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설교

요한계시록 강해(52)-새 예루살렘의 영광II(계22:1-7)

등불지기 2012. 3. 3. 19:49

새 예루살렘의 영광은 그리스도의 신부의 영광이요 곧 내 영광이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요한계시록 강해(52)

 

새 예루살렘의 영광(3)

 

본문: 계22:1-7

 

22:1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22: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22: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22: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22: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22:6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결코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22: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제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가르치면서 저는 종종 여행하는 사람의 기분을 느낍니다. 지금까지 요한계시록만큼 힘들고도 즐거운 여행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작년 9월부터 올해 12월까지 시도한 대장정에서 참으로 많은 것을 보고 느껴왔습니다. 처음에는 과연 끝까지 해낼 수 있을까 걱정도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어려워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주의 은혜로 오늘 계시록 22장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오늘날 교회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에 있어야 하며,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 배우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계시록의 말씀이야말로 오늘 교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굳게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이 영광스러움에 대해서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즐거웠습니다. 이 복된 말씀을 준비하고 전하는 일이 제겐 참으로 행복입니다. 여러분도 저처럼 느끼기를 바랍니다.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오겠습니까? 어쩌면 이 메시지를 위해서 청년1부와 2부를 하나로 묶어주셨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어쩌면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는 이 시대의 청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비전을 상실한 이 시대의 청년들에게 이 복된 말씀처럼 비전을 심어주는 말씀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자기 왕국을 건설하는데 급급한 이 시대 사람들에게 계시록의 말씀처럼 도전을 주는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지금까지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여행하면서 본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과 교회의 영광이었습니다. 그것은 시련과 핍박 속에서 신음하던 당시 교회들에게 있어 가뭄의 단비와 같았을 것입니다.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해 달라고 간구했던 바울 사도의 기도처럼 고난 속에 있던 하나님의 교회에 가장 필요했던 메시지는 바로 ‘그 영광’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탁월하시며 또 아름다우신지, 또한 교회 역시 얼마나 뛰어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참 능력의 원천입니다. 그 아름다움을 알고 사모하며 바라는 것은 기독교 영성의 핵심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영광을 아는 지식은 오늘 세상 속에 있는 교회들에게 무엇보다 가장 적절한 영의 양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비전으로 여러분의 가슴을 가득 채우십시오. 그러면 복이 있는 자가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새 예루살렘의 영광에 대해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본문으로써 요한계시록의 본론이 끝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본 환상은 22장 5절에서 끝나고 있습니다. 22장 6절부터는 이 책의 결론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의 핵심은 사도 요한이 바라본 비전입니다. 그 비전은 오늘날 모든 교회가 품어야 합니다. 이 비전이 없을 때 교회는 정체성을 상실할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속에서 방자히 행할 것입니다.(잠29:18) 요한계시록은 세상 속에 있는 교회가 어떻게 교회다울 수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영광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청년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알아가고 있으며 또 섬기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기독청년들은 정말 21세기 한국교회에 보배들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기독청년들을 볼 때마다 느끼는 점은 교회의 영광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참 비전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청년의 때는 돈을 벌거나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다름 아니라 참 비전이 필요한 때입니다. 제가 지난 주간에는 내수동교회, 사랑의 교회, 충현교회, 대구 내일교회, 그리고 대구 동부교회의 대학부와 청년부의 조직과 현황에 대해 잠시 조사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임이 활성화된 청년 대학부라 할지라도 지역교회에 대한 헌신의 마음은 거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청년부에 대한 소속감은 있는데 지역교회에 대한 소속감은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언제든지 결혼하면 떠날 것이고 아니 빨리 결혼해서 떠나고 싶은 교회로만 생각하지 결혼해서 이곳에서 평생 섬기고 이곳에서 하나님을 계속 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교회나 성장하는 청년부의 특징은 자체의 모임과 조직과 예산과 독립된 공간을 보장해달라고 하는 요구에 충실하게 들어준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정작 청년들 자신은 그렇게 지원해주는 교회에 대해서는 별 애착심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 교회를 섬기는 분들이 고민하는 부분이 바로 그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지역교회에 대한 애착심을 심어줄까 하는 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계시록은 매우 적절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기독 청년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메시지는 다름 아니라 구주의 영광, 그리고 교회의 영광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기독 청년들이 반드시 가져야 할 비전의 핵심입니다. 이 계시의 말씀을 깨닫고 그 의미를 가슴에 간직하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슴에 간직된 말씀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필요한 비전이 될 것입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든지 이 비전이 여러분의 등대요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이 비전을 굳게 붙잡으십시오. 구주와 교회의 영광에 대한 메시지를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권세에 대한 메시지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해서 새 예루살렘의 영광을 보겠습니다. 새 예루살렘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곳입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뛰어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이니 그 아름다움이 얼마나 탁월하겠습니까? 새 예루살렘의 영광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사도 요한은 천사의 안내를 받아 멀리서 점점 가까이 다가가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묘사된 장면을 마음속에 하나씩 그려보면 마치 내가 천사의 손에 이끌려 공중을 날아다니는 것처럼 생각이 될 정도입니다. 먼 곳에서부터 점점 가까이 다가서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본 것을 다시 보십시오. 저 멀리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려지고 하늘로부터 새 예루살렘이 내려옵니다. 그 모습이 마치 잘 단장된 신부의 모습과 같습니다. 사실 새 예루살렘은 거룩한 도성으로서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를 가리킵니다. 단지 건물로만 생각한다면 새 예루살렘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은 바로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모습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것은 완성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극적인 장면입니다. 새 예루살렘 성은 어린양의 아내로서 참으로 영광스러운 자태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 영광은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의 영광의 빛이었습니다. 이 성은 너무나 견고하고 높아서 아무도 무너뜨릴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전능하신 주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방패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 성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열 두 문이 있습니다. 