양의 교회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우리는 신부에게 있는 영광이 곧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을 알고 감탄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으로 교회에게 입혀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영광을 빛나는 보석에 견주고 있습니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새 예루살렘을 생각할 때 성경에 열거된 보석들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본문에 기록된 여러 종류의 보석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지 보석 자체가 중요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새 예루살렘의 영광스러움을 생각할 때 그 영광을 [알라딘과 램프[라는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그런 성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한낱 보석으로 치장한 것만이 전부라면 우리는 이 성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단지 보석뿐이라면 저는 그곳은 지옥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것은 우리가 나중에 들어가서 살게 될 ‘성’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속한 ‘성’이라는 것입니다. 천사가 보여주는 비전은 바로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 교회는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곳입니다. 여전히 문제가 많지만 새 예루살렘 도성은 지금 임하여 있고 지어져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새 예루살렘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새 예루살렘의 영광은 바로 우리 자신의 영광을 말합니다. 우리는 영광스러운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그 영광은 내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영광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모세가 마지막으로 설교한 것을 기억하십니까? “여호와께서도 네게 말씀하신 대로 오늘날 너를 자기의 보배로운 백성으로 인정하시고”(신26:18) 또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오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신33:29)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보배’로 간주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관점대로 자신을 볼 줄 알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백성의 지키시는 방패가 되십니다. 가나안에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자신을 방패로 여길 줄 알아야 했습니다. 이 믿음으로 가나안 땅을 정복해야 했습니다. 이 믿음을 버리면 가나안 땅에서 오히려 패배하고 적들의 포로가 되고 말 것입니다. 본문에 성곽이 크고 높으며 벽옥과 같다는 말은 바로 그것입니다. 본문을 봅시다. 새 예루살렘의 영광이 마치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고 했습니다. 계시록에서 ‘벽옥’이란 보석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으로 친히 교회를 빛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교회를 흠과 티가 없이 세우셨습니다. 수정과 같이 맑더라는 것은 전혀 흠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엡5:26,27)고 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라볼 때는 늘 결점과 허물투성이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거룩하고 흠 없이 그리스도 앞에 세우실 것입니다.
교회의 영광에 대해 좀더 살펴봅시다. 새 예루살렘에 무엇이 있습니까? 둘째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습니다.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 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 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들이라”고 했습니다.(12절) 새 예루살렘의 성곽이 크고 높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안전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침범할 수 없고, 함락시킬 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교회의 견고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주님의 교회는 참으로 견고하며 안전합니다. 세상의 어떤 권력자도 교회를 없애거나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시도한 권력자들은 한결같이 부스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 역시 같은 의미로 말씀했습니다.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벧전1:5)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한번 하고자 하시는 일에는 결코 후회나 실패가 없습니다.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이 철회되거나 좌절되는 법이 결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고자 하시는 자는 반드시 구원하십니다. 우리가 구원에 대해 생각할 때 사람의 의지만 생각했지 하나님의 의지는 얼마나 생각하고 있습니까? 구원받는 것에 있어서 구원받는 사람의 의지가 중요합니까? 아니면 구원하려는 자의 의지가 중요합니까? 구원하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을 생각할 때 우리가 받은 구원은 참으로 확실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은 곧 그를 영화롭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고난 속에서도 즐거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벧전1:6)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자를 보호하십니다. 이것을 굳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보호하십니까? 하나님 자신의 모든 것으로 보호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우리 같더라”고 했습니다. 성곽이 크고 높다는 말은 견고함과 안전함을 말한다면, 그 성곽이 벽옥으로 만들어졌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친히 방패가 되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담대함과 자존감을 제공해줍니다. 가나안 왕들의 전리품을 믿음으로 거절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아브라함아 두려워 말라. 내가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방패가 되신다는 사실보다 더욱 확실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우리가 무엇 때문에 주눅 들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 아닌 것들로 자신들을 방어하려는 자들을 부러워해서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권력이나 돈으로 방패를 삼는 자들을 질투해서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을 자신의 방패로 삼는 사람이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의 방패가 되십니다. 오히려 교회를 대적하는 자마다 다 깨어지고 말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세상을 살 때 담대함을 가지십시오. 당당하게 사십시오. 하나님 자신을 여러분 자신의 방패로 여기는 자들에게 이 당당함이 있습니다. 오늘 이 당당함이 그리스도의 신부를 더욱 아름답게 해주고 있습니다. 세상 앞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는 이 당당함이야말로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솔로몬의 사랑을 한 몸에 받게 된 술람미가 자신이 왜 그토록 놀라운 사랑을 받게 되었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성벽이요 나의 유방은 망대 같으니 그러므로 나는 그의 보기에 화평을 얻은 자 같구나.”(아8:10)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의 눈은 최대한 낮추십시오. 대신 여러분의 가슴은 최대한 높이십시오. 눈은 높은데 가슴은 낮은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언제나 여러분의 시선은 낮은 데 두되, 가슴은 그 어느 누구도 함부로 침범하지 못할 정도의 ‘크고 높은 성곽’이 되십시오. 그리스도의 신부는 ‘높은 가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아무에게나 가슴을 열어주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께만 여러분의 소중한 것을 열어드리십시오.