기초석에는 열 두 사도의 이름을, 열 두 문에는 열 두 지파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리고 각 기초석과 문들은 각색 아름다운 보석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성 안에는 성전이 따로 필요 없으며, 성안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으로 잘 포장되어 있습니다. 성 안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찬란하게 빛나서 결코 어둠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너무나 존귀하고 거룩하여 땅에서 가장 존귀한 자라 할지라도 그냥 들어올 수 없을 정도입니다. 누구든지 들어오는 자마다 최고의 영광과 존귀를 드릴 것입니다. 그러나 들어오고 싶다고 다 들어오는 곳이 아닙니다. 이곳은 매우 거룩한 도성이어서 세속적인 자들이나 우상숭배자들이나 거짓말하는 자들은 결코 들어올 수 없습니다.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이 들어올 수 있는 곳입니다. 이 성에 들어오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에만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제 계시를 담당한 천사는 사도 요한에게 보다 자세히 그 성안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마치 새 예루살렘 성안을 천사와 함께 유유히 산책하면서 기록한 것 같습니다. (계시록 21장 9절에서 22장 5절까지 새 예루살렘의 영광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21절까지는 새 예루살렘에 있는 것에 대해 주로 관찰하고 있구요, 22절부터는 새 예루살렘에 없는 것을 중심으로 관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멀리서부터 점점 안으로 나아가면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놀라운 산책에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영광에 대한 계시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기업이 된 그리스도인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가에 대한 계시입니다.(엡1:11,18절 참조) 자, 오늘 우리는 천사의 안내를 따라 성안을 걸어볼 수 있습니다. 성의 길을 걸으면서 성의 분위기를 만끽해볼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경험입니까? 우리 모두 천사와 함께 새 예루살렘 성안을 거닐어 봅시다. 자, 1절을 보십시오.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라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이 가장 먼저 본 것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저가 내게 보여주었다”고 한 것에 주목하십시오. 여기서 분명히 알 것은 하나님이 보여주는 부분만 우리가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경험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계시에 달려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하여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새 예루살렘의 영광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에 온전히 의지해야 합니다. 계시의 영을 구해야 합니다. 계시의 영이 임하면 우리 눈을 덮고 있는 비늘이 떨어져나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식에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특히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아직 하나님을 제대로 모른다는 뜻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고전8:2)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진정 아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말할 것이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안다고 말할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첫 걸음은 바로 자신의 영적 무지를 인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자신이 깨닫는 것이 짐승과 같다는 것을 인정할 것입니다(잠30:2). 제가 대학 시절 영어영문학을 전공했습니다. 그런데 영어는 공부하면 할수록 잘 모르겠더라고요. 참으로 전공한 사람은 점점 그 분야에 대해 자신의 무지를 발견하는 사람입니다. 정말 아는 사람은 배우면 배울수록 잘 모르겠다고 대답합니다. 정말 모르는 사람은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안다고 자랑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더욱더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더욱더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하게 됩니다.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이 가장 먼저 본 것은 무엇입니까?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었습니다. 수정같이 맑다는 것은 매우 거룩하며 흠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생명수의 강은 성령의 강을 의미합니다. 생명수의 강은 새 예루살렘의 가장 중요한 젖줄과 같습니다. 사실 어느 나라건 할 것 없이 강을 끼고 있는 나라, 그리고 강을 잘 다스리는 나라가 잘 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나라의 강물이 얼마나 깨끗한지는 그 나라의 삶의 질을 보여주는 척도입니다. 강물이 깨끗한 것은 그 나라의 자랑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 우리가 배운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강들은 모두 오염되고 결국 마르고 만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세상나라가 의지하는 힘의 원천을 유브라데강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의지하는 젖줄은 마를 것입니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에는 생명수의 강이 언제나 흐르고 있습니다. 생명수의 강은 결코 마르지 않습니다. 생명수의 강은 새 예루살렘이 언제나 젊고 푸르며 싱그러움을 유지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생명수의 강에 대한 비전은 사도 요한이 처음 본 것이 아닙니다. 오래전부터 선지자들이 보아왔던 것입니다. 다윗은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46:4,5)라고 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이 생명수의 강물이 힘 있게 굽이치는 장면을 보았던 선지자였습니다.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천 척을 척량한 후에 바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겔47:3-5)고 했습니다. 창세기에 에덴동산에서부터 흐르는 네 가지 강물을 기억하십니까? 그 강물을 만드신 목적은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흐르는 생명수의 강을 계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이 강이 어떤 강입니까? 이 강이 어디서부터 흐르고 있습니까? 에스겔 선지자는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내리더라.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말미암아 꺾여 동향한 바깥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우편에서 스미어 나오더라.”고 했습니다. 오늘 사도 요한은 그 강의 발원지가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강의 근원이 영원하신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기 때문에 결코 중단되거나 오염되거나 마를 염려가 없습니다. 세상이 의지하는 강물과 다른 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물의 근원이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세상이 의지하는 물의 근원은 어디에 있습니까?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석유가 아닙니까? 그것은 어디에다 근원을 두고 있습니까? 그 모든 것은 다 고갈되어버릴 것이 아닙니까? 곧 마르게 될 운명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참으로 의지하고 있는 젖줄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어디서 흘러나오고 있습니까? 영원하신 하나님과 어린양으로부터 흘러내리고 있습니까? 그러면 이 강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과 어린양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수의 강은 성령의 흐름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 강이 어떤 강인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하셨습니다.(요7:37,38) 그리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 강은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7:39) 그러므로 여러분 요한 사도가 본 생명수의 강이 어떤 것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이 강은 성령의 강물입니다. 하나님과 어린양으로부터 성령이 한없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야 말로 오늘 우리와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성령이야말로 모든 사람 모든 사회 모든 나라와 민족이 찾아야 할 참된 젖줄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나 명예나 성공이 아닙니다. 그러한 것이 사람들에게 참된 생명의 젖줄이 될 수 없습니다. 지금 세상은 3차 세계대전이 아니라 전무후무한 오일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몇 십 년이면 바닥을 드러내고야 말 석유를 더 확보하기 위해서 세계 각국은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지금 미국이 이라크를 압박하고 있는 이유도 다름 아니라 석유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떻게 말합니까? 유브라데 강은 마를 것입니다. 그 바닥을 드러내고야 말 것입니다. 유브라데 강가에 세워진 바벨론 도성은 유브라데 강과 함께 망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결코 마르지 않는 생명수의 강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성령의 강물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 길입니다.

그런데 이 성령은 어디 가야 찾을 수 있습니까? 이 성령은 어떻게 경험합니까? 이 성령의 강물을 어디서 마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강물은 하나님과 어린양을 아는 참 지식에서 나옵니다. 그 지식은 죽은 지식이 아니라 산 지식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인격적 교제를 의미합니다. 본문 2절을 보십시오.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고 했습니다. 길은 무엇입니까? 길은 서로 교통하는 것입니다. 서로 왕래하는 것입니다. 길 가운데로 흐르는 강물을 보십시오. 세상의 강은 길 가운데로 흐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성에서는 길 가운데로 생수의 강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길은 어떤 길입니까? 하나님과 어린양과 교제하는 길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고, 어린양과 교제하는 길에 성령의 강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과 어린양과 함께 성도들이 서로 순전한 마음으로 교제하는 가운데 성령의 강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강물을 맛보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것입니다. 구주가 어떤 분이시며,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를 듣고 믿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하나님과 어린양이 하신 일에 대해 설교할 때 성령이 듣는 자들 가운데 내려오지 않았습니까? 또 예수님께서 “나를 믿는 자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오직 하나님을 믿을 때 성령의 강물이 믿는 자의 가슴 속에 흘러들어옵니다. 오직 어린양을 믿을 때 성령이 믿는 자의 배에서 흘러넘칩니다. 따라서 우리가 잘못된 성령운동에 대해 속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성령을 받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덤벼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믿는 것이 그 방법입니다. 하나님과 살아있는 인격적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과 진실한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성령은 무한히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과 어린양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는 것이 없이 단지 성령만을 받으려고 몸부림친다면 참으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성령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인격적인 교통이 없이 임하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먼저 우리가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을 받아들여 서로 먹고 마시는 길을 터놓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생수는 길 가운데로 흐르고 있습니다. 그 길은 믿음을 의미합니다. 분명, 성령을 받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은총이지만 하나님과 어린양을 믿는 자들에게 성령의 강이 흐르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따라서 하나님과 어린양을 믿는 믿음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성령운동을 조심하십시오. 만약 성령을 경험하고 싶다면 단지 이 길로 지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에 나있는 길을 따라 편안히 걸으면 되는 것입니다. 이 길을 걷는 것은 결코 힘들지 않습니다. 산책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즐겁고 평안한 것입니다. 주 하나님과 교통하십시오. 하나님을 주로 고백하는 자들과 교통하십시오. 그 길에 생명수 강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강을 보았으니 강 좌우에 서 있는 나무들을 감상해볼 차례입니다. 본문에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다고 했습니다. 앞서 ‘길 가운데로 흐르는 강’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명나무는 길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명나무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생명나무는 길 가에 널려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창세기부터 쭉 일어온 독자라면 놀라운 일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인간은 결코 생명나무의 길로 돌아갈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창3:22) 그런데 천사들이 불칼을 가지고 지키는 생명나무의 길이 이제 활짝 열려 있습니다. 언제든지 손만 뻗으면 생명나무의 과실을 따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길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 생명나무가 있습니다. 이 생명나무는 무엇을 가리킵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지속적으로 생명수를 공급 받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포도나무’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요15:1)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이것은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사용하신 비유가 아닙니다. 구약의 선지자들 역시 생명나무의 길이 열리게 될 것을 여러 가지로 선포했었습니다. “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지라 내가 저를 돌아보아 대답하기를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하리라”호14:8) 솔로몬 역시 생명나무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고 너를 인하여 네 어미가 신고한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 곳 사과나무 아래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아8:5) 성경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인생을 물가에 심기운 나무와 같다고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렘17:8)