세 번째로 새 예루살렘에 “열 두 문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문마다 지키는 천사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이것은 새 예루살렘이 위엄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천사가 문을 굳게 지키는 것을 보십시오. 천사가 출입하는 자들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나 이곳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들어가고 싶다고 해서 다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만이 이곳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아담이 범죄한 이후 하나님은 아담을 에덴에서부터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습니다.(창3:24) 그렇습니다. 교회는 위엄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나 들어갈 수 없습니다. 참 교회의 회원이 되는 것은 내 의지나 결단에 달려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를 보십시오. 그는 자시이 심사숙고한 결과 예수님이 어떤 분이며,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나름대로 알 수 있었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게 칭찬이 될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네가 위로부터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오늘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은 오직 위로부터 거듭난 자들의 총회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지으신 사람들만이 이 교회에 참 회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나지 않는 자는 자신의 노력과 의지에도 불구하고 이 도성의 입구에서 거절당하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까? 여러분은 위로부터 났습니까?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이 교회의 회원이 될 수 없고, 또 이 교회의 영광을 볼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각 문들 위에 이름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이름은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들이라고 했습니다. 이 교회는 구약 이스라엘 백성과 동일하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이스라엘을 선택하고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이 진정으로 성취된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옛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름은 결코 잊혀지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나 실패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부르시고 후회하시는 법이 결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여러분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여러분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고 선언하신 여러분들을 또한 이미 영화롭게 하신 분이십니다.(롬8:30) 우리 안에 새 생명을 심으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혼인잔치에 우리가 주인공으로 등장할 때까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빌1:6) 그러므로 참 교회의 일원이 된 사람은 낙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교회에 회원이 되었다고 하는 사람이 늘 부정적이고 비관적이라면 무엇인가 잘못되었습니다. 본인이 거짓말을 하든가, 아니면 믿음이 없든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여러분, 참 교회의 회원이 되었다는 것보다 더욱 우리는 안심시키고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또 있을까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은 새 예루살렘의 일부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어린양의 신부가 되었다는 사살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대통령이 우리를 청와대 만찬에 초대했다고 해도 평생 자랑하면서 살 것이라면, 하물며 살아계신 하나님께로부터 영원한 목적을 위해 부름을 받았다면 우리는 더더욱 자랑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문이니 그 성에 성곽은 열 두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양의 십 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고 했습니다.(13,14절) 동, 북, 남, 서 이렇게 방향의 순서를 기록한 이유는 죄인들을 찾아가시는 하나님의 발걸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약의 성막은 언제나 동쪽이 열려 있었습니다. 에덴을 떠나 자꾸만 동쪽으로 동쪽으로 도망갔던 인류를 향해 찾아가시는 주님의 발걸음이 향한 곳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몸으로 세운 곳이 교회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본질은 죄인들을 찾으시는 주님의 발걸음과 보조를 같이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전도와 선교에 힘을 쓰는 것은 매우 당연한 것입니다. 또한 교회는 폐쇄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을 향하여 열려 있어야 합니다. 가장 먼저 회개하는 죄인들을 받아주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든지 회개하는 죄인들이 들어올 수 있는 문을 열어놓아야 합니다. 또한 그 기초석이 12 사도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주님의 교회는 주님의 사도들이 전해준 메시지 위에 기초해 있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 아무리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은다고 할지라도 그곳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사도들이 가르친 말씀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특히 문들에는 12지파의 이름들과 기초석에는 12사도의 이름들이 기록되었다는 것은 옛 이스라엘과 기독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동일한 몸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구원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진실히 믿고 따르는 모든 교회가 사실은 한 몸이요 서로 지체입니다. 교회는 새로운 메시지를 개발하려고 노력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 위에 굳게 서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요한에게 비전을 보여주던 천사가 그 성을 척량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척량하려고 금 갈대를 가졌더라”고 했습니다.(15절) 여기서 척량하는 행동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요한 당시 갈대는 길이를 재는 자의 역할을 했습니다. 건물을 척량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건물을 허물어뜨리기 위해서, 또 다른 하나는 완공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후자의 의미입니다. 비전을 보여주던 천사가 이 성과 문들과 성곽을 척량했다는 것은 그 성이 이제 안전하게 완공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계시록 11장에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는 모습을 우리가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척량하는 것이 ‘거룩히 구별하고 보호함’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천사가 새 예루살렘을 척량한 것은 매우 거룩하게 구별된 것으로 아무나 건드리거나 무너뜨릴 수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행동인 것입니다.