이제 강 좌우에 있는 생명나무를 보다 자세히 관찰해봅시다.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라고 했습니다. 생명나무의 열매를 열두 가지로 언급한 것은 교회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 열매는 교회가 맺을 열매인 것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를 오직 신뢰함으로써 맺을 수 있는 열매인 것입니다. 곧 영생의 열매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름 아니라 교회를 위한 열매인 것입니다. 교회는 믿음과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그 열매를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열두 달 맺힌다는 말은 계절을 타지 않고 전천후로 열매를 맺는다는 말입니다. 시편 기자가 고백했듯이 복이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한 것처럼 그 행사가 그러할 것입니다.(시1:3) 생명나무의 과실을 맺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다시 말해서 참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늘 변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환경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비가 내릴 때나 가물 때나 언제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시1:4) 환경을 탓하고 사람을 탓하며 분위기를 탓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자신이 감정의 기복이 심하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의 뿌리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를 점검해보십시오. 우리 믿음의 뿌리가 감정이나 환경이나 사람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변함없는 말씀에 있다면 우리 삶은 한 가지 중요한 특징으로 성령의 열매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는 상황이나 사람에 관계가 없이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뿌리를 생명수 강가에 내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말라서 바닥을 드러낼 유브라데 강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까? 생수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께 내 뿌리를 두고 있습니까? 아니면 터진 웅덩이를 자꾸만 파고 있지 않습니까?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치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렘2:13) 교회가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는 것이 교회가 겪는 모든 문제의 원인입니다. 교회는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을 때만이 교회가 교회다울 수가 있습니다. 오직 믿음만이 교회를 교회답게 해줍니다. 오직 믿음으로 교회는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주님은 이 열매를 찾고 계십니다.

그런데 열매만이 아니라 잎사귀도 그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십시오.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고 했습니다. 새 예루살렘에는 열매만이 아니라 나무 잎사귀들도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존재한다고 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만국은 어떤 곳입니까? 만약 우리가 새 예루살렘을 단지 미래적인 천국으로만 본다면 뒤죽박죽 혼동에 빠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이미와 아직’이라는 긴장 속에서 파악하다면 이것은 크게 어려운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새 예루살렘은 먼 미래만이 아니라 이미 우리 가운데 임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이 강에 대해서 예언한 바가 있습니다. “강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맫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재료가 되리라”(겔47:12) 그러면 그 잎사귀들이 만국을 치료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그리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신 것을 기억하십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교회가 이렇게 많은데 세상은 이처럼 썩어 부패해져간다고 교회의 책임을 지적합니다. 일면 맞는 말씀입니다. 세상이 타락하는 데는 교회의 책임도 큽니다. 그러나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세상은 점점 타락해져가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이것을 결코 막을 수는 없습니다. 계시록 22장 11절을 보십시오.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불의를 행하는 자를 보고 그냥 보고만 있으란 말입니까? 아닙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를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이 헛될 것이란 말입니다. 마지막 때가 그런 때입니다. 우리가 외친다고 그들이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정의를 외치지 말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의와 정의를 외치는 것은 그 자체로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불의를 정의로 바꾸는 것이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가 아닙니다. 우리는 효용적인 가치관을 조심해야 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한 사람도 회개시키지 못한 엘리야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상급이 적을 것입니다. 엘리야와 같은 사역자들은 오늘날 효용적인 가치관이 지배하는 교회에서 구조조정 1호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회리바람으로 데려가신 것을 보십시오. 엘리야를 존귀하게 데려가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가 불의를 정의로 바꾸었기 때문입니까? 빛 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전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얼마나 커지느냐는 결코 중요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교회다운가가 중요합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신실한가가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말의 때를 알아야 합니다. 바울 역시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딤후3:1)라고 했습니다. 종말의 때는 영적인 고통이 증가하는 때입니다. 이 고통으로 세상의 신음소리는 점점 커져갈 것이고 교회는 복음으로 응전을 해야 할 위기에 처해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24:10-12)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는 말은 세상을 빛과 소금으로 바꾸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한다고 해서 세상이 살기 좋은 곳으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일 뿐입니다. 세상이 변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교회가 책임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지만 실제로 책임을 질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세상이 이처럼 악해진 것은 교회가 할 일을 하지 못해서라기보다는 세상이 더 악해지지 않은 것은 교회가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이 나라와 민족을 보십시오.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이 신기하지 않습니까? 더 악화되고 나빠져서 완전히 멸망해도 몇 십 번은 더 망했을 것입니다. 더 나빠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지만 그러나 교회가 없었다면 이 사회가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만 해도 참으로 끔찍합니다. 이 땅에 교회가 하나도 없다고 가정해보십시오. 이것은 참으로 비극입니다. 잎사귀는 만국을 소성하기 위해 있습니다. 잎사귀는 사실 별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잎사귀조차도 치료하는 효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문제가 많지만 그러나 문제 많은 교회라도 교회가 있다는 것 자체가 없는 것보다는 훨씬 가치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한국교회가 나라와 민족 앞에서 하는 일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지금까지 한국교회가 세상에 기여한 것을 헤아려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한국의 근대사는 한국교회사를 빼면 그야말로 시체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이 세계를 여행해보시면 알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그 존재만으로도 세상에 이미 기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 속에 있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새 예루살렘에 없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 첫째가 저주가 없다는 겁니다.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3,4절)고 했습니다. 새 예루살렘에는 눈물이 없고 죽음이 없으며 저주가 없습니다. 얼마 전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으라]는 책이 유행했었습니다. 사실 ‘저주’라는 현상은 결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저주는 새삼스러운 단어가 결코 아닙니다. 저주는 우리가 늘 보고 겪는 부분입니다. 알코올 중독자의 자녀가 중독자가 될 가능성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높다는 통계는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병원에 가면 의사들도 가족의 병력을 가장 먼저 물어봅니다. 열심히 땀 흘리며 일하여도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지 못하는 것 역시 저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저주를 끊기 위해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더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저주를 끊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달리 저주를 끊는 ‘특별한 비법’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저는 개인적으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특별한 비법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할 뿐입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20:5,6)고 했습니다. 저주를 끊는 특별한 비결에 대해서 강조하며 관심을 끄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 덜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 된다면 우리는 당연히 거부해야 할 것입니다. 현상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자칫 구주의 영광을 놓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골로새 교회가 위기에 빠진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전락하게 된 것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지 않고 현상이나 무슨 비법이나 무슨 규칙이나 무슨 행사나 무슨 프로그램에 집착하면서 교회의 생명력은 점점 약화되는 것입니다.