그러면, 천사의 척량 결과를 보십시오.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그 성곽을 척량하매 일백 사십 사 규빗이니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16,17)고 했습니다. 이 성의 전체적인 모습은 정사면체(square)입니다. 이 모습은 새 예루살렘이 완전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각 면은 12,000스다디온이라고 했습니다. 이 길이는 런던에서 아테네까지의 거리로서 약 2,400km 정도가 되는 거리입니다. 당시에는 땅의 이 끝과 저 끝의 길이가 1,600스다디온(320km)라고 생각했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당시로서는 엄청난 개념입니다. 이것은 문자적인 크기로 볼 수가 없습니다. 이 도성의 크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큰 규모라는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은 우주적인 교회로서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새 예루살렘은 완전한 총회입니다. 12는 이스라엘의 수입니다. 그리고 1,000은 충만을 뜻하는 수입니다. 그래서 너비 높이 길이가 12만 스다디온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완전하고도 완벽한 총회(assembly)를 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채워졌다는 말입니다. 또한 정사면체는 거룩하고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하나님의 백성 역시 거기서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벽이 144 규빗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 숫자를 문자적인 의미로 보면 혼동에 빠질 것입니다. 성을 척량할 때 12,000스다디온이 되었고, 성곽을 척량했을 때 144규빗이 되었습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성곽은 성을 지키기 위해 세운 파수대나 혹은 망루와 같습니다. 이런 건물에 우리가 들어가서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다분히 상징적입니다. 이스라엘의 수가 두 번 곱해서 나온 숫자입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하나님이 택하신 모든 백성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앞서 성곽을 척량한 것과 성을 척량한 것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성곽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강조한다면, 성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성은 하나님의 총회를, 성곽은 그것을 지키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따로 척량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성과 성곽을 척량하는 이유는 거룩하게 구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척량한 결과를 이렇게 자세히 보여주는 이유는 하나님의 교회가 완전하며 충만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본문 17절에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고 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사람이 척량한 결과는 천사가 척량한 것과 똑같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세어볼 때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 중에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이 다 구원 받았고, 그것은 천사가 세어 볼 때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어보나, 천사가 세어보나 어느 방법으로 세어보나 하나님의 교회는 참으로 온전하며 완벽한 총회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이처럼 완벽하게 구원하신 것을 보십시오. 그 능력을 우리가 찬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의 영광을 바라보았습니다. 교회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고 계십니까? 교회는 어린양의 신부이며 새 예루살렘 도성입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며 서로 교제합니다. 이곳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새로운 사회입니다. 여전히 지상교회는 깨어지고 넘어지고 실수하고 분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천상교회를 예비하고 계십니다. 아름다운 신부로서 단장하고 계십니다. 교회는 눈물과 기도의 골짜기를 통과하면서 아름다운 신부로 단장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교회의 아름다움을 볼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어린양의 신부로서 교회는 온 우주에 걸쳐 가장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가장 거룩하고 가장 순결하며 가장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12가지 찬란한 빛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교회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견고한 것입니다. 아무도 주님의 손에서 교회를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이러한 안전감을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함께 모일 때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교회의 영광을 바라보십시오. 새 예루살렘 도성이 뽐내는 아름다운 자태를 바라보십시오. 교회의 아름다움은 곧 여러분 자신의 아름다움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져야 할 자존감의 원천입니다. 어린양 앞에 드러나게 될 자신의 아름다운 자태를 그리며, 뽐내며 사십시오. 이 자존감을 잃지 마십시오. 세상의 영광 앞에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새 예루살렘의 영광으로 당당하십시오.
시온성과 같은 교회 그의 영광 한없다.
허락하신 말씀대로 주가 친히 세웠다.
반석위에 세운 교회 흔들자가 누구랴
모든 원수 에워싸도 아무 근심 없도다.
생명샘이 솟아나와 모든 성도 마시니
언제든지 흘러넘쳐 부족함이 없도다.
이런 물이 흘러가니 목마를 자 누구랴
주의 은혜 풍족하여 넘치고도 넘친다.
주의 은혜 내가 받아 시온 백성 되는 때
세상 사람 비방해도 주를 찬송하리라.
세상 헛된 모든 영광 아침 안개 같으나
주의 자녀 받을 복은 영원무궁하도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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