저는 내적치유세미나에 열심히 참석하던 한 청년을 압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친구가 고백하는 것은 자신이 더욱 완악해지더라는 겁니다. 이유를 물었더니 열심히 세미나에 참석했는데 실제로 자신이 달라진 부분은 없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사실 수련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련회가 무슨 특별한 은혜를 체험하는 장으로 생각하면 수련회를 참석하면 할수록 우리 마음은 완고해질 것입니다. ‘수련회에 참석하면 무슨 소용이 있나? 나는 변하지 않았는데...’라고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청년들이 참 많습니다. 저는 은혜를 체험할 어떤 목적으로 수련회에 가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렇게 함께 모이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저는 수련회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언제 함께 먹고 마시고 잘 수 있는 공동생활을 해보겠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다른 곳에서 길과 진리와 생명을 찾지 않도록 하십시오. 가계치유세미나가 길이 될 수 없고, 내적치유세미나가 길이 될 수 없으며, 영성수련회에 몇 번 참석하는 것이 결코 길이 될 수 없습니다. 다른 길을 찾지 마십시오. 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는 자들과의 순전하고 투명한 교제뿐입니다. 이 길을 갈 때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다”고 했습니다. 보좌는 주권과 통치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저주가 없습니다. 어린양을 주로 섬기는 자에게는 결코 저주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섬기는 자들도 저주 아래 있다는 주장을 단호히 거부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도 귀신 들릴 수 있다는 주장도 거부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물론 깨어서 마귀를 대적해야 하지만 결코 귀신들에게 사로잡힐 것에 대해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늘 치열하게 영적 전쟁을 치러야 하지만 실패와 패배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5:18)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났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이미 승리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저주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저주를 이겼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살아계신 주 하나님과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고 있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도 요한은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요일5:4,5)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지키는 것은 곧 세상을 이겼다는 말입니다. 세상을 이기지 않고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고 있습니까? 하나님과 어린양을 섬기는 것은 특권이자 축복임을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을 마음껏 섬길 수 있다는 것이 특권이라고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짐으로 여긴다면 죄를 깨끗하게 하신 것을 잊어버렸거나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바로를 주로 섬기다가 구원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주로 섬기게 되었을 때 무거운 짐으로 여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죄와 세상과 마귀의 무거운 압제 아래 신음하다가 하나님을 주로 섬기게 된 것이 무거운 짐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굉장한 자부심을 제공해줍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습니까? 당대의 군주였던 느부갓네살 왕 앞에서도 결코 주눅 들지 않고서 당당하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주 하나님을 섬길 것이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으신 위엄과 권능을 가지고 계신 분이심을 알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무한한 특권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어린양을 주로 섬기고 있다는 것은 이미 모든 저주 아래서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저주 아래 있는 인생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저주 아래 있지 않는 다른 이유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희미하지만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고 있으며 언젠가는 변화산의 제자들처럼 제대로 바라보게 될 날이 있습니다. 지금은 희미하게 보지만 그때에는 눈과 눈을 마주 볼 것입니다.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4절)고 했습니다. 영광의 주를 친히 뵈올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가진 소망입니다. 아니 지금도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그분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는 더욱 더 그분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누군가 우리의 가진 소망이 무엇이냐고 묻거든 이렇게 대답하십시오. 우리가 그분을 뵈올 것이라고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의 이름이 우리 이마에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그분이 우리를 친히 알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참으로 황송하고도 황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과 어린양께서 친히 나를 안다고 하실 때 우리는 얼마나 기쁘고 좋겠습니까? 주여 주여 부르면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하여도 주님이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면 이 얼마나 허무하겠습니까? 영원토록 이를 갈면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주 하나님과 어린양의 이름이 내 이마에 있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보실 때 주님 자신의 이름을 찾으실 수 있습니까? 내 이름보다 주 하나님의 성호를 더 소중하게 여기고 있습니까? 내 이마에 그분의 거룩한 이름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살아가고 계십니까? 우리가 그분 앞에 섰을 때 “내가 너를 알고 있다”고 하실 때 얼마나 기쁘고 감사하겠습니까? 내가 그분을 알고, 그분이 나를 알고 있다는 이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새 예루살렘 성에 없는 것이 또 있습니다. 밤이 없습니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고 했습니다. 밤은 영적 무지를 뜻합니다. 우리가 무지하기 때문에 계속 성령의 조명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하나님께서 완전한 조명이 되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적인 진리에 대해서 모르는 부분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무지하기 때문에 거짓에 잘 속아 넘어가고 미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결코 거짓에 속아 넘어가가나 미혹을 받을 일이 없을 것입니다. 완벽한 이해와 완전한 명철이 우리에게 있을 것입니다. 따로 등불과 햇빛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우리를 환히 비춰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희미하게 보일 뿐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계속해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눈을 밝혀 달라고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우리 어둔 영혼을 계속 조명해주실 것을 계속 간구해야 합니다. 성령이 조명하여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허탄과 거짓말에 눈과 귀를 빼앗길 것입니다. 오직 지혜를 구하십시오. 명철을 구하십시오. 성령의 조명을 구하십시오.

새 예루살렘에 없는 것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모든 종류의 두려움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것을 본문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 20장에 이미 언급이 된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으로 요한계시록의 본론이 끝맺는다는 것이 제게는 참으로 극적으로 느껴집니다. 성도들의 왕노릇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계속 될 것입니다. 특히 ‘왕노릇한다’는 표현은 넘치는 생명을 누린다는 표현입니다. 다시 죽음과 사망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롬5:17)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5:21) 새 예루살렘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결코 없습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없습니다. 거부당하거나 버림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직 넘치는 생명을 누릴 뿐입니다. 새 생명 안에서 당당하게 살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것을 맛보고 있습니다. 이미 왕노릇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계속 될 것입니다. 우리 안에 넘치도록 부어주신 구주의 새 생명은 결코 중단되는 법이 없이 영원히 넘치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감격스러운 말씀입니다. 세상의 왕들에게 눌림 받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세세토록 왕노릇할 것’이란 선언만큼 강력한 메시지는 또 없을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의 주민들은 언제나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게 살아갈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두려움이 있습니까? 사랑으로 떨쳐버리십시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4:18)고 했습니다. 새 예루살렘의 주민들은 그 어떠한 두려움이 없이 위풍당당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새 예루살렘의 주민이라는 자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아십시오. 자신에게 주어신 영광스러운 신분을 아십시오. 그것이 세상에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을 살아갈 때 잘 걸으십시오. 위풍 있게 다니십시오.(잠30:29-31)

이제 새 예루살렘의 영광을 보여주기 위해 안내를 담당한 천사가 사도 요한에게 확신을 주고 있습니다.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6절)라고 했습니다. 천사가 직접 그 환상에 대해 보증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본 것은 단순한 환상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신실하고 참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환상은 하나님께서 오래전부터 선지자들에게 보여주신 바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바라본 것과 사도 요한이 바라본 것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성령을 받아 선포해온 말씀들이 이제 그리스도인들에게 최종적으로 성취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코 속히 될 일”은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이루실 일들을 가리킵니다. 선지자들을 불러서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신 궁극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것도 궁극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새 예루살렘을 건설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새로운 도성, 새로운 사회, 새로운 나라, 새로운 백성 공동체를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 이것이 ‘결코 속히 될 일’인 것입니다. 이 계시의 말씀을 우리들에게 주시기 위해서 천사를 보내어 사도 요한에게 보여주신 것이고 사도 요한은 보고 들은 대로 기록하여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직접 보지 못했어도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완성을 바라보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천사는 주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계시의 축복은 계시의 말씀을 간직하는 자들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말씀을 높이면 말씀이 여러분을 높일 것입니다. 말씀을 품으면 말씀이 여러분을 지켜줄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무릇 너의 얻은 것을 가져 명철을 얻을지니라.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잠4:6-8) 계시의 말씀을 가슴에 품는 자가 계시의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보십시오. 그분은 반드시 오십니다. 그분이 오시는 날에 그분을 떳떳이 뵙게 될 것인지, 아니면 고개를 숙이게 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여러분의 믿음입니다. 이 말씀을 가슴에 간직하는 자들이 되십시오. 그러면 그날에 여러분의 가슴에 간직된 말씀이 여러분을 옹호하며 세울 것입니다. 이 계시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왜냐면 그는 비전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참 비전이란 다름 아니라 주님의 영광과 교회의 영광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러한 지식을 가진 자들이 정말 복된 인생입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복이 있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 비전의 말씀을 품는 자가 진정 복이 있는 자입니다. 오늘날 이러한 비전이 없기 때문에 많은 청년들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 비전이 없기 때문에 삶의 목적과 의미를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참 비전을 가진 청년들이 되십시오.